끝없이 펼쳐지는 논쟁거리의 하나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실험을 통해 더 나은 종을 만들고자는 하는 것이다. 죽어있는 아니 죽어가는 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을 통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 놓으려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이 소설은 그런 물음에 대한 출발로 시작을 한다. 아니 어쩌며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매력이 이 물음을 끊임없이 하게 하는데 있다. 세상에서 추방당한 박사가 머물고 있는 섬에 미착하게 된 사람을 통해 이 소설은 보여지고 느껴진다. 왜 이곳까지 쫓겨 왔는지 무엇을 위해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지. 사람의 심리를 잘 보여 주고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이 1896년에 쓰여 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현대적으로 읽어도 아무런 거리감이 없었다. 이런 생각은 오히려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와 함께 잘 어울리고 또한 그것을 비판하고 재미와 함께 이 소설을 읽는 맛이 살아난다. ‘투명인간’을 읽으면서 작가의 상상력에 많은 감탄사를 보냈었다. 그리고 작가가 만든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소설도 전작의 작품에 못지않게 읽는 사람을 빠려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읽어가면서 나도 이 소설의 섬에 들어와 있는 착각을 갖게 만들었다. 외딴섬과 실험.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한 과학자 어쩌면 이 시대가 만들고 있는 하나의 규칙과도 같은 것을 작가는 당시의 사회상에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주인공에 담아 하나의 비판서로 이 소설을 집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소중하다. 하지만 끊임없는 연구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종을 위해 아니 그 새로운 종에게 나 자신, 박사도 자신의 생명을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은 자신도 자신이 만들고 있는 새로운 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소설이 놓인 위치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인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곁에 나와 같은 사람. 아니 나와 같은 것이 함께 있기를 꿈꾸지는 않는지. 하지만 막상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반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미치광이 과학자는 그런 것들은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연구를 할 뿐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발견하는 일이 과학자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며 소임을 다 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자신을 이곳으로 몰고 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느 사회가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그 이면은 없다. 오로지 지금 현재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실험만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고 느낄 뿐이다. 섬은 그저 외로운 과학자를 하나의 세계로 이끌뿐이다. 무언가 새롭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만이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길이며 비판을 비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저 과학자의 남용은 지금 이시대의 아픔을 미리 예견한 한 소설가의 끈질긴 노력이 아닐까? 무엇이 그를 이 소설을 쓰게 했는지 소설을 다 읽고 나는 이 작가가 지니고 있는 생각을 한번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그가 여러 가지 작품 가운데 이 소설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고수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과 너무나도 잘 맞아가는 소설은 세상에 조금은 다른 이면을 보고 규칙과 함께 부정적인 현상을 필요로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고 있었다.
슬픈 일을 겪고 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슬픔의 정도의 차이는 사람마다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슬픔 자체를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슬픈 일이 커지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죽음이 그 경우다. 그 사람이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 충격은 걷잡을 없이 커져간다. 무척 견뎌내기가 힘이 든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밖에서 별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모인 가족들과 애도를 하며 외할머니를 떠나보낸다. 외할머니에게서 뜻밖에 유언으로 받게 된 상속들. 가족들이 떠나고 혼자 남은 집안, 그 집안을 둘러본다. 먼지와 그동안의 추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집이다.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읽어가는 나를 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지난날의 슬프고도 정겨운 이야기를 접하게 된 이리스는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된다. 낯설기도 하고 설레이기도 하는 이야기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만 살아가면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누군가의 삶.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에 관해 만약 듣게 된다면 처음엔 그저 충격으로 들리고 믿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런 마음을 진정 시키며 충격과 낯선 향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책을 읽어가면서 나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리스가 놓인 상황을 3세대에 걸친 여성, 아줌마의 운명이라고 붙여 보았다. 그렇게 해 놓고 나니 외할머니의 삶의 굴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소설 제목이 사과씨의 맛인지 느껴졌다. 사과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것을 먹음으로써 작아지는 사과의 모양 그리고 반 정도 남은 사과의 단면은 어쩌면 우리가 지금 지탱하고 삶의 이면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 나머지의 생을 다하면 우리는 죽음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슬프고 정결한 마음. 그것이 사랑이고 슬픔의 이별이 아닐지. 외할머니의 죽음을 위로하고 싶기도 하고 그 슬픔을 반으로 줄여 들이고 싶은 생각까지 하게 되면서 소설은 중반을 넘어 섰다. 