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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공감의 차이를 몸으로 느끼고 싶은가?

자신을 살상하고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는 살구나무를 만나보라



살구나무는 4~5월에 피어 벚꽃을 연상케 하는 나무다. 파란 열매를 보면 매실이 떠오르지만 노랗게 열매가 익어가면서 매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노란 살구 열매를 따서 반을 쪼개면 가운데 씨앗을 중심으로 정확히 양분되고 씨앗은 고맙게도 과실 부분과 쉽게 분리된다.


봄날 만개한 꽃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계절 감각을 알려준 살구나무는 가을날 다시 맛 좋은 살구 열매를 선물로 준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다. 겉보기에는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고 있지만 맛은 없는 개살구라는 뜻으로,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가을 햇볕에 익어가는 노란 살구는 빛깔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다. 개살구로 전락한 이유는, 살구처럼 겉과 속이 다 노랗게 익어 자연의 맛을 선물로 주지 않고 겉만 화려한 사람들의 속임수를 효과적으로 비유하기 위해서다. 살구 열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른 봄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까지 한여름의 폭염을 견뎌낸다. 따라서 개살구라고 한다면 살구에게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빛 좋은 개살구는 그만큼 속은 부실하면서 겉만 가꿔서 사람을 속이려는 얄팍한 기교를 경고하는 메시지다.


살구나무는 한자로 ‘杏(행)’이다. 은행나무와 글자를 같이 쓴다. 공자가 야외 수업을 한 무대를 ‘행단(杏壇)’이라고 한다. 행단은 살구나무杏가 있는 제단을 말한다. 살구나무의 ‘살구(殺狗)’는 개를 죽인다는 뜻이다. 살구나무의 독성이 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살구씨는 한의학에서 ‘행인(杏仁)’이라 불린다. 《본초강목本草綱目》과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에 살구씨를 이용한 치료 방법이 200가지나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쓰임새와 약효가 많아 “약방의 살구”라 불리기도 한다. 살구씨를 갈아서 만든 한방 외용제는 기미나 주근깨 등의 피부 색소 침착, 종기, 부스럼 등에 사용되며, 피부를 하얗고 윤기 있게 하기 때문에 일찍이 궁중 여인들은 이것으로 피부를 가꾸기도 하였다.


“인은 하늘이 모든 존재에게 준 씨앗이다. 하늘이 준 인을 키우는 것이 인간의 할 일이다. 유가에서 ‘인’을 정치의 덕목 중 으뜸으로 생각하는 까닭이다. 인에 기초한 정치, 즉 인정(仁政)은 인간이 품고 있는 인을 발휘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모르는 국민을 불쌍하게 여기는 측은지심이 ‘인(仁)이다. 그 ‘인’ 덕분에 한글이 창제된 것이다. 인은 상대방의 아픔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 씀씀이며, 그 사람이 겪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용기 있는 결단이다.


공자의 사상인 ‘인(仁)’ 또한 씨앗, 종자를 일컫는다. 종자가 있어야 만물이 탄생한다. 공자가 ‘인’을 그토록 강조한 것도 씨앗이 있어야 나무가 있듯 ‘인’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은 다른 말로 해석하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내가 타인의 입장이 되어 직접 체험하면서 온몸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생각하는 능력이다. 체험 없이는 공감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머리로 생각하는 역지사지는 진정한 의미의 공감이 아니다. 그것은 연민이다. 공감은 타자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는 수준을 넘어 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결연한 행동을 포함한다. 진정한 공감은 결국 머리로 생각하는 이해타산(利害打算)이 아니라 가슴으로 생각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머리로 생각하면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지를 따지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으로 치닫지만 가슴으로 생각하면 타인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내가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결단이 따라온다.


