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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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앞으로 비비언 고닉 작품은 무조건 찾아 읽어야겠는데. 이 책,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다 읽자마자 든 생각이다. 비비언 고닉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건 이번이 두번째다. 가장 먼저 소개된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한 회고록이자 애증의 모녀 관계를 다룬 <사나운 애착>. 괜히 트라우마를 건드릴까봐 읽기를 주저했었던 책인데 조만간 읽어야겠다 싶다.



고닉의 글이 가진 특별함은 주변과 자기 자신을 향한 호기심과 세심한 관찰력에 있다. 뉴욕의 거리를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몇 년간 호텔에서 일하며 만났던 이들에 대해서, 대학에서 만난 동료들에 대해서, 가장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저자는 애정과 관심이 아니었다면 잡아내기 어려웠을 것들을, 이를테면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흐름 같은 것들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이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외로움, 수치심, 후회 등등 저자의 감정들 또한 숨김없이 드러나있다. ‘내가 하고 있던 이야기는 언제나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165p)는 말처럼,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는 결국 독자의 이야기와도 닿아있다. 우리 안에도 같은 감정들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타인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만을 본다.



가장 좋았던 글은 맨 마지막에 실린 편지 쓰기에 대한 글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언제든 전화를 걸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고독하게 쓰기에 몰입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내면의 삶‘이 사라져간다는 이야기. 이 책의 출간년도(1996)로부터 26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을 보면 몰입의 시간이 더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더 늘어나지는 않은 것 같다. 실시간 채팅과 SNS의 시대-영상, 이미지와 더불어 다시금 문자의 시대라고도 볼 수 있는-의 특징은 즉각적이고 즉흥적이라는데 있으니, 심사숙고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저자는 모두가 편지를 쓰지 않는 시대에 내면의 고요함에 다가가려면 분투해야한다고 일갈한다. 일기든 뭐든 써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넷플릭스를 선택해버리곤 하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마치 소란스러움에 대한 반작용처럼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해 그 안애서 맴도는 것들을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일‘(237P)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문장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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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된다는 것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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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아하는 작가 니콜 크라우스의 단편집.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문장에 있다. 크라우스가 자아내는 문장들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는 내면의 미세한 균열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기어이 문장 하나하나가 정체성과 삶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닿도록 직조해낸다. 작중 인물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들 모두 불가해하고 난해한 삶의 그물 속에서 기어이 사랑을 찾아내도록.



열 편의 단편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에르샤디를 보다>. 영화 <체리향기>에서 미스터 바디를 연기한 바로 그 에르샤디 맞다. 무용수인 주인공은 도쿄의 어느 정원에서 에르샤디를 보게 된다. 어쩌면 에르샤디의 모습으로 눈 앞에 현현한 자기 자신을.



이 작품은 영화 <체리향기>와 배우 에르샤디, 주인공과 친구 로미의 이야기가 다층적으로 펼쳐진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다. 또,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에르샤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 주인공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작품의 말미에 주인공은 ‘에르샤디로부터 무언가를 포착하고 싶은 욕망. 현실이 나를 위해 팽창했고 다른 세상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다고 느끼고 싶은 욕망 때문에 내 상태를 더 빨리 자각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결국 외부 현실의 징후들은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인 셈이다. 이 과정이 영화 <체리향기>의 줄거리를 빌어 꽤 아름답게 드러난다.



다음으로 좋았던 단편은 <스위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폭력적 관계에 자신을 내맡기고 벼랑 끝까지 다녀오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소녀는 ‘자신을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며 어둠 혹은 두려움과 맞붙어 이긴 사람의 품위‘를 가졌다.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기어이 벼랑 끝으로 스스로를 내모는 소녀. 이런 류의 이야기는 거부하는 것이 더 힘들다.



니콜 크라우스의 전작들로는 <사랑의 역사>, <위대한 집>, <어두운 숲>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단연 <어두운 숲>. 그렇지만 아직 그의 작품들을 만나보지 않은 운 좋은 독자라면 최신작이자 첫 단편집인 이 책 <남자가 된다는 것>으로 가볍게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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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 어렴풋이
신유진 지음 / 시간의흐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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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빌딩 사무실에서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정경은 실컷 보지만 정작 내 마음의 창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요즘. 틈이 날 때마다 이 책을 들고 카페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창문 너머 어렴풋이>.

