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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어린시절, 나의 여름은 논 기억 뿐이다. 공부는 팽개치고 소꿉놀이, 물놀이, 봉숭아 물 들이기 등 어떻게 하면 밖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그런 연구만 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나의 여름 추억 한가지가 섬뜩하게 다가오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이 된 나무위의 아지트 때문이였다. 너무나 평범한 나무였지만 그 평범함은 어느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었기에 더 섬뜩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다면 한번쯤은 나무 위를 올라가 봤을 것이다. 나 또한 동네 동생과 자주 오르던 야트막하고 가지가 편안한 소나무를 한그루 알고 있어서 자주 오르곤 했었는데, 그 나무 위에서 누군가를 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야요이는 사쓰키를 밀어 버렸다. 자기 오빠를 좋아한다는 이유 만으로.
단순히 사건의 발단이 된 곳이 나무위이고 시골이라는 데에서 오는 공통점으로 섬뜩했던 것만은 아니다. 책 속의 배경이 내가 자주 오르던 나무와 비슷했다고 해도 내가 놀랬던 건 긴장감 때문이였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어린 아이들이다. 그렇기에 충동적인 질투심에 야요이가 사쓰키를 밀어 버렸다고는 하지만 사쓰키의 사체를 대하는 야요이와 켄 남매는 어린애 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순간 겁을 먹고 사스끼의 죽음을 숨기려는 마음은 이해가 가나 너무도 태연한 켄의 모습과 심리는 섬뜩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살펴도 사쓰키의 시체를 숨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린 아이들이 사체를 숨기는 일은 한계가 있을 터, 긴장감 있게 흘러가는 어린 남매의 사체 숨기기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순간의 위기와 대상의 낯섬이 때로는 부족하게 다가 오기도 했지만 저 아이들의 죄를 숨기기도 전에 더 큰 위험앞에 서 있는 그들을 보면서 여운은 더욱 더 으스스하게 남았다.
이책에는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외에 '유코'라는 단편이 실려 있었는데 전편에 비하면 무난하게 흘러 간다고 생각했다. 식모로 들어온 키네요의 시각으로 펼쳐지는 도리고에가의 모습은 평범했다. 단, 아직 한번도 본적이 없는 마사요시의 부인 유코를 제외 한다면 말이다. 키네요는 식모로 들어왔지만 다정다감한 주인 때문에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 갈수록 유코에 대한 의문은 증폭되어 가고 자신만의 추리를 해가며 유코를 의심하게 된다. 키요네는 분명 주인이, 없는 부인을 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는 것이라 생각했다. 집에서 멀지않는 대밭의 무덤이며, 사모님은 2년전에 돌아가셨다는 주변 이야기도 그렇고, 키네요는 주인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주인을 보며 키네요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궁금증도 일고 주인과 유코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 주인의 작업실에 들어 갔다가 유코라고 불리우는 인형을 본 것이다. 키네요는 슬픔에 빠진다. 또한 주인을 구하고 싶다. 그래서 주인이 멀리 간 사이에 키네요는 인형을 불태워 버리고 만다. 마사요시가 돌아왔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인형이 아닌 진짜 사람 유코는 불에 타서 죽은 후다. 마사요시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키네요가 집에서 열리는 열매를 먹고 환각상태를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아픈 유코를 인형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전편에 비하면 후편은 잔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이하면서도 평범한 이야기는 반전을 만나면서 180도 달라지는 양상을 보였다. 도저히 17세의 나이에 썼다고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 들이다. 전편에서 어린남매의 시선도 그렇고 반전을 가미하는 '유코'에서도 그렇고, 'zoo'를 먼저 읽고 이 책을 대했지만 저자는 이런 장르에 탁월한 감각이 있는 것 같다. 'zoo'는 10편이나 되는 단편이 있었고 끔찍한 모습도 많아 우울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였는데, 이 책은 초기작 두편이 실려 있어 저자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에서는 심리묘사와 탄탄한 구성이 돋보여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17세의 저자의 부족함도 조금은 엿보였지만 나의 사체를 바라보는 사쓰키의 시선을 따라가며, 나의 사체는 어디에 있는지 한순간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흘러갔기에 그들이 들키지 않길 바라는 마음까지 들었으니 저자 능력에 감탄을 보태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유코' 또한 전편에 비하면 소박 했지만 역시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였다. 한편의 기담 같아서 오래도록 생각나는 분위기의 흐름은 전편과의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분명, 이런 장르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zoo'를 읽고 이질감에 몸을 떤 기억이 나는데 한 작가의 손에서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가끔은 나의 호기심을 밀어내는 장르도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였다. 이 여름, 오츠이치의 책을 읽는다면 순간이나마 더위를 이길 수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