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과의 대담, 

더 깊은 책 이야기 혹은 '이야기들에 관한 이야기' 

-언제 시작할지도 모를 인터뷰를 기다리기를 한 시간 반. 동갑내기 두 명의 MD는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이미 모 사이트에서 책 얘기 다 해버린 것 같던데 어쩌나부터 시작해서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로 마무리된 두서없는 이야기. 중복된 질문들을 지워나가다가 결국 팽개쳐버린 질문지와 식은 커피, 길어봐야 30분이 못될 거라는 인터뷰 스케쥴 조정 통보. 두 청년(!)은 박찬욱 감독이 커트 보네거트를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밀어붙여 보기로 했습니다. 좀 더 '책 ' 이야기를 뽑아내 보기로, 운이 좋으면 '무엇이든' 작은 조언을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인터뷰어: 알라딘 도서팀 금정연, 최원호 

 


알라딘:
SF와 장르문학 매니아로 유명하신데요.
 

박찬욱: 특별히 가리지는 않아요. 인문사회 쪽이나 과학쪽 책들도 읽는 편입니다. 문학을 좋아하긴 하죠.

알라딘: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보니까 커트 보네거트 책들이 많아서 반가웠습니다(두 MD는 모두 커트 보네거트 광팬임). 혹시 보네거트의 작품 중에서 이게 최고다라고 추천해주실만한 작품이 있을까요? 

박찬욱: (10여초를 고민) 음... 그 분이 편차가 별로 없이 퀄리티가 좋은 분이라서 고르기가 상당히 힘든데, 하나를 고르라면 <제 5 도살장>을 꼽겠어요. 물론 작품 자체도 유명하고 좋지만, 제가 처음으로 읽은 보네거트의 소설이라서 의미가 각별해요. 

 

알라딘: 그 외에 추천하고 싶은 책을 딱 다섯 권 정도만 뽑을 수 있을까요? 

박찬욱: (다시 10여초를 고민) 음... 그 때 100권 짜리 추천도서 목록을 고른 건 커피숖 같은데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라고 생각하고 골랐어요. 좀 대중적으로. 

알라딘: 그럼 아무 조건 없이... 

박찬욱: <관촌수필>도 좋고(이 책은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도 최고의 책으로 꼽았었음), <제 5 도살장>, 카프카의 <소송>, 졸라의 <떼레즈 라깽>... 도스토예프스키가...(10여초를 고민함)...이 분 소설도 참 다 좋은데...<백치>로 할까. <악령>도 좋은데. 이건 너무 고르기 힘드네요(웃음). 말 나온 김에 7개쯤 채워볼까? 존 르 까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그리고 SF문고 시리즈 중에서 어린 시절에 제일 재밌게 읽었던 <우주선 비글호>. 

                    (우주선 비글호는 절판)

알라딘: 도스토예프스키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지인 중에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떠올랐다고 한 분이 있었습니다. 혹시 책들 중에 영화 작업에 영향을 준 작품이 있나요? 

박찬욱: 아, [복수는 나의 것]은 아까 얘기했던 <악령>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특히 숲 속 살인장면. 이번에 나올 신작 [박쥐]의 경우는 <떼레즈 라깽>. 그 외에 특별히 어떤 책을 떠올리면서 영화를 만들진 않았어요. 그냥 느낌 가는 대로 가는거죠. 

   

알라딘: 그럼 영화를 만들 때의 영감이랄까, 느낌은 어디서 얻는 편이세요? 

박찬욱: 글쎄, 다 달라요. 그게 어디서 오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데이빗 린치같은 경우에는 초월명상 같은 걸 한다는데, 저는 그런 데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때그때 다른 것 같고, 특별한 근원같은 건 잘 모르겠어요.  

 <-문제의 초월명상 매니아 데이빗 린치의 영화/인생 이야기.

알라딘: 그렇다면 소재로써 영화화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게 있나요? 

박찬욱: 코맥 맥카시의 <핏빛 자오선>을 생각해 봤어요. 제가 서부극을, 그것도 인디언이 많이 나오는 서부극을 정말 해 보고 싶었거든요. 너무 잔혹한 이야기라서 쉽진 않겠죠. 그리고 정말 좋아하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같은 경우는 실제로 판권까지 알아 봤는데 간발의 차로 누가 이미 사 갔더라구요(웃음). 아마 잘 만들고 있겠지?  

