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윤리학연습 발표>

 

1: 위계

 

   모든 기예, 모든 연구, 모든 행위와 합리적인 선택은 어떤 좋은 것(some good)을 목표로 하며, 그래서 좋은 것(the good)은 모든 것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목표로 삼는 목적들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생산물이다. 만약 어떤 행위에서 생산물이 부가된다면, 생산물은 본성에 의해서행위보다 더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 행위는 생산물을 목적으로 추구되는, 즉 생산물에 관해 도구적이고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목적이 다른 목적에 관해 도구적이고 종속적인 경우가 있다. 이 때에는 상위의 목적을 추구하는 활동(학문)이 도구적이고 종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활동(학문)보다 더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다.

 


2
: 최고선, 정치학

 

   우리의 활동이, 우리가 그 자체를 원하고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다른 모든 것들은 그를 목적으로 삼아 추구하는 성격을 지니는 목적은 바로 좋은 것(the good), 최고선(chief good)이다. 그러므로 최고선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이것을 목적으로 삼는 활동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최고선에 관한 지식을 목적으로 삼는 활동
(학문)은 가장 상위의 활동이며, 곧 정치학이다. 정치학은 도시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들과 각 계층이 배워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할지를 규정한다. 이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들을 이용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다른 학문들의 목적은 정치학의 목적에 종속되며, 따라서 정치학은 가장 상위의 활동이다.

 


3
: 연구의 엄밀함의 한계

 

   우리의 연구는 장인들이 추구하는 것과 같은 엄밀한 정확도를 갖출 수가 없으므로, 그 정확성(명료함)을 주요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고귀한 것과 정의로운 것들의 영역 즉 정치학이 설명하는 영역은 너무도 다양해서, 본성이 아닌 합의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것들(goods) 또한 이와 비슷해서, 좋은 것들이 나쁜 결과를 맺는 일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에 관해서 대강, 그리고 기본적인 틀을 설명하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각 영역에는 그 주제의 본성이 허용하는 정도의 정확도가 있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잘 분별할 줄 안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분야에 관해서 잘 판단한다
.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그렇다면 모든 분야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은 모든 분야에 관해 잘 판단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학은 다양한 것을 경험한 나이든 사람들에게 알맞으며, 경험이 적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알맞지 않다. 또한 젊은 사람들이나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사람들은, 느낌에 이끌리는 삶을 살기 때문에 정치학에 알맞지 않다.

 


4
: 행복, 탐구의 방식

 

   정치학의 목표는 행해지는 모든 좋은 것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과 현명한 사람들 모두 그 가장 좋은 것을 행복(happiness)이라고 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행복한 상태(being happy)는 잘 살고 잘 행위하는 것과 같다(equivalent). 그러나 이 두 사람들은 행복에 관한 실제적인 생각들에 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은 쾌락(즐거움, pleasure), , 명예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고, 같은 사람이라도 상태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다. 특정한 사상가들은 이런 좋은 것들(good things) 너머에, 모든 좋은 것들을 좋게 만드는, 그 자체로 좋은(good in itself) 어떤 다른 것이 있다고 믿는다.


   논증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 하나는 제1원인에서(from first principle) 나아가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제1원인으로(to first principle) 나아가는 방식이다. 또한 알려진 것들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데, 알려진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우리에 의해(by us) 알려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건 없이(without qualification) 알려지는 것이다. 정치의 영역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은 믿음을 잘 형성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것이 고귀한 것 그리고 정의로운 것(한 단어로 정치)의 영역에서 경쟁하는 학생이 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습관을 잘 길들여야 하는 이유다. 1원리가 어떤 것은 그 경우라는 믿음이고, 만약 그것이 충분히 명백하다면, 그는 그 이유에 관해서 굳이 알 필요가 없다. 그러한 사람은 이미 제1원리를 소유하고 있거나, 그것을 아주 쉽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 쾌락의 소유가 행복이다, 명예의 소유가 행복이다, 덕의 소유가 행복이다에 대한 반박

 

