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11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증명 만약 이것을 부정할 경우, 할 수 있다면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라. 이렇게 되면 (공리7에 의해) 그것의 본질은 실존을 함축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정리7에 의해) 부조리하다. 따라서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Q.E.D.

 

* 정리11은 중세철학 및 근대철학에서 이른바 신 존재 증명 과정(demonstraion of the God) 이라고 불리는 것의 형태로 되어있다. 여기에 대해 스피노자는 3개의 증명과 주석 제시

* 정리11의 증명1은 귀류법.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귀류법에 따라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증명하고 있다.

* 증명2: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causa sive(or) ratio- 존재하는 것도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 핵심적인 스피노자 철학의 형이상학

*** 1)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는 그 이유가 사물의 본성 안에 있거나(,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본성 안에 있거나), 2) 어떤 경험적인 이유에 의해서 존재하거나(실재의 본성 밖에 이유가 있거나)

*** 네모난 원은 실존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본성 안에 있다.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 불가능.

*** 실체가 왜 존재하는가는 그 이유가 실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 안에 함축되어 있다(정리7) 원이나 삼각형은 본성상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자기원인적이 아니라) 물체의 보편적 본성의 질서, 자연의 어떤 법칙에서 따라 나온다.

 

*** 매우 흥미로운 형이상학적 주장. 여기 깔려있는 생각은 모든 것은 본성상 존재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중요한 전제). , 실존하려는 경향. 모두 그런 경향이 있는데 왜 실존하지 않나? 그것을 가로막는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사실 본성상 잠재적으로 다들 실존하려고 한다. -> 그러므로 신을 방해하는 것이 없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 만약- : 신의 본성 밖에 있다= 다른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 속에 그 이유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다른 본성이냐? 만약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라면 이건 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다른 본성을 지닌 다른 실체 속에 신이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유나 원인이 있다고 해보자.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으면 서로 상호작용 인과 작용 할 수 없다. 즉 신하고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신을 방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 -> 따라서 그 이유는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 왜 신의 본성이 모순을 함축하냐면 신이라는 것은 실체니까. 신은 본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신의 본성 안에 실존하지 않는 이유를 갖고 있다고 하면 저것과 부딪힘-> 모순.

 

* 강의록

 

<<<<<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원리 Principle de la Nature et de la Grace> 7.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 라이프니츠의 이 문장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 자연(넓은 의미의 자연/ 존재하는 것 모두, 실재하는 것 모두)

- 은총(즉 실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걸 넘어서!)

형이상학이라면 실재를 초월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실재를 창조한 것에 대한 질문. 신학적 질문. 이프니츠 입장에서 존재만이 질문의 대상이 되는 건 너무 납작했다. “도 질문이 돼야한다. 형이상학적인 ”. 아무것도 없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와 대등한 것. (그 말은 반대로 말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질문이 뜻하는 바는 왜 존재하는가. 이 우연은 누가 가능하게 했냐”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신... 그분....) 저 질문 자체만 듣고 너무 멋있었는데 추론해나가며 답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깼다ㅋㅋ

 

*** 스피노자의 말과는 매우 대조적 개념.

 

* 스피노자: 무는 이미 있다가 없어진 것(“시간의 개념으로 놓았다?) 그러니 왜 실존하지 않는지 밝혀야 한다(왜 실존하지 않는가? VS 왜 실존하는가). 실존하지 않는 것에는 원인 또는 이유가 존재할 테니까. 당연히 없는 게 아니라-> 우연적으로 없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없는 것이다. 그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이유를 밝히자!

 

* 스피노자는 무와 실존을 동등한 두 개의 항으로 정립하지 않고, 비실존/”를 이미 실존의 한 양태로 포섭하고 있는 것이다(실존의 양태 중에 없음상태로 실존). 이는 첫째, 스피노자에게 는 실재성을 지닌 사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실존이나 마찬가지니까). 둘째 이것은 논리적 근거나 인과성 원리는 항상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 ( 1) “는 이미 존재로 포괄되니까 2) “는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 없어진, 그러니까 그 이후의 상태인 것. , “이미 일어난 존재함이라는 사태 이후!)

