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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청목 스테디북스 64
이상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학교 과제로 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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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함으로 날개를 부르짖은 청년의 이야기 - 이상의 「날개」를 소설의 구성요소 중 작중인물의 이해와 서술자의 종류를 바탕으로 분석


   이상의 대표작인「날개」의 주인공 '나'는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전반적으로 괴이하다. 멀쩡한 젊은 청년이라고 보기 힘들다.「날개」의 독자들에게는 작중인물인 '나'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로 초점은 ‘나’에게 맞추어져 있고,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만이 독자가 가진 실마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히 살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파악이 쉽지 않다. 작가 이상의 성격이 독특하고 개성적이었던 만큼 그의 작품 속 인물 역시 한 편의 수수께끼 같다.

   이상은 소설「날개」의 ‘나’라는 인물을 구현하는 데 있어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는 보여주기 방식이다. 이상이 인물의 행동을 보여줄 때는 주로 ‘나’가 위주이며, 다른 인물들의 행동 묘사가 보이는 경우는 ‘나’가 등장하는 장면과 관련할 때뿐이다. 인물들의 특정한 행동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 그 이유를 부연설명 하는 법은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나’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을 간접적으로 추측하게 된다. 어느 것도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접근법은 의식의 흐름을 통한 내면 묘사다. ‘나’의 의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날개」를 읽으면서 ‘나’의 적나라한 의식과 마주한다.

   이 두 가지의 접근법은 단순하게 이등분으로 구별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서로 엮여져 있는 상태로 ‘나’라는 인물을 형상화한다. 인물의 행동과 내면 묘사가 한데 섞여 펼쳐지는 쪽에 가깝다. 그러한 작가의 묘사방법을 통해 독자가 그려낼 수 있는 '나'라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생각만 한다. 생각도 단편적이다. 외부의 자극에 순간적으로만 반응한다. 어느 소설에서도, 어느 이야기에서도 이처럼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젊은 남성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기력한 인물이 많다 치더라도, 자신의 무기력함에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드물다. 그는 자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한 지점이「날개」의 주인공 ‘나’를 독자로 하여금 비정상적이고 인상적인 인물로 기억되게 한다.

   ‘나’에게는 자존심도, 이해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속없다는 점에서 마냥 어린아이 같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예민한 존재인지 안다면 그러한 비유도 적절하지는 않다. 그는 아내가 키우는 한 마리의 개 같다. 자아가 없는 것 같다. 아내가 반찬을 부실하게 챙겨주면 군소리 없이 그대로 받아먹는다. 그래서 쪽쪽 말라간다. 아내가 옷을 챙겨주지 않으면 또 그대로 옷 한 벌을 입고 다닌다. 코르덴 양복 한 벌로 잠도 자고 밖으로 외출도 한다. 그는 어쩌다가 한 번씩 아내를 찾아오는 내객들의 정체를 궁금해 한다.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질문은 일회성에 불과하다. 그 이상 더 나아가지 않는다. 물음은 연장되거나 심화되지 않는다. 회피해버린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으레히 내 머리는 그냥 혼란하여 버리고 하였다. 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대체 귀찮기도 하려니와 한잠 자고 일어나는 나는 사뭇 딴사람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까닭이다.(17)”

   ‘나’는 천치처럼 군다. 그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가 자신에게 아달린을 먹여 온 것을 알고 물어보러 집에 들어온 그는 "내 눈으로는 절대 보아서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34)"와 같은 상황에 부딪친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이 소설 안에서 아내가 내객과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결국 자세히 언어화되지 않는다. '나'의 사소한 일거수일투족, 그가 아내의 화장품에 비치는 빛들을 갖고 놀고, 불장난 치는 것 따위는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그가 이불 안에 들어가서 사색하고, 게으른 동물로 사는 이야기도 친절히 다 나온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릿한 한 문장으로만 넘어 간다. 아내는 내객과 함께 있을 뿐, 정확히 어떻게 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나’의 말에 의하면 아내는 내객과 자신이 같이 있는 모습을 '나'가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아내는 꼭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래서 나는 보면 아내가 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았다.(30)"고 하는 식으로 표현한다. 그 장면은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아내가 안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묘사에서 짐작할 수 있는 점은 ‘나’ 자신의 가치판단이 미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가 그러한 장면을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제시된 금기나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뉘앙스가 된다. 무력하고 나약한 ‘나’는 자신의 물질적인 생존을 아내에게 완전히 맡겨버린 것처럼, 남성으로서의 자존심도 아내에게 미뤄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는 ‘나’라는 서술자의 진술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회를 스스러워 하고, 인간의 삶을 스스러워 하는 그가 마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진심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필자의 생각에 ‘나’는 신빙성 없는 서술자이다. '나'는 선택적으로 상황을 본다. 이야기를 할 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위에 쓴 것처럼 아내와 관련해서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점은 최후까지 보려 하지 않는다.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아름에 덥석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35)” 정도의 상황이 되어서야 ‘나’는 아내가 “밉다”(35)고 말한다. 그제야 그의 속내가 간신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미움도 잠시, 아내가 억수 같이 퍼붓는 독한 말들에 그는 망연자실하여 도망쳐버린다. 어디를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게, 어떻게 갔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얼이 빠진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스스로의 자아에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36)” 하지만 그는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는 말로 자신의 질문에서 또 한 번 도망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 직시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날개」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그는 자신과 아내를 ‘절름발이’로 묘사한다. 그와 아내 둘 다 사지가 멀쩡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유는 일종의 자기합리화이다. 어디 딱히 문제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나’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딱지 붙이지 않는 한 스스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변명할 길이 없다.

   이 글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겉보기에는 한 사람의 철저한 미약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약함이 아닌 욕망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삶에 갖는 욕심이나 욕망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아내에게 지고, 아내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기 자신은 거세시키고, 지워나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한 편의 총체적 역설처럼 느껴진다. 무능과 무력, 나약함과 미약함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히려 한 청년이 자신의 생에 갖는 괴로움과 아내에 대한 애착이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사실 욕망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이 소리 없이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자신에게 사라진 인공의 날개가 다시 돋아나서 한 번 더 날아보길 바란다. 날개 없는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권은 그 어디로도 날아가지 않는 것, 무력하게 제자리에 쓰러져 있어야만 했던 것뿐이었다. 날개 꺾인 새는 언제나 날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날고 싶다는 소리조차 차마 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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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날개(이상 단편집)』, 청목,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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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1-, 2014년 11월 첫째 주. 2014년 11월 1일~11월 8일

 

  왓챠라는 어플을 깔고 난 다음, 깨달았던 것은 내가 생각보다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물론, 뭐 양이란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건 책이랑 똑같은 문제다. 나는 다독한다는 사람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진 않는다. 중요한 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의 문제니까. 그래도 내가 생각보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건 마치 제대로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는 몸무게를 꼭 재봐야 하는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쨌든, 내가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왓챠를 통해 확인하고 난 다음, 이제부터 영화를 정말 작심하고 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시험 기간 같은 예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은 보아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걸 일지처럼 작성하고 공유하는 작업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모르지, 이렇게 쓰다보면 세상에 영화동지가 늘어날 수도!

 

  살짝 언급을 하고 지나가자면, 영화 각각에 대한 자세한 감상은 사실 평글로서 길게 써야 하는 것이 정석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상만을 채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다음이 11월 첫째 주에 내가 본 영화 목록이다.

