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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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수가 아니라 방화수, 불을 지르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화씨 451>(황금가지,2009)이다.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1953년작이다.  작가는 세상에 있지도 않은 이런 직업을 어떻게 상상해 냈을까?  더군다나 방화수의 목표는 오직 책을 불태우는 것에 있다. 책을 가진 사람을 마치 `마약'을 가진 사람인냥 범죄시 한다.  책을 읽거나 소유하거나, 감춰서는 안 되며 모든 시민은 어떤 책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어느날 그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책을 태우고 찢고 파괴하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던 주인공 몬태그는 퇴근길에 한 소녀를 만난다. 외양은 자신과 같은 인간이나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을 살고 있는 소녀, 클라리세다.


그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즐기고,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규율을 의심하며, 한 사회가 강요하는 집단적 규범에 의문을 표한다. 클라리세는 직업정신에 투철하고 자기의 생활을 한번도 의심해본적 없는 몬태그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 아저씬 행복하세요? "  각 가정마다 벽면 텔레비전이 설치돼 있고, 그곳에선 매일 즐거운 이야기와 신기한 풍경, 실시간의 뉴스가 제공된다.  사람들은 비싼 돈을 주고 집의 벽 하나씩을 텔레비전으로 바꾸는 것을 꿈꾼다.  보다 많은 정보와 즐거움, 시간을 잊게 만들고 복잡한 상상이나 고민 따윈, 해볼 시간과 이유를 갖기 못하게 만드는 텔레비전에 사람들은 푹 빠져살고 있다.  몬태그의 아내는 불면증과 약물중독에 시들어가면서도 벽면 텔레비전을 보는게 유일한 낙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집의 남은 벽을 텔레비전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한다.


클라리세가 몬태그에게 토로하는 개성없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모든 사람들은 대화의 주제가 비슷하고, 누구도 남과 다른 이야길 화제로 꺼내놓지 않는다. 그들은 같은 드라마를 보고, 같은 음악을 들으며, 같은 오락을 즐긴다. 그저 사회성을 기른다는 핑계 아래 한 장소에 모아두고, `멋대로 정리한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수업'을 하고, 아이들은 고분고분 침묵한 채 그 모든 교육을 받아들인다.  `감옥을 이 방 저 방으로 옮겨다니듯' 이 교실 저 교실로 돌아다니며 획일적 교육이 자행된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총기사고의 희생자가 되며 그 누구도 그러한 상황을 개선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클라리세의 입을 통해, 고발된 사회는 반세기 후,  정확히 오늘의 미국 사회와 겹친다.  1953년에 발표된 소설이 2018년의 실제 세계를 예언한다. 조지오웰이 <1984>에 그려논  `빅브라더'와 `텔레스크린'의 감시가 인간을 통제하는 극단적 전체주의 사회보다 그 순도가 약하지만,  훨씬 현실적이다.


왜 작가는 저런 모습의 미래를 소설속에 담았나?  그들을 지배하는 정부는 다른 정부를 상대로 핵전쟁을 준비하며, 벽면 텔레비전으로 전의를 다진다. 심지어는 이제 전 국민을 전쟁으로 이끌어내려 한다. 놀라운 것은, 그런 사회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 가까이, 방화수로서 책을 읽고, 책을 소유한 `범죄'를 처단하는 일에 몰두한 몬태그가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우연하게 만난, 소녀의 질문 "아저씬 행복하세요?"에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는 성찰의 문에 가까이 간다.  소설은 이제부터 주인공의 `반란'을 틈타 책이 불태워지고 책읽는 사람을 증오하는 사회의 진면목을 하나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꼭 어젯밤에 죽은 여자 때문만은 아니야. 간밤에 나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불사르느라 뿌렸던 등유를 생각했어. 그리고 불태운 책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처음으로 깨달았지. 불에 타 없어진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제각기 한 사람씩의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그게 누구든지 한 권의 책을 채우기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 낸 거야. 책 한 쪽 한 쪽을 알맹이 있는 글로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는지 알 수 없지.  전에는 결코 이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어."  89쪽,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책에 대한 방화가 정의라고 규정되어진 세계에 대한 시스템을 의심하는 몬태그의 반대편에, 그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는 `비티 서장'이 있다.  몬태그의 방화소 서장인 그는 이전 그 누구보다 책을 열심히 읽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젠 몬태그에게 `책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책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길을 잃게 만드는 물건이라고 속삭이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유혹하는 뱀처럼 그의 언술은 유창하지만 그가 말하는 단 하나의 요점은, 책은 인간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비티 서장은 특유의 달변과 해박한 지식으로 몬태그를 유혹하지만, 시스템을 의심하기 시작한 몬태그의 일탈을 멈출 수는 없다. 