 

* 스피노자에게 자기원인은 이러저러한 존재자 또는 실재의 필연적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필연적 실존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다. 곧 이는 누구에게 귀속되기 이전의, 누구의 실존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있음이라는 사태 자체를 의미.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에서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는이라는 규정, “그것말고 달리~ 일 수 없음라는 규정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스피노자에게 존재(실존)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필연적인 것이므로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미 저 스피노자의 문장에 필연으로써그 이유, 왜에 대한 답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실존할 수 밖에 없다고 필연성을 이미 잔뜩 부과했는데 거기에 뭘 물어!)

 

*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이라는 규정은 라이프니츠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가능태인 본질에서 현실태인 실존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이 스피노자에게는 부재함을 가리킨다(왜냐면 이미 본질 안에 실존이 들어가 있는데, AB가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A에서 B로 움직일 수가 있나!). 본질은 항상 이미, 영원하게 실존을 함축하고 있으며 실존은 항상 이미 본질의 행위, 현행적인 본질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은 암묵적으로 자연의 외부나 자연 이전에 성립하는 형이상학적 무를 가정하는 궁극적 근거에 관한 문제설정과 무관하며, 근본적으로는 부정이나 결핍, 무를 포함하지 않는 존재, 있음의 순수한 실정성을 가리킨다!

(형이상학적 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창조론을 너무나 뒷받침해주는 것이니까! 스피노자에게 이 세계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가 나타나는 기원따위는 없다)

 

*** 스피노자 주장: 형이상학적인 무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다. 무의미한 말. 라이프니츠는 있지도 않은 것을 만들어서 혹세무민 하고 있다 VS 라이프니츠의 주장: 스피노자는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

 

*** 라이프니츠의 <이성에 토대를 둔 자연과 은총의 원리> 7. “어떤 것도 충분한 이유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곧 어떤 것도 사태를 충분하게 인식하는 이에게 왜 그것이 다른 식으로가 아니고 그처럼 존재하는가에 대하야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원리가 정립되면 우리가 첫 번째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도대체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왜 도대체 아무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무는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 충족이유율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PSR 충분한 근거의 원리

- noting without sufficient reason.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태를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왜 도대체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무는 더 단순하고 쉬운 것인데. 세상에는 이렇게 더 단순하고 쉬운 무이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이 왜 많은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무에 대한 이 질문이 여전히 나는 매우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물론 그 결과가 은총이라는 것이 매우 찬물을 끼얹지만ㅋㅋ)

- 라이프니츠의 질문에서 어떤 것은 논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제시되어 있다. 어떤 것, 존재자, 자연, 더 나아가 이 세상,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역시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존재는 무에 대하여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우월성을 지니지 않는다. 만약 무 대신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선택의 결과이다. 창조의 선택. 은총.

- 그러니까 라이프니츠는 존재에는 어떤 신학적인 사건과 선택이 개입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논리.

- 라이프니츠는 원래도 긴 글보다는 10-20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들을 굉장히 많이 썼는데 워낙 쪽글들을 많이 써서 분류에 애를 먹는 바람에 아직도 전집이 완성이 안 됐다. 100년 동안 편찬 중상태로 아직도 한 권씩 나오고 있다. 불어로 쓴 게 대부분이고 소수의 글들을 독어와 라틴어로 썼다. 이 시대에는 불어가 우리나라의 영어 같은 지위를 지녔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에게도 무가 존재한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처럼 형이상학적 무가 아니라, 존재해야 마땅한 어떤 것이 어떤 이유내지 근거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단순히 실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실존하지 않음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유가 요구되고 있다.