옛사람들의 행복은 풍류를 즐기는 멋에서 나온다. 살구나무가 있는 곳에 술집이 있는 경우가 많다. 술집에서 살구나무를 심었는지, 살구나무가 있는 곳에 술집을 차렸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선비들이 꽃놀이를 즐기며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술집 근처에 살구나무를 일부러 심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살구꽃이 피는, 특히 비 오는 봄날 살구꽃을 배경으로 술 한잔 할 수 있는 풍류는 선비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여유이자 흥겨움의 시간이었다. 살구나무 꽃이 만발한 비 오는 봄날, 그것도 석양이 물들어가는 저녁노을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는 풍류의 멋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살구꽃이 피는 술집을 ‘행화촌(杏花村)’이라 하고 살구꽃이 핀 봄날에 오는 비를 ‘행화우(杏花雨)’라고 불렀다. 살구꽃이 만발한 행화촌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과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일 때, 그것도 봄날 비가 오는 저녁에 술잔에 담긴 인생의 의미를 논하는 술자리는 살아가면서 반드시 찾아야 할 자리다.


살구나무가 있는 곳은 풍류와 술이 있는 여유와 여흥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공자가 제자를 행단(杏壇)에서 가르쳤듯이 배움과 깨달음이 머무는 공간이기도 했다. 살구나무 꽃이 피어있는, 행사나 축제를 하는 정원을 ‘행원(杏園)’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살구나무가 있는 행원을 여유와 여백이 살아 숨 쉬는 풍류의 공간이었으며, 치열함과 열정이 스며드는 배움의 터전이기도 했으며, 다 함께 축가를 부르며 축제를 즐기는 공동체의 무대이기도 했다.


살구나무는 과일로서 사람들에게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빛나는 꽃으로 아름다움을 선물해주지만 나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신비한 소리를 선물해준다. 스님들이 두드리는 목탁을 바로 살구나무로 만든다. 목탁을 두드릴 때 울리는 특이한 울림과 은은한 소리는 살구나무가 아니면 낼 수 없는 신비한 소리다. 나무가 너무 단단하고 강하면 둔탁한 소리가 나서 멀리까지 울려 퍼질 수 없다. 나무가 또 너무 무르면 두들기는 소리에 반응하는 울림이 나무 자체로 흡수되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목탁의 소리가 맑고 청명하며 오랫동안 잔향이 남는 이유는 살구나무가 바로 그런 소리를 품고 자랐기 때문이다. 서양의 종은 시끄럽게 안에서 밖으로 흔들어야 소리가 나는데, 멀리, 그리고 오랫동안 울려 퍼지지는 않는다. 한국의 종은 밖에서 안으로 때려 나는 소리가 오랫동안, 그리고 멀리까지 울려 퍼진다. 그만큼 종이 아프기 때문에 자신이 품고 있는 소리를 세상을 향해 천천히 풀어놓는 것이다. 목탁이 내는 소리는 살구나무가 자라면서 겪었던 시련과 역경이 안으로 새겨져 울려 퍼지는 소리다.


살구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데, 개살구는 토종 살구다. 살구나무에 비해 크기도 작고 맛도 없지만 엄연히 우리 땅에서 태어나 자라는 토종이다. 그냥 살구에 비해 맛이 떨어져 볼품만 있고 실속은 거의 없는 경우를 빗대어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한다. 문득 산속에서 외롭게 자란 개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의 소리가 더 구슬프고 청명하게 울려 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외롭게 자라면서 고독을 삼킨 나무이기에 안으로 품은 한 많은 세상을 소리로 읊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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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뻗어야 위로 자랄 수 있다



