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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부 `꼴통'부류의 인간들을 제외하고는 우리 국민은 매우 상식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지도자를 자기의 손으로 뽑기도 하지만 또 그들의 잘못을 `깨닫는 순간' 가차없이 무혈혁명으로 불의한 지도자를 내쫓기도 하는 역량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 정의로움과 무지가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할 순 없지만, 이것은 엄연히 우리가 경험한 최근의 역사이며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민의 저력이다. 이런 널뛰기 같은 `상식과 몰상식'의 정치인식은 어디에 기원하고 있는가? 첫째, 그것은 욕망일 것이고 둘째 그것은 무지일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신작 <우린 너무 몰랐다>(통나무 2019)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 `무지'에 관한 것임을 우선 밝힌다.
사람들의 욕망은 도덕성에 우선한다. 그들은 살기가 어려워지면, 정치 지도자의 도덕성 따위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과거 MB가 그 무수한 의혹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된 이유다. 그 사람은 이미 10여년 전 대선 당시에 제기됐던 똑같은 혐의로 지금 감옥에 수감 돼 재판을 받고 있다. 그 당시, 국민들의 판단력은 `국밥을 게걸스레 퍼먹으며 잘 살게 해주겠다는 꼬드김'에 흐려지고 말았다. 욕망은 그러나 정직하며 보편적인 것이기에 용서가 된다. 반면, 사람들의 무지는 그보다 훨씬 고약하다. 우선, 무지는 게으름의 산물이다. 알야야 할 것을 공부하지 않은 것이 첫번째 잘못이요, 그러한 무지가 자신의 사상을 형성한다는 것이 또다른 잘못이다. 우리가 받은 역사교육 자체가 무지의 산물이며, 무용지물이란 걸 도올의 책은 반증해주고 있다.
도올이 이 책에서 주요한 테마로 삼고 싶었던 건 1948년 `제주 4.3과 10.19 여순'이다. 그러나, 어떤 독자가 이 사건들의 전후 맥락에 대해 해설할 수 있는가? 우리의 역사지식으로 이 사건들의 발단,전개,의미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시대의 석학이자 공부하는 철학자' 도올에게도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그의 현대사의 무지에 대한 반성과 개탄은 독자의 것이다. 그럼에도 내게 위안이 됐던 것은, 내가 그동안 주워들어 알아온 그 사건들에 대한 상식에 도올이 역사 문헌과 합리적 추론으로 근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주와 여순의 본질은 미국과 이승만, 해방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가 합작한 나찌의 유대인 학살을 넘어서는 `한국판 자국민 제노사이드(대량학살)'다.
도올의 이 책이 귀중한 자산이 될 것임은 그가 이 책에서 역사에 대한 기존의 틀에박힌 관념을 상당부분 독창적으로 해소한 점에 있다. 단적으로 도올은 해방이 이 민족에게 "저주,회한,근심,좌절의 대상"이었으며 "해방 때문에 패가망신했고 좆x다고 통곡했던 사람들의 역사가 이 민족의 역사였고, 해방 후 오늘날까지 진행되어온 불행한 역사를 야기시켜온 주체세력"이었다고 단정짓는다.(114쪽) 왜 그런가? 오늘날 보수가 소위 좌파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에게 흔히 들씌우는 `종북'이나 `빨갱이'니 하는 말들의 시작이 이 지점에서 탄생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언술의 발설자가 또 그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명백하다. 누군가가 역사적 팩트를 이야기하더라고, 그를 단번에 제압할 수 있는 말은 그 어떤 논리나 사실이 아니라 `빨갱이'란 단어 한마디로 끝나는 게 해방 후 21세기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적 언어습관이었다.
`빨갱이'라는 말은 도올에 따르면 제주 4.3과 여순 이후에 탄생한다. 그리고 그같은 단어를 조합해 누군가를 규정하는데 열을 올린 세력은 제주 4.3과 여순에서 약 4만 5천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세력이었다. 4만 5천명은 `빨갱이'였기 때문에 사살되었다는 것이, 우리 현대사의 암묵적인 가르침이었고 그렇게 우린 교육받았다. 그게 맞느냐? 그러한 역사서술이 정당한가? 라는 질문을 이 책은 쏟아냈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보면 우린 놀라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건의 주모자들이 내세운 결기어린 문장속에서 우리가 마주서게 되는 것은 매우 `상식적인' 요구였기 때문이다. 제주 4.3이나 여순 모두, 총격 학살자 처벌이나 남한 단독선거 거부, 미군정 퇴거, 자치적 인민위원회에 대한 탄압중지, 자국민 토벌작전에 대한 거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승만과 다시 권력의 중앙으로 초청된 일제말의 친일파들은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거해야할 명분이 분명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를 미군정의 도움으로 혁파해야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그 체제 아래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이 가능했으리라. 이승만은 영구분단을 고민했던 김구나 김규식 같은 인사들, 혹은 여운형과 같이 인민위원회를 구성해 민족 자치를 도모했던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유전자가 다른 인물이다. 70이란 노구에는 권력욕이 가득했고, 오직 초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으리라. 도올의 말처럼 해방이후 관공서에서 조용히 사라졌던 `좆x다'고 생각했던 친일파들에게 이승만과 미국은 구원의 장대한 서막이었을 것이다. 오직 그들이 새로운 구명줄로 삼은 것은 이 반공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 그것 하나면 족했으리라. 1948년 1년 동안 자국민 4만 5천명이 일거에 학살되는 데에는 이러한 이해관계가 놓여 있으며, 그 배후에 미국과 미군정이 든든히 자리하고 있다.
