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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푸드 -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ㅣ 소울 시리즈 Soul Series 1
성석제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소울푸드란 무엇인가?
소울뮤직도 있고, 소울메이트도 있으니 소울푸드라고 왜 없겠는가.
그래도 소울푸드. 그리 낮설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이책을 손에 들고서야 과연 그렇겠군.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소울푸드란 말하자면 유난히 집착하게 되는 음식. 그것이 불량식품이든, 양영식품이든 나에게 힘을 주는 음식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책은 나름 읽을만하다. 21인의 각계 명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그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그냥 편하게 잠자기 전, 서너편씩 읽다가 자기에 좋은 책이다.
그런데 솔직히 다소 삐딱한 성격인 나는, 누구만 입인가? 이런 책을 굳이 명사들만 소개하고 있게. 뭐 그런 상대적인 불만 같은 것이 없지 않았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더니 이 말을 생각하기에 딱이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은 뭘 잘못 먹어서 드는 생각인지 모르겠다. 성격이 그래서라기 보다 먹는 음식에 살짝 돌리고 싶어진다. 왜 좀 마음이 그득하고 넉넉해서 모든 것을 예쁘게, 너그럽게 봐줄 수는 없는 걸까? 뭔가 기가 약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영혼과 육체는 밀접해서 기는 마음이나 생각을 다스린다고 해서 생겨지는 것은 아니고, 음식을 통해서도 그것을 보호하고 보충해 줘야만 할 때도 있다. 그러니 살기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하는 질문은 그 자체가 필요가 없는 질문일 것이다.
책소개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TV 드라마 같은데서도 종종 클리셰처럼 차용하는, 동대문에서 뺨 맞고 남대문에서 화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 와서 양푼에 밥 두 공기쯤 넣고 있는 반찬, 없는 반찬 다 넣고 고추장에 비벼 우걱우걱 씹어 먹는 비빔밥은 그 먹는 모습만 봐도 뭔가 풍만한 마음을 갖게 한다. 왜 그렇게 동대문에서 뺨 맞으면 꼭 집에 들어와 비빔밥을 먹을까? 이건 아무래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장면일듯 싶기도 하다. 다른 미드나 일드를 보라. 누구가 뺨 맞았다고 집에 와 비빔밥을 먹나. 비벼 먹는 것 자체도 없거니와 설혹 있다고 해도 우리나라 나물류가 없으니 뭘 넣고 비빌텐가? 스테이크에 감자, 옥수수, 스프 등을 양푼에 넣고 비빌 것인가? 그럼 개밥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물 넣고 비비는 비빔밥은 역시 우리나라 최고의 음식임에 틀림없고, 그것 다 먹고 트림 한 번 하고, 커피로 입가심하면 속상한 건 잠시라도 잊을 수 있다. 그러니 이 또한 소울푸드로 손색이 없다.
밥성애란...?
하지만 난 밥성애가 나의 소울푸드라고 말하고 싶다.
밥성애가 뭐냐구? 밥과 모성애를 합친 말하자면 (리뷰를 쓰느라 급조한) 내가 만들어낸 신조어다.
살면서 위기의 순간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래된 이야기지만, 역병과 같은 IMF를 우리집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그 무렵 무슨 정신이었을까? 오빠가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사업을 늘렸다 쫄딱 망해 먹었다. 그것을 가장 늦게 안 건 나였다. 무슨 얘긴가가 오빠와 엄마, 동생하고만 오고 갈뿐 나를 따돌리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뭔가 덜미가 잡혔고 그제서야 내막을 알게 되었다. 속이 상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 시간을 엄수하는 나의 배꼽시계는 울리지 않았고, 밥이고 뭐고 먹을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이대로 굶어죽어도 모양새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는데, 마침 집엔 아무도 없었다. 엄마도 속이 상하니 이모네를 가셨던 것 같고, 그렇게 혼자 얼마를 울었을까? 울고나니 기운이 빠졌고, 조금 더 있자니 허기가 몰려왔다. 나는 할 수 없이 주방으로 나와 밥을 차려 먹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때 먹은 음식이 먹다 남은 음식 쓸어넣은 비빔밥은 아니었다. 그냥 늘상 먹던 밥상 그대로다.