성장할 수 있는 ‘높이’는 성장하기 위해서 아래로 뻗은 뿌리의 ‘깊이’가 좌우한다. 아래로 파고드는 깊이 없이 쉽고 빨리 위로 성장하려는 사람은 어느 순간 높이 자랄 수는 있지만 높이를 지탱할 수 있는 깊이가 없어서 쉽사리 무너진다. 아래로 뿌리를 내리는 노력이 위로 성장하기 위한 가능성을 결정한다. 잡초의 생명력은 위로 자란 줄기의 높이보다 아래로 자란 뿌리의 깊이가 결정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야 뿌리 뽑히는 나무가 되지 않는다. 일단 뿌리가 뽑히면 나무는 더 이상 생명 연장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나무에게 뿌리는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려야 결국 위로 높이 자랄 수 있다. 아래로 뿌리를 내리는 노력은 위로 줄기와 가지를 뻗으려는 노력보다 힘들고 어렵다. 그러나 뿌리 내리기를 포기한다면 성장의 가능성도 함께 포기해야 한다. 뿌리 없이 줄기 없고, 줄기 없이 가지 없으며, 가지 없이 꽃을 피울 수 없고, 꽃이 피지 않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열매의 풍족함과 풍요로움은 뿌리의 깊음과 힘겨움을 버텨내는 노고에서 비롯된다. 연못을 가득 채운 연잎도 ‘위로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래로 안으로’ 향하고 있다. ‘위로 밖으로’ 향하고 싶은 욕망이 강할수록 ‘아래로 안으로’ 파고들어 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낮추면 높일 수 있다. 낮춤이 높임이다. 아래로 숙여야 더 높이 치켜세울 수 있다. 아래로 파고든 깊이가 위로 치솟을 수 있는 성장 에너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파고들지 않고 치켜세우려고만 하면 금방 무너진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기초를 튼실하게 가꾸어야 한다. 기초는 기본이고 본질이며, 본질은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파고들어야 한다. 확고부동한 신념은 파고들어간 깊이에서 나온다.


“나무든 풀이든 모든 생명체는 뿌리를 닮는다.”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겉으로 드러난 실체의 본질을 결정하고 지배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지금 나의 모습도 지금까지 내가 파고든 뿌리가 만든 산물이다. 파고들기 전에 옆으로 뻗거나 위로 올라가다가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파고든 깊이의 내공이 옆으로 뻗을 수 있는 넓이를 결정하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무가 위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은 아래로 뻗은 뿌리 덕분이다. 뭔가를 얻거나 되려면 뭔가를 해야 한다. 나무는 위로 향하면서도 옆으로 몸집을 불린다. 사람도 위로 성장하면서 옆으로 살이 찐다. 그러나 위로 성장하는 키에 비해 옆으로 성장하는 몸집 불리기는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다. 몸집 불리기는 지나친 욕망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무에게 높이 성장하는 것은 수직적 깊이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시간적 성장이고 옆으로 몸집 불리기는 수평적 넓이의 확산을 통한 공간적 성장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나무는 위아래로 성장하는 동시에 옆으로도 성장하면서 나무로서의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


사람에게 수직적 깊이의 심화는 곧 전문성의 추구를 통한 종적(縱的) 심화 과정이다. 이에 반해 수평적 넓이의 확산은 또다른 전문성과의 부단한 접목을 통한 인식 지평의 확대, 즉 횡적(橫的) 확산을 의미한다. 부정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수평적 몸집 불리기와는 다르게 횡적 확산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좌정관천(坐井觀天)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분투노력이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나이가 있다. 하나는 깊이 파고든 수직의 나이다. 수직의 나이가 깊을수록 해당 분야의 전문성의 정도도 깊어진다. 또 다른 하나는 수평의 나이다. 수평의 나이는 인간관계를 통해 인맥을 구축한 관계의 나이다. 수직적 깊이 없는 수평적 넓이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며, 수평적 넓이 없는 수직적 깊이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다. 나무는 수직으로 파고들면서 동시에 수평으로 줄기와 가지를 두껍게 만들어나간다.


오랜 준비 없이 쉽게 시작하는 모든 일은 그 결실을 맺기전에 무너지기 십상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보다 빠른 시간에 관심과 주목을 받기 위해 튼튼한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기도 전에 보여주는 생각과 행동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첨단을 걷기 쉽다.


