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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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의 애독자로서 격하게 읽어보고 싶다. 당장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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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맨 앤드 블랙
다이앤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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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보다 뇌가 먼저 죽어가고 있는 엄마 생각이 납니다. 동전의 양면 같은 삶과 죽음의 세계를 그로데스크하게 그려놓았나봐요.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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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기억 보르헤스 전집 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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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를 처음으로 진득하게 읽었다. “읽다”는 의미에 “이해한다”는 의미가 곁들여져 있다고 본다면 사실 “읽었다”라고 말하기에는 낯 뜨거움을 배제할 수 없다. 보르헤스 글의 첫 느낌은 어렵다, 벅차다가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음미하지 않고, 이해 없이 글자만 읽어내려가는 경우엔 이보다 더 좋은 수면제가 없는 듯하다. 밤늦게 이불 밑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들여다보면서 읽다 졸다 읽다 졸다를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의 글이, 아니 더 정확하게는 글의 분위기가 머리맡에서 둥둥 떠다니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 그렇게 그 힘에 이끌려 뒤죽박죽으로 책을 다 읽었다.

보르헤스의 방을 방문하고 온 느낌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이 방에 문이 수도 없이 있다는 것.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방에 또 다른 문들이 있고, 그 중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문들이 있고 . . . 또 있고. . . 또 있고. . . 미궁 속 같아 어지럽고 답답한데도 호기심이란 놈이 자꾸만 그 문을 열게 만드는 . . . 어쩌면 그것이 보르헤스의 힘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난해하지만, 생살을 씹었을 때 조금씩 배어나오는 쫀득쫀득한 단맛처럼 특이한 맛깔스러움이 있다.

민음사의 보르헤스 전집 5는 단편집 『모래의 책』(1975)과 『셰익스피어의 기억』(1983) 두 권을 묶어서 펴낸 책이다. 보르헤스는 장편소설은 한 번도 쓰지 않고 단편소설만을 썼다고 한다. 이 책에는 17편의 단편과 『모래의 책』에 대한 작가의 후기가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들은 「셰익스피어의 기억」「파란 호랑이들」 「모래의 책」이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에서 헤르만 세르겔이란 화자는 다니엘 토프라는 사람에게서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받는다. 셰익스피어가 인생의 최종 목적지였던 그로서는 “바다를 제공받는 것” 같은 환희를 느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억압과 공포”로 바뀐다. 셰익스피어를 기억할수록 헤르만 세르겔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잃어갔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려움과 함께 내가 모국어를 잊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의 자기 정체성은 기억에 근거하고 있는지라 나는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 . /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모든 사람은 늘어가는 기억의 무게를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기억은 이따금 서로 뒤섞이면서 나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어쨌거나 나의 기억과 또 다른 사람의 기억은 서로 교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 스피노자는 <모든 것은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192) 

결국 그는 아무 데나 전화를 걸어 지적인 음성을 가진 누군가에게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떠나보내고 해방감을 맛본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 해방감일 뿐이다. 이 작품에서 보르헤스가 이야기하는 기억의 문제는 실로 흥미롭다. 사실 화자가 얻게 된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셰익스피어의 생애 전체가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기억하는 기억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를 모조리 기억할 수 없다. 책을 읽었다고 해도 일부만 기억할 수 있다. 기억이란 재봉에는 그렇게 여기저기 빈 땀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백과사전을 구입한다고 해서 그가 모든 행, 모든 단락, 모든 페이지, 모든 삽화를 다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러한 것들 중 어떤 것을 알게 될 가능성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 . / 아무도 한 순간에 자신의 과거 전체를 회상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셰익스피어도 그의 부분적 상속인인 나에게도 그러한 선물은 주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은 종합이 아니다. 그것은 무규정적인 가능성들의 혼돈이다. . . / 마치 우리들의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기억은 그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배척한 어둠의 지역들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셰익스피어의 기억」189)

더 나아가, 보르헤스는 한 번 들어온 기억은 완전히 지울 수 없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었지만, 화자는 새벽이면 또 다른 자가 되어 꿈을 꾼다. 어떤 묘책도 소용이 없다. 이 대목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는, 그 모든 행위들이 어쩌면 다른 누군가의 기억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 . . 그래서 나란 존재에 여러 사람의 기억들이 혼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 . . 그것으로부터 나란 사람이 완성되어 가지 않을까 하는. . . 흠 . . . 더 생각해볼 일이다.

