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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급사의 유익함과 아름다움] 천수를 다하고 안방에서 편안히 맞이하는 죽음이 행복일까? 이 작품을 펴자마자 주인공들의 급사--그것도 무의미한 횡사--를 접하면 이들의 어리석은 욕망이 때 이르고 무참하기까지 한 죽음을 불러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작품 안에서 독자를 대신하여 시체를 직접 들여다 보는 여러 관찰자들의 시선에도 역시 같은 생각을 담겨 있다. 그러나 시체를 '접수'하고 '처리'하는 자연의 눈으로 보면 이들의 죽음은 전혀 슬프지 않으며 사실 모든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 그것은 오히려 놀라운 잠깐의 선물이기도 하다, 의외의 장소에서 먹이감을 찾은 여러 생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나 이런 것들은 비교적 평범한 인식들이고, 이 책에서 좀 놀라웠던 것은 인간의 인간적 시선으로도 급사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바로 매사 이 부부에게 반항하기만 했던, 이 부부와 어떠한 동질감도 느끼지 않았던 실비가 그렇게 말한다. 천천히 바람이 빠져가는 풍선처럼 느긋하게 죽음을 기다려온 노인의 시체에서 느껴지는 지루함과 무상이 이 중년의 시체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한창 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들은 가장 설레고 고양된 순간에 죽음에 의해 냉동되었다. 실비가 부모의 시체를 보며 새삼스럽게 느끼는 사랑은 단지 엄마의 다리에 가 있는 아빠의 손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 생의 충만함과도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급사는 자연계의 여러 '친구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적'들에게도 이로움을 준다. 늘 자신을 고아라고 상상하기를 좋아했던 실비는 부모의 급사로 진짜 고아가 되어 행복하다. 당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당신의 오랜 적들은 드디어 당신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들은 이 전투를 끝내고 새로운 전투로 나아갈 수 있다. 인생이라는 전쟁은 그렇게 진행된다.
[유물론자의 어리석음] 과학적 사고, 과학적 검증의 방식을 선호하는 것과 과학만능주의는 전혀 다르다. 과학만능주의는 과학이 아니며 철학도 물론 아니고, 그냥 대단히 나쁜 버릇 같은 것이다. 진정 최고의 성과를 내는 과학자들은 오히려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며, 실로 예감과 영감이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 이 책에 나오는 두 동물학자는 분명 최고급의 과학자들은 아니다. 이들은 그저 범상한 대학원생이었으며, 30년 뒤 한 명은 그냥그런 교수직을, 다른 한 명은 강사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죽음을 생리학적으로 이해하였으며 그것이 진리라고 굳게 믿고 그 믿음을 설파해왔다.
처음 둘이 함께 해변에 누웠던 날, 자연은 그들에게 온갖 소리와 바람으로 그 시각이 탄생과 욕망이 아니라 죽음의 시각이 될 것이라고 암시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경고를 들을 줄 몰랐고, 이들이 센스 없이 그리고 탐욕스럽게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한 결과 동료 한 명이 바베큐가 되었다. 여인은, 그러니까 셀리느는 이 사건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의식적으로 배우진 못하였으나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녀는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부주의함을 공개 사과했다. 그러나 장차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자기에게 씌워질지 모르는 혐의를 피하고자 숨었고 또 여인의 증언을 방해했다. 곧 그들은 결혼했고 결혼 생활을 어떻든 유지는 했지만, 여인은 남자의 이 행동, 이 부분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이 둔하기 짝이 없는 남편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인식도 하지 못한다. 아니 때로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그는 다시 더 심한 바보짓에 도전한다. 바로 그 해변에서 다시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펼쳐 보이고자 하는 것.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고, 30년전 동료가 산화된 황무지와 뜻 모를 음악을 연주하는 해변이 주는 예감은 이번에도 그의 감각을 일깨우는 데 실패했다. 결국 그 대가는 부인이 먼저 치른다. 남편도 곧 이어 살해당하지만, 부인이 먼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읽는다. 부인의 다리로 손을 뻗는 짧은 순간에 조세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을까? 