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본질 - 환생의 증거와 의미, 카르마와 생명망에 대한 통합적 접근
크리스토퍼 M. 베이치 지음, 김우종 옮김 / 정신세계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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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윤회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종합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첫째, 이 우주에 의미 없는 것은 없다.
둘째, 전생체험은 그 당사자로 하여금 `나는 영원한 존재이며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을 배우는 것`이라는 진실을 단순한 믿음을 넘어선 앎으로서 받아들이게 한다.
셋째, 우리는 언제나 안전하다. 그 무엇도 우리를 삶의 본질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으며, 삶의 시련들 또한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성장을 위한 것이다. (14)

반면이 우리가 지상에서 많은 생을 반복하는 거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우주극...의 무대 위에 서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우리의 역할도 중요해진다. 윤회는 우리들 각각의 성장을 이 우주의 성장과 하나로 엮어주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더욱 깊이 관계 맺는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히 인간의 존재 목적에 관한 논의의 범위를 확장할 수밖에 없다.
즉, 윤회론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수많은 문제의 답이 달라진다. (31)

도덕적 인과법칙은 이런 문맥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띤다. 우리가 스스로 대접받길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도록 권고받는 이유는, 사실은 그들과 우리가 근본적으로 동일한 존재의 현현들이기 때문이다. 대접받길 원하는 대로 대접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서로 분리된 존재들이라는 착각을 점차 약화시키고 일체...로서의 근원적 자각을 강화하게 된다. 따라서 황금률을 따르라는 충고는 무슨 고매한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가장 중요한 진실을 재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13)

나는 알츠하이머 유전인자를 가족력으로 물려받아 평생 노심초사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지금의 엄마를 선택했다. 왜냐면 그런 유전적 결함보다도 우리 둘 사이의 카르마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부모를 고른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안내자들은 내게 홀어머니 아래서 성장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고, 나는 이 부부(부모)가 곧 갈라설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또한 이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나야 운명적인 결혼상대와 만나기에 적합한 지역에서 살게 될 것임을 알았다. (149)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전생의 악업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생각이다. 지금 누군가가 또는 자기 자신이 심하게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전생에 저지른 끔찍한 범죄 또는 악행 때문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첫째로, 앞서 말했듯이, 그 고통은 미래의 성취를 위한 준비 과정일 수 있다. 둘째로, 지상에서 윤회하는 단계를 거의 끝마쳐가는 영혼들은 좀더 큰 그림을 보고 있기 때문에 마무리 짓는 속도를 최대한 높이길 원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더 가혹한 삶을 자처한다. 심지어 휘튼은 우리가 영적으로 진보할수록 삶의 내용은 더 가혹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삶의 내용이 가혹해질수록 그만큼 영적 성장을 촉진할 기회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150)

말하자면 진도를 높이기 위해, 그간의 전생들에서 미해결된 카르마 조각들을 한 번의 생에 몰아넣는 것이다. 이처럼 참담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실은 지상의 윤회 과정을 끝마치려 서두르고 있는 영혼일지 모른다. 우리는 삶 속의 불행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를 절대 알 수 없으며, 그러니 최선의 선택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151)

이처럼 우리 삶에 정해진 계획이 있다면, 그것이 지금 잘 달성되고 있는지의 여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짐작했겠지만, 안팎으로 두루 조화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 바로 그 기준이다. 휘튼은 이렇게 말한다. "카르마 시나리오를 잘 따르고 있거나 이미 초과 달성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순리대로 펼쳐지고 있다고 느낀다. 반대로 시나리오를 벗어난 사람들은 모든 게 뒤엉킨 듯한 혼란에 휩싸인다." (158)

먼로가 언급했듯이, 대령은 우리가 먼저 도움을 요청했을 때만 도움을 준다. 이것이 영적 세계의 일반 원칙인 듯하다. 도움 요청이 없는 한, 상위 차원의 의식은 하위 차원의 의식을 돕지 못한다. 즉, 기본적으로 우리는 홀로 최선을 다해서 과제를 해나가게끔 되어 있다. 그래야 우리의 한계치를 벗어난 시련들을 마주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번 생에서든 다음 생에서든 우리 자신의 더 큰 정체성과 그것과의 유대를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꼭 사다리의 끝에 올라가야만 대령의 비범한 지혜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상황뿐 아니라 긍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대령의 도움 속에서, 삶을 위기의 연속이 아니라 편안하고 균형 잡힌 상태로도 완벽히 영위할 수 있다. (183)