「모래의 책」은 페이지 수가 무한한 어떤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페이지도 첫 페이지나 마지막 페이지가 될 수 없는 무한 분량의 책을 통해 보르헤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한의 수는 그 어떤 수도 받아들인다는 것”(136)인 듯하다. 페이지가 정해져 있다고 해도 모든 책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그 점에서 현대판 괴물의 존재를 통해 인간의 감지 능력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이야기한 「더 많은 것들이 있다」라는 단편과 상통하지 않나 싶다. 

어떤 사물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뜻한다. 흔들의자는 사람의 몸, 관절들과 사지를 연상케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가위는 자르는 행위를. 등 하나, 또는 자동차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야만인은 선교사의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행자들은 선원들이 보는 것과 똑같이 밧줄들을 보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세계를 보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더 많은 것들이 있다」65) 

「파란 호랑이들」은 그 수가 감소하기도 하고 증식하기도 하는 마법의 파란 돌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기 증식하는 돌들은 수학적 질서를 거부한다. 그런데도 화자는 그러한 붕괴 속에서 어떤 질서를 찾으려 애쓴다. 카오스 이론을 적용한 이 이야기에서 재미난 대목은 홀로 있는 돌은 증식되거나 사라져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화자가 획득한 최대의 수는 419이고, 최소의 수는 3이다. 수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수학을 파괴하는 돌의 무게에 짓눌리고 혼돈에 휩싸인 화자는 그는 어느 날 적선을 바라며 손을 내미는 한 거지에게 자신이 가진 파란 돌을 떨어뜨려 준다. “내 적선은 무시무시한 것”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말보다 더 무시무시했던 것은 거지의 답이었다. “나는 당신의 적선이 무엇인지조차 모르오. 그러나 내 것은 무시무시한 것이오. 당신은 낮과 밤, 분별력, 일상적 습관, 그리고 세상을 되찾게 될 거요.” 혼돈보다, 무질서보다 세상에 정해 놓은 룰에 갇히게 될 거라는 의미 같아서 나는 오히려 더 섬뜩했다.

이 세 편의 단편들 외에 20대의 보르헤스와 60대의 보르헤스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타자」, 70대의 보르헤스가 80대의 보르헤스를 만나는 「1983년 8월 25일」, 하룻밤과 아침 나절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사랑과 죽음이라는 삶의 두 가지 본질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은혜의 밤」(풍자적인 제목이다), 사람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이름이 없고, 불필요한 책을 생산해내는 인쇄술이 사라지고, 100세가 되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미래 세계를 그린 「지친 자의 유토피아」도 재미있게 읽었다. 이 작품집에서 내가 두 번을 읽고도 이해를 못한 단편은 「의회」이다. 후기에서 보르헤스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야심작이라고 말했지만, “너무 거대해서 우주, 모든 날들의 총합과 혼동되는 어떤 조직체에 관한 것”이라는 그의 설명에도 나는 이 이야기가 궁극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고 보르헤스의 글이 주는 생각의 여운도 누릴 수가 없었다. ㅠㅠ. 

무수한 책에서 인용으로만 접했던 보르헤스의 작품을 실제로 읽어 보니,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인용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그의 상상의 세계는 지평선처럼 끝이 없어 보인다. 작품을 모두 읽고 싶은 정도로(너무 힘들어서리...) 보르헤스에게 매료되진 않았지만, 삶에 찌들려 내 생각의 날갯짓이 허우적거릴 때쯤 다시 찾고 싶은 작가이다. 

