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은 불멸한다. 그것은 그들이 죽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죽음을 삶의 공간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태풍과 산불, 뱀과 거미, 질병 그리고 온갖 나쁜 조짐들 속에서 죽음이 엄습해오는 모습을 바라보게 됐다. (35)
우리는 이러한 상반된 입장들이 빚어내는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없으며 또한 그렇게 살지도 않는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대단히 힘들고 쉼없는 싸움이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그러한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중대한 모순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그러한 존재적 곤경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야기를 개발해냈기 때문이다. 바로 `불멸 이야기`다. (39)
구체적인 범주에 집중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분류 분석하는 가운데, 오늘날 육체적 생존 이야기는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접근방식은 다양한 문제들을 실제로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이익까지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음 패러독스의 전반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깨달음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하나의 문제를 수많은 세부적인 문제들로 해체함으로써 우리 모두는 부지런히 실천해야만 하는 기나긴 과제들의 목록을 부여받게 됐다. ... 각각의 뉴스는 매일 그러한 처방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한 기사들은 죽음이 얼마든지 대처 가능한 문제이며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92)
이는 바울이 그 글을 쓴지 2,0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읽히고 있는 강력한 증언이다. 물론 그 구절을 낭독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고인의 유족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기 위한 장례식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애초에 의도했던 메시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주류 기독교는 우리에게 영혼이 있으며 그 영혼은 죽음 뒤에 육체를 떠나 천국으로 또는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에 더 가까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은 예수와 바울을 포함해 초기 기독교인들의 설파했던 메시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성경 전반에 걸쳐 느끼게 되는 정서, 다시 말해 바울이 "최후의 적"이라고 불렀듯이 죽음을 끔찍한 사건으로 바라보는 입장과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139)
"내 심장이 멎었다. 그리고 둥근 빛줄기를 따라 터널 속을 날아갈 때,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게임을 계속하려면 동전을 넣으세요. 10, 9, 8...`이라고." (173)
메리 셸리는 이러한 비판적인 작품을 쓰기에 대단히 유리한 환경에 있었다. 우선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이 바로 그러한 "진보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들의 이익쯤은 얼마든지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고집 센 많은 이들로부터 고통을 겪었다. 작품을 통해 그녀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인간이 신과 같은 존재로 올라설 수 있으며 삶과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면 자연은 우리를 해칠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 모험들로 넘쳐나고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현명한 젊은 여성의 시선이었다. (178)
나는 이 몸을, 자유를 갈망하는 영혼을 가두고 있는 이 감옥을 이제 파괴적인 공기와 물의 입자들에 내맡기고자 한다. 그리고 내 모습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을 흩뜨리고 소멸시킴으로써 그 안에 옥죄어 있었던, 그래서 불멸의 정수에 합당한 세상으로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이 어두운 땅에 비참하게 갇혀 있었던 생명에 자유를 허락코자 한다. (191)
종교적 영역을 넘어서서 그 영향력을 넓혀나가는 동안, 이러한 견해는 세속적인 용어들을 획득해나갔다. 점차 `자아(self)`라는 표현이 `영혼`의 자리를 물려받게 됐다. 자아라는 표현은, 우리를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핵심을 우리 각자가 간직하고 있다는 똑같이 본질적인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비록 정신분석학자, 해체주의자, 행동주의자, 신경과학자들로부터 한 세기에 걸쳐 계속해서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 견해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철학으로 지속적으로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다. 자본주의 그리고 소비주의 또한 경제적 자율성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이 견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자아실현과 자기발견에 대한 현대적 숭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시 마찬가지다. (211)
인간이 수많은 종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할 때, 절대적 존재가 왜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인간`의 영혼들을 천상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가도록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왜 인간이 아니라 박테리아나 돌고래 또는 침팬지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존재가 너무나도 관대해 자신의 모든 관심을 인간에게 쏟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 영원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물어봐야 할 것이다. (218)
그러나 이와 같은 신 중심적인 천국이 모든 사람들의 꿈은 아니다. ...... "그런데 바다표범은 어디 있나요? 바다표범 얘기는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들의 천국에는 바다표범이 없어요?" 그러자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다표범이라고요? 당연히 없죠. 천사와 대천사들... 12명의 사도들과 24명의 장로들이 살고 있어요." 그러자 그 이누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됐어요. 바다표범이 없는 천국은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어요!" (220)
