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前사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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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제뉴스의 헤드라인를 삼키고 있는 소재들을 보라.  대부분 한국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에 관한 소식들이다.  얼마 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이 사건을 두고 네덜란드 언론은 "독일 총리가 히틀러의 무덤을 참배하는 격"이라 비꼬았단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스쿠니 신사는 2차대전의 전범들이 합사된 곳이다.  해서, 일본의 과거 총리들은 주변국 반발을 의식해 방문을 자제해 왔다. 그 앞에 서 현직 총리가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하는 것은 과거 일본의 역사범죄 자체를 긍정하겠다는 신호다.  일본의 직접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일본은 한술 더 떠, 독도를 자기영토라며 이제 교과서에서 당당히 가르치겠다 선언했다. 아베 정권이 들어선게 1년이 넘었지만,  삼국 정상이 한자리에 서본 적도 없다.  중국은 일본에 맞서 한국과 손잡고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설치했다. 중국은 또 일본과 댜오위다오(일본명:센카쿠열도)에 대한 영토 분쟁을 치르며 군사대치의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과연 21세기 동아시아의 패권을 앞에 두고 소리없는 전쟁이 진행중이다.  전쟁의 시발이 된 것은 과거사 문제였다. 1900년대 이 후, 근대 동아시아 역사가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최근작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前)사>(역사의 아침 펴냄, 2013년)가 집중한 시기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책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결코 우리가 배우지 못했던 역사의 세밀한 결에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 아나키즘 운동사, 식민지 시대 부호 열전,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동아시아 침략기, 그들의 질주와 패망을 이처럼 자세히 다룬 역사책은 없었다.  특히 이 책의 후반주가 집중해 그려내고 있는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 전략과 그것을 주도한 일본군의 성향을 알고나면, 아베 총리 언행의 역사적 뿌리와 그 위험성을 깨닫게 된다.

 

"현재 일본의 우경화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충격을 받은 일본인들이 일본 본토에서 벗어나기 위한 집단적 병리현상의 표출로도 이해할 수 있다. 방사능 오염에 대한 극단의 공포가 독일처럼 원전 해체라는 이성적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아시아 일부를 식민지배했던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5쪽, 이덕일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前)사> 

 

우리 교과서는 그간 일제 점령기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운동사를 간략히 서술하는데 그쳤다. 이데올로기에 민감한 국민 정서와 정권의 입맛에 따른 것일테다.  20세기 초에 전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이러한 이데올로기 경향이 우리 나라에선 일본점령을 벗어나고자 한, 저항운동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마르크스를 추종하고 능동적 노동계급을 양성하는 세력을 만드는데 주력한다.  또, 코민테른(노동자들의 국제조직)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전세계적으로 번져나갔지만,  레닌 이후 스탈린이 러시아를 접수하면서 사회주의가 전체주의와 민족주의 성향을 갖게 됐다.  이덕일은 일본 본토와 식민지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코민테른과 접선하는 과정, 일본의 일방적인 탄압, 또 그것이 일정부분 독립운동과 연계돼 있었다는 점을 흥미롭게 서술했다.

 

무정부주의는 `사회주의를 지향했지만, 좌파 전체주의를 공격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형제이자 적'이었다. 아나키즘 운동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였다.  일본정부는 이념에 치중한 사회주의 운동가들보다는 이념을 모태로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치 않았던 아나키스트들을 더 무서워했다. 그것을 증명한 아나키스트가 박열과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다.  일본 재판부는 박열 부부가 왕세자 결혼식 때 일왕 등을 암살할 계획을 수립하고 폭탄 구입을 논의한 것을 대역죄로 걸어 사형을 언도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재판에서 `일본 국가 사회제도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계급 사회란 점을 성토하고, 무지한 민중은 꼭두각시요, 나무인형일 뿐이다'고 진술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큰 주목을 받았다. 

 

