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한 사람이 말해. "나는 점점 아버지처럼 되고 있어. (중략)"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해. "나는 점점 아버지와 [다르게] 되고 있어. 나는 개가 되고 있어. 미래는 아마도 나를 추하게 만들 것이고, '가난한 생활'이 내 운명이야. 그러나 나는 인간이든 개든, 화가가 될 거야. 요컨대 감정을 가진 존재가 될 거야." 

...나는 너에게 말해. 나는 앞서 말한 개의 길을 택했다고. 나는 계속 개일 것이고, 가난할 것이며, 화가일 거야. 

p.296-297  

 

반 고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다르는 길. 

  

반 고흐의 서간집이 나온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좀 의아했었습니다. 이미 한 차례 열풍이 쓸고 지나간 자리니까요. 특히 예술 분야에서 한 번 유행을 탔던 주제는 좀처럼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법이어서, 출판사에서 뭘 믿고 이런 작업을 했나 싶어 (관계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_-;;) 제본 안된 본문을 훑었습니다. 

아, 이 정도였나? 반 고흐의 글이 이렇게 가열찬 느낌이었던가. 기존의 고흐 서간집들과는 달리 구어체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발췌가 아니라 전문이 수록된 편지들이기 때문에? 아니면 직접 편지를 선별해 엮고 번역하고 해설까지 꼼꼼하게 첨부한 박홍규 교수의 열정 때문에?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책의 구성이 반 고흐의 삶을 청년기부터 시간순으로 그려가고 있고(반 고흐 서간집 전집을 계획하고 있다는 박홍규 교수의 해설은 상당한 열의가 엿보이며 내용도 충실합니다), 거기에 반 고흐 자신의 목소리가 직접 그 사실들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마치 해설과 재연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듯이요. 필름이 아니라 글로 남은. 

실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반 고흐의 편지라고 하면 유명한 '돈 구걸' 이야기는 여기에서는 그저 생활의 일부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추신 같은 거죠. 대신에 편지의 본문은 

정경들-저 순진한 영탄법들,

 사랑하는 테오, 안트베르펜의 인상을 좀 더 전하고 싶어... 이곳에선 무엇이나 그릴 수 있어... 방수 천으로 덮인 상품들이 산처럼 쌓인 한구석에 흰말이 한 필 있더구나. 배경은 창고의 낡고 검은 연기로 그을린 벽이야. 정말 단순하지만, 흑과 백의 효과가 너무 분명해. 

정말 우아한 영국 풍 선술집 창을 통해 가장 더러운 진창이 보이고, 배 위로는 모피나 물소 뿔 같은 매력적인 상품이 기이해 보이는 항만 노동자나 이국적인 뱃사람 손으로 내려지고 있어. 매우 아름답고 정말 섬세한 영국 소녀가 창 앞에 서서 그것을 바라보거나,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고, 실내와 인물은 모두 명암이 분명하고, 빛으로는 -진창과 물소 뿔 위에 은색 하늘이 있어서- 일련의 대단히 격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지. (중략)

...지칠 때쯤이면- 하위치Harwich나 르아브르에서 온 기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선창 끝까지 가게 돼. 시가지를 등지고 있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 있는 것이라고는 평탄하고 반쯤 물이 찬 무한한 목초지뿐이야. 너무나 우울한 곳으로 습하고, 굽이치는 마른 갈대와 진창이 전부야. 작고 검은 보트 한 척이 떠 있는 강, 회색 물, 안개 낀 잿빛 하늘, 사막 같은 적막. 

p.363-365  *('...'은 단락 내 중략을 뜻합니다)

 

그림(누구의 것이던간에), 

귀하에게 드리는 습작은 여름 태풍이 부는 날, 밀밭 구석에 있는 나무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환류하는 대기의 파란색 속에 있는 일종의 검은 형세입니다. 그리고 양귀비의 주홍색이 그 검은 형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뒤에 보실 테지만, 이는 녹색,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검은색 바둑판 무늬의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직물의 색조 조합과 다소 가깝습니다.

p.743 

어제 저녁, 나는 숲에서 썩어 말라버린 너도밤나무 잎으로 덮인, 약간 경사진 지면 위에서 그림을 그렸어... 문제는, 정말 어려운 문제는, 지면 색깔의 어두움, 그 지면의 거대한 힘과 견고함을 표현하는 거야.  

