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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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몇 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이라지만,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은 몹시도 미시적인 일이다.  인간은 더불어 비속한 동물이다.  만물의 영장, 지구를 지배하는 지적 생물, 종교적 입장에선 선택받은 자로 묘사되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만년에 지나지 않으며, 그건 지구의 나이라고 알려진 45억년이나 한때 지구를 호령하던 공룡의 시대가 3억년 동안 계속된 것에 비하면, 정말 `새발의 피'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도 인류 문명은 온 우주의 진리를 독점하고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것처럼 큰소리를 치곤 했다.  특히 종교적 영역에서 중세 1천년의 시간은 인류의 지적 지평이 얼마나 허술하고, 고약한 비약을 감행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중세는 AD 392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이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 1천년간 중세 기독교는 세계를 종교적 색깔에 꿰맞추기 위해, 철학과 과학 등 모든 학문을 탄압했고, 그리스 초기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고 있던 과학과 자유로운 철학 세계의 사유를 짓밟았다.  세상은 성서적인 기준에 따라 해석되어야 했기 때문에 우주의 중심은 지구여야 했고, 그래서 태양을 비롯한 별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은 신앙이 되었다. 

지상의 삶은 천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구원받아야 할 여정이었고 과학자들의 연구는 성서의 창조 드라마에 시비를 걸면 심판을 받아야 했다. 지난 1천년은 우주의 역사에서 지극히 미약한 시간이지만,  그러한 시행 착오가 진리에 대한 인류의 각성을 가져왔다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지구라는 아름다운 인류의 터전은 종교적인 영역에서 바라는 것처럼 우주의 중심도, 유일한 행성도, 선택받은 대지도 아니었다.  지구는 우주의 수십억 은하 가운데 하나인 은하수 은하의 나선 팔 가운데 한 구석에 위치해 있는 존재 조차 미미한 태양계에 거주한다.  천상에서 가장 밝은 별인 태양이라지만, 은하수 은하에만 태양(항성: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나 그보다 큰 별들이 수천억개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구처럼 그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은 또 수조개가 있다.   

이러한 지구라는 주변부의 하찮은 행성에 발딛고 살아가는 인류는 대체 누구이며, 이 우주의 정체와 진실은 무엇일까 ?  오늘도 티뷰이 뉴스에서 순간 들려오는 온갖 개인과 사회, 세계의 문제들이란 하나 반갑고 환영할만한 게 없다지만,  우주라는 배경과 역사안에서 오늘의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사소하고, 우습지 않을까?  왜냐하면, 현미경 속을 분주히 오가는 미생물의 날렵한 움직임을 포착하는 누구든 그네들의 삶에서 역시 심각성과 진지함보다는 어떤 유머와 아이러니를 먼저 연상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양 과학서로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온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그 명성대로 인류가 지금껏 발견한 과학 지식과 지적 탐구의 역사를 해설한 책이었다. 저자 칼 세이건은 1980년에 이 책을 탈고 했지만,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이 책의 가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당시 최고의 천문학자이자 행성 전문가였던 세이건은 NASA의 자문 위원으로 보이저, 바이킹 등의 우주 탐사 계획에 참여했고, 하버드대를 비롯한 많은 대학에서 천문학을 강의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과학지식을 보급하는데 관심을 두었고, 코스모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최고의 대중적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이 책은 텔레비전 판 코스모스를 기본으로 하면서 더욱 정교하게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역사,철학, 생물학 등 모든 학문에 능통했던 저자의 해박한 글쓰기를 통해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본질'을 사색해 볼 기회를 주는 책이다. 

"우리가 지구 생명의 본질을 알려고 노력하고 외계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애쓰는 것은 실은 하나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두 개의 방편이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이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p.65 

흔히 종교적 인간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들을 `신'의 영역에 남겨둔다.  무지가 신앙이란 고귀한 이름을 달고, 경건의 옷을 입는 것이다.  때론 이것이 삶에 보탬이 되곤 한다.  대부분의 신앙은 기복신앙의 성질을 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중세 1천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미신의 해악은 순수한 과학 발전을 가로막았고 경건한 중세는 호기심 많은 인류가 탐구욕을 갖는 것조차 죄악시했다.  그리고 교회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를 마녀 심판 하듯, 탄압했다.  칼 세이건은 이 책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질문한다.  우주는 진정 창조 되었는가?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인과율을 생각해볼 때, 창조는 필연같다.  하지만, 세이건은 직접적으로 이렇게 묻는다. `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 '  흔히 종교적인 입장에서 세계는 인과율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원인의 끝에서 신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신의 존재 문제에선 인과율의 예외를 두곤 한다.  창조주는 인과율의 적용을 받지 않고, 본래 존재했다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인과율 아래서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엔 인과율을 생각할 때, 신은 대체 누가 창조했는가? 라는 이 질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이 문제에 확실히 답할 수 있을까?  세이건은 차라리 생각을 바꿔 우주의 기원에 답이 없고, 신은 항시 존재했다는 답변은 우주가 항시 존재 했다는 답변으로 대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적 관점에선 몹시도 불경스럽다.  하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이 예민한 질문을 이 책에서 마주하자마자, 세이건이 무척 용기 있는 과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하지 않는 종교인은 맹목으로 빠지기 쉽다. 창조주는 대체 누가 창조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할 줄 아는 종교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예민한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 신앙에 충실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껏 인류의 진보는 과학적 질문과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한 탐구를 통해 이어온 것이다.  교황청이 20세기에 들어서야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탄압한것에 반성문을 썼듯이, 종교는 과학이 발견하는 진실들에 빚지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특이점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신의 몫으로 떠넘긴다. 이것은 여러 문화권에 공통된 현상이다. 하지만, 신이 무(無)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p.513 