   사람들은 좋은 것(the good) 즉 행복에 관한 자신들의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수의 사람들은 쾌락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즐기는 삶(the life of enjoyment)을 좋아한다. 특별히 도드라지는 세 가지 삶의 형식이 있는데, 즐기는 삶과 정치적인 삶(the life of politics), 그리고 관조하는 삶(the life of contemplation)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소에게나 어울리는 삶을 합리적으로 선택하며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력자들 중 다수가 이런 삶을 선택하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 깊게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현명한 사람들
, 행위하는 사람들은 명예를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명예는 명예로운 사람들보다는 명예를 부여하는 사람들에게 더 의존한다. 따라서 명예가 행복이라는 생각은, 행복이 한 사람에게서 쉽게 뺏어갈 수 없는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에 들어맞지 않는다. 또한 명예는 그들의 좋음(goodness)을 확신하려고 추구하는 경우도 많다. 만약 실제로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명예보다 덕(virtue, 즉 좋음)이 우선이다. 그러나 덕이 명예보다 우선할지는 몰라도, 부족(결핍)한 점이 있는 것 같다. 삶 전체에 걸쳐 활동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덕은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덕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큰 불운에 처한 사람에게 행복하다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부는 우리가 찾는 좋은 것
(the good)이 아닌데, 단지 다른 것을 얻는 데 유용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6
장 보편적인 좋음(좋은 것의 형상) 개념에 대한 반박

 

   보편적인 것에 관한 개념을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 있는 모든 문제들을 통해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는 진리를 보존하고 철학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물론 형상(the Forms)을 소개한 사람들은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에 이런 논의는 난감하겠지만, 진리를 탐구하려면 친구보다는 진리를 사랑하는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


   형상을 소개한 사람들은 우선성과 차후성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연결고리들을 형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 그러나 좋은 것(the good)은 실체, 특성, 관계의 범주에 모두 적용되고, 실체는 관계적인 것에 본성적으로 우선한다. 따라서 좋음은 우선성과 차후성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런 좋은 것들(these goods)을 넘어서는 공통된 형상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좋음
(good)은 실체(, 지성), 성질(덕들), 수량(적절한 양), 관계(유용함), 시간(적절한 때), 공간(적절한 장소) 등 다양한 범주에 적용된다. 만약 하나의 보편적인 좋은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이들 중 한 범주에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용법과 어긋난다. 더욱이, 개별적인 형상에는 그것을 탐구하는 한 가지 학문이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하나의 범주에 적용되는 좋은 것의 형상을 확립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 형상에 관한 학문은 여러 가지가 된다. 게다가 그들이 사용하는 그 자체라는 말의 의미도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인간성의 정의는 하나이며 인간성 자체와 인간에게 모두 같다(고 그들은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적이라는 점에서, 인간성 자체와 인류는 차이가 없다. 이는 좋은 것 그 자체(좋음 그 자체)’라는 말에도 적용된다. 영원하다는 것도 더 좋다는 것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이런 논증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 그들(플라톤주의자들)이 모든 선(every good)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 자체가 목적으로 추구되고 가치가 부여된 것들을 하나의 단일한 형상을 참고한 것에 의해 좋다고 말하고, 반면 그런 것들에 도구적으로 쓰이는 경향이 있는 것들은 그런 것들을 목적으로 해서 좋다는 방식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들은 좋다는 말을 그 자체로 좋다는 것, 그리고 그 자체로 좋은 것들을 목적으로 해서 좋다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좋다는 것이 바로 좋은 것의 형상(에 관한 참고)이다. 우리가 흔히 그 자체로 추구된다고 말하는 어떤 것들도, 사실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추구되는 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 좋다는 것은 단지 형상 뿐인데, 만약 형상이 이런 의미라면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또한 좋은 것(the good)의 형상이 좋은 것에 관한 정의를 통해 존재한다면, 이들은 구체적인 사례들에 똑같이 예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에 어떻게 똑같이 예시되는 것인지 우리는 도통 알 수가 없으며, 그들은 각자의 측면(thier being)에 따라 다르게 정의된다. 따라서 단일한 형상에 대응하는 공통된 좋음(good)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다 같이 좋다
(good)고 불릴까? 우연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좋음(one good)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일수도, 하나의 좋음에 대한 공헌 때문일수도, 또는 유비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철학의 다른 영역에 관한 질문인 것 같다. 이것은 형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만약 범주들을 넘어서 근거를 두고 그 자체로 분리되어있는 하나의 좋음(one good)이 있거나, 한 좋은 것(a good)이 자체로 분리되어 있다면, 이것은 행위의 대상이 아니거나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것을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선의 형상을 이해하면
, 우리가 얻을 수 있고 우리의 행위의 대상이 되는 여러 좋은 것들(those goods)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지만, 실제 학문(활동)과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 활동하는 사람들은 어떤 좋음(some good)을 목표로 삼고 부족한 점을 채우려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편적인 좋음(the universal good)을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만약 보편적인 좋음이 실제로 도움이 된다면, 그들이 이런 지식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7
장 완전함, 자기충족, 인간의 특징적 활동