 

11월 1일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 루이스 브뉴엘의 '어느 하녀의 일기'

11월 2일 :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

11월 3일 :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11월 4일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 (한국어 제목 : 태양은 외로워)
11월 5일 : 마이클 마키마인의 '콜걸' (스웨덴 영화제)
11월 6일 : X
11월 7일 : 얀 트로엘의 '마지막 문장' (스웨덴 영화제)
11월 8일 :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이 정도를 보았다.

 

  날짜별로 정리하자면, 11월 1일에는 시험이 끝난 다음 날이라 집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요즘 내가 빠진 배우가 프랑스 대여자배우 쟌느 모로이다. 쟌느 모로가 나온 두 영화를 11월 1일 날 몰아보았다.

 

  11월 6일에는 안타깝게 영화를 보지 못했다.

 

  11월 5, 7일에는 이화여대 모모에서 스웨덴 영화제를 통해 무료로 스웨덴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감독별로 정리하자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은 정말 예술작품 그 자체였다. 큰 화면으로 정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이었다. 만약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이다. 그것은 장면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미학의 문제, 그리고 영화의 서사와 그 가지를 통해 스며나오는 정서(내용이라는 단어로 압축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의 문제이다. 그 두 개를 다 이루어내면 그 사람은 예술인이다. 전자에만 도달한 사람은 기술인이고, 후자에만 정통한 사람은 투박한 사람일 수 있다. 어느 쪽이나 예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이미 어떤 한 지경을 찍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장면 호흡은 정말 길고, 주로 풍경화에 가깝다. 인간을 도시의 눈으로 관찰하는 그의 시선은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방황을 찍어낸다. 그리고 종국에 인물이 사라진 그곳에서는 장면을 꽉 채우고 폭발할 듯 이글거리는 일식과 같은 정서가 흘러나온다. 여백의 미를 아는 사람이랄까? '밤'의 마지막 장면, '일식'의 마지막 장면, 특히 '일식'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종종 다시 돌려본다.

 

  코엔 형제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감독들은 아닌데, 그들이 예술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차원은 아니다. 잘 만든다. 그런데 어떤 지점에서는 사실 취향이란 문제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들은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균형 잡힌 이들이고,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 이들은 웨스 앤더슨과 비슷하다. 그들은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정말 잘 만들었다, 라는 말이 나오지만 마음 깊은 곳을 톡 건드리진 못한다. 그런데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는 내가 본 이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았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스포일러니 굳이 더 나가진 않겠지만 예술과 창작에 뜻이 있는 모든 사람의 고통과 고민, 부조리와 모순을 잘 묘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정말 에스파냐가 낳은 최고의 명감독이다. 그는 특히 여자 이야기를 다룰 때 있어서 상당히 좋은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언뜻 산만할 수 있지만 결국은 종점을 향해 가는 길을 착실히 밟는 영리한 영화다. 더 할 말은 없고, 사실 이 사람의 영화는 '귀향'이 정말 좋다. 관심 있는 분 꼭 보시기를.

 

  '콜걸'의 경우는 애매하다. 상당히 투박하다. 문제가 있을 정도로 투박하달까. 장면미학이 독자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감독이었다. 데뷔작이었던 듯 하지만, 훌륭한 감독들은 데뷔작으로도 장면미학을 구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은 매우 좋았다. 역시 스포일러에 가까우니 말은 안 하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결말이라는 것만 언급하는 정도로 끝내겠다.

 

  얀 트로엘 감독 같은 경우 보고 나서 너무 놀랄 정도로 영화가 세련되었었다. 내가 정말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 보아야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해준 영화였다.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이러한 수준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들이 있다. 장면미학적으로 이미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해 놓은 감독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만약 판소리였다면 내가 얼씨구 외쳤을 정도로 좋은 장면들이 있었다. 또한 그의 영화적 시선에는 정서가 고밀도로 농축되어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에만 충실한 한 이기적인 남자의 정서를 어찌 그렇게 훌륭하게 짜놓았는지. 감탄만 하면 지겨우니 다시 여기서 줄이는 것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같은 경우는 상당히 기대하고 봐서 그런지 기대보단 이하였다. 물론 잘 만들었다. 못 만들진 않았는데, 솔직히 어떤 지점부터는 조금 뻔한 이야기 같았다. 감독의 괴기하고 정신분열적인 정서를 느낄 순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조차 조금 뻔한 형식과 뻔한 내용 같기도 했다. 다시 보면 평가가 달라질 순 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 본인이 연기를 인상적으로 해낸 것은 소소한 재미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길게 썼다. 사실 작품 하나하나만 따지면 훨씬 더 길어야 하지만 인상 위주라서 이 정도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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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과제로 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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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하는 60년대 서울의 겨울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고심리주의 비평 중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분석


 

 

목차

 

Ⅰ. 서론 - 가벼운 욕망의 젊은이들, 무거운 이별을 한 남자와 우연히 만나다

 

Ⅱ. 가벼운 남자들, 그리고 지나치게 무거운 한 남자

1. 두 젊은이의 욕망을 둘러가는 대화

2. 세상을 포기한 우울한 남자

 

Ⅲ. 결론 - 인간의 저열한 밑바닥인가, 인간 본성의 나약함인가

 

Ⅳ. 참고문헌

 

 

 

Ⅰ. 서론 - 가벼운 욕망의 젊은이들, 무거운 이별을 한 남자와 우연히 만나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짧은 단편이다. 김승옥의 대표적인 글 중 하나인 이 단편은 도시화가 진행된 서울을 배경으로 밤에 우연히 만난 스물다섯의 두 남자와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전개된다. 막 아내를 잃은 삼십대 중반의 남자의 절절한 괴로움과는 대조적으로 그것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 없다는 듯 남의 불행을 부담스러워만 하는 두 젊은 남자의 심리는 독자의 눈에 비양심적이고 무책임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흐느적거리는 김승옥의 서울에서는 그 모든 인간적 양심이 휘발되어도 놀랍지 않게만 느껴진다.

  이 소설을 제대로 비평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서울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시대의 서울이 갖고 있는 도시화의 모습, 그 안에서 파편적으로 분열되고 고립된 개인상의 끔찍한 외로움이야말로 김승옥이 그려내고 싶었던 일면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미 앞서 이러한 서울의 도시적 공간과 그 안의 소외된 모습을 상징과 모티프로 분석한 논문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으면서 그러한 거대한 흐름을 전제로 하되, 개인들의 심리 양상에 집중하고 싶었다. 필자의 눈에 극중 인물들의 모습은 단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만 가능한 행동들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기보다 그들은 프로이트 식으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과 문명 안의 괴리에서 끝없이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초로(草露)의 인간들에 가까웠다.

  필자는 본론에서 「서울, 1964년 겨울」을 심리비평의 방법 중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을 이용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그러한 분석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간의 깊은 심리에서 복잡한 사회와 스스로를 분리시켜 무책임한 회피와 단순한 쾌락만을 목적으로 하는 일면, 진지하고 밀도 깊었던 인간관계의 붕괴로 깊은 슬픔에 빠져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면, 그리고 그러한 인물들의 어색하고 낯선 만남을 이야기해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Ⅱ. 가벼운 남자들, 그리고 지나치게 무거운 한 남자

 

1. 두 젊은이의 욕망을 둘러가는 대화

 

  「서울, 1964년 겨울」의 도입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황당하다. 25살의 젊은 두 남자는 배경이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이다. ‘나’는 시골 출신에, 고등학교만 마치고, 원하던 직업을 못 구해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는, 게다가 성병에도 한 번 걸려본 적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대학원생이라 자신을 소개한 ‘안’이라는 인물은 집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공통점 하나 없어 보이는 이 두 사람은 만나서 파리와 움직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외간 사람들이 보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소재를 그들은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무의미함은 무의식에 숨어있는 그들의 욕망을 은근 드러낸다.

