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은 나를 무엇으로부터 낫게 하려는 걸까? 어떤 상태로, 어떤 삶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애도가 하나의 작업이라면, 애도 작업을 하는 사람은 더이상 `속`[이탤릭]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이탤릭] 존재, `아주 귀중해진`[이탤릭] 주체다. 시스템에 통합된 그런 존재가 더는 아니다. (18)
나는 이제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이탤릭]이라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그들 모두를 `죽어야 하는 존재들`[이탤릭]로 바라본다.--그런데 그 사실만큼이나 분명하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결코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이탤릭] (62)
처음에 나는 생각했었다. 마망의 죽음이 이제 나를, 사교 모임 따위는 전혀 필요 없는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라고. 그런데 그 사이에 나는 영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전보다 더 면역력이 없어져 버렸다(당연하다: 외로움이라는 상태 속에 들어 있는 어떤 허무 앞에서). (106)
이런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이탤릭]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111)
... 커다란 생의 위기...를 이겨내고자 하는 "작업"은 너무 급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런 작업은 나의 경우 글쓰기를 통해서만, 또 글쓰기 안에서만 비로소 완결될 수 있는 것이다. (142)
자기만의 고유한 슬픔을 지시할 수 있는 기호는 없다. ... 그러나 모든 `현명한`[이탤릭] 사회들은 슬픔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서 코드화했다. (165)
여름날 저녁 하늘에서 제비들을 바라본다. 그러면서--마망 생각으로 마음이 찢어지면서--혼자 중얼거린다. 영혼을 믿지 않는다는 건, 영혼들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야만적인 일인가! 유물론은 진리이지만 그러나 그 진리는 또 얼마나 어리석은 진리인지! (169)
그렇게 과거 속으로 내던져져 있는 일을 참으로 잔인하지만, 그 일에 서서히 습관이 되면, 당신은 차츰 감지하게 될 겁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아주 부드럽게 새로운 삶으로 깨어나 당신에게로 되돌아와서, 그분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당신의 곁에, 그 어떤 빈곳도 남기지 않고 다시 존재하게 될 거라는 걸 말이죠. 물론 지금은 그런 일이 아직 불가능합니다. 침착하세요, 그리고 기다리세요, 당신을 산산조각 내어버리는, 그러면서 당신을 어느 정도 바로 설 수 있도록 만드는, 저 수수께끼 같은 힘이 찾아올 때까지. (181)
아직도 나는 마망과 `이야기를 한다"(현재형으로).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마음속에서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안에서 존재하는 대화다: 매일매일의 일상 속에서 나는 그녀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려고 애를 쓴다. (200)
[놀라운 패러독스: 철저하게 "지성인"인 나, 적어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불리는 나, 끝없이 이어지는 메타언어로 빈틈없이 짜여진... 나, 이 나에게 아무런 언어도 없이, 그 어느 언어에도 매이지 않고 그 어느 언어보다 탁월하게 말하는 그녀의 언어.] (219)
(이제 나는 이해한다, 사진이 어떻게 성스러워지고 모범이 될 수 있는지를 --> 사진으로 기억되는 건 `동일성`[이탤릭]이 아니다. 그건 그 동일성 안에 들어 있는 믿기 어려운 표현, "덕성(virtus)"이다). (230)
나는 그녀와 `하나가`[이탤릭]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동시에) 죽지 못했다. (245)
왜 내가 그 어떤 폭력의 정당화...에 동조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이유: 그건 내가 ... 고통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나는 그런 고통을 이겨본 적이 없다: 이건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폭력이 야기하는 고통의 희생자는 바로 내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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