열네 번째 달라이 라마야말로 고대의 지혜와 현대 과학의 만남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최고의 인물일 것이다. 중세 시대 이후로 거의 변화가 없었던 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기독교보다 더 오래된 종교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던 달라이 라마는 어린 시절부터 기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0대 시절에 그는 이전의 달라이 라마로부터 물려받았던 세대의 자동차, ...를 가지고 충돌 실험을 한 적이 있으며 시계 수리공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다양한 분야의 최고 과학자들과 즐겨 대화를 나눴다. ...... "구도자들이여, 현자가 열을 가하고 자르고 문질러본 연후에야 바로 소금이라고 인정하는 것처럼, 나의 이야기 역시 단지 나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라 면밀한 검토를 통해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35)
카르마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우주적 정의가 가져다주는 위안은 힌두교 세계관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안정성에 큰 기여를 했으며 그 덕분에 힌두교는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번성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적 안정성은 동시에 보수주의를 의미한다. 특히 사회 계층 문제에서 더욱 그렇다. 힌두교의 가르침은 높은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이전 삶에서 덕행을 쌓았기 때문이며 반대로 낮은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유동성을 허용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정의 구현에 역행하는 처사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장애인이나 병자 또는 신체적으로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은 전생의 잘못으로 우주적 처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치부함으로써, 약자들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동정과 관심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나치게 가혹한 입장이다. (244)
"친구여, 우리가 이 전쟁에서 빠져나가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칠 수 있다면, 나는 내 자신도 그리고 자네도 전쟁터로 나가게 하지 않을 걸세. 그렇지만 수많은 형태의 죽음이 우리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면, 그래서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함께 나아가 승리를 거둬야 하지 않겠나." (278)
여기에 더해 우리 인간에게는 무의식적 또는 감성적 차원에서 현실의 세상과 상징의 세상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성향이 있다. 상징의 동물인 우리 인간은 세상에 대한 상징적 이해 속에 전적으로 침잠해 있다는 점에서, 불멸을 향한 욕망을 물리적 영역으로부터 문화적 영역으로 본능적으로 이동시킨다. 이러한 본능을 일컬어 자일스는 후세를 추구하는 인간의 `진화적 이성(evolutionary rationale)`이라고 불렀다. 미래를 향해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잡지 속 사진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도 어떻게든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드는 것이다. (302)
불멸 이야기는 죽음의 문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죽음은 영생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좌절시키고, 그래서 죽음 그 자체로 문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부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혜의 접근방식을 추구하는 이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이 현실이며 불멸은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깊이 내려가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원천을 공략한다. (367)
"죽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는 우트나피쉬팀의 말처럼,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떠나고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경계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들을 그리워하거나 안타까워할 수 없고, 또한 그것 때문에 괴로워할 수도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장례식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서성거리거나 또는 고독한 공허의 세상으로 들어서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멈출 뿐이다. 우리가 겪은 모든 의식적인 경험들이 곧 우리 삶의 전부이며,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경험들의 경계를 정의하는 용어다. 마치 작품의 경계를 설정하고 이를 더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액자와도 같다. (372)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끔찍하면서도 하찮은 것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최고의 비결은 관심사를 점차 넓혀나가고, 더욱 비개인화(impersonal)되는 것이다. 그러면 에고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우리의 삶은 우주적 생명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376)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살아라. 동시에 내일 죽지 않는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게 살아라." 그 전반부는 여러분이 직장에 사표를 집어 던지도록 부추길지 모르나, 후반부는 상사에게 주먹을 날리고픈 여러분의 분노를 억제시켜 줄 것이다. (377)
삶에 끝이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시간에 한계를 설정하고, 그래서 그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죽음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존재에 긴박감을 주고,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존재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도록 허락한다. 우리에겐 힘이 허락하는 한 아침 일찍 일어나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최고의 모습으로 가꿔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 번의 세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고통을 겪게 되는, 또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사건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존재로서 우리는 죽어 있는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는 오직 삶이며, 그 삶이 한정돼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서 그 소중함을 통감하게 된다. (384)
비록 우리의 삶은 시작과 끝으로 막혀 있지만, 그 속에는 자아의 한계를 넘어서고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삶은 `한 권의 책`과도 같다. 책 속의 이야기는 시작과 끝으로 한정돼 있지만, 그 속에는 광활한 지평과 이국적인 풍경들 그리고 태고의 시대들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그 한계 너머를 알지 못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살아있는 순간들만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괴로워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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