- 기실 그 새롭다는 것들 속에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없고, 그것들은 단지 원래의 것들에 대한 변형들에 불과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거다.(「의회」31)
- 모든 모임은 나름의 방언과 의식들을 탄생시키는 경향이 있다.(35)
- 단어란 공유된 기억을 담고 있는 상징들이다.(54)
-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다시 안다는 것을 뜻한다는 플라톤의 이론을 들먹였다. 나의 어머니가 배우는 것은 다시 기억하는 것이고,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 망각했다는 것이라는 말이 베이컨이 쓴 글에 나와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은혜의 밤」73)

- 시력 상실은 암흑이 아니야. 그것은 고독의 한 형태지.「1983년 8월 25일」151)
- 나는 그것을 말로 뭐라 표현할 수가 없어. 모든 단어는 경험을 선전제로서 요구하니까 말이야. (「1983년 8월 25일」153)

- 나이가 들면 사람은 많은 것을 위장할 수 있지만 행복만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셰익스피어의 기억」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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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교실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25
에리히 캐스트너 지음, 문성원 옮김 / 시공주니어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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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나는 교실 Das Fliegende Klassenzimmer』
에리히 캐스트너 글/ 발터 트리어 그림/ 문성원 옮김/ 시공주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깊은 아쉬움이 들었다. 이런 책을 진작 읽었더라면, 진작 읽어야 했던 것을 . . . 그러면서 한편으로 나를 위로했다. 다행이야,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서. 『하늘을 나는 교실』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집 책꽂이에 어김없이 꽂혀 있던 책이었다. 제목만 보아서는 날아다니는 양탄자 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가득한 어린이책 같아서 그닥 읽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었다. 얼마 전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서 에리히 캐스터너 편을 읽다 이 책을 읽고 싶다, 꼭 읽어야겠다는 욕구가 부싯돌에 불붙듯이 확 일어났다.

이 책은 들어가는 대목이 여느 어린이책과 다르게 신선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런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아이들이 항상 명랑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 그들에게도 슬픔과 눈물이 있고 그래서 불행한 아이들도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보여 주고 싶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노라고 저자는 말한다. 머리말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용감한 사람과 겁 많은 사람, 영리한 사람과 머리가 나쁜 사람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의 용감무쌍한 영웅이 아니라 머리도 성격도 제각각인 다섯 명의 학생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남자 기숙학교인 김나지움 5,6학년들(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쯤)은 크리스마스 축제를 위해 연극을 준비한다. 그 연극의 제목이 <하늘을 나는 교실>이다. <하늘을 나는 교실>은 모든 아이들이 꿈꿀 만한 학교다. “오늘 수업을 현장에 가서 하겠다”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학생들은 비행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간다. 폼페이의 최후와 화산의 특성을 연구하러 베수비오 화산으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견학하러 이집트로, 북극곰과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황량한 땅을 보러 북극으로. 정말 멋지지 않은가. 금전적인 문제로 해외까지 갈 여유가 없다면 각종 책이나 비디오로 이른바 가상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 연극을 준비하는 다섯 명의 학생들은 나를 울리고 웃겼다. 부모에게 버림 받고서도 꿋꿋하게 자란 문학소년 요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에 옮길 줄 아는 용감한 아이 마르틴, 늘 배가 고파 먹을 것을 달고 살고 밥만 먹으면 더 껄떡대는 미래의 권투 선수 마르티스, 용기가 없어 늘 꽁무니를 빼는 땅꼬마 울리, 머리가 좋고 어려운 책들만 골라 읽으며 젠체하는 제바스티안. 이 각양각색의 애물단지들이 연극 연습을 중단하고 학교 울타리를 넘어 레알슐레 학생들과 벌이는 패싸움과 포로로 붙잡힌 친구 구출 작전은 통쾌하고 짜릿하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절대 도를 넘지 않는다. 싸움에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 아이들에게만 주먹과 따귀를 날리며, 학교 규칙을 어긴 이유를 선생님에게 논리적으로 말하며 그에 대한 벌칙을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정의와 의리와 반성을 아는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저마다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요니는 네 살 때 혼자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 버리자 아버지가 독일에 있는 조부모님 댁에 요니를 홀로 보낸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끝내 항구에 나타나지 않았다. 몇 해 전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선장의 누이동생 집에서 지내게 된 요니는 네 살 때 겪은 그 아픔을 결코 잊지 못하고 많은 밤을 울며 지새웠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남몰래 슬픔을 삭였다. 크리스마스 방학 때도 돌아갈 집이 없어 기숙사에 남는 요니는 자신의 처지를 친구 마르틴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은 익숙해지기 나름이야. 자기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어. . .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아주 행복한 건 아냐. . . 그렇지만 아주 불행한 것도 아니야.”(212)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요니는 한편 안 됐지만 누구보다 대견하고 듬직하다. 