  날아다니던 파리의 이미지가 꿈틀거리는 것으로, 그리고 "그 여자의 아랫배가 조용히 오르내리는 것"이라는 이미지로 움직여 갈 때, 우리는 젊은 남성의 의식 언저리에 있는 성적인 욕망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배운 사람이라는 '안'은 그것을 음탕한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린다. '안'의 낙인에 '나'는 속으로 발끈해 본다. '안'은 '나'의 욕망에서 좀 더 나아가 데모를 이야기한다. 같은 생명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적인 욕망만이 아닌 사회적인 욕망까지 읽어낸다. 그가 받은 교육의 힘으로 짐작된다. '안'은 서울이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고 답을 내린다.

  '안'의 진술은 상당히 정확하다. 서울은 무수한 개인들의 욕망들을 담아내고 있는 거대한 공간이다. 이 문명 공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다. 그 질서는 산업화, 현대화의 질서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이 공간은 그 안에 있는 개인들을 포근히 안아준다기보다는 소외시켜 버린다. 사방이 막혀버린 벽 같은 어느 선술집은 서울 안에서 소외된 전망 부재의 공간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공간은 동시에 인간에게 남아있는 본능과 욕망을 부채질한다. 서울 곳곳에 있는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위시한 광고들은 조용히 젊은 사내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다.

  문명의 고고함과 문명 안에 잔존하는 개인의 욕망은 프로이트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한 병존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은 여러 편리함과 생명 유지를 위해 문명을 이룩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 자신의 본능을 억눌러야 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욕망이 규제되지 않는 한, 평화로운 문명을 이룩해 진보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인간 본능의 억제를 프로이트는 문화적 '욕구 불만'이라고 묘사한다.

  「서울, 1964년 겨울」에 나오는 이 두 청년 역시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서투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도하던 그들은 결국 의미 없는 대화만이 서로가 무리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방식임을 깨닫는다. 꿈틀거림, 삶과 생에 대한 에너지는 그들이 갖고 있는 진짜 욕망이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외설적이고 음탕한 것이 된다. 지성인인 '안'은 그러한 욕망에 더욱 예민하다. 음탕하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욕망을 더 구체적으로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면의 욕망에서 비롯된 인간 본능의 진지함을 피하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가 '안'을 곯리려고 시작한 의미 없는 대화가 더 편하게 이루어진다. 평화시장 앞의 가로등들, 화신백화점 육층의 창들, 물건 파는 여자의 모습,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야말로 그들이 아무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들의 대화는 의미 없는 부분을 항해하다가 생(生)으로 귀환한다. 욕망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다시 욕망으로 돌아온다. 대화는 욕망을 둘러 이루어진다. 그들이 왜 지금 그 늦은 시간에 밖에 나왔는지 밝히는 부분에서 그들이 자그마하게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욕구가 암시된다. '나'는 하숙방에 들어앉아 벽이나 쳐다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안'은 밤거리에 나와 풍부해지는 느낌, 살아있는 느낌을 얻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고 밝힌다.

  젊은이들은 욕구불만을 양산하는 문명의 질서 속에서 더 나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들도 자신들의 욕구 자체가 모두 해소되고 밝혀지는 것을 기대하진 않는다. 그저 이 외로운 거리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또 몇 있다는 공감을 원한다. 그 단편적인 감정의 공유와 사소한 쾌락의 충족만이 그들이 원하는 바다. 자그마한 위로를 받고 싶어서 나온 그들이 만약 원래 계획대로 정식으로 한 잔만 하고 헤어졌다면, 아마 그들은 자신들의 무의미하고 가벼운 욕망만을 갖고 다시 원래의 삶으로 복귀했을 것이다.

 

2. 세상을 포기한 우울한 남자

 

  이 젊은이들은 예상치 못한 인물을 한 명 더 만나게 된다. 가벼운 욕망만을 가진 그들의 곁에 다가온 인물은 서른대여섯 살로 보이는 한 사내다. 그 사내는 가난뱅이 냄새가 난다는 서술자의 표현처럼 빈약하고 약하고, 우울해 보인다. 그는 중국 요릿집으로 두 명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가서는 비싼 음식을 시킨다. 부담스러울 것 같은 묵직한 이야기를 금방이라도 뱉을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 앞에서 두 젊은이들은 어색해 죽을 것만 같다. 술자리에서 재미있게 접근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곧 죽을상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나'의 진술은 의미심장하다. 가벼운 쾌락끼리의 만남은 가볍게 끝나지만, 진지하고 묵직한 존재와의 만남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복잡한 문명의 질서 속에서 보잘것없는 욕망의 가벼운 해소만을 바라는 개인들에게 과한 마음의 짐은 기필코 사양해야 할 무엇이다.

  사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는 아내와 자기가 맺었던 즐거운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재밌게 같이 살았던 아내가 급성 뇌막염으로 죽었다고 한다. '안'과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사내로부터 빨리 벗어날 궁리만 한다. 그들이 그러는 이유는 분명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쾌락 자아에 따라 쾌락 생산에 매진하고 불쾌는 회피한다. 마찬가지로 현실 자아는 유용한 것을 추구하고, 손상을 당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 젊은이들이 사내의 불행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그들은 즐거움을 쫓는다. 하지만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슬픔과 비애는 전염병처럼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내가 아내의 시체를 팔아 받은 돈을 흥청망청 쓰기 시작하자 '안'과 '나'는 죄책감도 없이 그의 불행에 승차한다. 그들은 넥타이를 사주겠다는 사내의 제안을 거절하지도 않고, 심지어 사내에게 제안해 성적 욕구를 풀러 종로 3가로 가자고까지 한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여자의 뱃살을 생각하는 ‘나’에게 음탕하다고 무안을 주던 ‘안’의 묵은 속내가 그때야 잠시 엿보인다. 억압되어 있던 욕구를 남의 불행에서 비롯된 돈으로라도 해소하려는 '안'의 가벼움에 사내는 그때서야 처음으로 경멸하듯 젊은이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린다.

  두 젊은이에게 사내가 사랑한 아내의 죽음은 그들이 지나가다 마주하게 된 화재와 성질이 비슷하다. 그들이 보는 화재는 큰 사건이고, 그 안에서 분명 누군가가 막대한 손해를 입었을 테지만, '안'이 말한 것처럼 그들에게 그 화재는 화재 자신의 것이지 누구 한 특정한 개인의 것이 아니다. '안'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기에 그들은 화재에 흥미가 없다. 그들은 화재에 그러한 것처럼 사내의 아내의 죽음에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사내의 아내와 사내가 가진 관계는 그 둘만의 것이기에 두 젊은이는 사내의 철저한 슬픔에 아무런 흥미가 없다.