- 라이프니츠에게 무라는 것은 대등하게 맞서있는 것 VS

스피노자에게 무라는 것은 (존재의 한가지 양상으로서) 존재 안에 들어와 있는 것,

- 무언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전제) 있어야 할 자리에 어떤 이유로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가 무이다. 왜 없을까? 불에 타서 사라졌을까? 질병을 앓아 죽었나? 같은 설명이 필요한 상태. , “존재해야 마땅한데왜 존재 안하지? 이런 논리.

- 스피노자에게는 무는 항상 이미 존재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존재의 한 방식이다. 이미 를 포괄하고 있다.

 

*** 그렇다면 라이프니츠는 존재만이 설명의 대상인가? 그렇지 않다. 선택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무일 때는 딱히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불교를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라이프니츠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으니까.

- 스피노자에게는 본성상 실존하지 않는 것은 없나? 그러니까 형이상학적인 무? 없다. 스피노자가 신학적인 것을 거부하는 이면이다. 자연은 영원하고, 자연이 영원하다는 것은 창조의 순간이 없다는 말이다. 시초나 기원, 끝점이 없다(지난 번 강의와 묶어서 생각해보면 흥미롭게 이어짐)

 

*** 데카르트의 영원진리창조론 VS 스피노자

- 17세기 철학은 여러모로 참 재미있다. 데카르트와 메르센 신부. 메르센 신부는 철학적으로 아주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지만, 훌륭한 사교성을 바탕으로 17세기 후반 유럽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의 유명한 사상가와 많이 알고 지냈고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역할. 그래서 메르센 신부의 전집은 대부분 편지다(이거 어쩐지 재밌다ㅋㅋ 역시 그 시대의 사교성이 활발한 사람들은 지금의 sns처럼 편지를 사랑) 데카르트가 1630년에 신부에게 편지를 몇 통 보냈는데, 이 편지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몇 통 안 되는 이 편지들에 영원진리창조론 (영원진리라는 것은 신에 의해 창조됐다는 독트린을 담고 있다)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생전에 출판한 책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 데카르트가 영원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1=1=2 a=b 의 아주 기본적인 논리. 즉 영원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항상 참인 것. 이것들은 시간적인 구애를 받지 않는다. 기원전에는 참이었다가 서기 3000년에 거짓이 되고 이런 거 없음.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이 영원진리들이 신에서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 , 이 말은 영원진리는 영원히참인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진리라고 창조됐다. 이 말은, 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것들을 진리가 아닌 것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신은 전능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영원성보다 신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신의 바꾸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영원진리는 전부 참이다라고 하면 이것은 신의 전능하고 무한한 의지를 제한하는 것이 되니까. 영원진리로 한정해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 이건 신이 아니지, 신은 영원진리까지도 거짓으로 만드는 힘을 가져야 신이지. 이게 데카르트의 관점. 신은 논리적 참과 거짓도 초월한다고 보는 것.

- 이게 17세기 철학이 재미있어지는 부분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영역 이외에 또 하나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니까. 어떻게 보면 순전히 사변적이고 쓸모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형이상학적으로는 매우 재밌는 이야기다.

- 근데 스피노자는 자연이 영원진리이고 영원하다고 본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은 이것을 거짓으로 만드는 신이 아니다. 저것들을 참이라고 인식하는신이다(창조하는 신이런 거 없고, 영원진리를 참이라고 인식하는 신이라고 못 박음ㅋㅋ)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의 반박을 앞으로 <에티카>에서 보게될 것이다.

 

- 그렇다면 데카르트에게 신은 진리가 아닌가? 진리의 신이 있고 진리 위의 신이 있고 그런 것인가? : 1) 진리로서의 신이 있고(“전지함으로서의 신”) -> 신의 무한한 지성 // 전능함으로서의 신 -> 신의 무한한 의지, 이렇게 신한테 저 두 가지가 다 있다고 보는 것이다.