소설속에서 몬태그의 스승으로 나오는 파버 교수는 책을 불온시하는 시스템 안에서는 세가지가 부족하다고 역설한다.  첫째, 그것은 좋은 질이다. 질은 가치와 깨달음, 수많은 사람들의 짜임새 있는 삶이다.  둘째, 여가시간이다. 시스템 속 사람들은 충분한 여가를 누리고 있다 착각하지만 그들은 온전히 그 시간을 텔레비전에 바치고 있다.  텔레비전은 현실이다. 그것만 보는 사람은 영원히 현실안에 갖힌다.  반면, 책을 읽는 일은 상상이다.  인간은 책을 읽을 때만 현실을 벗어나 상상이란 여유를 누릴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와 세계의 실상에 다가선다. 셋째, 질과 여가의 상호작용을 통해 얻어지는 실천이다. 그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고, 보다 나은 곳에 대한 희망이다.  이것은 비단 소설속 세계만을 가정한 이야긴 아니다. 책이 극단적 해악으로 가정된 소설속 이야기와 그 사회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에서 책이 사라진 풍경 또한 비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이야기이자 동시에 소설 밖 이야기라는 데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이제 알겠소?  왜 책들이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는지?  책들은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을, 숨구멍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지는 삶의 이야기들을 전해 준다오. 그런데 골치 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저 달덩이처럼 둥글고 반반하기만 한 밀랍 얼굴을 바라는 거야. 숨구멍도 없고, 잔털도 없고, 표정도 없지. 꽃들이 빗물과 토양의 자양분을 흡수해서 살지 않고 다른 꽃에 기생해서만 살려고 하는 세상,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참모습이오."   137쪽


미래 예언 소설이자 문명 비판 소설인 <화씨 451>은 황폐하고 반 문명적인 미래 사회를 묘사하면서, 단 하나 `책'이라는 사물을 불온시하는 세상을 그려냈다. 책을 대체하는 것은 `벽면 텔레비전'이며, 그것이 상징하는 건 `생각하지 않는 인간', `비판능력을 상실한 인간'이다. 편리하고 신속하며 사람들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흥미로운 벽면 텔레비전에 빠진 사람들은 구태여 책이란 고리타분한 물건을 찾지 않는다. 책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가르치며, 반성하게 한다.  또, 인간, 시민, 피조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정부는 책을 불태우면서 이 모든 것을 막아놨다.  인간을 통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인간이 사색하며,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임을 <화씨 451>안의 정부는 알고 있다. 그때 인간은 기계 부속품마냥, 거대권력의 지시와 통제에 순응하는 비판하지 않는 순응적 인간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떤가?  <화씨 451>에 등장하는 방화소나 방화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교묘한 장치가 책을 범죄시한다.  과도한 노동시간, 빈부격차, 부족한 여가, 스마트폰, 시간때우기에나 쓸만한 영상컨텐츠의 범람, 무절제, 독서에 대한 인식 부족 등이다.  그렇게 우리는 책과 멀어지고 있다. 그 자리를 소설 속 `벽면 텔레비전'과 엇비슷한 스마트폰과 다양한 영상 기술,  컨텐츠가 사람들의 마음을 독서로부터 빼앗고 말았다. 한 편의 영상 미디어를 소비하는 것과 책을 읽어내는 과정 사이엔, 매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책읽기는 일정한 노력과 고통을 동반한다.  영상미디어의 소비는 쉽고 편안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편차 때문에 영원히 책을 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설 속 몬태그처럼 삶을 낭비하고, 통제받는 것에 의심을 표하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  자발적 전체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70여년 전, <화씨 451>를 썼다.  아마 그 시절 사람들도 책읽기에 소홀했고 당대 새롭게 보급된 영화, 티브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 파급력이 얼마나 빠르고, 신속했던지, 작가는 그 새로운 기술에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책이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였다.  하지만, 그 시대는 약과였을까?  오늘날엔 모든 사람들의 손에 벽면 텔레비전이 아니라, `손바닥 텔레비전'이 보급된 세상이다.  <화씨 451>의 세계에서 한층 진일보한 책과 독서 문화가 고사하기 알맞은 시대로 진입한지 오래다.   `벽면 텔레비전'의 가장 큰 해악은 사람들에게 깊이 생각하고, 느낄 시간을 주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것은 주입받고 소비하면 끝이다.  민주주의는 지적이자 비판적 시민을 요구한다. 비판적 시민을 양성하지 못하면 민주주의가 고사한다. 소설 속 사회 분위기에서 전체주의가 감지되는 이유다. <화씨 451>은 영상시대의 가벼움과 즉흥성을 예언한 소설이자, 책읽기가 경시되는 사회의 위기를 SF 장르문학에 담아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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