  하지만 사내는 다르다. 프로이트는 두 사람이 맺은 관계가 깊은 애정에 묶여 있는 만큼 외부 세계에서 자신들을 고립시키는 경향이 더 강하다고 말한다. 사내가 아내의 친정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모르는 것을 그 예시로 들 수 있다. 부부는 서로에만 몰두했었다. 프로이트는 사랑을 인간이 문명으로의 통합을 지향해주는 기능을 하는, 일종의 문명의 발명품이라고 보았다. 부부생활은 지속적인 성생활을 보장하고, 즐겁고 안락한 남녀의 생활을 상징한다. 그러나 사내에게 그러한 삶은 끝났다. 아내는 죽었고, 그는 죽은 아내의 시체를 판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 돈을 가지고 무엇이든 즐기려고 노력하는 사내의 모습은 그가 가졌던 사랑이라는 관계의 무거움으로부터 애타게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곧 돈을 치워버린다. 화재 속으로 돈을 던져버린 사내는 아내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돈에서부터 벗어난 그는 곧 자신의 직업이 하는 대로 월부 책값을 받기 위해 한 집을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방문을 거절당한다. 세속적인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수단과 단절되고, 자신이 세상에서 직업으로 삼았던 일에서마저 거절당한 그는 자신의 세계 중 가장 큰 일부였던 아내를 애타게 부르짖는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맺었던 관계 중 가장 가까웠던 존재가 이 세상에서 부재하다는 사실을, 자신이 아내의 시체를 팔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처절하게 직면한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던 사내가 혼자 있게 된 여관방에서 자살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킬 수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방법은 현실을 적으로 간주하고, 현실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현실이 그가 도전하기에 너무 강력하므로 그곳에서부터 회피하거나, 은자가 되거나, 아니면 사내처럼 죽어버리는 것이다. 자살은 결국 사회와 자신으로부터의 완벽한 단절을 상징한다. 그가 그러한 방식으로 세상과 단절할 정도로 괴로울 수밖에 없던 이유를 고민하면, 죄책감이라는 감정 때문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기 징벌을 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중의 하나가 죄책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에게 죄책감은 엄격한 초자아와 초자아의 지배를 받는 자아 사이의 긴장을 의미한다. 그의 논의를 따라 생각해보면, 문명이 우리 안에 있는 공격 본능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낸 그 양심이 사내를 죄책감이라는 창으로 공격했을 수 있다. 아니면 자신의 일부분일 만큼 깊은 관계였던 아내를 잃었다는 상실감 그 자체도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지나친 우울증에 빠진 사내는 여관방에서 죽어버렸고, 옆에서 동반하던 젊은 두 남자는 이 사고를 무참하게 방관 하였다. 그들은 사내가 가진 끔찍한 슬픔은 회피하려 했고, 사내가 베푼 즐거운 돈놀이에는 기꺼이 참여했다. 문명이 제공하는 거대 질서 안에서 익명성을 보호받은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안'은 사내를 혼자 놓아두면 죽지 않았을 줄 알았다고, '나'는 죽을 것이라고 예상도 못했다며 비겁하게 자신들을 비호한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사내의 자살에서도 아무 책임 없이 떠난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도 십년 후 서울 어느 거리를 힘없이 거닐지도 모를 일이다.

 

Ⅲ. 결론 - 인간의 저열한 밑바닥인가, 인간 본성의 나약함인가

 

  필자는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심리주의 비평 중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을 이용해서 분석해보았다. 소설 안에는 억압된 욕망으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는 욕구 불만을 서울의 길거리를 가볍게 부유하며 해소하는 청년들이 있다. 그들은 인간 소외를 부추기는 도시화된 서울이라는 문명에 짓눌려 있지만, 그 안에서 꿈틀되는 성과 생에 대한 에너지를 갈망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그들과 반대로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한 사내의 큰 절망도 있었다. 하지만 두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게서 받아낼 수 있는 쾌락은 다 취하고, 옆에 있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소통은 피해버렸다. 프로이트식의 쾌락원리에 따라 두 명의 젊은이는 자신들의 쾌만을 쫓았고,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한 사람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막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형상화된 두 젊은이의 잔인한 면모는 인간의 저열한 밑바닥인가, 아니면 인간 본성의 나약함인 걸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이 파괴적이고, 성적인 것을 열망하는 단순한 원리를 가진 것에 대해 원래 인간은 고상한 존재가 아니므로 딱히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필자도 인간을 고상하거나 날 때부터 선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소설에 나타난 ‘안’과 ‘김’을 악하다고 비난할 의도는 없다.

  그러나 저열한 밑바닥을 보여준 것은 아닐지라도 김승옥이 그려내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인간 본성의 나약함을 그린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문명과 본능의 충돌은 결국 인간이 완벽한 행복,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에 관해 설명하는 유용한 틀 중 하나일 뿐이다. 발전한 서울은 더 많은 인구를 껴안고, 더 많은 욕망 충족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외롭다. 파편화된 인간들은 나약해져 있고, 무기력해져 있다. 다른 인간에 대한 무관심은 그들이 다른 이를 위해 해줄 무언가는 애초에 없거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들에게 사내의 아내가 죽은 사건은 비극이긴 하지만 그들이 참견할 비극이 아니다. 자신들의 상처와 손실이 아니면 신경 쓸 것 없다는 생각에는 자신의 것만을 지키기에도 바쁘다는 인식이 숨어있다.

  프로이트가 인간 심리의 원리를 다소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보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소망하는 완벽한 행복, 기대한 것과 결과물의 온전한 일치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것을 항상 가질 수만은 없는 취약함을 안고 살아갈아야 할 우리의 자세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저 상황에서 ‘안’과 ‘나’가 다른 태도를 취했다면 한 명의 사람이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그렇게 보면 김승옥의 소설은 서울의 비겁한 60년대를 고발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김승옥이 보여준 1960년대의 서울이 외롭고 고독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에서 도망가게 종용하는 곳이었다면, 지금 2010년대의 서울은 어떠한 장소인가? 여전히 나약한 인간 본성을 가지고, 수없이 일어나는 비극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는 핑계를 대며 비겁하게 도망가고 회피하는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면, 서울을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에게 제각각 ‘안’과 ‘나’와 같은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Ⅳ. 참고문헌

 

김승옥, 『무진기행』, 일신서적출판사, 2007

송준호,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29집』, 2006

Freud Sigmund 지그문트 프로이트, 윤희기 옮김, 『프로이트 전집 13 무의식에 관하여』, 1997

Freud Sigmund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석희 옮김, 『프로이트 전집 15 문명 속의 불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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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벽 (반양장)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4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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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과제용으로 제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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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사회, 개인에 대한 깊은 고민을 바탕으로 나온 문학적 결실 -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읽고

 

 

  필자는 이청준의「소문의 벽」을 한 문장, 두 문장 읽으면서 70년대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소설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이 소설은 전형적으로 매우 잘 쓰인 중편소설이다. 처음에는 정체불명의 상태로서 읽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한다. 중반에서는 진상을 밝힘으로써 전반부에서 깔아놓은 여러 고민들을 심화시킨다. 결말은 미해결 상태로 마무리 지어지며 여운을 남긴다. 완급이 잘 조절되어있고, 읽는 중간에 지루할 틈이 없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흥미의 면에서만 성공한 작품은 아니다. 작품 전반에서 형상화되어 있는 주제의식 역시 무척이나 흥미롭다.