-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신은 지성 + 의지?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의 생각은 지성이나 의지는 같은 것이고 지성이나 의지는 신의 본질과 무관하다. 지성과 의지는 신의 본질이 아니고 신의 본질(=실체의 본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였다. 실체의 본질은 속성 밖에 없다. “실체의 본질=> 속성이것은 스피노자가 일관되게 하는 말이다.

- 정리12-14에서 다루게 될 것들: 스피노자는 본질에서 바로 따라나오는 성질을 특성이라고 했고. 신에게도 이런 특성이 있다고 했다. 신만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특성. 자기원인, 영원성, 무한성 같은. 이것들은 특성이지 본질이 아니다. 정의12-14까지는 이런 다른 성질이 나올 것이다.

 

*** 라이프니츠에게 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 신이 창조했으니까. 양자택일이 가능한 무와 존재. 스피노자에게는 아니다. 우주는 계속 존재해왔고 영원하다. “무로부터의 창조이런 것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망했다 사라졌다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 죽음에 대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떤 생물의 종이 멸종했다면,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없는 것은 없다. (여기서 나의 질문: 스럼 스피노자는 모든 것들은 무한하다가 전제였던 것일까?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이유가 있을 텐데,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과연 몇 개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이를테면 지금 세상에 30종이 존재하고 있다고 치자.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원래 400종이 있는 가운데 370종이 없어진 건지 500종인데 470종이 없어진 건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스피노자는 무한을 전제로 하는 것인가. 스피노자는 그럼 조차도 무한한 거라고 생각한 것인가)

- 자연의 일부인 인간. transformation. 인간은 다른 종류의 물질 형태였다가 어떤 조합에 의해서 이런 형상을 갖게 된 것. 그래서 스피노자 철학은 진화론을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 역량 potentia VS potestas

이탈리아어, 불어, 독어는 저 두 가지가 다 단어로 구분되어 있는데 영어에는 “power”라는 단어가 일괄적으로 저 두 가지를 다 의미한다. 그래서 번역하는 데에 고민이 따름

- 스피노자 윤리학에서 저 두 개를 잘 구별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중에 정치학에 관한 논의에서 특히 중요하다. 2부 정리3에 가면 potentiapotestas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나온다.

- 그 오해의 내용: 포테스타스는 어떤 주체가 자기 의지대로 임의대로 행사할 수 힘을 말한다. 이를테면 왕이 자기 마음대로 기존의 법을 폐지하거나 제정하거나 하는 것. 하지만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신이 그렇게 마음대로 만들었다가 없앴다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마치 신의 포텐시아를 포테스타스로 오해한다. 그래서 신의 역량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적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을 말한다.

- 그러니까 신의 역량을 왕의 역량과 같은 것으로 혼동한다. 포테스타스는 어떤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대로 주체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데 말이다.

 

- 에드윈 컬리의 <윤리학>을 제일 좋은 번역이라고 추천했지만, 컬리의 맹점은 이것이다. 이렇게 구분이 중요한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일괄적으로 다 “power”라고 번역해놨다. 나중에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서 1993년에 낸 논문집에서 자기비판을 하는데 1985년에 <에티카>를 번역할 때만 해도 이 두 가지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아, 이건 꼭 구분했어야 했구나,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고.

- 이 두 개를 가장 세밀하게 구분한 사람은 안토니오 네그리 Antonio Negri. 그가 1981년에 낸 책이 <The Savage Anomaly 야생의 별종>인데, 이 야생의 별종은 바로 스피노자다. “17세기 서양 근대철학 역사 속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아주 별종이었다. 어떻게 분류가 안 되는이라는 내용이 골자인데, 한국에는 <야만적 별종>이라고 번역되어 나왔다. 물론 잘못된 번역이다. 제목부터 이렇게 잘못 번역했는데, 혹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보면 피해가야 한다ㅋㅋ 읽을 수가 없다. 얼마 안 돼서 절판됐기 때문에 읽을 수가 없고, 번역이 엉망이라서 읽을 수가 없고ㅋㅋ

