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로 된 심리학 용어 중에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일어로 '피해'를 뜻하는 단어와 '기쁨'을 의미하는 단어가 결합된 이 용어는 번역하자면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감정을 일컫지요. 타인에게 어떤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때, 내게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남모르게 안도를 느끼고,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내게 일어나지 않은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월감을 느낀다고 할까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코>에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바로 샤덴프로이데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스님에 대해 동정하는 듯 말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일종의 우월감을 즐기고 있었던 거구요. 그렇기에 스님이 콤플렉스를 떨쳐내자 오히려 적의를 드러내며 과도하게 비웃었던 것일 테지요. -45-46쪽
예전에 책을 낸 뒤 했던 어느 인터뷰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물음에 저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살고 싶고,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살고 싶다."고 대답했지요. 그때는 농담처럼 했던 말이었는데, 돌이켜보면 정말 잘한 대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삶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일에는 명백한 시한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주어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되, 내가 전력을 기울여오던 일이 어느 순간 벽에 부딪치게 되면 미련 없이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태도일 수 있습니다. -148쪽
파스칼은 "모든 불행의 근원은 한 가지다. 즉 인간에게는 조용히 혼자서 자신의 방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책을 펼쳐들 때, 인간은 비로소 혼자가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리듬대로 시간 속을 통과한다는 것이지요. 영화나 음악 같은 매체와 달리, 한 권의 책을 읽어내는 데 정해져 있는 시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독자는 나름의 속도로 책을 읽습니다. 어떤 사람은 서점에 서서 세 시간 만에 한 권을 독파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침대에서 잠들기 전 매일 30분씩 일주일 동안 읽어내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욕조에서 내키는 대로 가끔씩 그 책을 집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쉴 때 책도 쉬고, 내가 생각할 때 책도 생각한다고 할까요. -151쪽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삶에 대한 전망이 어두우면 왠만큼 나쁜 일이 닥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원래 온전히 기댈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삶이란 결코 장미와 와인의 나날일 수는 없는 것이라고 평소에 여기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이 소설의 마지막 두 문장에서 주인공은 '한순간 동안이나마 지속되었던 행복이면 삶은 족하다'고 토로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비관주의자가 꼭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불행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비관적 전망은 기대하지 않았던 행복이 찾아올 때 좀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구요. 그러니까, 당신이 비관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불행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대가 적으면, 오히려 하루하루의 작은 행복들은 더더욱 생생하게 체험될 수도 있으니까요. -157쪽
종종 고통보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고통에 대한 염려와 공포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적당한 고통은 필수적인 생존의 조건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작은 배를 타고 거친 파도를 넘으면서 오래오래 항해해야 하는 생의 고단한 순례자니까요. -170쪽
누구나 한두 번은 친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업인은 자신이 하는 작업이 무엇이든, 한두 번이 아니라 매번, 반복되는 일을 정성들여 해내야 하지 않을까요. 작은 물건 하나를 사고파는 일도 그런데, 하물며 생명이나 사람 자체를 다루는 일들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누군가의 흔한 권태가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가 된다면, 그게 죄가 아니라고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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