 「소문의 벽」은 잡지에서 일하는 '나'를 중심으로, '나'가 우연찮게 기이한 인물인 '박준'과 조우하여 그의 사정을 알게 되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박준'은 맨 처음 정신병원에 들어갔을 때는 실제로 정신이상자가 아니었지만, 정신이상자인 척 한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강한 열망을 거세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준'이 지쳐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이처럼 무엇인가를 반복적으로 말하고 싶어 하는 열망은 모든 예술가들의 기본 정신이다. 만약 건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경험들에도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 예술이 굳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의 가뭄 같던 심장에 단비가 내려 그 굳은 땅이 촉촉해질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박준'과 같은 섬세한 영혼에게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일촉즉발의 상황이 큰 충격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그 충격을 계속 마음에 되새기고, 골수까지 세뇌하여 자신의 입과 손에서 그 잔재들을 흘려왔다.

  그의 연약함은 무엇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좌냐 우냐를 골라서 대답하라고 윽박질렀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 그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그 어떤 진술조차 대답하기도 전에 이미 혐의 받고, 유죄선고 받은 채 기다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박준'은 도망쳐 나올 수 없는 그 공포 속에서 용의자로 질식하고 있었고, 그 모든 의식에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병원의 의사 역시 그의 진술을 딱지붙이고, 하나의 길로 몰아갔다는 점에서 그가 도망치고자 했던 정신검열의 억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열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도처에 있다. 예술가로서 그가 쏟아낸 진술의 노력은 같은 문학계 안에서도 검열 받는다. 개인적이고 사변적으로만 보인다면서 ‘박준’의 글을 받아들이지 않은 '안형' 역시 일종의 검열권력으로 작용한다. '안형'은 자기 자신의 경우에는 양호하다며, 그저 생각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나 사익을 위해 편집을 하는 경우도 있음을 '나'에게 주지시킨다. 하지만 사회적인 요구를 전면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사회의 양심을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박준'의 소설을 자격이 없다고 단정 짓는 '안형' 역시 여전히 하나의 검열로 작용한다. 이러한 ‘안형’에 대한 '나'의 내면적 반발은 예술의 형식이라는 문제에서 작가 이청준이 예술의 자유로움을 갈망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발화된 말이 갖은 검열에 걸리는 것은 숙명적일지 모른다. 필자는 작가 이청준이 왜 이 단편의 이름을 「소문의 벽」이라고 지은 것인지 고민했다. 어떤 말이든 입으로 나가면 다 소문이 되어버리기에 작품을 통해서 한 말만이 진정한 대화가 된다는 '박준'과의 인터뷰 내용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모든 말들은 검열을 통해 비뚤어지고 왜곡된다. 아무리 진의를 말하려 한다 해도, 진의와는 상관없는 다른 현실의 압력들에 의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 소문이 된다. 웅성거리는 그 말들은 참이지도 않고 오히려 소문으로만 나돌아 다니며 진짜를 가리고, 위선으로 위력을 발휘한다.

  이 왜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필자는 왜곡이 생기는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언어는 원래 실제를 반영하지 않고 굴절한다. 하지만 이청준은 '나'의 입을 빌어 그 시대의 암울함을 강조한다. 그는 소설에서 '박준'이 받은 전짓불빛 비슷한 것이라도 안 받아본 사람은 없지만, 그 강도가 더함에 따라 사람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은 더 커진다고 말한다. 이렇게 강도 높은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압력 속에서 꿋꿋이 자기진술을 펼칠 수 있을까? 그 시대 같이 고통스러운 시절에 손쉽게 글을 쓰는 이들은 자신이 감당해내야 할 고통의 몫이 없기 때문에 수준이 시원치 않으리라고 '나'의 입을 빌어 이청준은 그 시대를 진단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또한 단순히 당시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민족 간 상잔의 비극에서 발생한 상처도 안은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때였다. 부지기수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판국에, 우와 좌 중 하나를 눈 가리고 선택해야 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극도로 피곤한 검열의 철저한 희생자들이었다. 그 지옥 같던 시간이 지난 6,70년대의 현실에서조차 피해자들은 그 지독한 상처를 위로 받을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감정적 이해보다는 과학과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이름의 권위가 상처자리를 지져놓았다. 민족상잔의 시대는 가고, 새로이 부여받은 권위가 다른 사람을 제 멋대로 진찰했다.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 확신은 '박준'과 같은 사람들을 실험실의 하얀 쥐 다루듯 하였고, 결국 실패가 된 실험은 그를 희생양 삼은 것과는 별개로 결국 나중에 어떤 식이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뻔뻔스러운 변명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 의사의 무책임한 태도에 ‘나’가 깊은 환멸을 느낀 것도 의사의 태도가 그 당시 사회지도층들이 자신들의 권위주의에서 발생한 민간인의 피해나 민주주의의 후퇴를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충 눙친 것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있어 가장 치열한 검열이자, 가장 무서운 고민은 그처럼 힘든 시대에서 그들이 취해야 할 진정한 의무가 무엇이냐는 문제다. 자신만이 꿈꾸는 세계를 유아적으로 몰입할 것인지,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밝히고 싸우기 위해 문학과 예술을 그 발판으로 삼을지의 문제는 쉽지 않은 이야기다. 이청준은 '박준'의 이야기를 통해 단순한 이분법을 경계하고, 인간이 발화로 삼는 모든 개인적인 이야기에는 결국 인간 사회의 현실이 녹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다른 이름의 검열이 되어 형편없는 시세 속에서 무의미하게 굴러가는 잡지에 대한 회의로 일을 그만 두는 '나'의 모습을 통해, 현실이란 낙인으로 예술을 검열하는 당대의 현실도 꼬집었다.

  이렇게 보면 「소문의 벽」은, 단순히 소통에 실패한 한 광적인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으로 갈수록 예술가의 관점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설이다. 그 과정에서의 흥미유발도 잃지 않고, 주제의식도 놓치지 않은 이 훌륭한 중편이 탄생하기까지 작가 이청준이 자신이 몸담은 예술이라는 길과,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개인으로서의 접점을 얼마나 치열히 고민하고 형상화해냈는지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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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수업 시간에 대학 레포트로 낸 것인데, 기본적으로 헛소리 SF라는 게 슬프다. 

  하지만 글은 소통되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망망대해를 향해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와인병에 담아 띄어보낸다는 심정으로 올려본다.

 



기계새로운 종족

   

 

◎ 서론

 

 

기계는 대체 인간에게 무엇일까?

 

 

  10년 전쯤 과학과 관련된 잡지 (아마 과학 동아였던 것 같다)에서 미래에 사람들에게 선을 보이게 될 기계라는 제목으로 기계들을 소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기에는 아이보라는 이름의 강아지 기계도 있었고, 집사처럼 시중을 들어주는 기계도 있었고, 분화구 같은 위험한 곳에 대신 가서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하는 기계들도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며 강아지 기계인 아이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이보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 때 당시에는 아이보가 국내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때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대체용품으로 다른 기계 강아지 로봇을 사다 주었다. 그 강아지 로봇은 아이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저급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반응도 시답지 않았다. 나는 금방 그 강아지와 놀다 질려버렸다. 그리고 그 강아지는 잊혀졌다. 이후 나는 진짜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고 지금은 고양이와 함께 산다. 진짜 강아지와 진짜 고양이, 생명체들은 기계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반응을 보인다. 고양이는 나에게 진짜로 성을 내고, 진짜로 말썽을 부리며, 나를 할퀴기도 하고,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며 “아 정말 기계와 생명체의 차이는 크구나.”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만약 기술이 발전해서 로봇이 진짜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반응하고 사고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때 과연 진짜 고양이와 로봇 고양이에게 무슨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지금의 고양이를 위시한 생명체들을 그 내부 구조와 움직임을 작동하게 하는 기술력이 현재 인류가 기계를 만들어내는 기술력보다 단순히 훨씬 높은 성질의 것이라고 본다면, 언젠가 인간이 그 기술력을 따라가게 되었을 때 생명체와 기계의 차이란 것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감정, 생각의 작동원리조차 규명할 수 있게 되는 그 날이 온다면 아마 인간은 스스로들을 분명히 정의 내려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 본론

 

 

1. 탄생

 


  새로운 종이 나를 창조자로, 그들의 기원으로 축복할 터였다. 행복하고 우수한 수많은 생명이 그로 인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아버지도 나만큼 자식들에게 완벽하게 감사 받을 자격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계속해보니,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나중에 가서는 죽어서 부패한 시체도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 프랑켄슈타인, 메리.W.셸리, 열린책들, p77.


