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미신에 빠져드는가
매슈 허트슨 지음, 정은아 옮김 / 원앤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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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숨겨진 믿음은 매일매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에게 통제감, 목적의식, 세상과 연결된 느낌, 삶의 의미를 주며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겠다. 당신이 어떠한 속설에도 휘둘리지 않으며 `뉴에이지...`를 멸시하는 강경한 회의론자라고 해도 사실은 마음 속으로 마술을 믿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19)

한편 또 다른 실험에서는 신체적인 전염에 민감함 사람일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입었던 스웨터를 더 사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신체적인 민감성이 강한 사람은 정신적인 전염이라는 마술적 사고에서도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44)

미신에서 비롯된 소소한 행동들은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미신적 행동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오류 관리 이론 자체는 매우 이성적이다. (122)

"극한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의 생존 여부는 독립적인 행동과 삶의 중요한 측면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 일부 공학자들은 이러한 통제력을 현대 기술에 접목시킨다. 싱가포르 항공의 대표는 비행기 좌석에 달린 스크린 시스템이 그저 비행의 지루함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음식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 자체가 몇 시간이고 좁은 의자에 묶여 생판 모르는 조종사에게 생명을 맡기는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탑승객들에게 어떤 통제감을 제공하는 심리적 수단으로 이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다. 승객들은 리모컨에 달린 시작, 정지, 멈춤, 다시 감기 등 다양한 버튼을 누르면서 아주 구체적인 통제감을 느낄 수 있다." (129)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세상에 미치는 통제력의 정도를 과장해서 생각한다. 그런데 이를 과장하지 않고 정확하게 간파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이다. ...... 하지만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위험할 수 있다. 수많은 연구에서 동물들에게 피할 수 없는 전기 충격을 주고 나면, 그후에는 쉽게 피할 수 있는 전기 충격도 거의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유사하게 인간 역시 피할 수 없는 소음에 노출된 후에는 시끄러운 헤드폰의 볼륨을 줄이는 것조차 머뭇거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31)

리벳 박사의 연구는 이 A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매우 높게 만들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뇌 속의 과정인 A가 무엇인가를 결정한다는 의식적인 느낌, 즉 자유의지인 B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 C라는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A는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A가 B와 C의 원인일지라도 우리는 B가 C의 원인이라고만 생각한다. 이렇게 자유의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형성된다.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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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종교 유교
가지 노부유키 지음, 이근우 옮김 / 경당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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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핵인 초혼재생도 모른채 뭐든 유교 탓이라 하는 멍충이 설법에 날리는 똑똑한 할. 나아가 동북아 현대성, 우리의 현대, 어떻게 빚어나갈까에 대한 중요한 고민. 그러나 5장의 신사 이슈엔 동의 안 해. 유교를 세상사 유일한 잣대 삼으면 일본의 제국주의 현대 무반성하는 위험한 결론도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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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종교 유교
가지 노부유키 지음, 이근우 옮김 / 경당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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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거슬리는 부분은 있지만 아주 좋은 책. 우리 사회 맥락에서도 꼭 필요한 문제제기.

촌스러운 외관 때문에 저평가되지 않도록 세련되게 재포장해서 서점으로 다시 내보내주길.
사소한 오탈자도 고쳐서(예: 126쪽 "이는 에서"). 



그런 의미에서 아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아이를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인색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부분을 자주 오해하고 있다. 유교가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같은 혈족이다. 같은 혈족 내에 자손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배항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배항이란 같은 혈족 내에서 부모라면 부모 세대, 자식이라면 자식 세대를 하나의 그룹으로 취급하여 그 그룹의 제일 연장자부터 숫자를 붙여 구별하는 것이다. (75)

효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이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도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효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오해이다. … 거듭 말했듯이 중국인, 나아가서 동북아시아인은 이 세상을 오감…으로써 마음껏 즐겨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대해서 유교는 사후의 위령을 가르쳤던 것이다. 초혼재생으로 그리운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이러한 사생관과 연관되어 생겨난 관념이 효이다. 즉 죽음의 관념과 연관된 ‘종교적인 효’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식의 효, 즉 부모에게 복종하는 식의 ‘도덕적인 효’를 훨씬 초월한 것이다. (77)

‘효’란 현대 용어로 옮기면 ‘생명의 연속에 대한 자각’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를 영원히 자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을 보는 눈이 ‘삶’을 보는 눈으로 단번에 바뀐다. 죽음의 의식에서 광대한 삶의 의식으로 바뀌는 이것이 유교의 사생관이다. (78)
……
유혼…과 자손—형태는 바뀌지만 자신의 정신과 육체는 영원히 `즐거운 이 세상`에 `현재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자각하고 말하는 것이 유교이며, `효`가 그 핵심어이다. (84)

