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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내가 읽은 책은 이 책의 원작인 A Walk in the Woods이다. 알라딘에는 없네.

LA와 멕시코시티를 거쳐 칸쿤까지 가는 긴 비행여정에서, 그리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캐러비안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이 책을 읽었다. 쾌적하고 시원한 호텔, 그저 야자수 그늘 아래 비치 체어에 누워있으면 웨이터가 수시로 찾아와 필요한 것을 묻고는 피나 콜라다니 마가리타니 하는 시원하고 달콤한 음료를 가져다 주는 이국의 해변가에서 문명과 단절되어 의식주를 모두 짊어지고 눈보라를 헤치고, 진흙을 뒤집어 쓰고, 탈진해가며 산을 오르는 빌과 카츠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는 남달랐다.

라임을 넣은 멕시코 맥주를 마시며 나른하게 누워 왜 문명이 주는이렇게 커다란 즐거움을 기꺼이 희생해가며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으로 들어갈까, 그곳에는 게다가 추위 혹은 더위, 무서운 곤충과 곰도 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이 귀여운 두 주인공의 '산사나이되기' 도전의 에피소드들은 너무나 웃겨서 계속 피식피식 웃으면서. 진짜 이유를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정말 미스테리한 것은 그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나 역시 다시 지리산을 올라가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나 강렬하게 피어올랐다는 것이다. 비좁은 산장에서의 새우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드는 단순한 삶,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작은 꽃들, 봉우리 꼭대기에서 맞는 서늘한 산바람 같은 것들이 너무 그리웠다.

나는 다시 찜통같은 더위가 숨막히는 도시로 돌아왔다. 여름이 가기 전에, 혹은 가을이 가기 전에 지리산에 꼭 한 번 가야겠다.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후회하며 벌써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야지. 이렇게 숲이 나를 부르고 있을 때 얼른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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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 (완전판) -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5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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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의 추리소설 독서의 역사는 매우 짧고 좁다. 어린 시절에는 추리소설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와 공포-남들은 스릴이라고 말하는-가 싫어서 거의 읽지 않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추리소설 독서가 어른스럽지 못한 일이라는 어설픈 편견 탓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해피밀 장난감에 목숨을 거는 내가 새삼 어른스러움을 논한다는 것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 얘기인데다가 말끔한 장정판으로 만들어져 전집의 이름을 달고 서점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최근의 추리소설들을 보고있자니 문득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마구마구 피어올랐다.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보았으나 워낙 아는 것은 없는지라 고민하다가 여성작가인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부터 읽어보자고 결심하고 책을 골랐다. 그 첫 권이 "오리엔탈 특급 살인" 이었으며 - 순전히 오리엔탈 특급열차에 대한 막연한 로망 때문에- 이 책은 그의 전집 중에서 내가 읽은 세번째 책이었다.

이 소설의 시점은 매우 파격적이다. 일인칭 시점을 사용했다. 그런데 화자가 푸아로도 아니고 마플 부인도 아니다. 그러면 새로운 탐정인가? 그런데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조금 지나면 화자의 옆집네서 호박을 기르며 사는 전직 미용사인 것 같은 외지인이 푸아로였음이 밝혀진다. 내가 읽어본 몇 안되는 추리소설들은 모두 탐정의 일인칭 시점이거나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는데 이건 새로우며 당혹스럽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사건 수사는 진행되고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에게 골고루 용의자의 가능성을 한 번씩 부여하며 수사망이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더 알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 마지막 몇 페이지를 남겨두고 정말 놀랍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대단한 반전이 나타난다.

멋진 추리소설이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주인공 탐정의 놀라운 추리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보여준다. 꼼꼼한 사건 전개와 세밀한 풍경 및 인물 묘사, 인물 심리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 탄탄한 플롯을 바탕으로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굴까'하는 긴장감 외에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특히 이 소설은 새로운 시점을 사용하였으나, 다 읽고 난 후에는 이런 시점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이 소설이 얼마나 밋밋해졌을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여름이다. 공포영화와 추리소설의 계절. 이번 여름에는 한 권씩 야금야금 추리소설을 읽으며 더 똑똑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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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ce 2004-06-2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더 똑똑해지겠다고? ㅎㅎ
 
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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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너무나 즐거웠다. 주저없이 올해 읽은 최고의 책으로 선정해버렸을 만큼 즐거웠다.

나도 앤 패디먼 못지않은 책벌레, 문자중독이다. 어디에서건 혼자 있는데 읽을 거리가 없으면 불안하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러닝 머신과 스테퍼 위에서, 화장실에서, 어디서든 무엇이라도 읽어야 한다. 카탈로그도 정말 훌륭한 읽을거리이다. 어디론가 이동할 일이 있으면 일단 이동 시간과 거리, 체류 기간을 고려하여 가지고갈 책의 두께와 부피를 결정한다. 새로운 도시로 여행을 가게 되면 일단 나와있는 대부분의 여행 가이드를 섭렵하며 상상 여행을 미리 하고 그 도시에서 태어난 작가의 책, 그 도시에서 집필된 책을 조사하여 가방에 먼저 자리를 잡아두어야 한다.

괴팍하고 까다로운 면도 뒤지지 않아서 처음 읽을 때에는 줄거리와 문체를 음미하는데 집중하지만 두번째, 세번째가 될수록 이 잡듯 오자, 탈자, 띄어쓰기, 문법적 오류, 역사적 오류, 과학적 오류 등을 잡아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앤 보다는 책을 덜 육체적으로 사랑한다는 점이다. 화장실에서도 책을 읽곤 하니 책에 물이 좀 묻거나 하는 정도는 괜찮지만 이 다음에 내 아이가 나의 책을 입과 침으로 음미하는 것을 보면서 그저 웃을 수 있을만큼은 못 된다. 면지에 책을 살 때의 느낌과 짧은 소감을 적는 것을 즐기지만 까탈스럽게도 책의 겉표지와 띠를 버리지 못한다.- 이것은 아마 우리나라책에서만 특징적으로 많이 보이는 현상같다. 튼튼한 하드커버 표지가 있음에도 조잡한 디자인의 겉표지가 다시 씌워져있고 모모 문학상 수상, 올해 가장 읽을 만한 책, 따위의 쓸데없는 문구가 요란하게 써있는 띠가 다시 한 겹 둘러져있다. 이것들이 책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 빌려가서 이걸 벗긴 채 돌려주면 불같이 화를 내곤 한다. 책장 귀퉁이를 살짝 접어놓는 것은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는 것은 - 오늘도 나는 엄마와 싸운다. 엄마는 주장한다. 50년 습관을 어찌 하루아침에 바꾸라고 하느냐- 죄악으로 간주한다.

나도 더 세월이 흘러 내 아이가 열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내 나이 그 때에 면지에 '우리 딸, 치약 뚜껑 잘 닫고 다니면 더 예쁠텐데'라고 써서 선물해주신 <해저나라>를 읽어주며 목욕탕 용품의 깨끗하고 올바른 사용법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제 마음에 드는 번역본을 만났을 때 늘 그러했듯 - 읽을 확신이 없더라도 멋진 작품은 원작을 함께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또 다른 병이다 - 이미 느껴지는 단어와 문장의 수준이 완독에의 확신을 더욱 떨어뜨리긴 하지만 이 책의 원작 'Ex libris'을 사러 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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