전생 연구에는 늘 이런 접근법상의 문제가 따라다닌다. 우리는 완전히 독립된, 중립적인 연구자로서 내담자를 대할 수가 없다. 연구를 하려면 어떤 식으로든지 내담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전생 현상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 자체가 변수로 작용하고, 전생 기억에 접근하려는 시도 자체가 많은 적든 왜곡을 일으킨다. 심층의식을 연구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상호작용에 가담하지 않고는 그것을 연구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 상호작용에 참여할 때의 의식 상태가 우리가 경험할 바를 결정한다. 여기에 다른 우회로는 없다. (193)

결론적으로, 죽음에 대한 모든 언급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개별적 정체성은 죽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 자리를 양보할 뿐이다. 필요에 따라 그것은 일체를 위해 계속 기능할 수 있고, 우리의 의식은 더 이상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령은 그 자신의 풍요로움을 통해, 우리가 잠시 뒤집어썼던 그 정체성으로부터 우리를 쑥 끄집어낼 것이다. 더 큰 삶과 재합일함으로써 우리는 기쁘게, 또한 후회 없이 그 정체성 너머로 확장해간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고, 수십 년간 짊어졌던 무거운 가방을 마침내 내려놓는다. 오래전에 이별한 가족들과 포옹하는 순간, 그간의 고통은 싹 잊힐 것이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온 가족이 다시 한 데 모였다. (201)

간단히 답해서, 그것은 배움을 가속화하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기억 상실이 만드는 `단절`은 우리의 급속한 성장에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성장은 범위가 너무나 넓어서 그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를 어떤 한정된 시간 내의 서로 다른 경험들에 완전히 몰입시킴으로써 배움을 가속화하기 위해, 이처럼 상대적으로 짧고 의식적으로 분리된 삶의 구조가 고안된 듯하다. 특정한 몸, 특정한 사회관계, 특정한 문화, 특정한 이력, 특정한 역사 속에서 할 일을 마치고 나면 우리는 그와 전혀 다른 조건들 속으로 투입된다. 현생에 맞춰진 초점을 넓혀보라. 이런 생이 수백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우리는 부와 가난, 두려움과 용기, 갈등과 평온 등등 인간의 모든 경험을 아는 존재이다. ... 우리는 하나의 지역,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모든 지역과 문화를 잘 알고, 하나의 시대가 아니라 우리가 발 담갔던 모든 시대를 잘 안다. (206)

천국의 축복을 경험하든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든, 이 차원에서 우리의 일정은 정해져 있다. 윤회론자들은 `영원한 지옥살이` 따위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지상의 생 동안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그게 신과 영원히 별거해야 할 만큼의 잘못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을 배우는 일을 제외하고는 지상에서의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 윤회 과정에는 `영원한 지옥살이`라는 끔찍한 망령이 없는 대신 우리의 책무가 더욱 강조된다. 윤회론에는 우리가 저질러온 실수의 결과들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대속...의 구원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217)

이것은 신학자들이 채워넣아야 할 그리스도교의 여러 공란 중 하나이다. (241)
......
이는 새로운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교인들은 복음서의 핵심 가르침과는 별 관계가 없더라도 신약에 나온 내용이라면 무조건 믿어야 하는가? 의도된 내용과 의도되지 않은 내용을 분별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는 우리를 뿌리과 가지가 한데 엉킨 고대의 미로 속에서 헤매게 한다. 성서 시대 이후로 지적 능력을 엄청나게 키워오는 동안, 우리는 이런 작업을 해야 할 때를 수없이 놓쳐왔다. 우리는 신약 속의 가르침들 중에서 본질적인 것들은 남겨두고, 당시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만 유효했던 것들은 다시 역사 속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243)