“용두사미(龍頭蛇尾)란 경구를 모르는 사람이 없듯이 정당이든 단체든 개인이든 거대하고 요란한 출발은 대체로 속에 허약함을 숨기고 있는 허세인 경우가 허다하다. 민들레의 뿌리를 캐어본 사람은 안다. 하찮은 봄풀 한 포기라도 뽑아본 사람은 땅속에 얼마나 깊은 뿌리를 뻗고 있는가를 안다. 모든 나무는 자기 키만큼의 긴 뿌리를 땅속에 묻어두고 있는 법이다. 대숲은 그 숲의 모든 대나무의 키를 합친 것만큼의 광범한 뿌리를 땅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대나무가 그 뿌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나무가 반드시 숲을 이루고야 마는 비결이 바로 이 뿌리의 공유에 있다.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나면 이제는 나무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인의 마디와 뿌리의 연대가 이루어내는 숲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잡초에는 TR비라는 것이 있다. TR비는 잡초가 땅 속 깊이 뻗은 뿌리(Root)와 땅 위로 뻗은 줄기와 가지의 높이(Top)의 비율이다. 80:20 법칙이다. 잡초의 80%는 땅속에 뻗어 있고 20%만이 겉으로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잡초를 뜯어내고 동물들이 아무리 많은 양의 잡초를 뜯어 먹어도 잡초는 땅 밑의 뿌리로부터 새로운 싹을 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뻗어 자신의 종족을 퍼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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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려봐야 뒤흔들 수 있다



살다 보면 참으로 많은 바람이 분다. 한겨울에 몰아치는 삭풍(朔風)과 북풍(北風)이 있고 한여름에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비바람도 있다. 아무리 세찬 바람이 불어와도 줄기와 가지가 휘어지고 때로는 꺾일지언정 뿌리로 버티는 나무나 들풀처럼 우리도 혼탁한 바람에 짓눌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 중심은 흔들리면서 잡힌다. 흔들려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중심이라고 잡아서 안심하고 있는 찰나 생각지도 못한 바람이 불어와 뿌리째 흔들려봐야 진짜 내 삶의 중심을 알 수 있다. 중심은 흔들리면서 서서히 잡히는 내 삶의 핵심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수록 흔들어 깨워야 할 우리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반성하고 점검해보는 것이다.


많이 흔들려본 사람만이 세상을 남다르게 뒤흔들 수 있다. 흔들린다는 것은 내 삶의 중심을 흔들어본다는 것이다. 나무의 중심은 뿌리다. 흔들어서 뿌리가 잘 버티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의 중심이 얼마나 튼튼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흔들리는 일은 나무를 더 강하게 성장시키는 원동력인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일로 흔들려본 사람일수록 어지간한 흔들림은 이겨낸다. 흔들려보지 않고서는 자신의 중심을 똑바로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삶의 진한 체험적 깨달음으로 다른 사람을 뒤흔들 수도 없다. 숱한 개념에 나의 체험적 신념이 추가되지 않으면 관념의 파편으로 전락해 호소력이 없게 된다.


풍경은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소리 내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야만 비로소 그윽한 소리를 낸다. 인생도 무사평온하다면 즐거움이 뭔지 알지 못한다. 힘든 일이 있기에 즐거움을 알게 된다. 이는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시냇물도 돌부리가 있어야 노래를 부른다. 걸리는 돌이 있어서 부딪히면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 인생은 가슴이 뛰지 않는 삶이다. 어제와 다른 불확실한 바람이 불어야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내일을 준비한다. 내일 어떤 바람이 불어올지를 기다리지 말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정면 도전해야 한다. 미국의 작가이자 강사였던 데일 카네기Dale Carnegie도 말하지 않았던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라고.