하지만 제사는 여전히 집에서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이유는 집안의 불단을 중심으로 선조 공양을 행하기 때문이다. … 확실히 유교에는 교단조직이 없지만 각 가정에서 거행하는 형태로 전국에 널리 퍼져 있다. 요컨대 유교라는 것은 교단종교나 개인종교가 아닌 ‘가문의 종교’인 것이다. 각 가문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각종 의례의 주재자는 직업적인 종교인이 아닌, 가문의 최고 책임자가 맡게 되는 것이다. (109)

그렇듯 에도 시대에는 실제로 지도적 이념의 역할을 했던 주자학이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에도 시대와는 다른 현대에서 그 역할을 잃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교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현대에는 현대에 적합한 유교도덕이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현대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유교도덕을 창출하려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방법은 있는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선은 유교의 종교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130)

이것이 개인주의로서 표층에 나타났을 때는 구미 근대사상의 자유나 평등의 표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개인주의를 단지 겉으로 용어만 수입하고 법에도 반영하여 보급해온 일본의 경우에는 기독교와 같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을 갖지 않는 이상,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을 경외하는 일 없이 자기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이기주의로 흐르고 만다. 그런 사례는 우리 주위에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본인은 마음속 깊이 부모 자식 중심의 가족관을 의식하면서도 현실생활에서는 구미의 개인주의를 흉내내어 부부 중심의 가정 생활을 꾸리고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일본의 핵가족이다. 비뚤어진 현상의 전형이다. (132)

이처럼 각각의 구체적인 인간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것이 중국인의 특징이다. 더구나 그런 각각의 도덕은 그것이 적용되는 인간 관계를 냉철하게 꿰뚫어봄으로써 생겨난 것으로, 유교도덕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오랜 경험에서 인간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요소를 끄집어내어 그것을 도덕화해온 것이다. 도덕론자가 머릿속에서 짜낸 것을 가지고 위로부터 인간 관계를 규정하고 억압하려는 따위의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199)

유교의 도덕론이라는 것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있는 개체로서의 자신이 개체와 함께 소속 사회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생의 행복론인 것이다. 구미식으로 우선 개인이 있고, 그런 개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이 아니다. 그러한 공생은 유교 문화권에서는 무리인 것이다. 이 유교의 행복론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교육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살고 있다. 인간, 인간, 그리고 인간의 세계이다. 따라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규칙[禮]이 있다. 그런 규칙은 성인이라 불리는 뛰어난 인물이 만든 것이라고 하여 유교에서는 인간이 그것을 배우기를 바란다. 아니, 예만이 아니다. 성인은 훌륭한 말들을 모으거나 자기 자신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유교에서는 그런 기록 문헌, 즉 고전도 배우기를 바란다. 다시 말하면 시서예악...에 대한 학습이다. (210)

그러한 행복론을 위해서 유교는 성립 당시부터 교육을 자신들의 방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유교에 맞선 노장사상은 유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인 교육을 부정한 채, 교육을 받지 않은 자(그 전형은 아기)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라는 전혀 상반된 주장을 폈던 것이다. (211)

유교에 대해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한 줄로 충분하다. 유교의 종교성과 그 위에 존재하는 유교의 도덕성,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효--이 세 가지가 유교의 구조를 만들고 있다. 다만 종교성은 죽음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고 또 마음속 밑바닥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종교성을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특히 일본에서는 일본 불교 속에 유교의 종교성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중국인이나 한국인보다 더 유교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212)

게다가 유교의 행사는 가족 단위로 치르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를 위한 교단이나 집회 장소가 필요 없다. 가족의, 가족에 의한, 가족을 위한 종교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선전하지 않는다. 많은 종교교단이 떠들썩하게 자기를 선전하는 것과는 반대로 유교는 침묵을 지킨다. 그러나 유교는 동북아시아인의 감성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이나 한국인,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며,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살아 있다. 일본인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성묘를 하고, 선조 공양(선조 제사)을 하고 있다. 바로 거기에 침묵의 종교인 유교의 모습이 있다. (212)

그래도 나는 굳이 화제를 택했다. 화제를 해설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교적 입장`에 서서 세상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유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면, `유교적 입장`이나 `유교 이해`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적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 입장에 서서 다양한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발상에서 출발한 시도이기 때문에 소재가 화제라는 점은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유교적으로 그런 화제들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이다. (214)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중국인은 소박하게 이미 있는 것은 있다, 목 화 토 금 수는 이미 있다는 데서 출발하여 만물의 성장을 설명하고 그것을 기술하려고 했다. 참으로 중국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본질은 무엇일까를 형이상적으로 사고하는 발상이 빈약했다.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것은 허…로 간주하고, 형이하적인 만물 현상 세계를 실…이라고 하여, 실이 허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를 테면 도덕에서 성실…, 질실…을 중시하는 사고로 이어진다. 중국인은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짬이 있으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 인간과 하늘 땅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자는 입장이다. (233)