엄마는 필시 내가 어느만치 울고나면 밥을 차려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전날까지 보지 못했던 반찬 한 두 가지가 더 추가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밥을 먹고났더니 속이 한결 편해졌다. 배가 든든해지니 마음도 편해졌다. 이대로 굶어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아플 때도 먹고 앓는 체질이라, 흔히 속상할 때 곡기를 끊는 사람을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굶어 죽기까지는 하지 않겠지. 그저 밥을 안 먹고 있는 시간이 나는 짧은데 비해 어떤 사람은 긴 사람이 있다는 차이 정도겠지.
물론 그때 밥을 먹고 속이 든든해졌다고 해서 당장 오빠나 엄마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아니다(그렇게 된데는 엄마의 책임도 일부 있었다. 자식이 많으면 어느 한 자식만을 위해 줄 수 없는 것이 부모된 마음의 고충일 것이다). 속이 든든해졌다고 해서 선한 마음만 갖게되는 것도 아니고, 미워하는 것도 기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음식은 착한 마음도 갖게하지만, 미워하는 마음에 유용한 땔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그래도 나의 육신을 낳고, 평생 때 굶지 않게 해 준 엄마는 차마 미워할 수 없더라. 가끔 짜증은 낼 지언정.
밥이란 참 묘한 구석이 있다.
매일 먹으니 질린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끔은 지루하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하루 세 번 먹는 때거리 중 점심은 밥을 먹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하루 삼식을 다 밥으로 채우면 웬지 모르게 부담스러워 점심 정도는 다른 것을 먹게 된다. 이를테면 빵이나 떡, 고구마, 국수나 라면 같은 포만감을 줄 수 있는 간식으로.
어쩌다 생각지도 않게 점심을 그런 간식거리로 채우고 저녁을 바깥에서 먹게 됐는데 그것이 공교롭게도 밥이 아니고 다른 먹거리였다면, 그 다음 날 아침 밥상을 받았을 때 밥의 목넘김은 마치 추울 때 따뜻한 이불을 덮는 것만큼이나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그제야 밥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체해서 내내 밥을 못 먹고 있다 막힌 것이 뚫려 식욕이 동할 때 먹는 밥도 같은 것이다.
밥은 또한 나의 엄마다.
맛을 깨닫는 것은 내가 미맹임을 깨닫는데서 부터 시작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까지 늘상 엄마가 해 주는 밥과 반찬만을 먹었던 어린 나는, 아랫방에 세들어 사는 아줌마의 반찬이 정말 맛있다는 걸 알았다. 어느 날은 아주머니가 앞서 말했던대로 양푼에 밥을 비벼 먹는데 나도 모르게 그 앞게 가 앉아 언제쯤 한 숟깔 퍼서 나의 입에 넣어줄까 침이 나올 정도로 기다렸다. 그 아주머니가 푼 밥숟깔은 탐스럽기도 하거니와 윤기가 자르르 한 것이 과연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다. 그렇게 보고 있는 내가 불쌍했던지 드디어 아줌마는 한숟깔 잔뜩 퍼서 나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때 느끼던 맛은 천국을 다녀 온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미처 채 느껴볼 새도 없이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당장 안방으로 건너 오라는 것이다. 그리고 혼이 났다. 엄마가 해 주는 밥도 있는데 거지 같이 그 방에 가서 턱쳐들고 있다고. 난 그저 본능이 시켜서 했을 뿐인데 거지라니. 엄마는 평소 거지를 3대 악인 중 한 사람으로 취급할 정도로 쇄뇌 교육을 시켜왔다. 오죽했으면 문지방에도 못 서게 했을라고. 거지된다고.
그런 말을 들은 내가 또 아랫방을 갔을리 만무했지만, 그건 지금 생각해도 잔인한 처사인 것 같긴 하다. 같은 음식이라도 집집마다 하는 방법이 다르고 맛이 다른데 자꾸 이집 저집 먹어봐야 미맹을 깨치고 우리집 음식이 좋으면 얼마나 좋은지, 남의 집 음식이 다르면 얼마나 다른지 알 것이 아니겠는가. 당시 엄마는 문중에 음식 솜씨 좋기로 정평이 나 있긴 했지만, 의인이 자기 고향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엄마의 음식 솜씨는 우리집에선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는 편이었다. 남들이 손가락을 쪽쪽 빨며 먹는 엄마표 음식은 우린 그저 덤덤하게 먹을 뿐이니까. 그러다 어쩌다 남의 음식을 맛볼 기회가 있으면 그때야 비로소 겨우 인정해 줄 정도였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겠지만, 밥은 엄마와 뗄레야 뗄 수 없가 없다.