알라딘: SF나 추리물 등은 20-30대 젊은 층이 주 독서층인데요. 감독님께서도 독서광이자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장르물 팬이신데(웃음), 이 땅에 함께 있는 '장르 동지'들께 한말씀.

박찬욱: 우리나라에서 만드는 작품들, 문학이나 문화쪽 결과물들이 상당히 뛰어난 점들이 있어요. 그런데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은 역시 상상력과 지성 같은 거예요. 인생에 대한 성찰같은 지적인 작업도 상상력과 충분히 결합할 수 있잖아요. 그게 가장 잘 발휘되는 분야가 싸이-파이(Sci-Fi, SF, 과학소설)죠. 국내 창작물에 대해서는 거기에 늘 갈증을 느껴요. 그런 책들을 통해서 자극을 많이 받고, 영감을 많이 받게 되는 거니까. 상상력의 자극이 가장 필요한 젊은이라면 Sci-Fi죠.  


알라딘:
지성과 상상력의 결합이라... 가장 성공적인 작가로는 누가 있을까요?
 

박찬욱: 음, 어슐러 르 귄 여사죠. 글마다 자신의 세계를 완전히 구축한 경지를 느낄 수가 있어요. 물론 문체도 아름답고. 

알라딘: 너무 책 얘기만 한 것 같은데요(웃음). 영화 얘기도 한 번 드려볼까 합니다(웃음). [올드 보이]의 엔딩 장면에서 오대수가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우는데요. 사실은 기억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끝났다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박찬욱: 아, 그것도 어떤 책에 나왔던거죠? 뭐드라... 

알라딘: <몰락의 에티카>요. 

박찬욱: 아 신형철 씨. 나도 읽어봐야겠네. 어쨌든 저는 그 결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실례라는 생각도 들고. 중요한 건 오대수가 (기억을 지우려는) 시도를 했다는 거죠. 기억을 지워가면서까지 미도와의 사랑을 지키겠다고 결심한 의도가 소중한 거예요. 패륜적인 발상이기도 하고, 반사회적인 면도 있는데, 그런 내용은 이제 하나의 신화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니까(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인륜이나 도덕을 뛰어넘는 것이야말로 신화 속 인물들의 삶이잖아요. 최민식 씨는 연기를 할 때 최면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건 배우가 연기를 하기 위해 선택한 거고, 저하고는 상관 없는 거예요. 

알라딘: (30분 경과) 벌써 시간이 다 됐네요. 마지막 질문 드릴께요. 요즘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 꿈을 잃었거나 포기한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걸로 성과를 거두신 입장에서 조언을 한마디 해주실 수 있을까요? 

박찬욱: 글쎄.. 조언이라. 특별히 제가 무슨 충고를 하기보다는 영화 하나 소개해 드릴께요. 서울 아트 시네마에서 씨네마떼끄의 친구들이라는 영화제를 하는데(영화제는 3/1 까지입니다), 거기 개막작이 [선라이즈]라는 무성영화예요. 가뜩이나 사는 것도 힘든데 무슨 영화냐고 할지 몰라도, 한 번 그 영화를 봤으면 좋겠어요. 온갖 고생과 난관을 뚫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는 열정, 힘을 느낄 수 있어요.  

알라딘: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선라이즈. 지친 청춘들을 위한 박찬욱 감독의 기습 추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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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hoho 2009-02-2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보이 마지막 장면의 웃음이 궁금했는데. 배우의 그런 의도가 있었군요.

짱미 2009-02-2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젠가 영화로 나올 "핏빛 자오선" 꼭 봐야겠네요. ^^

외국소설/예술MD 2009-02-26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ohoho님/ 그 미소의 의미는 해답은 없겠지만, 감독과 배우 사이의 묘한 갭을 알고 나니 저도 다시 보고 싶어요. ㅎ

짱미님/ 저도 박찬욱 감독님께서 만드셨으면 좋겠습니다. ^^;; 팅커테일러..는 정말 아까워요 개인적으로.

독서하는청춘 2009-03-19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인의 서재에 나왔던 만큼 책도 정말 사랑하시는 거 같습니다.
앞으로 나올 영화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