영화 〈최종병기 활〉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불어오는 바람의 강도나 방향을 너무 오랫동안 고민하며 계산하려다 오히려 바람에 밀려 사라질 수 있다. 다양한 각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맞부딪혀 보는 경험이 많을수록 바람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내공이 깊어지는 법이다. 머리로 계산해서 바람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바람을 맞이해본 경험이 있어야 바람을 느낄 수 있다. 불어오는 바람의 존재는 확실하지만 그 바람의 실체와 본질에 대해서 사전에 알 길은 없다. 즉, 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바람의 성격이나 방향은 몸으로 부딪혀보지 않고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이런 점에서 “타자는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바람이 분다는 사실, 그리고 그 바람으로 내가 흔들린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바람으로 인해 흔들리는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람으로 인해 나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흔들림으로 나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무슨 대응 논리를 구상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그의 고통은 존재론적으로 확실하다. 하지만 그 고통의 의미를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확실한 고통의 존재를 인식론적으로 불완전하게 알 뿐이다.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나무가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힘들게 흔들리며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나무는 흔들리면서 성장한다는 점이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밖에 없다. 그래서 흔들림은 살아 있음의 증거다. 사람도 살아가면서 흔들려본 경험이 있을 것이며, 그때마다 저마다의 사연과 배경이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심하게 흔들렸을 때일수록 더 심하게 안간힘을 쓰면서 삶의 중심을 잡아보려 애썼던 것 같다.


나의 의지는 의지할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더욱 빛나기 시작한다. 흔들려도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는 나무처럼 결국 나의 의지로 흔들리는 난국을 극복해야 한다. 위대한 성취는 위로 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남다른 성취는 사무치게 외로운 고독 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의지(依支)의 강도가 약할수록 의지意志의 강도는 강해진다.”


의지(依支)하는 사람은 의존적인 사람이고 의지(意志)를 불태우는 사람은 독립적인 사람이다. 나무야말로 세상에 의지(依支)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의지意志가 강한 생명체다. 반대로 인간은 지구상에서 다른 생명체에게 가장 많이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의존적인 생명체다. 사람은 어린 시절에 누군가에게 의지하다 점차 어른이 되면서 자신의 의지(意志)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간다. 의지가 생기려면 우선 내가 의존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살기 시작해야 한다.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나무의 의지를 생각하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나의 의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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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짧고 기다림은 길다



자연에는 속도와 효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모두 때가 되면 싹이 트고 잎이 나오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봄을 기다려야 싹이 나오고 여름을 기다려야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을 기다려야 단풍을 구경할 수 있으며 겨울이 되어야 삭풍을 견디는 나목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자연의 속도를 조절하여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기간을 단축할 수 없으며, 여름이 길다고 바로 가을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없다. 그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기대했던 일을 보려하는 조급증에 걸려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직장인은 3분마다 딴짓을 한다고 한다.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이메일을 보고 SNS 메시지를 바로바로 확인하고 답장을 보낸다. 속성만이 판을 치고 숙성할 기다림의 시간이 없다. 묵은지를 기다렸다가 먹는 그윽함이 없어지고 겉절이로 만들어 빨리 먹어버리려는 듯 속도는 빨라지고 삶의 밀도와 강도는 약해지면서 행복한 순간에서 느끼는 깊은 충만감도 없다. 효율은 높아지고 있지만 무엇을 위한 효율인지 의문이 들며 진정 우리가 원하는 효과를 달성하고 있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편지를 쓰면서 그리움의 형상을 떠올리고, 편지를 보낸 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깊은 사랑의 애절함을 나누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메일이나 그것보다 더 빠른 SNS로 이런저런 메시지들을 보내고 즉석에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화를 내는 세상이 되었다. 소통의 빈도와 속도는 높아지고 있지만 소통의 강도와 밀도는 약해지고 있다.


나무의 경쟁은 꽃이 만개하는 봄부터 시작된 게 아니다. 한 해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해야 진한 향을 지닌 아름다운 꽃을 봄에 피울 수 있다. 다른 나무보다 꽃을 앞서 피우려면 먼저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목련의 하얀 꽃을 볼 수 있는 것도 꽃이 진 후에 곧장 이듬해에 피울 봉오리를 만드는 목련의 꽃 농사 덕분이다. 가을에 만들어진 봉오리는 겨울 내내 햇살을 맞으면서 봄을 준비한다.”