- 네그리의 저 책에서 다중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다중이라는 용어를 스피노자 철학에서 처음으로 발굴해낸 것이 바로 이 책. “다중이야말로 스피노자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가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그 전까지는 그 누구도 스피노자의 다중이라는 것에 주목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스피노자 연구의 고전이라고 불리우는. 그런데 왜 아직까지 재번역되어서 나오지 않을까? 아마도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 이탈리아어를 잘 하면서 동시에 스피노자를 잘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무니까(정말 없을 것 같다ㅋㅋ)

- 저 책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은 네그리의 제자 마이클 하트. 네그리의 <야생의 별종>의 또 다른 중요한 테제는 포테스타스와 포텐시아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포테스타스는 지배권력이 행사하는 힘. 권력자라거나 미신적 신이라거나 신학적 철학자의 힘이다”. 그렇다면 네그리 책을 영어로 번역할 때 이 두 개념을 하트가 어떻게 구별해서 썼을까? 그는 역자 서문에서도 굉장히 강조한다. 포텐시아를 대문자 Power, 포테스타스를 소문자 power로 번역했다. 정말 궁여지책으로 낸 아이디어다.

-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너무나도 쉽게 번역을 한다. 자기가 처음 보면 신조어인 줄 알고 신조어를 막 만들어낸다. 하지만 외국 연구자들은 그렇지 않다. 방금 컬리나 하트 이야기를 했지만, 이게 그렇게 중요한 말이라면 포텐시아는 “potential”로 쓰고, 포테스타스는 “power”라고 썼을 수도 있을텐데(이게 바로 우리나라식 번역이다) 근데 potential에는 포텐시아가 갖는 능동적인 의미가 없으니까 고심 끝에 그 단어로 번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막... 포텐시아를 역능이라는 말로 풀어썼다. 저건 그냥 능력을 뒤집은 말에 불과하다ㅋㅋㅋ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진보인 줄 안다.

어쨌거나ㅋㅋ 포텐시아와 포테스타스를 구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증명3

실존하지 못함은 무능력 = impotentia

- 인간을 비롯한 유한한 존재자들, 많은 개체들은 세상에 존재한다 = 존재할 수 있는 역량potentia을 갖고 있다.

- 따라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보다 역량이 작은 것들은 실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실체로 실존하거나 양태로 실존하니까. 그리고 양태로 실존하려면 실체가 필요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 증명3에 딸린 주석.

- 후험적 aposteriori 아포스테리오리

선험적 aporiori 아포리오리

- 증명3에서 나는 경험적(후험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입각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는 의미로 시작해서 요약하면- 우리가 존재하잖아. 우리 인간이, 우리 유한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잖아. 우리가 실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그럼 생각해보자.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데 우리보다 역량이 더 큰 신이 실존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냐. <- 이게 바로 후험적인 증명.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니까 증명3에서는 이렇게 증명을 해봤는데 이는 그들이 오직 외부원인들로부터 따라나오는 실재들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주석에서는 선험적으로도 증명해보겠다.

- 핵심은 외부 원인에 의해 생겨나는 것들“(양태/변용)자기 자신의 본성에 의해 실존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

 

* 정리12-14는 신의 특성을 도출해내는 정리들

 

정리12 ”어떠한 실체의 속성도, 그로부터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끔, 참으로 인식될 수 없다.“

정리13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 의미: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 실체가 분할된다 = 실체가 여러 부분으로 쪼개진다

- 정리1213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는 핵심 논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증명 절차도 거의 동일하다. 스피노자는 정리12에서 가설적으로 다수의 실체를 전제한 가운데, 실체를 분할되게 만드는 어떠한 실체의 속성도 참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논점을 이끌어낸다. 그 다음 정리13에서는 여느 실체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에 대하여, 이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는 동일한 논점을 이끌어낸다. 귀류법.