무언가 사랑이든, 이별이든, 그것을 계속해서 나눠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왜 그동안 외할머니의 모습과 행동들이 나타났지 왜 이리스를 이곳에 남게 했는지 하나씩 밝혀지는 비밀들에게서 작은 단서들이 들려지고 발견되면서 사건은 점점 재미를 더해 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과 호기심을 일으켰고 이리스에게는 더욱더 파헤치고 싶은 일종은 모성본능까지 보이게 되었다. 왜 사과 씨의 맛일까? 먹어본 적 없지만 이 소설을 통해 나름대로 추리는 가능했다. 죽은 사람의 과거에 비춰진 아름다운 사람과 죽음에 이르는 모습들이 어쩌면 일상적이 되어버린 지금, 하나의 울림이 되고 세대를 아우르면 세대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가 사과를 먹는 장면과 연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매혹적인 그녀들의 삶은 연예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하면서 소설을 끝을 달려가고 있다. 사과의 아삭아삭한 맛처럼 소설은 재미와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사랑에 대한 열망을 갖게 한다. 그러나 늦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모든 것이 절망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다시 시작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소설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에 상을 수여해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땐 소설의 구조와 작가의 의도로 보이는 숙부만의 언어가 내 마음을 조금은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 읽는 내내 그것은 오히려 읽는 재미를 안겨 주는 요소가 되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장점이며 불평하면서 읽고 있어도 어느 순간엔 나 자신도 모르게 숙부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고 “왜 또 나오지 않지” 하면서 다음 장을 넘기게 된다. 어쩌면 요구에 가까운 행동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상상력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해 숙부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들. 흔히 다른 사람은 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 주변의 사람들은 낯설거나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모습과 작가가 구축한 소설 안에서 어쩌면 독자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하고 소설 안으로 이끌려는 의도가 들어있지 않을까. 읽어 갈수록 소설 안으로 빠져들었다. 어쩌면 확신에 가까웠다. 소설은 숙부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과 다른, 매우 부적응, 부적용에 가까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사회와 단절된 모습은 사회의 통념 속에서 얼마나 고통 받고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가슴까지 느끼게 해 주었다. 작가의 무한한 상상이 더해져 고립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숙부의 모습은 이 소설의 백미이며 얼마나 거대한 세계 속 다양한 이면의 모습인지 그 다양한 삶의 한 부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가지게 했다. 숙부는 다른 사람의 이목은 그다지 그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의 소설 속 주인공이 되고 소설의 모티브가 되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만의 언어와 행동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숙부에게는 다른 사람의 모습들이 현실에서 많이 벗어난 사람들로 보일 뿐이다. 숙부의 눈엔 다른 사람의 모습이 현실의 모순을 살고 있는 인물들일 뿐이다. 다른 사람과 특이하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한 사람을 둘러싸고 구경을 하거나 관심의 정도가 지나쳐 그, 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그 분위기를 몰고 가는 현실처럼 소설은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모습을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그려내어 거대한 세계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계보다도 작은 모습으로 평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작은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행동으로 옮기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까? 우연한 기회에 본 많은 것들이 숙부의 삶을 전부 이해하고 만든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는 것을 또한 느끼게 한다. 무언가를 보고 전부를 본 것처럼 이야기 하는 사람들. 이상한 행동을 보고 나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 다수의 생각은 그저 한 순간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숙부의 행동들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것들의 자랑거리이며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살기 위해 애쓰는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 특이하지만 그 나름대로 자신의 방해요소들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회의 한 일원임을 떳떳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별에서는 없는 아니, 있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그런 부분들을 건들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이 보여주고자 한 여러 가지 배경 묘사와 상황의 전개는 극히 소설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측면이지만 그 속에 담긴 유연한 삶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중 최대의 수혜자로서 숙부의 삶이 기록 되어지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소통의 방식내지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낯선 언어와 말을 더듬는 행동들을 극복하기 위해 숙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한히 많은 언어들이 쏟아지는 지금,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여러 가지 목소리와 언어들을 보면서 나도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과 행동을 보여 주어야겠다고 느꼈다. 숙부의 기록과 행동은 어쩌면 우리가 평소 느끼는 감정의 주체로 주체할 수 없었던 시기에 느끼는 감정의 또 다른 표현의 표출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흥미꺼리가 되는 요즘 사회의 구성원 한 사람으로 보면 좋을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낯선 삶이 세상에 던져져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래본다.