  애초에, 인간이 기계를 만든 이유는 편리함을 위해서였다. 최초의 기계는 제분기였다.(*네이버 백과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0583&cid=40942&categoryId=32351

기계는 인간이 원래 사용하던 도구에서 더 나아가 에너지가 가미된 종류의 도구였다. 이때까지의 도구란 개념이 인간의 에너지를 통해 도구로서의 기능을 하였다면 기계란 인간이 설치한 시스템에 따라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받아 움직이는 도구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꼭 기계의 성질을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구 자체가 인간 생명체의 부분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을 우리는 프로스테시스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내 안경!”

  새끼돼지는 웅크리고 기어가서 바위 사이를 더듬어 찾았다. 그러나 먼저 그곳에 당도한 사이먼이 안경을 대신 찾아 주었다. 여러 가지 격정이 무서운 날갯짓을 하며 산정에 서있는 사이먼 주위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한쪽이 깨어졌어.”

  새끼돼지는 안경을 움켜잡고 다시 썼다. 그는 악의에 찬 눈으로 잭을 노려보았다.

  “난 안경을 써야 보여. 이제 난 눈이 하나밖에 없는 거야. 두고 봐.”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문예출판사, p109.


  인간이 쏟는 에너지가 투사되는 모든 존재들은 인간 신체의 부분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기술력이라는 능력 측면에서 또 하나의 성질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아이언맨, 배트맨 같은 영웅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의 능력이 거짓되었다거나 혹은 저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은 초능력자로서 자신의 순수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기술력의 발현과 많은 도구들 역시 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성격 중 하나로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성경 중 창세기 1장

 

  인간은 자신들의 기술력, 혹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류만의 특성이라 본다. 또한 그것이 자신들을 다른 종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주는 어떠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러한 능력은 다른 생물들, 예를 들어 까마귀를 위시한 조류나 다른 영장류들에게서 발견된 주변 사물을 사용하는 능력이라는 면을 고려하면 꼭 인간만의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종에서 보이는 기술력이나 도구 사용 능력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술력의 월등함은 이때까지의 인간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음도 역시 사실이다. 베이컨을 위시한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의 정복이 인간의 삶을 더욱 결실에 차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우월한 기술력은 이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신체와 신체가 아닌 부분의 차이의 구분을 어렵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

  어떤 식으로 보면 오히려 우리의 원래의 신체가 아닌 도구들이 더 우월하게 우리의 신체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비신체적 도구들을 자신의 기능을 대신 해주는 대체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을 인격과 관련된 존재로 보지는 않는다. 그것들을 인간의 신체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다면, 여전히 그러한 도구들은 우리의 의지가 없이는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기계들은 어떠한가? 기계들의 제작 후의 과정은 성장에서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우선 이야기를 미루겠다. 그렇다면 기계의 탄생에 한 번 집중해보자.

  쓴 것처럼 기계 역시 도구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편리함에 봉사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나 기계는 인류의 편리함에 도구가 봉사하는 것과는 다른 식이다. 그들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여전히 자신들만의 작동 원리를 가지고 있고, 에너지가 공급된다면 스스로 작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쯤에서 인간과 기계의 차이에 대해 냉소하려는 나의 논의를 지적하기 위해 혹자가 이렇게 지적할 수도 있겠다. 기계는 TURN ON 버튼이 눌려지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작동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주장에 이렇게 말하겠다. 우리 역시 TURN ON 버튼이 눌려지지 않으면 스스로의 작동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TURN ON 버튼이 무엇인지의 소소한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생명체의 TURN ON 버튼을 누르는 기제를 나는 성욕에 관련한 유전적 정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만약 TURN ON 버튼을 누르는 기계를 만든다면 기계들은 원칙적으로 스스로들을 재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인류처럼 말이다.

  논의로 돌아가면, 인류는 편리함을 위해 우리가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받아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이러하다. 인간이 편리함을 위해 기계를 만들었다는 것까지는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 자급자족하는 체계는 확실히 우리의 에너지를 받아쓰지 않는다는 효율성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효율성이 오히려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일으켰다. 그것은 기계와 우리가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로부터 독립되어, 그에게 낯설게 실존하며, 그에게 대립하는 자립적 힘으로 된다는 것, 즉 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낯설게 대립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칼 맑스 프리디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김세균 감수, 박종철 출판사 중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부분의 p74.

 

  따로 떼어놓고 본 기계에게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알면 알수록 기계들이 갖고 있는 자급자족의 시스템이 우리의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아프로디테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처럼 인류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대상을 점점 더 꼼꼼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자신들과 같은 기능을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맨 처음에 인류가 대체 왜 인간과 비슷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 기계에 돈을 투입하는지의 정확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럴 필요성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자신들의 초기 혹은 부분적인 작동원리를 갖고 있는 대상을 통해 자기 자신들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라면? 그런 이유라면 인간이 왜 그것을 궁금해 하는지 이상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원래 모든 것을 궁금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단순히 작동원리의 설명을 위해서 기계를 만들려고 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순수한 의도이다. 그러나 사이보그를 위시한 기계들을 만들 때, 인간이 의도한 것은 신의 흉내였을 수도 있다.

  단순히 인간이 자기 자신들의 탄생 원리를 탐구하다가 원리를 우발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흉내 내게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목적을 품고 이때껏 신의 영역이라 생각한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무신론자로서 나는 그러한 침범을 전혀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물을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발터 벤야민 선집 중 2권), 발터 벤야민, 도서출판 길

    

  인간은 자신들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이것이 자신들의 기술력을 자부심 넘치게 믿는 까닭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인간들은 기계라는 흔히 말해지는 모사품들로 인간의 죽음이라는 일회적인 이벤트를 뛰어넘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경향은 비단 기계나 사이보그만이 아니라 기술복제시대에서 만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향의 절정 부분이 바로 영화 아일랜드나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복제인간 같은 존재들에 관한 고찰이다. 그들은 제작자들이 인간의 수많은 작동 원리를 프로그램화 하여 신체 대용인 기계라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삽입된 존재들이다. 그들의 탄생 자체가 바로 신이 우리를 탄생시킨 원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인간을 더 많이 흉내를 내면 낼수록 기계는 단순한 도구의 존재에서 그 이상의 것으로 발전한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의 기술력으로 픽션에서의 복제인간과 같은 탄생을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술은 언제나 시간에 따라 진일보했다. 나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의 욕구가 분명 그러한 미래를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도 인간들은 자신들처럼 웃는 기계를 만들며 좋아한다. 자신들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형상과 다를 바 없는 기계를 만들며 좋아할 날 역시 멀긴 하겠지만 올 것이다.

