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이 아니라 구정이, 그도 아니라면 3월 봄학기 시작이 진짜 새해의 시작이라고, 올해엔 정말 바지런한 서재 관리를 하겠노라고 (혼자) 결심했는데, 오늘이 벌써 6일이더라고요? 늦더라도 책 읽은 기록을 남겨야지. 돌아서면 잊기에 맘 먹었을 때 써야 함.

 

쿳시는 처음 읽는 작가다. 이름 스펠링도 어려워. COETZEE . 남아프리카의 백인 작가라 태생적으로 인종 문제와 '죄책감'을 쓸 수 밖에 없다. 또 그는 네덜란드 계 후손인데 전통인 아프리칸스어 대신 영어로 글을 쓰니 이래저래 아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죄책감은 문장, 단어, 호흡 마다 배어 있어서 무겁다. 해법도 없이 계속 파고 들어가니 가벼울 수가 없다. 그의 찌질한 인간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문득 고개를 들어서 '사랑'이라든가, '자연' 혹은 '순수'를 말하고 싶어하는데 '여인'을 통해서. 흠, 이건 흔한 전개 같다가....

 

'서머타임'에선 작가 쿳시의 사후 그의 전기를 쓰려는 화자가 네 명의 '인생의 여인'을 인터뷰한다. 여인들을 통해서 인간 쿳시, 혹은 작가세계를 다시 살핀다. 과연. 쿳시의 문학 혹은 쿳시 자신의 뿌리는 어디인가. 그는 가난하고 싱글이고 생활력은 없는데 시를 읊고 책을 쓰고 영국인이 아니면서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가르치고 자신을 측은하게 여기는 여자(들)에게 치근거리고 눈치 없이 계속 따라 다니고 그러다 망신을 당하고 그런데 그 망신은 워낙 익숙해.  찌질함으로 포장한 솔직한 고백, 혹은 오만함으로 조근조근 다 적어놓고 모아놓는다. 그래서, 이 사람은 당신/독자와 많이 다릅니까? 하모요, 전 그란 사람 싫어예. 그런데 책은 묘하게 재미있게 읽힌다는 게 신기함. 그 소설 세계가 현실을 그리며 비틀고 계속 주류/비주류, 가해/피해, 변화/전통 을 언급한다. 한없이 고상할 수도 한없이 초라할 수도 있는 소설, 쿳시, 그리고 어쩌면 그걸 읽는 나도. 아니야, 부정하고 싶어.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고갱 그림으로 표지를 삼은 건 흠....이해는 가는데 내가 생각한 줄거리랑은 조금 달랐다. 야만/문명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화자는 서머타임의 작가 혹은 인물 쿳시와도 많이 닮았다. 가해자인 자신의 아이덴디티를 못버려서 괴롭고 또 그 와중에 가해를 계속 하고 있는. 하지만 구원 받고 싶고, 구원자가 되고 싶어한다. 지 안에서 여러 가치들이 막 부닥치고 법석인데 .... 그는 변태라네. 원주민 어린 여자에게 하는 행동은 읽기 더럽다. 그런데 그게 깨달음과 해법을 주는가? 차마 그렇다고 대놓고 얘길 못하지만 슬쩍 그런 척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막 벌준다. 에잇, 나대더니 꼴좋다, 에잇, 그래도 넌 솔직했쟈나?! 웅장한 양심 해방일지 개쪽을 당할지, 이 밥맛이며 찌질한 백인 변태 아저씨는 ... 하지만! 아주 머리가 좋아서 이 소설 혹은 우화를 독자가 중간에 덮지 않게 만든다는 게 또! 신기함. 우리 세상이 소설 속에 언뜻 언뜻 비추기 때문. 야만은 누구? 어디? 왜? 아, 맞다. 노벨 프라이즈.

 

ps)두 소설 모두 다락방 님을 열받게 만들기 충분함. 그런데 또 패스하고 무시하기엔 .... 아깝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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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0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 쿳시 소설 좋아했었거든요. 다 너무 인상적으로 읽었던 터라..
역시 제가 읽어보는 게 답이겠어요.

유부만두 2019-03-19 10:50   좋아요 0 | URL
각자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게 될 거에요. 쿳시는 꽤 스마트한 작가인 건 확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