아니, 언제나 일관성을 유지하는 캐릭터인 그는 그저 자신이 그녀를 염려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차가운 시인]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의 문체 말이다. 영어로 쓰여진 글인데 내가 영어로 읽은 것은 아니니 잘 안다고는 못하겠으나, 번역을 거치고서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 책은 그 사고가 깊을 뿐만 아니라 표현력도 시에 근접한 아름다운 문체라는 것. 해변과 날씨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거의 대가적이다. 유물론자 동물학자 부부가 비명횡사하여 자신들이 신봉하던 그 유물론대로 자연에게 제 살을 내어주다가 결국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그들을 놀라게 하고 스스로는 비웃음 당하고는 결국 따로따로 시체안치소에 넣어진다는(이 책을 읽다보면 죽음이 사람에 의해 처리되는 과정이야말로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죽은 사람은 그저 자연의 손에 맡겨져 '자연스럽게' 해체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일상의 상식과는 다른 주장) 무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섬세한 문체 속에 흐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사랑이나 예술에 몰두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시무시하고 끝이 없는 죽음의 통로를 언뜻 보는 사람들, 그것을 눈여겨보고 명상에 잠기기에는 너무 둔감한 사람들뿐이다. 딱정벌레라는 족속 중에는 시인이 없었다. 딱정벌레는 <몬다지의 물고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녀석은 우리처럼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을 부인하는 체계를 만들어 내느라 평생을 보내지도 않았다. 죽음과 구덩이와 산사태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울하게 나날을 보내지도 않았다.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을 보상해 주는 놀라운 경이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딱정벌레는 계획도, 기억도, 죄의식이나 야심도, 사랑에 대한 욕망도, 망상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여자가 딱정벌레의 햇빛을 망쳐 놓았다. 그래서 녀석은 여자한테서 달아나고 싶었고, 먹이를 먹고 싶었다. 그것이 딱정벌레의 장기 계획이고 미래였다. (58)
조지프가 앞으로 걸어 나와 셀리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셀리스는 손짓으로 그를 내쳤다. 이 화재, 이 죽음은 그녀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이기도 했다. 사랑이 잘못이었다. 열정이 잘못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비록 짧았지만, 자연계의 균형을 뒤흔들로 자연계의 동시성을 시험할 만큼 강렬했다. 섹스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다. 섹스와 죽음은 하나의 직선 위에 있는 검은 좌표다. 슬픔은 에로틱해진 죽음이다. 그리고 섹스는 성교 후의 여행으로 곧장 뛰어들기 위해 때가 되기 전에 서둘러 속세의 번거로움을 벗어 던질 뿐이다. 셀리스가 그렇게 아침 일찍 연수원을 뛰쳐나와 새로운 사랑을 잡기 위해 서두른 것이 화재의 원인이었다. 그것이 과학적인 견해다. (216)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조지프가 허리를 쿡쿡 찌르며 말리는데도 셀리스는 고백을 멈추지 못했다. 셀리스는 제 허리를 찌르던 조지프의 손끝을 평생 동안 증오했다. 셀리스는 조지프처럼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거나 편리한 거짓말 뒤에 숨으려 하지 않았다. ...... 그는 그녀를 강요하고, 순종하는 육체를 찾는 연인이었다. 그 도움의 손길은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 셀리스는 귀찮았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 것일까? 내가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나? 그 오래전에 그가 진실을 말하지 않고, 또 내 허리를 쿡쿡 찌르면서 자백을 말린 것에 대해 내가 아직까지도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짐작도 못하나? (217)
하지만 부모를 젊어 보이게 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실비는 깨달았다. 부모가 죽은 방식 그 자체. 변사는 대개 젊은이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느린 소모는 노인의 속성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게 전혀 없었다. 급속히 파괴된 부모는 정말 아름다웠다. 손상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본질과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들은 개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나름대로 고양되어 있었고, 묘하게 침착했다. 이것은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들은 자궁에서부터 줄곧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그 최후의 노인성 경련...을 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살보다 더 행복한 죽음이기도 했다. (242)