"여수 14연대의 항거는 부당한 명령에 대한 거부일 뿐이며, 사회사적,정치사적으로 보더라도, 그것은 가벼운 "소요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든지 정상적 궤도로 컴백될 수 있고, 다스려질 수 있는 소요였다. 이것을 대규모 국민학살극으로 확대시킨 것은 오로지 국가 폭력의 업이었다. 여순민중항쟁은 14연대 사람들의 합리적 판단에 여순 지역 인민 전체가 호응한 결과의 산물일 뿐이다. 14연대 사람들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모든 문제는 여수,순천 지역의 민중이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그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적 체제에 저항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1만 5천명 이상의 학살로서 국가가 대응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 이하의 만행이다." 303쪽, 도올 <우린 너무 몰랐다>
이승만은 여순 진압 막바지에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 첫 문장은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로 시작된다. 한마디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남한 단독선거를 방해하는 자들은 불순세력이므로 어린아이까지 모두 학살하라는 지시였다. 이런 자가 초대 대한민국 1대 대통령이었다. 제주 도민과 여순 사람들이 남한 단독선거를 거부한 이유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매우 애국적이며 합리적인 요구였다. 그들은 `단선'이 결국 영구 분단으로 이어지고, 전쟁을 불러올 것을 우려했던 것인데 역사는 민초들의 예상이 정확히 적중했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도올은 몇가지 신선한 역사에 대한 가정과 오류에 대한 수정을 논의의 장으로 끌고온다. 당대 미,소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1950년의 전쟁이나 영구분단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니까 당대 남한의 모든 인사들은 신탁을 거부했고 북한은 신탁을 찬성했다. 해방 후, 남북한이 오히려 찬탁으로 돌아서 미,소 공동위원회에 통치를 몇년간 맡겼다면 혼란의 수습기간이 지나고 전쟁없이 통일선거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게 도올의 가정이다. 인민위원회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은 정당한가? 도올은 `인민'이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그 단어가 그 당시나 중국 고전속에서 매우 일상화된 용어라고 수정한다. 여운형이 해방 후 조직한 민간자치기구는 급속도로 전국에 조직을 확장시켰는데, 그 가운데 제주의 인민위원회가 가장 높은 수준과 참여를 이루어냈고 이승만과 미군정에겐 모난 돌이 됐다.
"제주 4.3 민중항쟁 지도부의 몇 사람이 남로당에 헌신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허구적인 정체성이었고 실제 제주 민중항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제주민중항쟁은 오직 핍박 받는 제주민중이 피압박의 막다른 골목에서 분노를 표출한 사건일 뿐이다." 234쪽
도올은 무소불위의 언어로서 `꼴통들'이 난발하며 휘둘렀던 언어폭력 `빨갱이'란 말의 갑질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지금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해결사처럼 등장시킨 `빨갱이'란 단어에 내포된 고백을 이제 우린 눈치챌 수 있다. 첫째, 나는 게을러 역사에 대해 무지하다. 둘째, 나는 해방후 "좆x던 친일파 세력'의 후손이다. 셋째, 친일파로서 살아 남기 위해선 반공에 헌신해야 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북한 체제나 공산주의를 추종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간략히 말해서 머리가 돌지 않고서는 의식주마저 해결못하는 북한을 찬양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빨갱이'니 `종북'이니 하는 단어가 반세기 이상 이 땅에서 유통되는 것에는 신묘한 비밀이 있지 않을까? 상식을 가진 모든 시민이 원하는 것은 남북한 평화요, 한민족의 무궁한 번영이다. 평화안에서만 경제도 있고 기초적 삶의 영위도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는 어렵게 찾아온 남북,미북 평화의 시대에 훼방을 놓는 이들이 가득하다. 미국이 그러한 것은 이해가 된다. 그들은 언제나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무소불위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천년을 함께 살았고 겨우 반세기 분단돼 살고 있는 우리가' 평화가 아니라 총부리를 겨누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걸 바라는 세력은 따로 있다. 최근 일본의 적대행위를 봐라! 지금 경제가 어렵다고? 사는게 힘들다고? 나는 지난 10년 이명박그네 정권아래서 아침 뉴스를 듣는게 정말 스트레스였다. 매일 미사일이 발사되고, 내일 핵전쟁이 일어날 듯 남북,북미가 서로 으르렁 거리며 전쟁 직전까지 갔던 그 시절이 악몽처럼 기억된다. `이명박그네'는 경제도 살리지 못했으면서, 남북관계까지 파탄낸 정치권력이었다. 감옥에나 갈 지도자를 누가 뽑았나?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위인'이 아니다. 우리의 손끝에서 탄생한 정권이었다.
역사에 대한 무지가 언제든 괴물을 소환시킬 것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존경스러운 것은 지난 10년의 악몽같은 시절에도 그가 똑같은 언설로 국민들의 무지와 정치권력의 도덕적 무능함, 남북관계의 악화를 비판하여 왔다는 점이다. 도올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한다. 그의 거친 언사, 과감한 논리, 거침없는 주장이란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무지를 질타하며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하는 달을 주목해야 한다. 지식인의 시대적 소명과 양심을 지키며, 공부하는 철학자는 흔치 않다. 이 책이 담아 내고 있는 어려운 시대적 난맥과 맥락을 용맹스럽게 돌파하는 도올의 열정은 칭찬해야 마땅하다. 이 책은, 도올이 고백하듯이 역사에 대한 원통함, 저주받은 역사안 원혼들의 피눈물로 쓰여진 책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