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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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으로도 이 시집은 슬픔을, 죽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내게 그런 경험이 없다면 젊은 시인의 시집이라는 이 시집을 좀더 쉽게 열어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전 그런 경험이 있기에 이런 제목의 시집을 더구나 저보다도 훨씬 어리다는 남자 시인의 시집을 열어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지인들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읽지도 사지도 않았었지요.

 

그러다가 자주 가던 낭송회에서 박준 시인이 호스트로 나오게 되어 그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고, 통통하고 정겨운 외모의 그는 이 시집과 당최 어울리지 않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시를 듣자마자 이건 진짜구나! 싶은 마음에 그렇게 그 낭송회를 다녀와서야 시집을 읽어봤습니다.

 

미인이니 죽음이니 하는 오래된 낱말들이 시로 만들어질 때 우리는 더이상 새로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박준시인의 미인과 죽음을 만났을 때 최소한 저는 새로운 반응을 하였습니다. 웃자고 얘기하자면, 이 시집을 읽고 '이제부터 미인은 박준꺼!'라고 했습니다. 오래전 김경주 시인의 시집을 읽고 '이제부터 시차는 김경주꺼!'그랬듯이 말이지요. 그만큼 '미인'이라는 말은 박준시인의 시를 통과하면서 기존에 갖던 미인의 이미지를 전복했습니다. 미인은 아름답기보다는 슬프고 그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에게도 미인이 있습니다. 벌써 십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내겐 아프고 슬프고 그립고 미안한 이가 있습니다. 최근에야 꿈을 꾸지 않지만 저 역시 꿈 속에서 미인을 만납니다. 미인은 꿈속에서 더 곱습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면 솔직히 힘든 마음이 들어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십 년쯤 흐른 뒤에서야 사람들에게 미인의 이야기를 꺼내놓곤 합니다. 슬픔을 자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것은 꺼려집니다. 내가 왠지 미인을 이용하는 것 같아 슬픔은 그저 내가 감내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미인을 이토록 시집 한 권에 가득히 담아놓은 것을 보고나니 미인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더 바꾸기로 했습니다. 보고싶어하고 추억하는 것,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것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대하기로 했습니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굳이 강조하는 것은 미안함 때문이겠지요...나만 너무 행복하면 안될 것 같은 마음. 그 마음이 그리움을 가릴 수 없어 내가 아직 당신을 생각한다는 그 마음만은 말해도 되지 않느냐? 허락해 줄 수 있겠냐고 묻는 것 같습니다. 미인은 허락하겠지요? 그의 미인도 나의 미인도.

 

편견은 복면가왕에서만 던지는 것은 아니어야 하겠지요? 처음에 가졌던 시인의 나이와 시의 간극에 대하여 가졌던 편견은 이제 많이 사라졌습니다. 시인은 이제 결혼을 하였고 수줍게 농담을 던지던 젊은 남자의 모습과 좀더 어울려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바라건대 다음 시집에서는 슬픔과 그리움과 미안함이 아닌 다른 것을 펼쳐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집에 대하여서는 편견에서 시작하여 호불호에 이르기까지 많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이 시집 자체는 훌륭하다는 생각입니다. 서정시와 젊은시인의 난해한 시의 그 사이에서 매우 세련되게 자리잡은 위치가 특별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생각건대 표현의 세련됨이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위에 적은 시들 외에 부분을 옮긴 시들도 적지 않아 몇 편을 추려 소개해 봅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나요?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아이와 카페를 찾았습니다. 혼자 올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남편에게 두 아이를 보게 하는 것은 양심상 그럴 수 없었는데 시를 옮기고 이렇게 리뷰를 쓰는 동안 아이는 옆에서 만화책도 읽고 끄적거리기도 하고 연산문제를 풀기도 합니다. 아이는 지루해하면서도 행복해합니다. 문득, 아이가 슬픔을 알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 시작이 시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진짜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대한 늦게 주고 싶은 것이니까요. 미인의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미인의 마음을 알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그 사이에서 쉬는 시인의 숨소리가 저는 다만 좋았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그리고 나의 슬픔을 미인이 허락하였으니 고운 자랑거리로 품고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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