 

   모든 행위와 합리적 선택에서 목적은 좋은 것(the good)인데, 그 목적(the good)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것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행해진 모든 것이 어떤 목적을 가진다면, 그 목적은 그 행해진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the good)이 된다. 여러 목적들을 가진다면, 그것들이 좋은 것들(the goods)이 된다. 또한 우리는 여러 목적들을 다른 목적들에 대한 수단으로 택하며, 그래서 모든 목적들이 완전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최고선은 완전한 어떤 것이다. 단 하나의 목적만이 완전하다면, 그것이 우리가 찾는 것일테고, 여러 개가 완전하다면, 그 중에 가장 완전한 것을 찾아야 한다. 이를 찾는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적용해볼 수 있다. 만약 어떤 것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될만한 가치가 있다면, 다른 어떤 것을 목적으로 추구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보다 더 완전할 것이다. 또한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선택할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면, 그 자체를 위해서 또는 다른 목적을 목표로 선택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보다 더 완전할 것이다. 조건 없는 완전함이란, 그 자체를 위해서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으면서 다른 어떤 것을 목적으로 선택할만한 가치는 전혀 없는 것을 말한다. 행복은 부분적으로 조건 없는 완전함에 부합한다. 명예, 쾌락, 지성은 그들 자체를 위해 선택되지만, 또한 행복을 위해서 선택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반면 명예롭기 위해서, 즐거우려고, 또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행복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충족
(self-sufficiency)이라는 측면에서도 행복을 살펴볼 수 있다. 완전히 좋은 것(the complete good)은 자기충족적이다. 자기충족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을 선택할만하게 만들며 부족(결핍)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이런 자기충족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실제로 선택할만한 모든 것들 가운데 단지 하나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단지 하나라고만 생각하면, 다른 것이 덧붙여져서 더 좋아질 것인데, 그렇다면 좋음(goodness)을 증가시키는 그 다른 것이 더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복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특징적 활동
(characteristic activity of human being)에 관해 파악하면 최고선(the chief good)을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것(잘 하는 것, doing well)은 그 특징적 활동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것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것(living, the life of nourishment and growth)은 식물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특징적 활동은 아니다. 나머지는 이성을 소유한 요소의 삶,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을 고려하는 삶이다. 이 요소는 또 이성에 복종하는 부분과, 이성을 소유하고 생각에 참여시키는 부분으로 나뉜다. 우리는 우리의 연구의 맥락에 적절하게, 활동이라는 의미에서의 행위와 관련한 삶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인간의 특징적 활동이 이성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면
, 그리고 그 특징적 활동에 덧붙여지는 덕 속에서 좋은 것(the good one)의 우월성이 확보된다면, 또한 좋은 사람(the good person)의 특징적 활동이 이것들을 잘 그리고 고귀하게 발현하는 것이고 또한 적절한 덕과 일치하여 성취되는 그 때 성취된 특징적 활동이라면, 인간적인 좋음(the human good)은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으로 드러난다. 만약 여러 덕이 있다면, 그 가운데 가장 좋고 완전한 덕과 일치하는 것이 인간적인 좋음이다. 이것이 삶 전체를 관통해야 한다(this must be over a complete life).