강판권의 이 말처럼 준비에 실패하면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진리를 나무는 잘 알고 있다. 사람도 기업도 마찬가지다. 가장 잘나갈 때 다음을 기약하는 준비를 서둘러 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추락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


자연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생명체들의 축제의 장이다. 자연에는 원래 그런 것이 없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는 생명체도 없다. 모두 거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가장 먼저 봄소식을 알리는 꽃은 개나리와 진달래다. 개나리와 진달래는 추운 겨울을 나면서 모든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봄이 오면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트린다. 겨울눈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낸 덕분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결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조용히 준비한 결과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모습이다. 경쟁은 꽃이 만개하는 봄부터 시작된 게 아니다. 봄에 준비하는 꽃은 봄에 꽃을 피우지 못한다. 봄 이전의 봄부터 겨울까지 치밀한 준비를 해야 진한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꽃을 봄에 피울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남보다 먼저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가장 먼저 피는 꽃은 추운 겨울이라는 시련과 역경이 오기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꽃눈을 준비한 나무에서 나온다. 나무는 긴 기다림 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짧은 기회를 위해 준비한다. 기다림은 길어도 기회는 재빨리 지나간다. 기회는 긴 기다림 속에서 인고의 시절을 보낸 덕에 누릴 수 있는 선물이다. 짧은 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긴 겨울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긴 겨울을 겨울잠으로 허비하고서는 용솟음치는 새봄의 기운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겨울은 그저 움츠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폭풍전야의 전운이 감도는 치열한 준비 기간이다. 가을은 짧고 여름은 길다. 짧은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둬들이기 위해서는 긴 여름 동안 활화산 같은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 봄은 오행으로 보면 ‘목(木)’에 해당한다. 나무가 새싹을 틔우는 시기라는 뜻이다. 여름은 오행의 ‘화(火)’에 해당한다. 불같은 열정으로 신록을 우거지게 하고, 작열하는 태양과 더불어 천둥과 번개 속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하는 시기다. 여름을 열정적으로 보내지 않고서는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보통 준비 기간은 길지만 승리의 환호와 잔치는 짧게 끝난다. 준비 기간을 짧게 하고 승리의 축배 시간을 길게 잡으면, 다음 승리는 바로 물 건너간다. 바닥에서 오랫동안 몸부림친 사람은 기회가 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설혹 기회를 놓쳤다 할지라도 준비 시간 동안 자신이 성실하지 못했던 것을 탓하며 자신에게 채찍을 가한다. 칼을 쓰는 시간보다 칼을 가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그래야 단칼에 승부수를 던질 수 있다. 대패질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그래야 나뭇결을 따라 아름다운 대패질을 할 수 있다. 기다리는동안 절치부심하면서 얼마나 몸부림의 시간을 보냈는지에 따라 기다림 끝에 맛볼 수 있는 승리의 맛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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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하면 불행해지지만 비전을 품으면 행복해진다



나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참나무는 참나무대로 살아가고, 벚나무는 벚나무대로, 등나무는 등나무대로 살아간다. 수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이렇게 각기 다른 나무가 숲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나무 열전이 펼쳐지는 숲에 가보면 나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간다. 송직극곡(松直棘曲), 소나무는 곧게 자라고 가시나무는 뒤틀리면서 자란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도 가시나무는 소나무를 부러워하지 않고 소나무의 흉내를 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소나무는 소나무, 가시나무는 가시나무다. 소나무는 소나무처럼 자라고, 가시나무는 가시나무답게 자라는 것이 자연이다. 어찌 이게 나무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일까.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다리가 긴 학은 학대로, 다리가 짧은 오리는 오리대로 살아간다. 다리가 짧은 오리는 다리가 긴 학과 자신을 절대 비교하지 않는다. 이렇듯 각각의 특성을 살려가며 개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환 원리이자 이치다. 비교하면 불행해지지만 비전을 품으면 행복해진다. 잎이 넓은 활엽수는 활엽수대로, 잎이 가늘고 긴 침엽수는 침엽수대로 살아간다. 높이 자라는 나무는 하늘을 보고 자라고 땅에서 가까운 나무는 땅을 보며 저마다 행복하게 살아간다. 물가에 자리 잡은 버드나무는 물을 정화시키며 살아가고 산 정상에서 자라는 나무는 수시로 불어닥치는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자세를 낮추어 살아간다.


