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지음, 원마루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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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육아와 교육에 관한 책을 읽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조바심을 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군다나 그런 책들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란게 거기서 거기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복습하는 것은 독서의 즐거움을 해친다.  육아에 정답이 있는가,라는 회의도 든게 사실이다. 아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나는 정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다. 넘치는 사랑 말이다. 되돌아보니 사랑만을 주겠다는 각오는 빗나가고 말았다. 사랑뿐만 아니라 상처 또한 준 것이 사실이다.  왜 어른들은 사랑하면서도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걸까.  내 잘못을 되짚어보고자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포이에마,2014)를 읽었다.


그는 영국에서 국제적 기독교 공동체 브루더호프를 이끌고 있는 목사다. 책이 큰 줄기에서 기독교적 가르침을 차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색채보다 강한 것은 지난 40년동안 수많은 부모와 아이들을 상담하며 얻은 교육과 양육의 지혜였다.  그의 이력에서 특별한 것은 1999년부터 전신마비 사고를 당한 뉴욕 경찰관 스티브 맥도날드와 함께 `폭력의 고리끊기'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선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힌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상대로 용서를 통한 화해의 메세지를 전한다.  다양한 경험과 상담 사례가 아이들의 양육에 관한 평범하지만 진심이 담긴 저자의 가르침으로 승화한다. 


아이는 질책보다 용서가 필요한 존재며, 미움이 아닌 사랑받아야할 개체다. 이것이 양육과 훈육의 기본 원칙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아이를 망치는 것은 어른의 욕망이지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가 어른의 스승으로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종교적인 수사가 아니다. 아이가 그릇된 길로 나아가는 것은 어른을 흉내내서다.  아이는 따라하기의 천재들이다. 결과를 놓고 질책하는 것은 주객전도라 할 수 있다. 오염된 세상은 어른이 만드는 것이고,  그 세계에 자연스럽게 물든 이들이 바로 아이들이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아이들을 용서하고 흔쾌히 보듬어야 하는 이유다.


" 과잉 인구가 지구를 파괴한다는 전문가들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지구를 파괴하는 건 탐욕과 이기심이지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이 우리의 선생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복잡하기만 한 세상에서 우리 어른은 아이들만 줄 수 있는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7쪽,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학업성취도를 보이는 핀란드에선 아이가 일곱 살이 되어야 공부를 시킨다. "이들 국가의 교육자들은 일곱 살까지 아이들이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노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고도 그들은 학교를 졸업할 때쯤이면 학업 성취도가 세계 상위권이다. 유치원부터 조바심을 내고 아이를 들볶는 한국 상황과는 여러모로 비교된다.  교육이란 획일적인 가르침이기 마련이다.  획일성은 창의성의 건너편에 있는 말이다.  일곱 살 이전의 아이는 놀면서 가장 많이 배운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아이가 자유롭게 노는 일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부모들은 자녀를 창의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방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맞벌이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 부족한 시간을 보상하는 방법으로 자녀들에게 스마트 기기를 선물한다. 바쁜 부모와 시간을 보낼 일이 없는 아이들은 컴퓨터와 테블릿 피시를 조작하는 일에 익숙하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최신 전자기기를 자유롭게 조작하는 일을 빠르게 배우길 소망한다. 최신 기술도 공부의 일종이라 믿기 때문이다. 반면, 캘리포니아 로스앨터스에 거주하는 구글, 애플, 휴렛패커드의 경영진 자녀들은 발도로프 학교에 다닌다. 발도로프 학교에선 첨단 기기만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교육 자료로 환영한다. 펜과 종이, 뜨개질바늘, 가끔은 진흙도 등장한다. 컴퓨터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다. 첨단 기술 기업의 경영자들이 자녀를 컴퓨터로부터 보호하는 학교를 선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컴퓨터 엔지니어 출신의 교사 캐시 와이드는 배움을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손에 잡힐 수 있을 정도로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다. 작년에 캐시는 산수 시간에 분수를 가르치기 위해 학생들에게 음식을 자르게 했다. 사과, 케사디야, 케이크를 4분의 1,  2분의 1,  16분의 1로 잘랐다. `4주 동안 분수로 먹고 살았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다 돌아갈 수 있게 케이크를 자를 때 아이들이 딴짓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교실을 첨단 기술로 가득 채우는 정책을 옹호하는 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경쟁하려면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항변하지만, 발도로프 학교의 부모들은 되레 묻는다.  `그렇게 배우기 쉬운 컴퓨터를 뭐 하러 서둘러 가르쳐요?'"  74-75쪽