헌법에 근거한다고 하면서 구미식 개인주의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 학교이기 때문에 교육이 개인주의를 보급해갈 것이다. 그것이 철저하게 보급되었을 때 일본의 가족이나 가정은 변질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주체성을 가진 개인주의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기주의자를 만들어낼 것이다. 왜냐하면 교원들 중에 자율이나 자립의 기개를 가진 개인주의자는 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진정한 개인주의를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인주의를 외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는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실례를 나는 질리도록 많이 보아왔다. (265)

후지사와 난가쿠가 구미의 언어를 모르면서도 자유민권운동적인 ‘자유’의 번역어로서 불교식의 ‘자유’라는 말은 맞지 않다고 지적한 것은 한자 용어에 대한 직관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번역어로서 무엇이 좋은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리’라고 번역하라…. (269)

통렬한 비판이었다. 기부를 바라던 그들은 대답도 못하고는 못 들은 척 여전히 길가는 사람에게 기부를 청했다. 남자는 몇 번이고 집적대고 있었다. 박애를 주장하는 젊은이들은 대학생인 것 같았는데, 시비를 거는 그 남자에게 이론적으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런 모습에서 박애라는 도덕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 구도—구미 선진국의 도덕을 머릿속으로 받아들일 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인과, 학문이나 교양은 없지만 유교 문화권의 인간으로서 인간의 노력이 갖는 소중함을 깨우친 서민 간의 대립, 이것은 그대로 서민에 대한 근현대 일본 지식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식인은 정말로 근대사상과 근대도덕을 몸에 익히고 있는 것일까? (275)

어떤 사람은 말한다. 개인주의는 점차 일본인 사이에 퍼지면서 성장하고 있다고. 거짓이다. 언뜻 보면 개인주의적으로 보이는 것 같지만, 한 껍질을 벗기고 들여다보면 대부분 이기주의가 아닌가. 이기주의에는 큰 도리에 근거한 자율도 없으며 자립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이익추구뿐으로, 이익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것이다. 진정으로 자립한 개인주의자라면 자기 자신의 논리에 충실히 따르며, 때로는 귀중한 생명을 바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런 훌륭한 분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이기주의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생명은 절대로 내놓지 않는다. (280)

대체로 가족주의 중심의 유교는 악이고 개인주의 중심은 선이라는 식의 경직되고 도식적인 발상이다. 개인주의라는 교과서적 권위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까, 의문이라고는 조금도 품지 않은 채 개인이나 자유, 평등 같은 말을 되뇌기만 하면 마치 현실이 그렇게 될 것처럼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언설의 상당수는 자유 평등 개인주의를 절대 선…으로 아는 신념을 말하고 있을 뿐, 구체적이지 않다. 어떤 글을 읽어도 예산을 짜서 복지설비를 느리고, 필요 인원을 공공단체가 확보하라는 식의 초보적인 사회주의 논조에 지나지 않으며 천편일률적이다. 거기에는 스스로의 눈으로 인간을 통찰하려는 독자적인 관점이 없고, 전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라 하는 역사감각도 없다. (285)

남자는 바깥이 본분, 여자는 안이 본분이라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서 이루어진 분업이 아니라, 모두가 필사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적극적인 지혜로서 남녀의 분업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유교이론에서 남녀분업이라는 말은 그것을 추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교가 음양의 대칭에서 유추적으로 남녀를 거기에 대응시키는 등 성별에 따른 역할 분담을 하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교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든, 현실에서는 남자는 괭이로 밭을 갈고, 여자는 가사에 바빴던 것이다. (290)

유교란 무엇인가? 침묵의 종교다. 가족이나 사회와 함께 존재하는 공생의 행복론이다. 일족의 ‘생명의 연속’에 대한 찬가이다. 그것을 젊은이들이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일족 가운데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반드시 이어질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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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력 - 꿈을 실현시키고 직관을 깨우는 힘 파동의 세계 총서 1
페니 피어스 지음, 김우종 옮김 / 정신세계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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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본연의 주파수를 찾고 그에 머무는 연습이 누적될수록 감응력은 살아난다. 삶은 본질을 향해 조금 더 수렴하고 관계는 변할 수 밖에 없다. 나의 주파수는 이미 예전의 동조상태를 벗어나 더 높이 이동하고 있으므로. 설명도 변명도 필요 없다. ˝영혼이 마침표를 찍으면 그것으로 끝이다.˝(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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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본질 - 환생의 증거와 의미, 카르마와 생명망에 대한 통합적 접근
크리스토퍼 M. 베이치 지음, 김우종 옮김 / 정신세계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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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안 읽은 게 아쉽지만, 그랬다면 지금처럼 공감하진 못했을 터. 단신교는 말 안 되면서 볼썽 사납게 억압적. 다신교는 정화는 커녕 산만&요사스런 느낌. 그런데 윤회 받아들이면 이렇게 생각이 뽕 뚫림. 대령과 영혼의 나이 개념 굿! 자료와 논리 위에 선 착실한 학술서이자 믿을 만한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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