또한 `영혼의 나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현생에서 주어진 주제들에만 너무 집착하는 태도에 빠지지 않도록 해준다. 현생은 지금 우리의 `작업장`일 뿐이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더 기나긴 여정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현생과의 동일시를 멈추고 우리가 현생을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 내가 맡아온 역할들은 나의 본질이 아니다. 나는 그보다 더 큰 존재다. 전생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고, 후생에는 또 다른 어떤 사람일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나는 이번 생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통찰을 숙고함으로써 현생과 관련된 우리의 정체성은 조금씩 느슨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더 큰 정체성을 향해 확장해간다. (229)

이처럼 명백한 보편성과 열린 마음가짐을 우리는 어쩌다 망각하게 되었을까? 신이 사랑받고 예배받는 곳은 어디든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진실에 우리는 어쩌다 눈이 멀고 말았을까?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는 구절을 우리는 어쩌다 가장 축소된 의미로만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우리는 이 말을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라, 신을 찾기 위해서는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 아래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신은 곧 온전한 사랑`이라고 가르친 예수께서 과연 태생적으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전부 구원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길 원하셨을까? 토착종교 안에서 태어나고 살아왔기 때문에 물려받은 전통을 버리고 선교사들이 갖고온 새로운 종교로 개종하는 것이 그저 불명예라고 여겼을 뿐인 모든 사람을 제외시킬 만큼, 과연 신의 사랑이 그렇게 제한적일까? ... 다행히도 지금 이 시대의 지적, 영적 견해는 이런 근시안적 상태를 훌쩍 벗어나 한층 통합적인 수준으로 향하고 있다. (260)

미국 내 성인 신도들 중 거의 4분의 1이 윤회론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신앙심의 약화가 아니라 성숙의 신호이다. 그들의 신앙은 약한 것이 아니라 용감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신이 다스리는 다른 지역들과 진지하게 대면함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윤회가 있는 그대로의--믿음이 아니라 엄정한 조사로서 뒷받침된--진실이라면, 결국 그리스도교는 이 진실과 스스로 어우러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의 신과 창조주는 둘이 아니기에, 그리스도교는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 중 어느 것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자연의 질서 중 어떤 것도 신의 무한한 사랑과 영생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268)

윤회론은 간단히 말해 이런 것이다. "부모 때문에 내가 이 문제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이 특정한 문제를 풀기 위해 내가 현재의 부모를 일부러 선택한 것이다." (278)
......
우리의 부모가 카르마의 힘을 따르듯, 그들의 단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불완정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불완정성을 깨달아 완전함에 이르도록, 즉 진실에 직면하며 그것을 헤쳐가도록 하는 데 봉사한다. 부모와 우리의 관계가 그렇듯 우리와 자녀의 관계도 그러하다. 자녀에게 완벽한 부모가 되려 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부모의 실수를 대물림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새로운 실수를 하게 된다. 우리의 부모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자녀에게 내재된 불완전성을 일깨워 그를 그것과 씨름하도록 만들 것이다. 당장은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우리의 불완정성이야말로 우리에게 맡겨진 존재들에게는 완벽한 조건이다. (279)