   여기까지가 우리의 탐구 대상에 관한 밑그림이고
, 자세한 내용은 시간이 채워줄 것이다. 그러나 각 분야에 알맞은 적절한 정확도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도 모든 경우에 관해 같은 방식의 설명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어떤 것이 바로 그 경우라는 그럴듯한 증명은, 사실 자체를 출발점으로 삼는 제1원리들과 함께 사실에 적용했을 때 충족될 것이다.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얻을 수 있으며, 각 본성에 알맞은 방식으로 탐사해 나가야 한다.

 


8
: 일반적인 견해와의 조화

 

   우리는 제1원리를 우리의 견해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견해에도 맞춰보아야 한다. 모든 자료와 진리를 조화시키다보면, 곧 틀린 것(falsity)과 충돌하게 된다.


   좋은 것들
(goods)은 외적인 좋은 것들(external goods), 영혼에 좋은 것들(goods of the soul), 몸에 좋은 것들(goods of the body) 세 가지로 나뉜다. 영혼에 좋은 것들은 우리가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특별하게 좋다고 말하는 것들이며, 영혼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영혼의 행위와 활동들이다. 행복에 관한 우리의 개념은 이것과 일치하며, 이것은 철학자들이 채택한 존경할만한 견해다. 또한 목적은 특정한 행위들과 활동들을 구성하고, 따라서 목적은 영혼에 좋은 한 가지(a good of the soul)이지 외적인 좋은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행복한 사람은 잘 살고 잘 행위한다는(4) 일반적인 견해와도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우리의 입장은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에 관한 견해를 모두 포함한다
. 행복은 덕이다, 실천적 지혜다, 지혜의 한 종류다, 다소간의 쾌락이 따라오는 그들의 조합이다 등등. 그런데 행복이 외적인 번성도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견해는 오래 지속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였다. 행복이 덕에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견해는, 우선 행복이 덕이라고 또는 행복이 어떤 특별한 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그것이 상태인지 행위인지 말하는 것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최고선은 활동이다. 상태는 결과를 산출하지 않지만, 활동은 결코 그럴 수 없다.


   또한 우리의 주장은 그런 사람들의 삶이 쾌락 그 자체라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
. 쾌락을 경험하는 것은 영혼의 상태에 관한 것인데, 덕과 함께인 사람들은 덕과 일치하는 것을 보면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의 쾌락은 본성에 의해서 즐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것과 다른 것이 갈등을 일으키지만, 덕스러운 사람은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덕스러운 행위를 보면 즐거워한다. 그가 즐거워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그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또한 즐거운 만큼이나 좋고 고귀하기도 하다. 그러므로 행복은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행복에는 외적인 좋은 것들의 현존도 필요하다
. 그런 자원들 없이 고귀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행위를 하면서 동료, 친구, , 정치권력 등을 도구인 것처럼 사용한다. 이런 것들이 갖춰지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하기 힘들다. 이런 현실 때문에, 행복을 좋은 운명(good fortune)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9
: 운명, 전체로서의 삶

 

   행복은 학습, 습관화, 육성에 의해 얻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행복은 어떤 신적인 수혜의 덕 또는 행운에 의해 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우선, 만약 모든 것이 신이 인간에게 준 것이라면, 행복 또한 신이 준 것이어야 하며 또 가장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설사 신이 준 것이 아니고 인간이 배워서 얻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행복은 분명 가장 신적인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덕에 관해 생각하는 데 완전히 무력하지만 않다면, 배우고 노력해서 덕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널리 퍼진 견해다. 만약 실제로 그렇기만 하다면, 행복 또한 그런 방식으로 얻어야 한다. 가장 위대하고 고귀한 것을 행운에 맡기는 것은 매우 적절치않다.


