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12세인 큰아이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사춘기가 찾아오지 않아 여전히 세상에서 최고 좋은 사람이 엄마이고, 간혹 잔소리를 하긴 하지만 엄마가 다 저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고 더불어 함께 믿고, 엄마하고 수다 떠는게 너무 즐겁다고 말해주는 아이이다. 이 애의 특이함(??)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그 중 흉은 아니지만 화제로 올리면 재미난 것 하나만 말하자면 입맛이 너무너무 토속적이라는 거다. 주위 어른들이 아이 입맛을 두고 한 마디로 딱 잘라 표현하는데 그 말이 재미있다. 기사식당. 기사식당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그 메뉴가 바로 이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스타일의 식단이기 때문이다. 그 별난 입맛이 이미 두 살때 증명됐는데, 그것도 순대국밥집에서였다. 어른들이 먹고 있는 시뻘건 국물을 보고 입맛을 다시더니, 식사를 마쳐갈 즈음에는 저는 안 준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서 혼 좀 나봐란 심정으로 매운 국물에 밥을 말아 입에 넣어줬더니 코를 박고 그릇을 핥았던 역사가 있다.

 

초콜릿을 입이 달다고 한 조각 이상 못 먹고, 케이크는 생일날 한 번 먹으면 족하고, 고기는 한두 점 먹으면 됐으며(몹시 질이 좋은, 숯불에 구운 소고기는 예외로 하고), 최고로 치는 반찬은 유채나물 무친 것이다. 요즘 아이 치고는 나물 맛을 썩 잘 구별한다.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은 이유는 오늘 아이가 한 말이 너무 기억에 남아서인데, 그 말이 나온 배경과 말이 타고 나온 목소리의 결이 어땠는지를 이야기하려면 그 입맛을 설명하지 않고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후가 되도록 저녁엔 또 뭘 해먹어야 하나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알배추를 뜯어넣어 멸치육수에 된장과 마늘, 대파만 좀 풀어넣고 배추가 흐물거리도록 국을 끓이고 매운 코다리조림을 만들었다. 점심에 떡볶이를 과하게 먹어서 속이 안 좋다던 아이는 저녁 밥상을 보고 반색을 하더니 축 늘어진 배추를 호로록 호로록 연달아 건져먹었다. 그러고선,

 

엄마, 5학년때 학교에서 순우리말로 맛을 표현하는 여러 종류의 단어를 배우거든요? 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랬었구나, 근데?

거기에 달보드레하다는 말이 나와요.

아, 엄마도 그거 알아. 어감도 되게 예쁘지.

근데요, 지금 이 배추 맛이 딱 그거예요. 설탕 같은 걸 넣어서 낸 인공적인 단맛은 하나 먹으면 끈적거려서 더 먹기 싫거든. 근데 배추가 되게 달아. 이게 바로 달보드레한 이야.

그러고선, 엄청스레 행복한 얼굴로 한 그릇을 싹 비웠다.

 

올 겨울방학에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이미 정해놓고 열심히 독서하고 있지만, 오늘 있었던 작은 일로 사전도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어졌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멋진 책도 있고,

 

사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쓴 훌륭한 책도 있다.

 

아래의 두 책은 지금 나이로 읽기엔 여러가지로 어렵거나 조금 이르거나 한 구석이 없지 않아서 좀 나중으로 미뤄야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지... 저녁 먹으면서 네가 했던 짧은 한 마디로, 이런 책들을 또 이렇게 얼기설기 모아봤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어쩌면 질린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고, 엄마 정말 못말려 하면서 피식 웃을지도 모르고. 설마 이걸 나더러 다 읽으라는 건 아니지? 할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엄마는 오늘 네가 관념의 세계 어딘가에 머물러 있던 단어 하나를 현실로 만난 순간의 감동을 아주 오래오래 간직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구나, 라는 걸 깨닫고 얼굴에 함박미소를 떠올린 네게 이런 행복한 배움이 많아지기를, 학교에서, 책에서 머릿속에 심어 준 많은 씨앗들이 실제로 떡잎을 내미는 때는 바로 이런 순간들이라는 걸, 이게 진짜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좋겠다. 현실에서 진짜를 발견하는 그 기쁨을, 너도, 다른 아이들도 많이많이 누릴 수 있기를. 그건 아이들의 특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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