(중략) 그것을 그리기는 너무 힘들더군. 지면은 매우 어두운데도, 그걸 그리는 데 튜브 한 개 반을 썼어. 그 밖에 빨강, 노랑, 갈색, 황토색, 검정, 시에나 황갈색을 쓴 결과는 적갈색이었어. 그러나 흑갈색에서부터 짙은 와인색이나, 도리어 희미한 황금색을 띠는 빨간색으로 가는 도중이었지. 그래도 아직 이끼와 빛을 받아 밝게 반짝이는 싱싱한 풀밭의 경계를 그리는 일이 남아 있었는데 정말 그리기 힘들었어.

(중략) 이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에게 말했어. 즉 작품에 가을 석양의 느낌, 신비로운 느낌, 진지한 느낌이 나타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 효과는 시간적으로 영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서둘러 그려야 했지. 인물은 모두 몇 번의 견고한 붓질로 단숨에 그렸어. 어린 나무들이 대지 위에 어찌나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는지 정말 감동했어. 그 둥치를 붓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지면을 이미 두껍게 칠해두었기 때문에 간단한 붓질로 나무들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게 만들었어. 뿌리와 줄기는 튜브에서 물감을 짜내면서 바로 모양을 만들고, 약간의 붓질로 다듬었을 뿐이야. 

(중략) 어떤 의미에서 나는 유화 그리기를 배우지 않았던 것이 좋았다고 생각해. 

p.256-258

그리고 -특히 폴 고갱과의- 우정, 수많은 예술 작품들에 대한 감상 또는 비평("그림에서 성취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보다 이전에 베를리오즈나 바그너가 음악에서 이미 달성한... 슬픔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예술을 만드는 것이네!"), 사회와 세계에 대한 정치적 입장, 먹고 살기 위한 구차함...  마치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삶의 정수를 옮겨놓은 듯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그 모두를 집어삼키는, 그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강렬한 의지가 있지요.

자.. 그렇다면 마지막 인용을 어디서 가져올까요. 그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거의 그의 유서처럼 취급받는 907번 편지(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져 있습니다)의 유명한 문구, "내 그림, 나는 그것에 생명을 걸었고 내 이성은 그것으로 반은 무너져버렸구나." 로 할까요. 

오늘만큼은 다른 걸로 해 보겠습니다. 죽기 4년 전, 아직 청년이라 할 수 있던 '순진한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반 고흐가 잠시 살폈던 세계입니다. 

오늘 일요일은 거의 봄날이야. 오늘 아침 혼자서 공원과 대로를 비롯하여 도시 전체를 오래 산보했어. 만일 시골이었다면 종달새가 처음으로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날씨야. 

요컨대 부활의 기운이 느껴지는 무엇이 있었어. 그러나 상거래라든가 사람들 모습은 침체해 있고, 나는 최근 여러 곳에서 터진 쟁의행위로 염세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야. 

앞 세대에게 그것은 무익한 게 아니라 반대로 승리라는 점이 분명해질 거야. 지금은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여 빵을 얻어야 하는 괴로운 시절이야. 매년 더 악화되겠지. 부르주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은 200년 전 제3계급이 다른 두 계급에 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해. 지금 최선의 길은 침묵을 지키는 거야. 왜냐하면 운명의 여신은 부르주아 편을 들지 않을 테고, 우리는 곧 그것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봄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방황하고 있는지! 

p.387-388 

봄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방황하고 있는지. 바뀌지 않는 것은 작품만이 아니라 언제부턴가의 이 세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턴가가 아니면 처음부터였을지도 모르지만요. 

700여 페이지의 두툼한 분량, 깔끔한 양장 사철 제본,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해설과 각주가 달린 '서간문을 통한 전기'. 여러모로 추천해 드립니다. 초판본에는 책에 수록된 반 고흐의 스케치를 담은 작은 스케치 연습장이 함께 제공됩니다.