- 정리12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만이 아니고 실체라고 부를 수 있는“ // 정리13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

 

* 정리12 증명

실체가 분할될 수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렇게 되면 1) 분할된 부분들이 실체의 본성을 유지하는 경우 2) 유지 못하는 경우

1)의 경우부터 살펴보자. 그럴 때 이 말은 하나의 실체로부터 다수의 실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리6에 의해 모순된다(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 따라서 실체는 분할될 수 없다

- 2)의 경우. 이것은 부분들이 전체와 아무런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의 실체는 (분할된) 다른 실체와 공통되는 것들이 하나도 없다. ,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 것들은 서로 인과작용을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전체는 부분들 없이 존재하고 인식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반대로 부분들도 전체와 무관하게 인식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정의4와 정리10에 의해 모순된다. -> 분할될 수 없다

- 자연이 분할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연이 두 개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무한하게 많은 속성이 있다는 것은 속성이 있다는 것은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 * 정리10을 살펴보면서 여기서 주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나의 실체의 각each 속성하면- 이것은 마치 실체가 전체고 each 속성들은 실체를 이루는 부분들이라고, 실체-속성은 전체-부분의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하지만 정리10의 술어를 보면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속성 각자는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논리적 자립성(정의3에서도 나오지만)을 갖는,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상위에 어떤 개념도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 실체-속성이 전체-부분의 관계라면 자립적일 수밖에 없으니 이렇게 이해하면 저 술어에서 위배된다. 그래서 정리10은 매우 복잡하고 어떤 점에서 역설적이다. 요지는, 속성들은 실체에 공통적으로 집합적으로 속해있지만 전체-부분의 관계가 아니다. 속성들 하나하나가 자립성을 가진 채로 실체에 속해있다. 사유속성 없이도 연장속성이 인식될 수 있듯이(그 반대도 마찬가지듯이) 자립적으로 성립한다. 그렇다고 이 두 개의 속성이 두 개의 상이한 실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스피노자는 실체의 본성에는 실체의 각 속성이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이 속한다고한다. 그 이유는 실체가 지니는 모든 속성은 항상 실체 안에 함께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영원히. 그러니까 각각의 속성은 다 자립적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실체에도 결코 의존하지 않는다. 실체가 속성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이라는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함께 집합적으로 구성하는 것. 영원히.

 

* 속성은 실체의 각각 다른 표현들이다. 각각의 속성이 실체를 전부 다 표현한다. 2부 정리7로 가보자. 유명한 평행론. 여기에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order and connection.

*** 주석을 보자. ”곧 무한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하나의 동일한 것이 두 가지 속성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는 하나의 동일한 인과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 이 논리가 나중에 3부에 가게 되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있다. 정신은 사유속성에 속하고 신체는 연장속성에 속하지만, 이렇게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두 개의 양태지만, 이 두 개의 양태가 구성하는 인간이라는 통일체는 동일한 코나투스를 표현한다. 하나의 동일한 코나투스가 때로는 정신을 통해 때로는 신체를 통해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의 똑같은 코나투스다.

***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경우에도 인간과 신체, 인간과 정신이 부분-전체 관계가 아니다. 실체-속성의 관계가 전체-부분의 관계가 아닌 것처럼.

 

* 인공지능인 AI가 속성이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마 스피노자라면 사유속성이라고 할 것 같은데 사유속성을 벗어난 새로운 속성이 될 가능성은? 아마 스피노자는 AI, 이게 바로 내가 말한 정신이야! 내가 말하는 관념이야! 라고 말할 것 같다ㅋㅋㅋ 그럼 무한지성으로 바라볼 수 있는가? ㅋㅋㅋ 그렇겠지, 무한지성의 일부겠지. (사유나 연장속성이 아닌 속성의 예를 찾아보기 위한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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