   이런 입장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행복이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의 한 종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 다른 좋은 것들(the other goods)은 행복에 관해 필수적인 조건이고, 또 다른 좋은 것들은 행복을 얻는 데 자연스럽게 도움을 주거나 유용한 수단으로 봉사한다. 이런 입장은 우리의 처음 목표, 즉 시민들이 좋고 고귀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것을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정치학의 목적을 찾아야한다는 언급과도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다른 동물들을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 이유가 되는데
, 그들은 행복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아이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데, 그런 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행복은 완전한 덕과 완전한 삶을 요구한다. 삶에는 우여곡절이 많고, 우연한 일들도 일어나고, 가장 성공적인 사람이 말년에 엄청난 불운을 만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다.

 


10
: 죽은 사람이 행복하다는 주장에 대한 검토

 

   한 사람이 행복한지 아닌지 평가하려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봐야하기 때문에, 죽은 뒤에만 가능한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죽은 뒤에라야 행복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은 활동을 하지 않는데, 이것은 우리가 내려온 행복의 정의(덕에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와 어긋난다. 죽은 사람은 나쁜 것(evils)들과 불운을 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행복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축소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마치 살아있으면서도 그것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죽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행복하다가 불쌍해지기도 한다면 그것은 분명 이상하다. 그러나 후손들의 운명이 완전히 그의 선조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또한 이상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 만약 죽은 뒤에야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를 알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진실되지 않은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해보인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운에 의해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고, 또한 삶이 운명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게 행복을 영원하고 변화하는 것과 완전히 무관한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운명을 따라가다보면, 같은 사람인데도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다. 운명을 기반으로 삼는 것은 이렇게 변화가 심하며, 그 토대가 부실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운명은 잘하는 것과 잘못하는 것이 의지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들은 전체적인 인간의 삶에서 부수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이 성취하는 영역 가운데서
, 덕과 일치하는 활동보다 더 영원한 것은 없다. 그들은 학문보다도 더 오래 지속되는 어떤 것이며, 그 상태로 가장 명예로운 것이다. 축복받은 사람들(the blessed)은 아주 지속적으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런 활동에 자신의 삶을 모두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성질은 행복한 사람들에게, 삶 전체에 걸쳐서 속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은 특수하게 고귀한 방식으로 운명에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여전히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다
. 사소한 일은 영향이 거의 없지만, 아주 좋은 일은 그의 삶을 축복하고, 좋게 꾸며준다. 반면 아주 나쁜 일은 삶을 괴롭히고 많은 활동들을 감추면서 삶을 억압하고 망가뜨린다. 그럼에도 그 많은 불운을 조용히 견뎌내는 사람이 있다면, 고귀한 것이 그를 위대한 영혼으로 만들어주면서 그 삶에 빛을 비춰준다. 따라서 활동이 삶에서 진짜로 중요한 것이라면, 축복받은 사람은 혐오스럽고 비열하지 않기 때문에 망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 좋고 현명한 사람은 운명을 견뎌내고 상황에 맞는 가장 고귀한 것을 하리라고 믿는다. 만약 정말로 우리가 말한 것과 실제가 같다면, 행복한 사람은 절대 망가질 수가 없고, 불안하거나 바뀌지도 않는다.


   이제 삶 전체에 걸쳐서 완전한 덕과 일치하는 활동들에 참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

 


11
: 주변 사람들의 불운이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검토

 

   주변 사람들과 후손들의 운명이 어떤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은 몰인정할뿐더러 사람들의 생각과도 반대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사건들을 고려하는 것은 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대강 고려해보면 좋을 것 같다.


   어떤 운명이 한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하고 작은 영향을 주기도 하듯이
, 모든 주변 사람들의 운명도 그렇다. 또 만약 사람들에게 일어난 불운이, 살아있을 때 일어났는가 죽었을 때 일어났는가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면, 이것은 반드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항이거나 오히려 죽은 사람이 좋은 것과 나쁜 것에 참여할 수 있을까 또는 그렇지 않은가에 관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고려해서 이 사항에 답을 해보면, 우선 좋거나 안좋은 모든 것이 죽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불행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하고 또한 행복한 사람들을 망치지는 못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된다. 그래서, 그것이 일정정도 영향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성에 있어서 그리고 어떤 정도로 사람의 상태를 바꾸게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12
: 칭찬

