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집의 경우에는 목차에 가득한 수많은 책의 제목을 읽고 나면 왠지 그 책 조차도 다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러한 목차는 독자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반면 그 책을 읽는 데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작년 한 해 그러한 책들을 적지 않게 읽은 터라 이 책이 그런 목차를 갖고 있었더라면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 책 읽기를 마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목차가 매우 단순했고, 그것은 독자인 내가 이 책을 서평집으로 보기 이전에 책으로 보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각 장의 제목들도 명쾌하고, 감각적으로 배치된 모양새가 참 예쁘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 중 가장 큰 것은 상쾌하다는 점이었다. 서평집을 읽다보면 어떤 작가들은 자신들이 책을 많이 읽고 썼다는 자만에 빠져 젠 체하는 경향이 있곤 하는데 이다혜 작가의 책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세어 보진 않았지만 100권이 넘는 서평들을 읽으면서도 뒤끝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게다가 책을 먼저 읽은 사람으로서의 팁까지 주니 얼마나 고맙던지. 뭔가 욕심 내지 않고 진심으로 쓴 작가의 추천들은 신뢰감이 생겨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많이 늘어났다.
가령,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에 대한 서평을 읽으면서 내심 '이건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따라한 거 아닌가?'하는 무식한 생각을 했는데 이내 그 전후 관계를 알려주었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도 정말 재미있게 읽은 터라 그 책에 영향으르 준 <잠자는 미녀>라는 책이 많이 궁금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다른 소설들 (이 책에서 언급된 <손바닥 소설>도 물론 포함하여)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도 코맥 매카시이 '국경 삼부작'을 다 읽지 못하겠다면 두 번째인 <국경을 넘어>만 읽으라는 팁이나, <뉴요커>의 '소설' 팟캐스트(아마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과 유사한 팟캐스트가 아닐까?)라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한 고급 정보도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 정보를 주면서도 절대 젠 체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좋다.
수많은 책들의 서평이 실린 책이지만 각각의 서평은 사적이면서 매우 짧고 어렵지 않다. 사적이고 어렵지 않다고 해서 혼잣말이라던가 가볍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현대의 독자는 그런 의미에서 불운하다. 작품을 작품으로 만나기 전에, 차고 넘치는 말의 홍수 속에서 그 작품에 대한 언어의 감옥에 갇히고 말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포함해 각종 리뷰나 평론들을 요행히 피한다 해도, 책 표지의 홍보문구에, 길거리 광고판에 노출되는 일마저 피할 도리는 없다. (28-29쪽)
어떤 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무조건 따라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 이렇게 주장이 강한 책을 읽을 때 일수록 읽는 사람의 생각하는 힘이 필요하다.(291-292쪽)
라던가
부모는 수만 가지 방식으로 아이들의 정신적 상처의 근원이 될 수 있다. 부모가 보이는 숱한 변덕(일관성 없는 양육환경), 아이에게 신체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 해도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는 가정폭력(때로 살인으로 이어지는), 양육상의 편의나 병적 무관심에 기인한 극한의 환경(벽장이나 개 우리에 갇혀 자라는 경우)이 그런 예다. (108-109쪽)
하는 부분들은 작가가 작가이기 이전에 이 그 자신이 독자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임을 말하여준다. 작가이되 독자인 독특한 위치를 가지는 서평인으로서 가지는 특성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특히나 그녀의 문체가 독자에게 무엇을 알려주려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것 같아 뒤끝이 상쾌한 것 같다.
작가와 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독서 취향을 가지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유독 일본 작가의 책들이 많은데 나는 일본 작가의 이름은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아주 유명한 작가의 책 밖에 읽은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독서 후 리뷰를 쓰는 습관이 있어서 그런지 유독 관심을 가지며 책을 읽었다. 몇 몇 권들은 장의 제목에 좀 안어울리는 것 같아 빼거나 위치를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은 읽는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것 같은 아주 사소한 의문 사항이었고,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책 한 권 나도 쓰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다.
내 오래된 습관 중의 하나가 책을 읽으면 리뷰를 쓰는 것이다. 세어보자면 꽤 많은 리뷰들을 썼겠지만 그것의 독자를 '나'로 한정하여 썼기에 그것들을 꾸역꾸역 묶어 집에 보관하고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존에 '나'로 독자를 한정한 것에서 벗어나 '불특정 다수'를 독자로 정하여두고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리뷰들이 태반이지만 2013년,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아직 정하지 못했던 때에 이 책을 만나 한 해의 독서 계획을 세워볼 수 있었다. 아, 책 읽기 좋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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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임1 <<책 읽기 좋은 날>>을 통해 읽고 싶어진 책의 목록>
<잠자는 미녀> <좀비들>
<스타일 나라의 앨리스> <명탐정의 규칙> <손바닥 소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 송광사 새벽 예불을 엄마에게 선물해 주고 싶다.
<아Q정전> <새엄마 찬양> <어젯밤> <달리기>
<전망 좋은 방> <이십 억 광년의 고독>
<옆 무덤의 남자>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
<붙임2 내가 2012년에 읽은 책을 이 책의 소제목에 따라 한 권씩만 추천한다면?>
당신 살아 있나요? - 삶은 가능성. <나는 가능성이다>
긍정이 뒤통수 칠 때 - 나도 이 책을 추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피로사회>
매끄러운 사회 생활을 위하여 - 호어스트의 유머를 배우자! <서두르지 말고 인생을 안단테>
슬픈 날에는 슬픈 음악을 - 가끔은 깊은 슬픔에 빠지는 것도 좋다. <고통>
누군가 내 삶에 끼어들었으면 - 난 우물 안 개구리일 뿐. <꿈꾸는 자 잡혀간다.>
오늘 밤도 분홍분홍해 - 이런 책을 별로 안읽어서 =^^= <막다른 골목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