학교 다니는 자녀가 있는 경우 지금은 급식들을 하겠지만 나 때는 그것이 흔한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 밥을 해서 네 사람 분의 도시락을 싸야만 했다. 그것만도 황송할진데 엄마는 도시락 반찬에 꽤 공을 들여야 했다. 어쩌다 남들은 없어서 못 먹을 김치가 도시락 반찬의 전부면 차라리 밥을 굶었으면 굶었지 가져가지를 않았으니까. 우리가 없는 집 아이라면 그도 이해하고 가져가겠지만, 없는 집도 아닌데 창피하게 그걸 어떻게 가져가냐는 것이 우리의 한결 같은 주장이었다. 그땐 그게 엄마를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어떤 땐 엄마도 짜증이 나는지, 다른 집 자식들은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만 싸 가져가도 공부만 잘 하더라. 늬들은 뭐냐? 푸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누구도 해당사항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엄마를 힘들게 만들고 장성했으면 남들만치 번듯하게 사는 모습도 보여 드려야 하는 건데, 가끔 이렇게 살 줄 알았으면 그때 싸주는대로 가져 갈 일이지 무슨 앙탈을 그렇게도 부렸을까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우린 엄마 덕에 잔병치레도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란 편이다.
거기엔 철마다 제철에 맞는 음식을 먹도록 해 주셨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그중 벌써 20년 가까이 해마다 겨울이면 먹는 음식이 호박죽이다. 호박죽엔 호박이 주원료가 되겠지만 이것 역시 밥이 되는 쌀이 들어가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정확히는 쌀가루다. 그리고 세알은 짭쌀가루로 만들고. 동지에 먹는 팥죽 보다 우린 이것을 더 좋아한다. 한때는 이것이 너무 맛있어 겨울 한철을 나는 동안 큰솥으로 두 번을 해 먹은 적도 있다. 그러면 사나흘을 밥도 먹지 않고 그것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다. 그것도 지금은 한 해에 한번 밖에는 먹지 않는데 아무튼 우린 그것을 먹어야 겨울을 낫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 호박죽을 좋아한다.
이렇게 소울푸드는 허기를 달래줄뿐만 아니라 영혼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한 해 크게 아프지 말고 잘 넘기라는 엄마의 간절한 바람도 함께.
나의 고민
책 간간이 보여주는 아우일의 그림이 좋다.
그의 그림은 익살스러운 것도 있지만 약간 도회적이면서도 쓸쓸함이 베어있어 묘한 매력을 풍긴다.
무엇보다 한 쳅터가 끝나면 글쓴이의 소개가 나오는데 평범하게 쓴 것도 있지만, 어떤 이의 소개는 정말 재밌다. 예를 들면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쓴 이화정 씨 같은 경우, 오늘 놓친 나의 한끼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모토로 언제나 즐거운 식사가 삶의 에너지가 된다고 주장하는 맛의 원더우먼......(56p)는 정말 재밌다. 이런 식의 자기 소개를 재밌게 한 필자가 몇은 더 있다.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 보면 글쓰기 고수일 텐데 정말 부럽기도 하거니와, 난 아직 그 경지는 아닌 것인지 도무지 나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젬병이다. 왜 비싼 밥 먹고 그런 것도 못하는 것일까? 밥을 얼마나 더 먹으면 이렇게 재밌게 쓸 수 있을까? 안타깝기도 하고, 질투도 난다. 지금부터라도 고민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또한 아직도 배를 곪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소울푸드냐고 역정 같은 역설로 풀어낸 한창훈 씨의 유려한 글솜씨도 해산물의 신선함 만큼이나 알싸하다. 강추할 것 까지는 못되지만 혹시라도 읽을 기회가 온다면 그냥 흘려 보내지 말고 붙들어 보라고는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