1926년 3월 판결공판 때 사형을 언도받은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네"라면서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태연했고, 가네코는 판결 순간 "만세!"라고 외치며 "모든 것이 죄악이요, 허위요 가식이다"라고 덧붙인다. 그 시절 아나키스트들의 의연함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훗날 무기형으로 감형되지만 다른 형무소로 분리 이감된 아내 가네코는 23살 나이에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녀는 옥중에서 "한 번은 저버린 세상이지만 / 글 읽으니 / 가슴에 솟는 가여운 슬픔" 이란 시를 짓기도 했다.  남편 박열은 해방 후 22년만에 석방되어 조선민족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우린 일본점령기의 아나키즘 운동사에서 해방조국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일본에 맞선 용기있는 인사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육군유년학교 출신의 장교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과 관료들에 대한 불신으로 자주 쿠테타를 일으키며 일본 내 가장 강력한 군부세력으로 커 나갔다. 이 전쟁기계들은 `세계최종전쟁론'을 퍼트리며 일본 정부 위에 자주 군림하고자 했다. 이들은 훗날, 만주침략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중국 대륙을 손쉽게 접수할 것을 기대했으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국공내전으로 힘이 분산된 중국군은 훗날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을 거치며, 관동군의 기세를 꺽고 만다. 이덕일은 이 책에서 `조직폭력배'에 가까운 일본군부의 성향과 동남아시아 침략전쟁의 전략을 시기별로 상세히 풀어냈다. 특히 훗날 천황 외에는 일본정부의 통제조차 받지 않았던 관동군과 군부의 무소불위 힘과 오만, 전쟁범죄의 잔혹함은 지금 되돌아봐도 그 악랄함에 치를 떨 정도다.

 

`현인신'으로 군림하며 실제적으로 폭력배나 다름없던 군부세력을 배후조정한 히로히토 천황은 전후 전쟁 책임을 일부 회피하는 비겁함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까지 일본군의 패주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 본토를 요세화하며, 최후 결전을 준비한 군부 세력에 장단을 맞춘 장본인이었다. 미군에 태평양의 일본해군이 궤멸되었지만, 일본의 전쟁기계들은 함께 죽자는 `1억 옥쇄'작전을 전략이라고 내걸며 집단 할복도 불사하겠다는 정신착란에 빠져든다. 그런 군부의 손에 놀아나며 마지막까지 항복을 미뤄 수많은 일본인을 원자폭탄에 희생시킨 이가 다름아닌 히로히토 천황이었다.

 

" 이때 더글라스 맥아더가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의 답변에 따라 `천황제를 해체하고 일왕을 전범으로 처벌'했다면 전후 아시아의 정치 지형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는 현재 동아시아 상황의 원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366쪽

 

근대는 잊혀졌다기 보다는 가르치지 않았다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아니면 가르쳤으나 그 역사교육은 지극히 부실했다. 이덕일이 풀어낸 망국에서 해방 전까지의 역사는 새롭고 흥미로웠다. 이 책의 강점은 일본점령기에 가장 왕성한 활동과 적극적인 반일 투쟁을 전개했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세력의 잊혀진 역사를 복원한 점이다. 그러한 서술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이 대립하게 된 원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듯 하다. 또, 점령기에 나름의 수완을 발휘해 부를 쌓은 인물 열전을 읽다보면 어느 시대에나 실속을 차릴 줄 아는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을 흥미롭게 살필 수 있다.  끝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가장 큰 소득은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성격과 그 만행을 추적함으로써 우리 시대 일본 우익들의 언행을 경계할 근거를 확보한 데 있을 듯 하다.

 

기시 노부스케는 2차 대전 당시 군부 파시즘을 지지한 관료로 전후 A급 전범으로 분류돼 복역한 전쟁범죄자였다. 공교롭게도 그의 손자가 다름아닌 현직 아베 신조 일본 총리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부메랑이 되어 다시 동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누구를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최근 뉴욕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일본과 한국 정부를 동시에 비판했다. "두 나라 정부의 역사 교과서 수정 노력으로 역사적 교훈이 뒤집힐 위험에 빠졌다"고 논평한 것이다. 독재와 친일 미화 논란을 불러일으킨 한국 교과서나 독도를 일본땅이라 왜곡하고 일본 전범들의 행동을 긍정하는 일본 교과서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논조다.  일방적 피해자였던 우리가 급이 다른 일본과 나란히 비난을 받는 것은 억울하다.  하지만, 외부세계의 시선은 객관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이 역사에 대해 정직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나라의 역사왜곡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이덕일의 역사에 대한 시선을 공감한다. 그는 이 평설을 통해 일본이 키워낸 전쟁기계들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했다.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군사기술만을 교육받고 자라난 일본 육군유년학교 출신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은 유년시절 잘못된 교육 탓이 크다.  그러나  오늘 일본은 자신들의 왜곡된 과거사를 다시 자라나는 일본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범죄를 저지르도록 태어난 특수한 인간이 있는게 아니라, 어른들의 그릇된 욕망과 그 사회의 잘못된 교육이 있을 뿐이다.  진정 깨어있고 싶다면 한 국가와  한 사회가 소홀히 다룬 과거를 알아야 한다.  주류 역사교육에서 소외되고 잊혀진 한 시대가 있다면, 그것은 `근대'일 것이라고 이덕일은 이 평설을 통해 문제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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