그렇지만,  칼 세이건은 과학 만능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과학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들의 자정 능력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다.  인류 문명의 역사 1만년 가운데 인류가 코스모스의 일원임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최근 100년 안의 일이다.  그리고 인류는 핵무기를 갖게 됨으로써 세계를 수천번 파괴하고도 남을 힘을 갖게 되었다.  우주 탐사선을 지구 밖으로 내보내는 모든 기술은 핵무기를 실어나르는 기술에서 가져온 것이다.  과학이 가진 양면성은 이 지구 파괴와 우주 탐색이라는 부정과 긍정의 성질을 동시에 안고 있다.   

종교에선 흔히 종말론을 들먹이지만, 지구 종말은 필연이다.  태양은 헬륨과 수소가 핵반응을 일으키며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지만,  타는 물질은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 태양은 에너지를 소실하고, 빛을 잃을 것이며 태양계의 행성들도 태양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하지만 지구의 나이만큼이나 먼 훗날의 일이다.  하지만, 세이건은 이러한 별의 탄생과 죽음이 코스모스의 일상다반사한 일이며, 지금도 우주 어느 곳에서 벌어지는 장엄한 서사시라고 단언한다.  별이 인간의 운명처럼 생과 사를 넘나들고 저 조용한 밤하늘의 별들 사이에서 수많은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놀랍고 경이롭다.  더불어, 셀 수 없이 많은 지구와 같은 행성들이 저 은하들에 반드시 있을 것이고, 지구처럼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라고 세이건은 확신한다.  

"그런데 과연 우주에 이야기할 상대가 있을까?  우리의 은하수 은하에만 물경 3000억 내지 5000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하는데, 지적 생물이 거주할 수 있는 행성을 거느린 별이 어찌 태양 하나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칼 세이건 <코스모스>,  p.595 

한달 동안 700여 페이지를 읽어내려가며 난 한 과학자의 지적 해박함에 놀랐다.  그는 천문학자지만 이 책에서 그는 인류역사와 철학에도 정통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도 어느 교회에선 성경 이외엔 다른 책은 불경스럽다며 읽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전도서에도 지식을 더하는 것은 번뇌를 더하는 것이란 말이 실려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알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중세가 갈릴레오와 같은 천문학자나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적 철학자에 의해 끝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교회는 그 막강한 힘으로 불경한 것들을 마녀 심판하고 무고한 학자들을 불태워 죽이고 있을 것이다.  하여, 여전히 우리는 태양이 거룩한 지구를 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건 교회가 숭배하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탐구에서 나오며, 지식에서 나온다.  종교적 신념에 어긋난다고 해서, 세상을 비합리적인 믿음에 묶어 둘 수는 없다.  비록, 그것이 신념을 벗어나는 개념이라 하더라도, 우주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거주하는 은하수 은하는 여타의 은하들과 같이 타원형이며 세이건은 이것이 마치 거푸집에서 동시에 재조된 듯 하다고 비유 한다.  지구에서 통하는 물리법칙은 우주 어느 곳에서도 동일한 법칙으로 통한다.  1+1이 2가 되는 것은 우주 공통의 원리란 얘기다.  이 수학공식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과학이란 2가 되어야 한다고 소망하지 않아도 그냥 2인 것이다.  과학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 원리를 파악하려 한다.  넓게 보아 이것은 몹시도 종교적인 일이기도 하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면 모든 법칙까지 창조했을 것이다.  이 법칙을 연구하고, 감추어진 진실을 찾는 작업,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절대로 반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신의 섭리에 가닿는 일이기도 하다.  더불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탐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편협한 욕망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은하수 은하의 구석진 나선팔에 위치한 태양계의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살고 있는 인간은 저 수조개의 별과 은하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 존재 자체가 몹시 미미하고 대수롭지 않다.  그 미미한 존재가 대우주를 인식하고, 탐구를 시작한 것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세계와 우주,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그의 언어와 지식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다.  신앙이 객관과 합리를 따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종교의 영역에서 그토록 갈망하는 `진리'의 일부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201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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