마르틴은 부모님이 가난해서 수업료의 반은 보조 받고 장학금을 받는 우등생이다. 그런데 올 크리스마스 휴가에는 집에 갈 수가 없다. 고향에 가려면 8마르크가 필요한데 부모님이 송금해준 돈은 고작 5마르크다. 그마저도 빌린 돈이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집에 오지 말고 보내준 돈으로 초콜릿이라도 사 먹고 썰매도 타면서 씩씩하게 보내라고 당부한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르틴은 “절대로 울면 안 돼, 절대로 울면 안 돼, 절대로 울면 안 돼!”라고 백 번 넘게 속으로 다짐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유스투스 선생 앞에서 끝내 목 놓아 울고 만다. 도대체 그런 약속을 어떤 아이가 제대로 지킬 수 있겠는가. 마르틴의 눈물은 그야말로 정직해서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유스투스 선생 덕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마르틴은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넉넉한 부모님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땅꼬마 울리는 겁쟁이라고 놀려대는 아이들의 등쌀에 화가 나 어느 날 결단을 내린다. 운동장 철봉대 사다리에서 우산을 펴고 눈 덮인 언 땅 위로 뛰어내린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용기를 시험해 보인 것이다. “평생 남들한테 하찮은 사람 취급받을까봐 불안해하며 사는 것보다 다리 하나 부러지는 게 더 낫다”는 유스투스 선생의 말은 행동의 결과보다 원인을 우선시한 사려 깊은 지적이었다. 그 사건 후로 땅꼬마 울리는 작은 몸집 안에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된다. 

울리의 사건을 두고 무모했다고 말을 해대는 아이들에게 제바스티안은 울리는 그냥 겁쟁이가 아니라며 자신의 치부를 고백한다. 자신도 울리처럼 용기가 없는 사람이지만, 약아서 그런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반면, 울리는 꾸밈없고 순수해서 무척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물론 제바스티안은 자신의 치부를 반성하거나 고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자신으로 일관하겠다고 선언하는 제바스티안의 소신도 근사해 보였다. 

다섯 친구들 중 마티아스는 자기 안의 슬픔이나 아픔이 가장 적은 단순한 아이다. 그러나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울리와 가장 친하고 그 친구가 다리를 다쳐 병실에 누운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껄떡 대장 마티아스는 속이 말랑말랑한 다정한 친구다. 먹기만 하면 기억력도 끝내준다니까 라고 말하는 마티아스 같은 친구가 있어 네 친구도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이 개성 만점의 애물단지들이 무척이나 좋아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두 어른이 있다. 골초지만 금연자 전용석인 고물 객차에 산다는 이유로 금연 선생으로 불리는 니히트라우허 씨와 옮고 그름을 어른의 잣대가 아닌 정확한 상황 판단에 의거해 따져 주는 유스투스(정의) 선생이다. 두 어른의 공통점은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안다는 것이다. 고리타분한 설교로 아이들을 억누르지 않고 그들의 정당한 행위(비록 그것이 교칙에 어긋난다 해도)에 대해서는 훌륭하다고, 잘했다고 말해줄 줄 아는 멋진 어른들이다. 이런 어른들이 많이 생긴다면 아이들이 사는 세상이 좀 더 여유롭고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저자인 에리히 캐스트너는 사범학교를 나와 한때 학교 선생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표현해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허황되지 않고 실감이 넘친다. 특히 아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그래 맞아 우리도 이렇게 말했어’라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들이 많다. 이만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겪을 만한 사건과 갈등, 슬픔과 절망, 용기와 희망을 그려놓은 『하늘을 나는 교실』은 내 아이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책이다. 일본의 독일문학가 이케다 히로시는 나치에 저항한 에리히 캐스트너를 두고 “도덕이 무너져버린 시대”에 모럴리스트가 되려 했던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이 책의 머리말을 보면 저자의 그런 면이 엿보인다. 

