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배용준 때문에 난리다, 일본은. 하긴, 지난 3월 일본에 온 이래, 지금껏 텔레비전만 틀면 한국드라마, 음식코너에선 한국요리 소개,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으니, 새삼 '난리다'라고 하기도 어색하지만. 그런데 어제 오늘 방송 분위기는 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도 그럴것이, 그넘의 '욘사마'가 뭔지... 10명이나 다쳤다고 하니 언론들이 떠들어댈만도 하다.
이제부턴 '한국 헐뜯기'로 돌아가는 거냐고? 그렇지는 않다. 일본이란 나라, 우리나라와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고, 서로간에 구원(舊怨)도 많다면 많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것도 아니고, 욘사마 하나로 모든 관계를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아무튼 어제오늘 여기 방송 분위기를 보자면- 후지TV에선 한국의 방송보도를 잠깐 보여줬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MBC에서 서울 시민 인터뷰 한 내용. "사실 여기선 배용준씨 가지고 그렇게는 (난리를 치는 건) 아니잖아요. 잘 이해는 안 가요"라는 서울 아줌마의 코멘트. "한국에선 배용준 갖고 그렇게 난리를 안 친다"는 것이 후지TV 뉴스에서 하고팠던 얘기였을 것이다. 신문들도 어제의 '불상사'를 떠들어댔고, 몇몇 신문에선 유감을 표현한 배용준의 기자회견을 '사죄회견'으로까지 지칭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후지TV는 토요일마다 '천국의 계단'을 내보내고 있고, 아사히 TV건 뭐건, 일본 방송들 경쟁적으로 한국드라마 방영하는데 아주 웃겨 죽겠다. 내가 본 것만 해도-- 며칠전 세어봤더니, 지금 일본에서 방영하고 있는 한국드라마가 여덟개인가 그렇다. 배용준이 드라마에 그렇게 많이 출연했는지, 일본 와서 알았을 정도니깐. 후지TV 등등이 어제오늘 욘사마 열풍을 조금 '꼬아서' 보도한 것도, 내가 보기엔 그닥 마땅찮다. NHK에서 하도 겨울연가를 팔아먹으니깐 그거 꼴보기 싫어 저러는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좀 든다. 자기들끼리도 경쟁을 하고 있으니깐.
한국에 있을 때 동남아 한류 어쩌구 하면 그냥 그저그런 정도인줄만 알았다. 아마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일본의 욘사마 열풍, 한류 붐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을 못할 것이다--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도대체 겨울연가 포스터는 일본 전역에 몇장이나 깔려있는 것이기에, 어딜 가든 욘사마 얼굴을 보게 되냐고 -_- 며칠전 큐슈에 갔다가, 오르골 가게에 들렀다. 역시나, 또 겨울연가 포스터. 그리고 "겨울연가 주제가 오르골 있습니다"라는 친절한 안내판.
이런 정도는 너무나너무나 당연한 거라서 이젠 신기하지도 않다. 늘 만나는 아줌마 친구들이 있는데, 배용준은 기본이고 원빈 권상우 이병헌 얘기 다 나온다. 서울에 있는 언니들하고 권상우가 좋네 원빈이 좋네 떠들다가 여기 아줌마들 만나면 대화가 그대로 이어진다. 내가 한국인이니까 한국 얘기를 하다보니 탤런트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 탓도 있겠지만, 아무튼 요사이 한국드라마 모르면 일본사람들하고 못 논다. 오죽하면 내 주변 일본아줌마들 사이에선 내가 기무라 타쿠야를 좋아한다는 것이 '뉴스' 취급을 받을까. 아줌마들끼리 욘사마 얘기 실컷 하다가, "이치고상(내 일본이름)은 기무라 타쿠야 드라마를 본대요, 글쎄!" 자기들끼리 이러면서 웃는다. 기무타쿠 예전 드라마들 너무 재미있는데, 솔직히 요샌 일본 드라마들 재미 없다. 현재 TV에서 방송해주는 드라마는 한개도 안 보고 있다. 일본어가 딸리기도 하지만 재미가 영 없거든. 그도 그럴 수밖에. 온통 한국드라마 수입해다 내보낼 뿐, 자기네들 드라마에는 신경 안 쓰고 있으니깐.
'겨울연가'. 서울에 있을 때 물론 나도 이 드라마를 열심히 봤었다. 좋아하냐고? 안 좋아한다.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저 드라마, "재밌었다" 혹은 "화면이 이뻤다"고는 말할 수 있을지언정 '좋은 드라마' '훌륭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냐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가지도 얘기 안되는, 진정 말안되는 스토리. 사람의 기억이 무슨 포스트잍이냐, 떼었다 붙였다 하게.. 후까시도 한두번이지, 진짜 해도해도 너무하는 드라마에, 해도해도 너무하는 감독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어쩌랴. 저것이 '효자'인 것을.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발산한 효과 덕에 나의 일본생활이 수월해진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일단 주변 사람들이 우호적이고, 한국에 대해 관심들이 많고, 자기들 입으로도 '요즘 한국 붐이라서 관심이 많이 생겼다'고들 한다. 한국 얘기 해주면 재밌어하고, 특히나 한국 연예인들 얘기를 해주면 재밌어한다. 한국에서 온 내가 해주는 얘기가 아줌마들한테는 나름대로 '특종'인 셈이니깐.
그래서 나는 종종 아줌마들한테 한국 연예인들 얘기를 해주곤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얘기, 예를 들자면-- 이영애는 한국에서 톱스타다, 이영애 데뷔했을 때 진짜 이뻤다, 원빈은 꽃미남이다, 요새 권상우 잘나간다, 최지우는 발음이 안 좋다, 뭐 이런 거. (웃기게도 여기 사람들도 최지우 혀짧은 것을 안다. 혀짧은 발음은, 언어가 달라도 구별이 가는 모양).
이렇게 한류는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 궁금한 것은, 한류가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하는 것이 아니겠슴둥? 분명한 것은, '욘사마'로 시작된 한류가 일본에서 적어도 한국 꽃미남 탤런트/배우들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요리,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분명 높아지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지금 구구절절이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은-- 지금 텔레비전에 나오고 있는 드라마 때문이다. 초난강(요샌 일본 사람들도 '쿠사나기 츠요시'가 아니라 '초난강'이라고 부른다)이 방금전 한국말로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늙은 엄마 품에 안기는 장면이 나왔다. 자이니치, 즉 '재일 조선인'을 주인공으로 한 단막극인데 초난강이 조선인 역할을 맡았다.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한류는 필히 '역사'에 닿을 수 밖에 없다. 몇달전 이곳 TV에선 재일조선인이 겪는 차별과 사랑을 다룬 연속극이 방송되기도 했는데, 꽤 유명한 여자탤런트가 주연을 맡았지만 드라마 자체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시도(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룬) 자체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겨울연가'는 확실히 말도 안되는 드라마다.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드라마를 통해 한류가 형성되고, 그 흐름이 결국 일본 내에서 '터부'를 건드리고 있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역사문제가 터부였듯이, 일본인들에게도 자이니치 문제(총체적으로 역사문제)는 분명 터부였을 것이다. 그 금기가, 겨울연가 혹은 욘사마라는 희한한 계기를 통해 깨지고 있는 것이다.
철벽같던 모든 금기들은 아주 작은 균열로 인해 깨지기 마련이다. 일본에서 한류가 그런 균열을 확대하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의 욘사마열풍을 아마도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한국인들을 위해, 한국의 언론들도 양국에서 터부를 건드리는 작업을 좀 해주면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