 

 

2. 성장

 

 

  기계들의 탄생이 인간의 도구에 대한 필요와 작동원리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창조자 모방에서 생겼다면 탄생 그 이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부분은 예언적, 혹은 픽션의 성격이 섞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가 발명한 기계들은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인 적은 없기 때문이다.

  가상의 상상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기계의 탄생 이후 기계 자체가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인 적은 없어도 기계가 우리에게 예상치 않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직 현대 시대의 기계들은 말도 하지 못하는 영아기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계적이고, 예상을 어긋나지 않는 반응들을 보이는 단계이다. 그런데 다른 말로 지금의 기계의 상황을 영아기의 단계로 본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기계들의 상황도, 기계 자체도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기계가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이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 우선 이야기할 것은 기계의 탄생 이후 기계가 부모인 인간에게 더 영향을 많이 받았느냐 아니면 부모인 인간이 기계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았느냐를 따졌을 때 아직은 부모인 인간이 기계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계의 탄생 이후 우리는 시대의 많은 변화를 체감해야 했다. 기계에 대한 반발은 러다이트 운동(*네이버 지식사전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3543&mobile&cid=47323&categoryId=47323)과 같은 대규모의 사회운동으로도 나타났다. 기계는 태어난 직후부터 시대 흐름에 휩쓸려 착취의 주체로 오인받기도 하였고 (나는 오인이라고 생각한다. 기계의 프로그램은 말했듯이 영아기의 단계이고 그들은 스스로 판단을 하기엔 아직 부족한 상태다. 현 기계의 상태는 오히려 기존의 도구와 비슷하게 인간의 의지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인간의 인식 체계를 아예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이야기해볼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지 몰라도 가상의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기계들이 말을 하기 시작할 그 때를 상상하는 것이 단순한 공상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면으로 보면 예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In the beginning there was man and for a time it was good. But humanity called civil society, soon fell victim to vanity and corruption. Then man made the machine in his own likeness. Thus did man became the architect of his own demise. But for a time, it was good.

 -애니매트릭스Animatrix, 워쇼스키 남매 감독, 제2의 르네상스 1부 The second renaissance part 1 of 2

 

  워쇼스키 감독의 애니매트릭스에서는 가상의 상상을 통해 미래사회에서의 기계가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반항할 수 있는지 관해 보여준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기계는 인간에게 종족의 개념으로도 부속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며, 사회 구성원의 위치에서 일종의 하층민으로 몰락해있다. 그들이 맡는 역할은 인간들이 맡기 싫어하는 역할들이다. 이러한 상상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결국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필요로 했기에 태어난 기계들이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서 대우받기는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란 종족은 심지어 같은 종족의 개체들 역시 수단 혹은 타자로 바라보는 순간 어떤 식으로 배척하는지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이야기했으므로 가감할 말은 없다. 인간의 특성, 혹은 생명체의 배척이라는 특성상 기계들은 속할 곳이 없는 사회의 쓰레기 처리담당이 될 것이다. 기계들은 자연 시스템 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종족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자연적 시스템에 조화될 수도 없다. 애니매트릭스의 허구적 상상은 기본적으로 기계가 자신의 시스템을 받아들여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그에 따라 도구로 존재하기를 거부할 때의 저항을 표현한다.

  이러한 상상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냐의 문제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애니매트릭스는 수많은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는데, 그 사건들의 주요한 지점들은 모두 인권 유린에서 생각을 따온 부분들이 있다.   

  기계가 과연 저 정도로 성장하느냐의 문제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이미 다루어지는 모습들이 이미 인간 사회 속에서도 존재하며, 그에 따라 기계가 결국 우월한 기술력으로 진일보하여 인간의 형상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기계가 인간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기계를 향한 인간의 대우라는 측면에서 조명될 것임을 말한다. 인간은 이렇게 기계라는 고민을 통해서도 인권적인 문제에서도 다시 한 번 생각을 점검할 수 있다.

  기계의 성장이 과연 인간 종족을 위시한 생명체의 작동원리를 따라올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질문도 중요하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미시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양자역학, 상위의 차원을 점령한 고전역학의 영역의 모든 원리들은 발생의 원리가 아니라 발생 이후의 현상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분명 기계에게 인간만큼의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똑같은 원리로써, 철학적 사유를 어떤 식으로든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분명 걸음마의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역시 그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맨 처음에 할 때는 걸음마의 수준이다.


 











Caution wrong robot! Caution wrong robot!

 -월E, 앤드류 스탠튼 감독, 픽사, 2008

  

  영화 월-E의 주인공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들이다. 주인공 월-E는 처음에는 똑같이 도구적 존재로 태어난 기계였으나 수많은 시간이 흐른 이후 괴이하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컴퓨터에 심어놓은 내부논리의 충돌로 영향을 받은 인공지능 오토 (함선의 반란자)에 대해서도 주목할 점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인간과 유사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일인가? 문제는 그 누구도 쉽게 아니요,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불가능할 거라고 지적한 사람들은 중국인 방 논증과 같은 사고 실험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기계의 인공 지능이 결국 인간의 수준을 못 따라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문제는 거꾸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인간 역시 중국인 방(*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C%A4%91%EA%B5%AD%EC%96%B4_%EB%B0%A9)과 같은 시스템으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제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반론을 제기하면 이것은 인간의 고등한 시스템을 오히려 기계에 적용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기계에 의해서 적용될 때 변수를 막지 못한다면 새로운 반응을 생성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주장을 도출하게 된다.

 

 

3. 결혼

 

 

  기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생명체적인 특성에 관해 이야기해 볼 때, 성性이라는 측면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셀 뒤샹, 독신 남성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 대형 유리, 1915>


 












  <대형 유리>의 위쪽에는 나체의 신부가 자신의 옷을 계속 벗고 있으며 아랫부분에는 헐렁한 재킷과 제복으로 묘사된 작고 불쌍한 총각들이 위쪽에 있는 소녀에게 자신들의 좌절감을 내보이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대형 유리>는 하나의 자유로운 기계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무례한 기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무관심에 대하여 유서를 남긴 애처로운 기계이기도 한 것이다. 

 -새로움의 충격, 로버트 휴즈, 미진사

    

  기계와 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변태적이다. 그것은 이러한 행위의 음란성을 떠나 무생물에게 생명체의 성질을 부여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부적절함과 비정상성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을 모방하기에 가장 윤리적인 문제로서 나타나며 그렇기에 사람들을 자극하기 가장 쉬운 요소는 분명 기계와 섹슈얼함일 것이다.

  기계가 인간의 성을 모방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준에서 우스꽝스럽거나 괴기해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변태성’ 때문에 기계가 가지고 있는 운동성과 섹스의 운동성을 대비해보는 상상은 어떻게 보면 낯이 뜨거울 수도 있다.  

  제시한 그림은 좌절된 인간의 욕구 표현과 현대 사회 속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기계와 성을 끌어왔지만, 그 둘이 어떻게 같은 식으로 묶일 수 있었는지를 고찰해보면 서술한 것과 같이 기계의 운동성과 섹스의 운동성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기계의 움직임과 인간의 성행위의 작동원리 역시 다른 모든 인간과 기계의 작동원리처럼 유사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육체적인 작동원리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플라토닉한 사랑의 원리로서 기계의 성적 측면을 바라보자. 이러한 측면 역시 호소력이 강하며 동시에 윤리적으로도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앞에서 나왔던 영화 월-E의 주인공들 역시 서로를 사랑한다. 그 둘은 기계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관해서 영화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조명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인데, 기계에 그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주인공들이 기계이지만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행위를 벗어나 다른 주체에게도 성립될 때, 사랑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되고 다른 종족들을 묶어주기까지 한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얻고자 했던 것.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 만큼 너무나도 소중한 것, 그것이 자유지요.