“진정한 삶은 돈을 버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데서 시작돼서 돈을 버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 . 여러분은 될 수 있는 한 행복해야 한다! 기쁨에 겨워 그 작은 배가 아플 정도로 웃으라! / 다만, 어떤 것에도 속지 말고 어떤 것도 속이지 말라. 불행에 맞서는 법을 배우라. 실패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운이 나쁠지라도 기운을 잃지 말아야 한다. 기죽지 말라! 용기를 내라! / 권투 선수들 말마따나 펀치를 맞아도 강하게 버텨 내야 한다. 펀치를 받아치고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이 여러분에게 먹이는 첫 펀치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세상이란 엄청나게 큰 글러브를 끼고 있으니까! 세상의 펀치를 견딜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고 있다가는 방 안에서 파리 한 마리가 기침만 해도 벌렁 나자빠져 앓아눕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기죽지 말라! 용기를 내라! 알겠는가? 이걸 깨달은 사람은 이미 반은 이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날아온 펀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용기와 지혜를 보여줄 수 있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 지혜 없는 용기는 어리석은 것이고, 용기 없는 지혜는 부질없는 것이다! 세계사에는 멍청한 사람이 겁 없이 굴거나 영리한 사람이 비겁하게 굴었던 시대가 많이 있다. 그것은 옳은 게 아니었다. / 용감한 사람들이 영리해지고, 영리한 사람들이 용감해질 때에야 비로소 인류의 진보라는 것이 얼마나 자주 그릇되이 인식되어 왔는지 드러날 것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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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8-1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리히 케스트너의 책을 예전에 읽긴 했는데요... 저런 멋진 말을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역시 독서는 비독서랑 한몸인 것 같네요. ㅋㅋ 삶과 죽음이 한몸이듯이...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하워드 진.도날도 마세도 지음, 김종승 옮김 / 궁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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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엄마가 되고부터 내 삶에 한 가지 고민이 더해졌다. 그것은 다른 모든 부모들처럼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이다. 아주 많은 육아서를 읽은 건 아니지만, 최근 들어 잇달아 읽은 아이 교육과 관련된 육아서들의 공통된 주제는 우리 아이 어떻게 하면 똑똑한 아이로 키울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책들이 내 아이를 영재나 수재로 만들기 위해 아이를 닦달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아이로 키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교육법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한결같은 외침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 찜찜했다. 나사 하나가 빠진 것만 같은 허전함과 답답함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러다 읽게 된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는 가뭄 뒤의 단비 같은 해갈을 맛보게 해주었다.