매력적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상대방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어떤 추억을 안고 있는지, 말하지는 않지만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어떤 의미로 자신에게 다가 오는 것일까? 이런 많은 의문투성이로 사랑은 시작되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설레임. 그것은 사랑의 시작이며 출발인 셈이다. 무엇이 상대방에게 끌리게 되었는지 관심사는 이제 공통의 분모를 가지면서 이어가게 되고 서로 싸우기도 하지만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릴 수 있는 용기, 아니 추억이란 이름으로 그것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새벽에 눈을 뜨면 생각나는 사람. 아무도 없는 구경꾼들.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사랑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면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것이 새벽이 되었든 아니면 늦은 밤이던 사랑을 하게 된다면 상관은 없다. 오직 그 상대방에게 내가 보이는 참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우리 뭐 먹을까 생각을 하면서도 그저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고 같이 무엇인가를 하게 된다면 그저 웃음만이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대변하고 보여 줄 뿐이다. 나에게 이 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는 그런 의미로 다가온 소설이다. 사랑에 대한 어떠한 과장도 어떤 덧붙임도 없이 그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그러나 다른 소설과 다르게 느꼈던 것은 이 소설이 지닌 여러 가지 장점 때문이었다. 과장되지 않는 부분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사랑의 이면과 사랑에 대한 속삭임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에 대한 열병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필요한 인내처럼 이 소설은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기 전에 어떤 흐름을 가지고 이어가고 있었다. 무언가의 종착점이 아닌 출발점으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고 텅 빈 세상 가운데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들이 한결 가볍게 움직인다. 이것은 작가가 지닌 빠른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간결한 문체와 연결이 된다. 때론 농담처럼 때론 진진한 삶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태도는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모르고 지나온 사랑에 대한 추억을 가지게 만들고 선물처럼 사랑이란 말을 가슴에 담아 두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싫은지 무엇이 후회를 하게 만드는지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을 진진하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소설이기 때문에 그저 깊숙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정말 그랬을까? 그저 이런 작은 감정만 가진다면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소설이 주고자 한 세상에 대한 영역, 이 소설이 미치고 있는 사랑에 대한 다른 생각들. 그리고 이별. 제목에서 주고 있는 ‘추파춥스’는 어떤 의미로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는지 무엇이 그것을 진솔하게 하는지. 잃어버렸던 사랑에 대한 추억과 어느 순간 근육들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을 지닌 소설에서 그것을 어떤 식으로 끌어안고 보아야 하는지 무엇이 전부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저 사랑의 떨림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열병처럼 나는 온통 이 소설을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주말을 이용해 읽어 낸 소설은 나를 마지막 온기가 있는 곳에 데려다 주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출발과 사랑에 대한 다시 출발 지점으로 옮겨 놓고 있는 작가의 상상력 때문이었다. 사랑과 이별을 보기 좋게 작가의 상상력으로 덮어버려 재미와 흥미진진함을 함께 전해 준 소설에서 사랑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소설을 많은 사람들에게 권해보고 싶다. 사랑에 대한 참 맛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동경과 마음의 쏠림 현상이 간직된 채 추억하는 곳이 한 곳이라도 있을 것이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그런 경험은 체험이 아닌 소중한 그 무엇으로 변모해 있다. 함께 그곳에서 뛰어놀고 따르고 이끌어 주던 사이의 사람들에게 몇 년 후 의 만남은 만남 자체로 신비롭고 아련한 추억이 된다. 그곳이 누구에게나 쉽게 공개되는 곳이 아니라면 그 사이의 매개체로는 더이상 바랄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폴과 앨리스에게도 그런 곳이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며 지냈던 아이에서 이제는 이성적인 끌림이 그 둘 사이를 좌우지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변해 있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 그 모습을 간직한 채 기억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함께 하던 또 다른 한 사람. 그들에겐 이른 바 삼각관계처럼 얽힌 시간의 흐름을 갖는다. 아닌 이미 예정 되어 있는 것처럼 약간의 혜택 없이 그것을 여과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말해 누군가와 경쟁하고 심리전에서 이겨야만 자신이 취하고 싶은 것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어린 시절, 그것은 그저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 평범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무제한적으로 제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 자신에게만 보여줘야 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다가 온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에겐 끝이 보이지 않고 평온할 것 같은 시간이 이제는 나락으로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공간으로 발을 들여 놓고 있다. 자신에게 왜 이런 상황이 맞닿아 있는지 의문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취하는 한낫 나약한 몸부림일 뿐이다. 신비로운 섬. 신기하고 평온할 것 같은 섬에서 이쪽에서 저쪽을 보아야 하는 운명적인 모습들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젠 누군가를 배반해야 하는지. 지속 가능하게 예전의 모습을 간직한 채 현실을 그냥 가슴에 묻어 두어야 하는지 갈림길에서 어떠한 보장도 받지 못한 채 사라져 가는 추억과 시간을 그리워한다. 아픔과 슬픔, 견뎌내야 하는 시간만이 그들 앞에 놓여지면 이제는 더 이상 강조되어지고 하나로 부여된 사랑 조차 아픔이 된다. 그것도 뼈아픈 아픔. 성장은 그렇게 훌쩍 커버린 키만큼 자라나게 되는가 보다. 가슴에 사랑을 묻어 두고 사는 나에게 많은 생각보다는 한 가지의 추억거리를 안겨 주는 소설이었다.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