윤회론에 따르면, 가족들이 분명 잘못을 했다 해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우리 삶에서 벌어진 일은 모두 우리 자신의 책임이며, 이 책임을 통해 우리는 엄청난 자유를 얻는다.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책임지고자 하는 순간, 운명은 갑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시나리오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을 때, 우리는 당연히 제 역할에 충실했을 뿐인 배우들을 용서하게 된다. 바로 이 `용서`야말로 우리가 이 연극을 통해 배운 것이다. 용서는 결코 쉽지 않다. 진심으로 완전히 용서하려면, 가장 깊이 내려가려면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 모든 소란의 배후인 실재(Reality) 그 자체를 용서해야 한다. 그 이름이 우주이든 신이든 도든, 우리는 만물의 근원을 용서해야 한다. 용서를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 큰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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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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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사의 유익함과 아름다움]  천수를 다하고 안방에서 편안히 맞이하는 죽음이 행복일까? 이 작품을 펴자마자 주인공들의 급사--그것도 무의미한사--를 접하면 이들의 어리석은 욕망이 때 이르고 무참하기까지 한 죽음을 불러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작품 안에서 독자를 대신하여 시체를 직접 들여다 보는 여러 관찰자들의 시선에도 역시 같은 생각을 담겨 있다. 그러나 시체를 '접수'하고 '처리'하는 자연의 눈으로 보면 이들의 죽음은 전혀 슬프지 않으며 사실 모든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 그것은 오히려 놀라운 잠깐의 선물이기도 하다, 의외의 장소에서 먹이감을 찾은 여러 생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나 이런 것들은 비교적 평범한 인식들이고, 이 책에서 좀 놀라웠던 것은 인간의 인간적 시선으로도 급사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대목이었다. 바로 매사 이 부부에게 반항하기만 했던, 이 부부와 어떠한 동질감도 느끼지 않았던 실비가 그렇게 말한다. 천천히 바람이 빠져가는 풍선처럼 느긋하게 죽음을 기다려온 노인의 시체에서 느껴지는 지루함과 무상이 이 중년의 시체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한창 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들은 가장 설레고 고양된 순간에 죽음에 의해 냉동되었다. 실비가 부모의 시체를 보며 새삼스럽게 느끼는 사랑은 단지 엄마의 다리에 가 있는 아빠의 손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 생의 충만함과도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급사는 자연계의 여러 '친구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적'들에게도 이로움을 준다. 늘 자신을 고아라고 상상하기를 좋아했던 실비는 부모의 급사로 진짜 고아가 되어 행복하다. 당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당신의 오랜 적들은 드디어 당신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들은 이 전투를 끝내고 새로운 전투로 나아갈 수 있다. 인생이라는 전쟁은 그렇게 진행된다.

 

[유물론자의 어리석음]  과학적 사고, 과학적 검증의 방식을 선호하는 것과 과학만능주의는 전혀 다르다. 과학만능주의는 과학이 아니며 철학도 물론 아니고, 그냥 대단히 나쁜 버릇 같은 것이다. 진정 최고의 성과를 내는 과학자들은 오히려 과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며, 실로 예감과 영감이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 이 책에 나오는 두 동물학자는 분명 최고급의 과학자들은 아니다. 이들은 그저 범상한 대학원생이었으며, 30년 뒤 한 명은 그냥그런 교수직을, 다른 한 명은 강사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죽음을 생리학적으로 이해하였으며 그것이 진리라고 굳게 믿고 그 믿음을 설파해왔다.

  처음 둘이 함께 해변에 누웠던 날, 자연은 그들에게 온갖 소리와 바람으로 그 시각이 탄생과 욕망이 아니라 죽음의 시각이 될 것이라고 암시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경고를 들을 줄 몰랐고, 이들이 센스 없이 그리고 탐욕스럽게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한 결과 동료 한 명이 바베큐가 되었다. 여인은, 그러니까 셀리느는 이 사건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의식적으로 배우진 못하였으나 무엇인가를 느꼈다. 그녀는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부주의함을 공개 사과했다. 그러나 장차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은 자기에게 씌워질지 모르는 혐의를 피하고자 숨었고 또 여인의 증언을 방해했다. 곧 그들은 결혼했고 결혼 생활을 어떻든 유지는 했지만, 여인은 남자의 이 행동, 이 부분을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이 둔하기 짝이 없는 남편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인식도 하지 못한다. 아니 때로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그는 다시 더 심한 바보짓에 도전한다. 바로 그 해변에서 다시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펼쳐 보이고자 하는 것.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고, 30년전 동료가 산화된 황무지와 뜻 모를 음악을 연주하는 해변이 주는 예감은 이번에도 그의 감각을 일깨우는 데 실패했다. 결국 그 대가는 부인이 먼저 치른다. 남편도 곧 이어 살해당하지만, 부인이 먼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읽는다. 부인의 다리로 손을 뻗는 짧은 순간에 조세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을까? 아니, 언제나 일관성을 유지하는 캐릭터인 그는 그저 자신이 그녀를 염려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차가운 시인]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의 문체 말이다. 영어로 쓰여진 글인데 내가 영어로 읽은 것은 아니니 잘 안다고는 못하겠으나, 번역을 거치고서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 책은 그 사고가 깊을 뿐만 아니라 표현력도 시에 근접한 아름다운 문체라는 것. 해변과 날씨를 묘사하는 장면들은 거의 대가적이다. 유물론자 동물학자 부부가 비명횡사하여 자신들이 신봉하던 그 유물론대로 자연에게 제 살을 내어주다가 결국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그들을 놀라게 하고 스스로는 비웃음 당하고는 결국 따로따로 시체안치소에 넣어진다는(이 책을 읽다보면 죽음이 사람에 의해 처리되는 과정이야말로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죽은 사람은 그저 자연의 손에 맡겨져 '자연스럽게' 해체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일상의 상식과는 다른 주장) 무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섬세한 문체 속에 흐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사랑이나 예술에 몰두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시무시하고 끝이 없는 죽음의 통로를 언뜻 보는 사람들, 그것을 눈여겨보고 명상에 잠기기에는 너무 둔감한 사람들뿐이다. 딱정벌레라는 족속 중에는 시인이 없었다. 딱정벌레는 <몬다지의 물고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녀석은 우리처럼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을 부인하는 체계를 만들어 내느라 평생을 보내지도 않았다. 죽음과 구덩이와 산사태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울하게 나날을 보내지도 않았다.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을 보상해 주는 놀라운 경이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딱정벌레는 계획도, 기억도, 죄의식이나 야심도, 사랑에 대한 욕망도, 망상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여자가 딱정벌레의 햇빛을 망쳐 놓았다. 그래서 녀석은 여자한테서 달아나고 싶었고, 먹이를 먹고 싶었다. 그것이 딱정벌레의 장기 계획이고 미래였다. (58)