이 책은 “진보적 역사학자이며 극작가이고 사회운동가이자 대학교수”로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 하워드 진이 학교가 안고 있는 모순, 다시 말해 민주주의 교육에 앞장서야 할 학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들을 위태롭게 하는 체제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까발리고 있는 일종의 고발서다. 대담, 논문집, 강연, 인터뷰, 기고문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한 권으로 엮어낸 이 책에서 하워드 진은 승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역사 교육, 체제에 순응할 줄 아는 착하고 선량한 시민을 키워내는 학교 교육, 콜럼버스와 서구 문명 그리고 부시의 대테러 전쟁의 은폐진 진실, 계급이 실종된 미합중국 민주적 선거 제도의 허실, 계급의식을 가지고 자라는 것의 의미, 교사는 학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구체적인 실례들을 통해 아주 진지하고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경탄한 첫 번째 대목은 무겁고 딱딱한 주제인 데 반해 글이 전혀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저자가 고리타분한 정의나 당위론만을 내세우는 대신 과거에 빚어졌거나 현재 빚어지고 있는 미국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그리고 그것을 타개해 나가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적절하게 보여줌으로써 글과 말에 탄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책에서 하워드 진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민중의 시각에 선 역사관을 통해 피상적인 앎이 아니라 “마음 깊이 진정으로 느끼는 본질적인 앎”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그는 이른바 객관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다고 일갈한다. 역사란 수많은 사실들로부터 선택되는 것이고, 그러한 선택에는 어떤 판단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판단을 누가 하는가, 대통령, 의회, 대법원, 장군들처럼 지위가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체제에 큰 위협을 주지 않는 사실들만이 선택되고 그것들이 학교에서 가르쳐진다는 것이다. 가진 자, 승리한 자의 관점으로 이루어지는 학교 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연계성’ 교육법이다. 저자가 예로 든 고등학교 교사 빌 비글로우 씨가 축구공을 이용해 축구공 속에 숨어 있는 의미(파키스탄 노동자의 현실)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수업 방식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내가 눈여겨 볼 대목은, 축구공에 담긴 착취와 고통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 학생들의 글이 그런 사실을 몰랐을 때보다 훨씬 문학적이면서 깊이가 더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줌으로써 내가 아닌 타자들에 대한 공감 능력도 키워준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솔직히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 나는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살짝 눈을 감고 살았다. 오랜 전부터 가진 자들의 손아귀에서 쥐락펴락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대고 내가 한 팔 높이 쳐들어 잘못을 외쳐댄들 무엇이 바뀔까 하는 냉소와 회의가 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1922년 가난한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밑바닥 세계를 경험한 하워드 진은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 대학 교수가 되어서도 그 세계를 결코 잊지 않고 빈자의 계급의식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어느 젊은이 못지않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냉소주의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진보의 변화를 추구하는 일에 일관되게 헌신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하워드 진은 세 가지로 대답한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사회 변혁에 헌신해온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저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저를 지탱해줍니다. / 한편으로는 일종의 역사의식이 저를 지탱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주변을 둘러보면 냉소주의와 비관론에 빠지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 . 민중의 분노가 강을 이룰 때, 그리고 그들이 모이기 시작할 때 변화는 매우 급격하게 이루어집니다./ 지속적으로 주장을 펼치고, 실천하려 노력하고, 또 참여하도록 한 요인은 바로 그것이 삶을 더 흥미롭고, 즐겁고, 가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 . 저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더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저를 지탱해주는 힘입니다.”(191)

이 세 가지 답변 중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세 번째 항목이었다. 희생하는 삶이 아닌 자신을 살찌우는 충만한 삶이라, 바로 그런 시각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된다면 이 그릇된 세상이 좀 더 살 만해지지 않을까란 희망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라면, 우리의 교육을 고민하는 교사라면, 나는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내 아이의, 내 학생의 점수 몇 점을 더 올려주는 것보다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배우는 민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그들의 저항운동을 통해 오늘날의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그래서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공감과 연대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독단이 붕괴된 바로 그 자리에 희망이 솟는다. 사람들은 자라난 환경이 어떠했든지 간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열린 사고를 가졌으며, 과거를 바탕으로 그들의 행동을 자신 있게 예단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태도에 영향 받기 쉬운 약점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약점이 바람직한 것과 또 그렇지 않은 온갖 가능성을 낳기도 하지만, 그러한 약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그 같은 약점은 어떤 인간도 포기해서는 안 되고, 어떤 생각의 변화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될 수 없음을 뜻한다.”(220)  

 이 글은 사람들이 저자를 두고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나 돈에 쪼들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계급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그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자신과 아주 유사한 세계관을 가진 젊은 역사학자 스토튼 린드를 소개하며 전통적인 교조적 ‘계급 분석’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들이민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의식이 환경에만 지배받는다면 세계의 역사는 결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상에 영향 받기 쉬운 인간의 약점은 반대로 세상을 진보시킬 수 있는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저자는 당부한다. 역사를 공부하되, 역사가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게 하고 싶다면 일부 역사가들이 저지르는 오류, 무수한 사실의 전당인 역사 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 책 속에는 내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미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 가려진 또 다른 구체적인 역사가 곳곳에 실려 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게 어제오늘의 일인가, 원래 세상이 그런 게 아닌가,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 . 그러나 하워드 진은 사실과 더불어 민중의 분노와 노여움을 같이 느끼게 하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이 변혁의 대열에 설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의 힘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 아이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무엇인지를 궁리할 것이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도 통제한다. 그리고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조지 오웰)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곧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141)

우리는 이렇게 흘러가는 세상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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