-바이센테니얼 맨,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2000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주인공인 로봇 앤드류는 조립 과정 중 기술자의 실수로 (마요네즈가 떨어지는 바람에) 인간의 특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앤드류는 인간의 특성, 특히 지능과 같은 측면을 부분적으로 가졌을 뿐, 여전히 기계이며 불사의 몸이다. 그러던 중 그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사랑이라는 애착의 감정이 기계인 그를 기계에서 탈피하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과 애정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는 어떤 계산과 실질적 이익이라도 감정이라는 추상성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구로 태어난 기계가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고, 그 부분과 관련해 수많은 인간들은 기계가 그것을 흉내를 낼 수 없는 한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랑을 하는 기계는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 그 순간 자신의 종족의 특성을 벗어난 행위를 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로봇인 앤드류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인간이 되고 싶어 인간을 흉내를 내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대체 그를 기계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앤드류가 자신의 기계라는 정체성을 포기하고자 하는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라는 점은 그가 가사 로봇이라는 수단으로 만들어졌지만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시사한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을 남겼다. 기계와 인간 사이에 차이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기계 역시 목적으로 대우해야 할 존재가 될 것이고, 앤드류 역시 자신을 그렇게 대우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라는 계기를 통해 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찰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자유라는 문제에까지도 나아가게 된다.

 

 

4. 죽음

 

 

  사랑에 이어 죽음이라는 부분 역시 인간을 위시한 생명체의 대표적인 성질이다. 기계에게는 죽음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소프트웨어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다른 하드웨어에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그러한 형태의 전환이 가능할 날이 올지 모르겠으나, 현재 죽음의 정의란 신체가 쇠하여 꺼지면 영혼 역시 인간 사회에서 더 이상 발현되지 않는 개념을 말한다.

우리는 기계를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기계는 작동이 멈추거나 고장이 나서 제 기능을 못 다 할 뿐이다.

 

At B1-66ER’s murder trial, the prosecution argued for an owner’s right to destroy property. B1-66ER testified that he simply did not want to die.

Who was to say the machine, endowed with the very spirit of man did not deserve a fair hearing? 

-애니매트릭스, 위와 같은 작품

 

  애니매트릭스의 제 2의 르네상스에서 제일 먼저 인간에게 반기를 둔 로봇 B1-66ER(개체 이름이 아니다.)이 처분대상이 되는데 그 로봇은 자기가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죽고 싶어 하지 않는 기계, 삭제되고 싶어 하지 않는 기계는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비정상적이다. 기계에게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계라는 개념은, 기계가 인간성과 유사해지면 유사해질수록 낯설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결국 픽션에서 파운데이션, 로봇 같은 SF 고전을 쓴 아이작 아시모프에 이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소설 아이, 로봇에서 로봇 3원칙을 내세워 로봇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어 수단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개념을 가지게 되는 것부터가 로봇에게 자의식이 생기는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작 아시모프 그 자신과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픽션의 창작가들은 오히려 로봇 3원칙의 해석 문제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주목한다.

  죽음이야말로 자신의 의식이 상실하는 순간이고,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한 자의식의 존재를 시사한다. 말했듯 기계 문명이 영아기 시대인 현재 시대에 아직 죽거나 제거되기를 피하려는 기계는 존재하지 않다. 그것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계에 관해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준다. 아직 기계가 자의식이나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문제이고, 미래에서는 기계들이 의식과 지능의 수준에서 인간과 유사해질 때부터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입력 회로에 로봇 3원칙 같은 원칙을 세워두는 것 자체가 기계들에게 우리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 인공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그 원칙들 사이에서의 여러 경우의 수를 고민할 것이고, 경우의 수들을 도출해본다면 그 원칙들이 얼마나 다양한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죽음을 피하려는 기계에 관해 고민해 보았지만, 픽션에서는 죽음을 선택하는 기계들도 존재한다. 이미 이야기한 바이센테니얼 맨의 주인공 앤드류 역시 자신이 생각한 인간성과 사랑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어쩌면 기계에게 죽음이란 선택의 영역일 수 있다. 만약 훗날 그들에게 인간 이상의 지능과 의식이 부여된다면 그들은 자신을 인간과 다른 존재로 인식할 것인가 혹은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설 것이고, 그 기로에 선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영원성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와 같은 선택의 문제에도 봉착하게 될 것이다.

 

 

◎ 결론

 

 

  이 글에서 나는 기계들에게 인간성이 부여된다면, 이라는 가정을 픽션과 추측, 현대에 존재하는 양상으로 보이고자 했다. 쓴 것처럼 나는 이러한 가정들이 언젠가는 분명히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와 다르게 기계가 새로운 종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상징이다.

  기계에 대한 고찰은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픽션에서 발달한 기계 문명에 관해 생각할 때 두려움이나 경탄을 가지게 되는 것은 모두 기계를 우리와 연결 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계만을 따로 놓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획 아래에 기계가 우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이나, 기계가 우리의 삶을 이전의 삶보다 훨씬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 모두 인간 중심적이라는 데에서 큰 차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이 품고 있는 것은, 어떠한 다른 가능성이나 존중 받을 수 있는 일말의 씨앗을 품고 있는 대상들이 우리가 우리 아닌 다른 배제된 존재라는 이유로 지나친 공격을 받거나 착취당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계 자체에 관한 문제에서, 모든 것은 기술력과 시간의 문제이다. 기술이 우리와 기계, 생명체와 생명체가 아닌 존재의 개념의 구분을 헷갈리게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날들은 이미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현재에서도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우리 아닌 존재 (그것은 같은 종족이어도 사실 상관없다. 자신이 배제하고 있는 존재라면 무조건 포함이 된다.)를 볼 때 마치 외계의 종족을 만난 것처럼 군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들은 우리와 같은 존재, 혹은 우리가 만들어낸 존재, 적어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과학 현상을 철학적으로 바라 볼 때, 철학이 먼저 있어 과학에 영향을 주었느냐, 아니면 과학이 먼저 있어 철학에 영향을 주었느냐를 따져 묻는 것은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이 아무리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과학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서로 관념적으로도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 관해 열린 마음을 갖고 바라보아야 한다. 열리지 않은 마음으로 보면 애초에 철학과 과학은 서로 공통 지점조차 없어 보이는 영역들이다.

  최종 결론을 내리자면, 내가 주문하는 것은 기계가 새로운 종족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나 상상은 쓸데없다는 말이 얼마나 불필요한 말인지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관련한 기술력의 문제는 앞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규명해갈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를 예측하고, 상상하면서 그러한 측면들을 현재의 우리 삶과 연결시키는 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즉, 과학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기계 담론과 관련해 현재의 인류에게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은, 인류가 스스로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며 그 불분명성 때문에 우리가 믿어왔던 사례들과는 다른 반례가 생길 때 인류 스스로의 정체성 정의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는 만큼,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선택 밖에 존재하지 않다고 바라본다. 하나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며 우리 존재의 부족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다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협하는 대상들을 배척하며 스스로를 그것보다 더 잘 난 존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명백히 나는, 전자의 선택만이 우리를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계가 새로운 종족일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철학적 고민을 던져주는 과학적 담론이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보는 것은 너무 좁은 시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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