남도 지역에서 부르는 〈나무타령〉을 잠시 감상해보자. 나무 이름으로 지은 노래 가사가 예사롭지 않다. 나무의 성격이나 존재 이유를 드러내는 것도 같고 고유한 색깔대로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나무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십리 절반 오리나무, 열의 곱절 스무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거짓 없어 참나무, 그렇다고 치자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입 맞추어 쪽나무, 양반골에 상나무,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 나무 가운데 나무는 내 선산에 내나무.



이외에도 수액 좀 그만 빨아먹으라고 호소하며 자고로 인간의 사악함을 한탄하는 고로쇠나무, 저마다 참나무라고 우기는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총을 잘 쏘는 딱총나무, 물가에서 언제나 푸르게 자라는 물푸레나무, 화살처럼 날아가는 화살나무, 밤나무 보고 너도나도 밤나무라고 하는 나도밤나무와 너도밤나무, 맨날 말아 먹는 국수나무, 고민 끝에 찾다가 실마리를 잡은 가닥나무, 밤에만 자기를 부르는 자귀나무와 그 옆에서 질투를 느끼는 머귀나무, 가뭄을 걱정하는 가문비나무, 계획을 세우고 언제나 미루기만 하는 미루나무,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작살나무, 그 옆에서 조금 덜 무섭다고 우기는 좀작살나무,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를 내뿜으며 유혹하는 향나무, 언제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구상나무, 대패질하는 집 앞에 서 있는 대팻집나무, 음식 만들 때 자기를 꼭 양념의 재료로 쓰라고 부탁하는 생강나무, 세상의 비밀을 숨기자고 쉬쉬하는 쉬나무, 까마귀에게 밥 주는 까마귀밥나무, 보리밥만 대접하는 보리밥나무, 꿩 보고 덜떨어졌다고 우기는 덜꿩나무, 말이 오줌을 주로 누어서 생겼다는 말오줌때나무가 있다.


또 먹어보면 신맛이 나는 신나무, 사람에게 많이 퍼주는 사람주나무, 예로부터 덕이 많은 예덕나무, 참 죽이 잘 맞는 참죽나무, 언제나 차를 대접해오는 차나무, 자신을 태운 재가 노랗다고 생각하는 노린재나무, 조밥을 닮은 조팝나무, 이 밥만 먹고 자란 이팝나무, 박쥐가 날아가다 쉬고 간다는 박쥐나무, 산딸기 모양의 열매를 맺는 산딸나무, 사시사철 푸름을 자랑하는 사철나무,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 같은 먼나무,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쓰이는 박달나무, 크고 날카로운 가시로 접근 금지를 엄하게 외치는 엄나무, ‘쾌지나 칭칭 나네’를 부르며 자라는 층층나무, 화류계(花柳界)의 거두로 무한히 뻗어가는 버드나무21, 감 떨어지기 전에 감나무, 두려워서 벌벌 떠는 사시나무, “왜 소태 씹은 얼굴을 하고 있어?”라고 물을 정도로 정말 잎이 쓴 소태나무, 임도 보고 뽕도 따며 일 년 365일 방귀만 뀐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주인공 뽕나무와 그 옆에서 덩달아 방귀를 뀌는 꾸지뽕나무… 이런 나무들이 만들어가는 숲의 경이로움과 자연의 위대함에 우리는 얼마나 감탄하며 살고 있는지를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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