보통 책을 읽으면 전반적인 분위기나 흐름으로 감상이 정리되곤 하는데, 유독 특정한 문장이나 챕터가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다. 이 책에서는 ‘그 여름의 끝‘이라는 글을 여러 번 읽었다. 어느 여름의 끝에 십 대 후반을 함께 보낸 친구와 재회하는 이야기. 이 글은 고여 있는 시간과 새롭게 흐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것들과, 우정과, 다정함이 가득 흘러서 마치 이 글의 일부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푹 빠져들어 읽었다. 작가님의 글은 다정하다. 유연하기도 하고 강인하기도 하고 조금은 쓸쓸하기도 한 다정함. 그래서 더 좋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랑이 느껴진다. 창을 여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살아가는 일도 결국 사랑의 힘으로. 사랑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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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고수 - 신 변호사의 법조 인사이드 스토리
신주영 지음 / 솔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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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재미있는 법정 에세이라니. 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 어렵고 무겁겠거니 싶겠지만 이 책은 다르다. 판사나 변호사, 의뢰인과 나눈 대화와 속마음이 흥미진진하게 쓰여져 있어,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읽어나가게 되는 책이다. (실제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원작 에피소드가 실려있는 책이기도 하다. 비교하며 읽어보면 재미 2배.) 사실 법은 재미없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것이다. 결국 법정사건은 사람 사이의 일이고, 재판도 사람의 일이다. 신주영 변호사의 <법정의 고수>는 법정에 선 변호사와 판사의 마음을 중심으로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비교적 일상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드라마화되기도한 제2자유로 도로구역결정 취소소송 사건이다. 마을 주민들이 행정부를 상대로 건 소송인데, 책 속 상당부분이 이 사건에 할애되어있다. 이 사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어떻게든 재판의 판도를 바꿔보려는 저자의 치열함과 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쾌한 판결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부분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본래 판단하는 것은 칼로 자르는 것이기에 재판은 아프지만, 정의롭고 합리적인 판결은 당시자들을 속시원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패소하는 경우에도 말이다. 이상하게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거듭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판장에 서는 궁극적인 이유는 마음의 찌꺼기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리고 그건 승소나 패소와는 크게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판사의 마음, 변호사의 마음, 원고와 피고의 마음. 재판장은 법이라는 기준 아래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곳이지만, 수많은 마음이 깃들어있는 곳이기도 한 것 같다.

책의 시작과 끝에는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모두는 어디에 서 있든 선택의 여지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순간 짐의 무게는 가벼워지며 성장하게 된다고. 사건을 수임하느냐 마느냐 선택권이 사실상 없다는 변호사의 경우에도,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 이야기다. 결국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의 인생을 구성하고, 그 사건들 중 일부는 법정에 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사람 살아가는 일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번 개정판을 시작으로 2,3편이 출간 예정이라는 소식이 단비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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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 시대의 강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고민들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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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작가의 신작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비장한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지만, 막상 펼쳐보면 저자의 다정한 통찰이 가득담겨있다.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이 시대를, 어딘가 미친 구석이 있는 인생을 헤쳐나가기 위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기준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점을 짚어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중심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나 - 나의 시선과 태도 말이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의견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절망은 희망이 될 수도 있고, 희망은 절망이 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비관보다는 낙관이 힘이 세다.



책을 읽으며 나도 느껴왔지만 미처 언어화하지는 못했던 것들을 정리된 글로 만날 수 있어 무척 속시원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선택에 대한 이야기. 다양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할지 모르고 딜레마에 빠진다. 무엇을 선택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최상의 선택은? 그러나 선택보다 중요한 건 선택 이후의 태도가 아닐까. 저자의 말처럼 지도 없는 시대를 건너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선택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무엇을 선택했든 그 선택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건 내 태도다. 과거의 선택이 아쉽게 느껴질지라도 과거의 나는 최선이었음을 이해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수밖에 없다.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대의 흐름을 문제로 인식하거나, 그 문제를 나의 문제로 치환하는 식의 사고는 오히려 스스로를 더욱 절망으로 내몰 뿐이다.



아무튼, 전작들에서 그러했듯이 시대적 징후와 타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개인의 삶을 응시하는 저자의 따뜻하고 다정한 시선이 느껴지는 책이다. 비슷한 주제를 가진 사회비평 에세이의 경우 뾰족함을 느낄 때가 많아 섬칫하곤 하는데, 저자의 글은 언제나 나로 하여금 스스로와 주변을 더 깊이 돌아보고 더 정확하게 사랑하게끔 만든다. 배움도 사랑도 모두 느낄 수 있는,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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