조지프가 앞으로 걸어 나와 셀리스의 허리에 팔을 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셀리스는 손짓으로 그를 내쳤다. 이 화재, 이 죽음은 그녀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그의 책임이기도 했다. 사랑이 잘못이었다. 열정이 잘못이었다. 그들의 열정은 비록 짧았지만, 자연계의 균형을 뒤흔들로 자연계의 동시성을 시험할 만큼 강렬했다. 섹스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다. 섹스와 죽음은 하나의 직선 위에 있는 검은 좌표다. 슬픔은 에로틱해진 죽음이다. 그리고 섹스는 성교 후의 여행으로 곧장 뛰어들기 위해 때가 되기 전에 서둘러 속세의 번거로움을 벗어 던질 뿐이다. 셀리스가 그렇게 아침 일찍 연수원을 뛰쳐나와 새로운 사랑을 잡기 위해 서두른 것이 화재의 원인이었다. 그것이 과학적인 견해다. (216)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조지프가 허리를 쿡쿡 찌르며 말리는데도 셀리스는 고백을 멈추지 못했다. 셀리스는 제 허리를 찌르던 조지프의 손끝을 평생 동안 증오했다. 셀리스는 조지프처럼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하거나 편리한 거짓말 뒤에 숨으려 하지 않았다. ...... 그는 그녀를 강요하고, 순종하는 육체를 찾는 연인이었다. 그 도움의 손길은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 셀리스는 귀찮았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 것일까? 내가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하나? 그 오래전에 그가 진실을 말하지 않고, 또 내 허리를 쿡쿡 찌르면서 자백을 말린 것에 대해 내가 아직까지도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짐작도 못하나? (217)

하지만 부모를 젊어 보이게 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실비는 깨달았다. 부모가 죽은 방식 그 자체. 변사는 대개 젊은이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느린 소모는 노인의 속성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게 전혀 없었다. 급속히 파괴된 부모는 정말 아름다웠다. 손상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본질과 특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그들은 개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나름대로 고양되어 있었고, 묘하게 침착했다. 이것은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들은 자궁에서부터 줄곧 사람들을 따라다니는 그 최후의 노인성 경련...을 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살보다 더 행복한 죽음이기도 했다. (242)

실비는 부모가 이번만은 자기를 정말로 놀라게 했다고 인정했다. 적어도 그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를 놀라게 한 것은 부모가 살해된 사실만이 아니었다. 부모가 알몸이라는 사실만도 아니었다. 부모가 죽으면서 실비의 가슴에--뒤늦게나마--사랑을 가득 채울 힘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것은 어머니의 발목에 가볍게 닿아 있는 아버지의 손가락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손을 치우지 마세요.> 실비가 말했다. (242)