 

   행복은 칭찬(praise)받게 되는 것인가? 칭찬 대신 명예를 받게 되는 것인가? 먼저, 칭찬은 특정한 종류의 상태에 있거나 또는 다른 것과 특정한 종류의 관계에 놓여있을 때 받는 것처럼 보인다. , 어떤 사람이 칭찬을 받으면 그들의 행위나 그들이 산출한 것이 칭찬을 받고(), 또한 좋고 탁월한 어떤 것과 어떤 관계에 놓여있으면 칭찬을 받는다(, 빠르기). 그런데 결국 칭찬은 관계 속에 놓여있는 것(더 큰 것, 더 좋은 것)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신이나 가장 신적인 고귀한 사람에게는 축복받았다고 하거나 행복하다고 한다. 좋음(good)에 관한 것도 이와 같은데, 우리는 정의를 칭찬하는 것처럼 행복을 칭찬하지는 않는다. 행복은 오히려 축복받은 것, 더 좋고 더 신적인 어떤 것이다.


   에우독소스는 이런 점을 우월함의 쾌락에 관해 주장하면서 잘 지적했다
. 그는, 어떤 것의 좋음은 그것이 지금 칭찬받고 있는 것보다 더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우월함 자체는 칭찬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었다. 신이나 좋은 것(the good)도 이런 것과 같은데, 다른 좋은 것들(other goods)이 칭찬받고 있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참고했다는 이야기인데, 신이나 좋은 것들에는 그렇게 참고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행복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행복은 명예롭고 완전한 어떤 것이다.

 


13
: 영혼의 부분

 

   행복은 완전한 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특정한 종류의 활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덕에 관해서 살펴야 한다.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인간적인 덕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적인 좋음(human good)과 인간적인 행복(human happiness)에 관해 논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덕은 영혼에 관한 것이지, 몸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행복은 영혼의 활동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학문은 정치학이고, 만약 정치가의 임무가 시민들을 덕스럽게(그래서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는 영혼에 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덕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봐야지, 그 이상의 정확성을 추구하면 당면한 목표와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


   영혼의 한 요소는 이성을 가지고 있다
. 다른 부분은 그렇지 않다(이 요소들이 몸처럼 나뉘어있는지 아니면 아예 물리적으로 나눠져있는 다른 어떤 것인지, 또는 본성상은 나눌 수 없으나 사고 속에서만 나눠지는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성이 없는 요소 가운데, 영양 부분(vegetative, the cause of nutrition and growth)은 공통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배아부터 다 자란 것들까지 다 가지고 있다. 이 부분의 덕은 공유된 것이고, 인간에게만 독특하지는 않다. 따라서 인간적인 덕에 아무런 역할을 맡지 않는다.


   이성은 없지만 이성에 참여하는
, 영혼의 다른 자연스러운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요소는 이성이 인도하면 알맞은 방향, 가장 좋은 방향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 안에 이성과 갈등을 일으키고 저항하며 반대되는 또 다른 자연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도 명백하다. 자기절제를 잘 하는 사람과 자제를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생기는 부분이다. 실제로 우리는 영혼에서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몸 속에서 이런 것을 본다. 그래서 이성이 없는 요소들은 두 부분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양 부분은 이성과 공유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반면 일반적인 의미의 욕구와 욕망을 구성하는 부분은 그 부분이 이성에 귀기울이고 복종하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성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매우 좁다. , 수학적 의미의 이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합리적인 충고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요소는 이성을 소유한다. 그래서 이성이 있는 요소 또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 자체를 가지고 있는 부분과, 합리적인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는 부분이다.


   덕은 이런 구분을 따라서 나눠진다. 어떤 덕은 지적인데, 지혜, 판단, 실천적 지혜 같은 것들이 그렇다. 반면 다른 것들은 특징적 덕(성격적 덕, virtues of character)인데, 관대함과 절제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성격을 말할 때 침착하다(자제를 잘 한다)고 말한다. 반면 칭찬은 그의 상태(현명함)에 대해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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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까지 나온 니코마코스 윤리학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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