실비는 부모가 이번만은 자기를 정말로 놀라게 했다고 인정했다. 적어도 그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를 놀라게 한 것은 부모가 살해된 사실만이 아니었다. 부모가 알몸이라는 사실만도 아니었다. 부모가 죽으면서 실비의 가슴에--뒤늦게나마--사랑을 가득 채울 힘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은 어머니의 발목에 가볍게 닿아 있는 아버지의 손가락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손을 치우지 마세요.> 실비가 말했다. (242)
조명을 거의 받지 못해 비밀스럽고 창백해 보였던 부모의 삶, 기껏해야 실루엣에 불과했던 부모의 삶이 열정과 색깔을 띠는 데 필요한 것은 죽음의 현란한 횃불뿐인 것 같았다. 이제 죽음의 눈부신 빛이 부모를 포착하여 고정시켰다. 그들의 이력은 확정되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덧붙일 것도 없다. 그들이 죽은 날짜는 기록되었고,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다. 아무것도 바뀌거나 수정될 수 없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죽지 않은 이들의 심정이나 그들이 지어내는 신화뿐이다. ... 죽은 사람들 자신은 추억을 박탈당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276)
이 피해자들은 자초한 재난의 공범자였다. ... 그들은 죽음을 유혹했다. 그리고 죽음은 그 유혹에 넘어갔다. 그들은 죽음을 원했고, 그래서 죽음이 찾아왔다. 친절한 손에 화강암을 쥐고. 이웃과 동료들도 모두 그렇겠지만, 네 명의 젊은 경찰관도 피해자들의 행동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행복한 죽음>을 그렇게 쉽사리 강탈당하는 결과를 자초한 것은 너무 무책임했다. 고통과 노년의 유동적인 세계에 도달할 때까지 기를 쓰고 나아갔어야 했다. 꿋꿋하게 참고 견뎌서, 침대에서의 편안한 죽음이라는 정당한 보상을 받으려고 애썼어야 했다. (287)
하지만 그의 손은 곧 아내를 떠나 복사뼈에서 미끄러졌다. 아내의 다리에 얽혀 있던 그의 손가락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풀려 버렸다. 그들 사이의 공간은 점점 넓어졌다. 그의 손가락 관절이 땅바닥을 훑었다. 아내의 종아리에 남은 것은 남편의 손가락 자국뿐이었다. 입맞춤하듯 살짝 닿은 그의 손가락 끝이 종아리에 박혀 오목한 새김눈을 남겼다. 조지프의 시체는 서쪽으로 굴러갔다. 그의 아내는 동쪽으로 갔다. 그들은 풀밭을 떠나 무명 시트 위에 눕혀졌고, 나무를 흉내 낸 종이 관에 담긴 다음, 다시 사막용 지프의 평평한 바닥에 실려 해변을 따라 달리다가 교외를 지나, 시체 공시소의 얼음처럼 차가운 서랍 속으로 들어가 자살자들 틈에 끼였다. 마침내 바람이, 시간이, 우연이 그들의 시체를 휩쓸어 갔다. 대륙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하늘에는 별똥별이 지나갈 공간이 있었다. (289)
활기 차게 밀려오는 어스름한 회색의 첫 새벽빛 속에서 집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태양의 이마가 하루를 몰래 들어다보고 있다. 태양의 얼굴은 아직 잠에서 덜 깨어 남빛이고, 구름에 덮인 머리는 빗질도 하지 않아 부스스하고, 바다의 수평선을 향해 안개 같은 고수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있다. 새들은 이제 정원의 나무 꼭대기에서 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시내의 첫 전차가 사랑을 찾아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수천 채의 집에서 첫 자명종이 울리고 있다. 수도꼭지가 열리고, 가스불이 켜진다. 커피와 빵과 수프 냄새가 난다. 게잡이 배 한 척이 해안을 따라 힘겹게 나아가고 있다. 도중까지 태양을 배웅하기 위해, 또는 태양이 온 곳으로 다시 쫓아 보내기 위해. 조지프와 셀리스는 그들의 방에 있다. 그들의 침대에 팔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다. 그들이 아무리 몸을 뒤척여도, 그들이 무슨 꿈을 꾸어도, 불투명한 어둠이 그들의 귀에 뭐라고 속삭여도, 어둠이 뭐라고 약속하고 협박하고 장담해도, 그들은 유예 기간이 왔다가 물러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295)
아직도 모래언덕은 날마다 높아져 산더미처럼 쌓이고 허물어진다. 산마루는 바람과 함게 이동하고 다시 모인다. 모래언덕은 날씨와 바다에 대항하여 등성이를 높이고, 바람에 실려 오는 세상의 슬픔을 막으려고 애쓴다. 바리톤 만의 해안만이 아니라 그 너머의 모든 해안에는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물고기와 새, 조개삿갓과 쥐, 연체 동물, 포유류, 홍합과 게의 시체와 깨지고 얇아진 잔해가 올라오고, 파도에 휩쓸리고 분류된다. 그리고 조지프와 셀리스는 경험을 뛰어넘어, 사랑으로 충만한 무의식적인 종말을 누린다. 그것은 죽어 있는 상태가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끝나는 날들이다.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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