조명을 거의 받지 못해 비밀스럽고 창백해 보였던 부모의 삶, 기껏해야 실루엣에 불과했던 부모의 삶이 열정과 색깔을 띠는 데 필요한 것은 죽음의 현란한 횃불뿐인 것 같았다. 이제 죽음의 눈부신 빛이 부모를 포착하여 고정시켰다. 그들의 이력은 확정되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덧붙일 것도 없다. 그들이 죽은 날짜는 기록되었고,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다. 아무것도 바뀌거나 수정될 수 없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죽지 않은 이들의 심정이나 그들이 지어내는 신화뿐이다. ... 죽은 사람들 자신은 추억을 박탈당한다. 그들은 자신의 죽음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276)

이 피해자들은 자초한 재난의 공범자였다. ... 그들은 죽음을 유혹했다. 그리고 죽음은 그 유혹에 넘어갔다. 그들은 죽음을 원했고, 그래서 죽음이 찾아왔다. 친절한 손에 화강암을 쥐고. 이웃과 동료들도 모두 그렇겠지만, 네 명의 젊은 경찰관도 피해자들의 행동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행복한 죽음>을 그렇게 쉽사리 강탈당하는 결과를 자초한 것은 너무 무책임했다. 고통과 노년의 유동적인 세계에 도달할 때까지 기를 쓰고 나아갔어야 했다. 꿋꿋하게 참고 견뎌서, 침대에서의 편안한 죽음이라는 정당한 보상을 받으려고 애썼어야 했다. (287)

하지만 그의 손은 곧 아내를 떠나 복사뼈에서 미끄러졌다. 아내의 다리에 얽혀 있던 그의 손가락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풀려 버렸다. 그들 사이의 공간은 점점 넓어졌다. 그의 손가락 관절이 땅바닥을 훑었다. 아내의 종아리에 남은 것은 남편의 손가락 자국뿐이었다. 입맞춤하듯 살짝 닿은 그의 손가락 끝이 종아리에 박혀 오목한 새김눈을 남겼다. 조지프의 시체는 서쪽으로 굴러갔다. 그의 아내는 동쪽으로 갔다. 그들은 풀밭을 떠나 무명 시트 위에 눕혀졌고, 나무를 흉내 낸 종이 관에 담긴 다음, 다시 사막용 지프의 평평한 바닥에 실려 해변을 따라 달리다가 교외를 지나, 시체 공시소의 얼음처럼 차가운 서랍 속으로 들어가 자살자들 틈에 끼였다. 마침내 바람이, 시간이, 우연이 그들의 시체를 휩쓸어 갔다. 대륙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하늘에는 별똥별이 지나갈 공간이 있었다. (289)

활기 차게 밀려오는 어스름한 회색의 첫 새벽빛 속에서 집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켜고 있다. 태양의 이마가 하루를 몰래 들어다보고 있다. 태양의 얼굴은 아직 잠에서 덜 깨어 남빛이고, 구름에 덮인 머리는 빗질도 하지 않아 부스스하고, 바다의 수평선을 향해 안개 같은 고수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있다. 새들은 이제 정원의 나무 꼭대기에서 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시내의 첫 전차가 사랑을 찾아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수천 채의 집에서 첫 자명종이 울리고 있다. 수도꼭지가 열리고, 가스불이 켜진다. 커피와 빵과 수프 냄새가 난다. 게잡이 배 한 척이 해안을 따라 힘겹게 나아가고 있다. 도중까지 태양을 배웅하기 위해, 또는 태양이 온 곳으로 다시 쫓아 보내기 위해. 조지프와 셀리스는 그들의 방에 있다. 그들의 침대에 팔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다. 그들이 아무리 몸을 뒤척여도, 그들이 무슨 꿈을 꾸어도, 불투명한 어둠이 그들의 귀에 뭐라고 속삭여도, 어둠이 뭐라고 약속하고 협박하고 장담해도, 그들은 유예 기간이 왔다가 물러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295)

