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연구 발제. 『로티와 사회와 문화』(김동식 엮음, 철학과현실사, 1997)에 있는 리처드 로티, <낭만적 다신론으로서의 실용주의>(남기창 옮김) 요약. 영어 원문은 in Philosophy as Cultural Politics>

 

   로티는 실용주의를 낭만주의, 다원주의, 공리주의의 결합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낭만주의는 완전함을 향한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 과정에서 취하는 열려있는 태도, 그리고 삶에 대해 개인이 취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특성을 말한다. 다원주의는 이런 개인들의 삶의 태도를 존중하며, 이들의 위계를 결정할 특정한 기준 또는 그에 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공리주의는 이런 개인들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가장 추구해야 할 바는 각 개인의 가능한 한 가장 행복한 삶의 방식이며,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경우는 오직 어떤 행위가 다른 사람 또는 사회의 다른 많은 구성원들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 뿐이라는 사회적 삶에 대한 시각을 뜻한다.

 

   이런 식으로 실용주의를 이해하는 입장은 베르텔로의 입장에서 잘 드러나있다. 실용주의에 관한 그의 기준은 니체와 제임스-듀이, 그리고 밀을 모두 같은 실용주의자로서 분류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 사람의 삶을 표현하고 그것을 유통하는 수단으로서 철학이나 지식보다는 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낭만주의적 문학작품들에 관해 긍정적이었다. 이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이들이 일신론적이고 플라톤주의적인 기독교에 맞서서 다신론을 긍정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개인들의 수 만큼 다양한 시, 그리고 다양한 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이들에게 다신론과 다원주의는 대체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점 못지 않게 차이점 또한 분명히 드러난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이다. 니체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이었는데, 그것을 이른바 현대의 기독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티는 니체의 이런 정치적, 종교적 태도가 그의 사상에서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실제로 표방하고자 한 것은 이른바 반표상주의이다. 그러나 이런 반표상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도, 반민주주의와도 양립가능하다. 니체는 다른 기독교주의자들 그리고 플라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대문자 진리에는 이상적 사회에 관한 지식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공유했으며, 따라서 대문자 진리에 관한 거부는 곧 이상적 사회에 관한 거부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니체에게서는 반표상주의와 반민주주의가 공존했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반표상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종교가 인간의 삶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그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색채가 탈색되어 사회적 강령만 남은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에서 신에 관한 언급과 역설을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평등과 박애(동포애) 뿐이며, 이것은 실용주의적으로 충분히 수용가능한 것이다.

 

   이런 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로티는 실용주의의 종교관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종교는 습관이다. 둘째, 종교는 진리와는 무관하지만 어쨌든 우리가 소속된 문화의 한 부분이다. 셋째, 진리 개념을 폐기함에 따라 우리는 우리의 활동에 관해 새로운 구분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활동/개인적 활동의 구분이다. 넷째, 종교가 문제가 되는 시기는 그것이 사회적인 것과 결합되어 구분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날 때 뿐이다. 다섯째, 니체는 이런 종교성(그리고 종교적 도덕성)을 도덕적 나약함의 상징으로 보았지만, 반면 제임스와 듀이 그리고 밀은 타인의 행복에 관한 무관심의 징후 그리고 민주주의적 합의를 우회하려는 수단으로서 종교성을 보았다.

 

   실용주의자들의 종교관을 살펴보면, 제임스와 듀이는 많은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미묘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제임스는 종교를 실용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노력했고 상당한 성과 또한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 경험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초월적인 존재 또는 그에 관한 무엇인가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이것은 여전히 플라톤주의적인 실수, 즉 진리를 향한 욕구와 행복을 향한 욕구를 구분하고, 진리욕구가 충족되면 행복욕구도 자연스럽게 충족될 것이라는 생각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듀이는 종교가 아무리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진리성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종교가 권장하는 바를 실천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진리욕구와 행복욕구의 구분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행복욕구만이 인간에게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런 실천을 통해 증명되는 것은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성격, 자신이 진리라고 설파하는 내용에 관한 내용 전부가 아니라 실천과 관련된 사항들 뿐이다. 이렇게 그는 기독교에서 형이상학적 색채를 빼는 데 성공했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서 충분히 하나의 시로써 역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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