아이의 양육 과정에서 갈등을 겪는 부모들은 순전한 사랑과 엄격한 훈육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 것인가로 고민한다. 모든 부모는 사랑이란 감정을 훼손하지 않는 채,  아이가 잘못된 습관과 행실을 고칠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런데, 사랑과 훈육을 결합하기가 쉽지 않다.  내면의 사랑을 외부의 엄격성으로 드러내기 마련인, 훈육 과정은 아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며 정답에 가까운 조언을 건넨다.  "아이를 훈육하기를 두려워마라. 하지만 아이가 미안해하는 걸 느끼는 순간 즉시 완전히 용서하는 걸 잊지 마라"(119쪽)  유년을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눈치가 빨랐고 영리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지적당하지 않아도, 아이들이란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마련이고 질책 당할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질책이 아니라 사랑이다.  잘못을 고백하는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란 진심을 드러내는 최고의 훈육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독일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귀로 Der Weg zuriick>가 소개 돼 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직후, 한때 시골 학교 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시기의 짧은 기억을 소재로 훗날 <귀로>라는 소설을 집필한다.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듯한 이 작품은 비참하고 잔인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교사가 해맑고 순수한 아이들을 맞대고 선 교탁에서, 어른들의 잘못된 욕망과 범죄로 물든 세계를 반성하는 모습이 잠시 등장한다. 소설 속 교사의 모습으로 화한 레마르크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이 끔찍한 시대에도 홀로 죄악에 물들지 않고 순전함을 지킨 너희 작은 생명에게 나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166쪽)   야만적인 전쟁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그는 자신과 우리의 문명이 유년의 밝은 빛을 띄는 아이의 순수성을 오염시키지 않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끝난다.


" 경련이 온 몸으로 퍼져 마치 돌처럼 굳어가는 것만 같다. 이러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간신히 입을 연다. `아이들아, 이제 가거라 오늘 수업은 없다. ' 내 말이 진담인지 확인하려고 어린아이들이 나를 살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말한다. `그래, 맞아. 오늘은 가서 놀아라.  하루 종일. 숲에 가서 놀든지, 개나 고양이와 함께 놀려무나.  내일까지 학교에 돌아올 필요는 없다.' "  166-167쪽


"우리 아이가 이렇게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을 한 때 열심히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에선 어떻게든 아이를 어른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교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프로그램의 말미에선 아이가 교정되고야 만다.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는 것은 어른의 책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조급한 것은 아니지 되돌아봐야 한다. 이 책의 저자라면 아마도, 보다 더 많은 인내와 대담한 용기를 부모에게 요구했을 듯하다. 그리고 좀 더 참아주고 인내하지 않았을까. 아이가 어른의 사랑과 인내에 보답하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아이가 잘못된 습관과 못된 행실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어른의 책임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아이가 바뀌길 희망하면서, 우리 자신을 바꾸지는 않는다. 


말로써,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치지 말고 행동으로 어른이 본을 보이는 것은 어렵다. 교육과 양육이 어려운 것은 어른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이상적인 욕망과 형태를 투사하기 때문은 아닐까?  레마르크의 소설 <귀로>에 나오는 선생님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는 아이들을 볼 낯이 없는 것이다. 그가 교단에 선 것은 어른이기 때문이지 선생으로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과 욕망에 파괴된 세상이야말로 아이들의 정직과 순수함에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진정한 스승이며 거울이다. "아이는 언제나 옳다"  잘못된 것은 세상이고 어른들이다.  하여, 우리는 하루에 수십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아이들이 번번이 말썽을 피워도, 아이를 향한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저자는 "아이들에게 희망이 없어라고 체념하는 것은 본래 그들에게 희망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랑이 부족한 탓이라"고 단언한다.  자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랑이다.  그곳에서 지혜와 인내가 샘솟을 것이다. 사랑,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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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2015-05-08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답이겠지요. 좋은 서평을 읽고 깊이 공감하는 바, 메일을 드렸어요. 확인 부탁드립니다.

개츠비 2015-05-08 11:36   좋아요 0 | URL
네이버 메일로 답장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