  

 

-MD가 뽑은 또다른 네 가지의 반 고흐

 

 

 

 

 

 

 

 

<반 고흐 효과>는 치밀하게 짜여진 '사회학' 책입니다. 무명 화가였던 반 고흐가 사후에 어떻게 '불운한 천재 예술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그 후광을 키워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대중 메커니즘-사회 시스템을 통해 접근하고 있죠. 대중들이 알아보지 못한 천재에 대한 죄책감을 대속적 발상을 통해 추앙하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그 대속 과정은 어떤 진실을 재발견하는 것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고, 불운한 천재에 대한 급격한 발상 전환을 통하여 집단적인 카타르시스-그리스류 비극 관람에 가까운-를 얻는 데 1차적인 목표가 있죠. 말하자면 반 고흐 효과는 반 고흐라는 실체를 어떻게 재발견하느냐 하는 기능적인 effect가 아니라 심리학적인 증후군에 가까운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반 고흐를 아이콘으로 추앙하도록 만든 각종 권력들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도 함께 포착되어 있습니다. 다소 난이도가 있으며, 문장도 좀 난해한 편이지만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습니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는 소설 형식을 빌어 온 전기인데요. 아마 반 고흐 관련 책들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일지도 모르겠네요. 1934년에 출간되어 고전 대열에 속하는 책으로, 팩션 소설들의 할아버지쯤 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불운한 천재 예술가'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비극과 열정의 뒤범벅을 보여줍니다. 소위 고전적인 반 고흐론이라고나 할까요. 일반에 잘 알려진 바로 그 반 고흐인데, 학술적으로 그의 '실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더라도 그 전체적인 삶의 궤적이 감동적인 것만큼은 변함이 없나봅니다. 최승자 시인의 번역은 감성적인 글(리차드 브라우티건의 <워터멜론 슈가에서>라든가)에서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책에서도 그 격앙된 낭만을 잘 옮겼습니다. 

<반 고흐 명작 400선>은 말 그대로 반 고흐의 그림을 수백 개나 수록하고 있습니다. 소위 유명 그림들은 물론, 스케치와 습작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이 함께 실려 있어요. 반 고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의 전기를 읽을 때 함께 두고 읽기에 더없이 좋은 '비주얼 가이드북' 입니다. 물론 그의 후기 작품들이 어마어마한 위업을 달성한 건 맞지만, 초중기 (특히 네덜란드를 떠나갈 무렵) 작품들의 색채 구성을 통해 인상파-야수파의 태동을 예감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특히 마로니에북스는 Taschen 시리즈를 낼 때도 그렇고, 그림의 인쇄에 있어서 믿을만한 출판사죠.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는 접근 불가능한 천재가 아닌 '고뇌하는 인간' 고흐를 분석합니다. 특히 다른 책들이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부분, 바로 그의 소년기와 청년기를 장악했던 종교적 관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종교적 열정이 고흐의 세계관 속에 사물에 대한 감수성과 영원에 대한 추구, 평등과 박애에 대한 관심을 박아넣었다는 거죠. 실제로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뒤에도 그의 편지에는 성경 이야기나 성서의 문구 인용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이 책은 그러한 종교적 열정이 반 고흐로 하여금 자신의 수난을 감내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고, 그림의 화풍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소위 '반 고흐 효과'에 경도된 책들이 고흐의 후기 작품들을 정신분열증의 창조적 폭발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를 비판하면서(반 고흐의 정신분열증 설은 그가 비극적인 영웅으로 추앙된 뒤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가 단순히 측두엽 이상에 의한 간질 발작을 겪었을 뿐, 그의 그림은 언제나 그의 삶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가치를 이루어내는 과정이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삶의 비극을 천재성으로 뛰어넘은 영웅 대신에 영원히 자신의 굴을 파고 있었던 '영원한 근성의 수도승'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난이도는 <반 고흐 효과>보다 쉬운 편입니다.

 

글이 길어져서 다른 신간들은 또 다음 시간에 찾아들고 뵙겠습니다. 행복하신 분들은 계속 행복하시고, 행복하지 않은 분들은 행복해지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망각을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진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나 <반 고흐 효과> 같은 책들이 빛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p.s.

써놓고 보니 반 고흐에 관련된 책 중에 가장 좋아하는 책을 빠뜨렸네요. 

불꽃같은 그림에는 불꽃같은 글이 가장 어울리지요. 앙토냉 아르토의 고흐에 대한 단상은 번역문인데도 불구하고 자기확신에 가득찬 언어의 압도적인 위력을 선사합니다. 그야말로 여름 햇볕처럼 작열하는 언어의 향연에 흠뻑 젖게 되죠.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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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9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9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체오페르 2009-06-01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막 피어오르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09-06-02 20:30   좋아요 0 | URL
그저 제가 감사드릴 일이죠... 좋은 책만 고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

roar 2009-06-1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저도 사서 보았답니다. 감사드려요!

외국소설/예술MD 2009-06-10 13:46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드셨나봐요. 영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