아직도 모래언덕은 날마다 높아져 산더미처럼 쌓이고 허물어진다. 산마루는 바람과 함게 이동하고 다시 모인다. 모래언덕은 날씨와 바다에 대항하여 등성이를 높이고, 바람에 실려 오는 세상의 슬픔을 막으려고 애쓴다. 바리톤 만의 해안만이 아니라 그 너머의 모든 해안에는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물고기와 새, 조개삿갓과 쥐, 연체 동물, 포유류, 홍합과 게의 시체와 깨지고 얇아진 잔해가 올라오고, 파도에 휩쓸리고 분류된다. 그리고 조지프와 셀리스는 경험을 뛰어넘어, 사랑으로 충만한 무의식적인 종말을 누린다.
그것은 죽어 있는 상태가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끝나는 날들이다.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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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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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예감하고 차분히 맞는 사람도 많은데, 이 부부는 젊어든 늙어든 벼락 맞듯 죽음을 경험하는, 감이 아주 떨어지는 유물론적 동물학자들. 둔감하고 이기적인 욕망이 죽음의 얼음물 맞고 싸늘한 재가 되는 과정. 죽음이 본인 가족 공동체&자연에게 무엇인지를 치밀하고도 시적으로 묘파하는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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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의 아들 - 나의 선택 테드북스 TED Books 1
잭 이브라힘.제프 자일스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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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라는 단어 좋아하지 않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 칭호를 붙여도 좋을 것 같다. 편견과 폭력에 난자 당하는 아픔을 알기에 모든 무기를 버리고 스스로 평화의 징표가 된 사람. 누구 밑에서 어떻게 자랐든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증오에서 친절로, 폭력에서 평화로, 고립에서 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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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의 아들 - 나의 선택 테드북스 TED Books 1
잭 이브라힘.제프 자일스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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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일 정도의 증오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누군가에게 배워야 생겨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니, 그냥 가르침을 받아서도 아니고 강제로 세뇌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증오가 저절로 생긴다는 건 거짓이다. 비빌 언덕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안적 세계관을 거부당한 사람들에게 거듭 되뇌는 거짓말이다. 우리 아버지가 믿은 거짓말, 내게 전해주려 했던 거짓말이다. (25)

나는 무엇이 아버지를 테러리즘으로 이끌었는지 이해하느라 인생을 보냈으며, 아버지의 피가 내 혈관 속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했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유는 희망과 교훈을 전하기 위해서다. 광신의 불속에서 자랐으되 비폭력을 받아들인 젊은이의 초상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 대단하게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는 저마다의 화두가 있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화두는 누구에게나 선택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증오를 훈련받았어도 관용을 선택할 수 있다. 공감을 선택할 수 있다. (28)

그는 ... 모든 것에 파고들어 의문을 제기하고 관심을 쏟았다. 이 남자는 독단을 증오했다. 스튜어트는 내게 계시 같은 존재였다. 나는 이른바 삶의 지혜를 덥석덥석 집어삼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아버지상이었다. 그가 세상을 풀어 알려주길 기대하며 밤늦도록 기다렸으며, 그는 내 머릿속의 잘못된 배선을 수리해주었다. 나의 새 역할 모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114)

이 책에서 편견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은, 누군가를 편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우선 취약한 사람을 찾는다. 자신감, 소득, 자부심, 활력을 잃은 사람을. 아니면 삶에서 모멸감을 느끼는 사람을. 그다음 그를 고립시킨다. 그를 두려움과 분노로 채우면,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 캘버턴 사격장의 사람 형상을 한 얼굴 없는 표적으로 여기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날 때부터 증오를 훈련받은 사람도, 마음이 비틀어지고 무기처럼 된 사람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선택할 수 있다. 평화를 남달리 옹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폭력, 차별, 권리 박탈의 결과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어본 사람들은 세상에 더는 피해가 필요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123)

"내가 목숨을 바칠 대의는 많지만, 남의 목숨을 빼앗을 대의는 하나도 없다." (123)

그녀가 말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 내가 당신 아버지 사건을 다룬 요원이에요." 그녀는 잠시 쭈뼛거렸다. 그 모습에 마음이 쓰였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했다. "엘사이드 노사이르의 자식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늘 궁금했어요. 당신이 그 사람 뒤를 따랐을까봐 걱정했어요."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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