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연구 발제. 로티, 『철학과 자연의 거울』 5장 요약>

 

 

1. 심리학에 대한 의심들

 

 

  로티가 옹호하는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정신적 존재자 또는 심리학적 과정과 같은 개념들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신적인 것을 대체할 다른 개념이나 존재자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정신적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논란만 가중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초점은 근대철학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피해가면서 환원주의적인 성향 또한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는 것에 맞춰져 있다.

 

  심리학은 이러한 정신적 존재자나 심리학적 과정 같은 개념들이 가리키는 대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다. 만약 인식론적 행동주의가 맞다면,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는 엉뚱한 대상을 연구하고 있는 셈이다. 심리학의 이런 특성은 “인지적 과정과 구조라는 신화”, 또는 “데카르트적 신화” 등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철학적 비판과 마주한다. 이런 측면에서 두 가지 점이 놀라운데, 하나는 정신적 존재자라는 개념에 관한 철학적 포기가 심리학의 활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만약 그 철학적 기원으로부터 수 세대가 지난 지금도 자립적일 수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철학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이 자체적인 절차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비판받을만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절차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을 가리키는 용어들의 의미는 행동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정신적인 것을 연구하는) 심리학은 행동과 환경 사이의 경험적 관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둘 수 있다”는 것으로 비약하는 조작주의적 오류(조작주의(operationism) 과학철학은 과학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는 그것을 규명해내는 절차(operation)를 축약해서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저것의 길이는 6미터이다.’는 ‘표준적 미터법에 부합하는 길이 측정 도구를 저것 옆에 가져다 댔을 때 그 숫자가 6이다.’ 라고 말하는 식이다.), 즉 정신적 존재자를 설명하기 위해 환경을 끌어들이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된 추론이라는 점은, 정신적 과정인 인지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적인 과정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통해 지적된다. 그러나 조작주의적 오류에 대한 이런 지적 또한, 단지 내적인 것을 옹호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에 지나지 않을 뿐, 의미있는 경험적 발견을 이끌어내는 이론적 배경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이런 조작주의적 오류에 왜 쉽게 빠지는지, 그것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를 분석해보아야 한다. “철학자들은 왜 심리학자들이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적 존재자나 과정들을 상상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가?” 철학자들은 이렇게 과정에 기반해 인간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철학자들의 눈에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기계적 설명을 더욱 강화하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공포감은 더욱 늘어난다.

 

  통합과학에 대한 열망은 이런 공포감을 부추기는 근거가 된다. 이것은 환원주의에 기반을 두는데, 양자역학에 의해서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영향력은 강하다. 콰인 이전의 환원주의자들은 물리과학이 사용하는 용어로 모든 것을 환원해야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콰인 이후의 사람들은 기능을 표현하는 용어들을 구조를 표현하는 용어들로 바꿈으로써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신적인 존재자에 대해서 다루는 심리학은 정신적인 것이라는 자신의 탐구대상을 여전히 유지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신경생리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심리학은 정신적인 것에 관한 연구에서 위에 표현된 태도들과 유사한 경향을 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심리학이 유령을 불러들임으로써 과학적 활동을 방해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인상은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의식에 대한 데카르트식의 생각과 영혼이 육체에 대해 독립적이라는 고대의 생각을 뒤섞어놓은 전통이다. 둘째는 내적인 반성은 특권적인 접근을 전제하며, 이러한 접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지위가 다른 존재자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내적인 반성에 입각한 인식론적 접근은 내적인 반성의 특권적인 접근은 사회적인 친숙함의 다른 이름이라는 셀라스의 논의에 의해서 무력해진다. 만약 특권적 접근을 사회적인 친숙함으로 바꾼다면, 내적인 반성은 사회적으로 친숙한 것을 발견하는 방법으로서 다시 그 인식론적 지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적인 반성은 정신적 존재자와는 무관한, 물리적 과정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콰인과 셀라스의 논증은 심리학이 정신적 존재자를 붙들어매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가로막는다는 경험주의 철학자들과 물리주의 철학자들의 의심을 어느 정도는 완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생각에 기반해, 이 장에서는 지식의 문제와 관련된 인식론과 경험적 심리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둘은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따라서 경험적 심리학으로 인식론적 작업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인식론이 문제로 등장한 문화적 배경과 경험적 심리학이 인식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인식론을 경험적 심리학으로 대체하거나 보충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제안들을 검토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론과 증거 사이의 관계를 심리학으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유비하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통해 인간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된 ‘정신적인 것’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2. 인식론의 부자연스러움

 

 

  콰인은 「자연화된 인식론」에서 인식론적인 문제가 있다는 환상에 빠진 철학자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하며, 그래서 인식론은 심리학-자연과학의 일부분으로 끌어내리고, 물리적 인간의 입력과 출력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식론은 빈약한 입력-증거와 풍부한 출력-이론 사이의 연결, 그리고 이론이 어떻게 증거들을 초월하는가를 알아내려는 학문이다. 그러나 철학사를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런 질문이 제기되고 그것이 답을 내야만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 부각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경향의 시초인 데카르트는, 스콜라주의가 아주 사소하다고 간주한 것을 진지하게 탐구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이후로 인식론이 제일철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간단히 답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제기가 되는 맥락으로부터 콰인을 떨어뜨렸을 때, 과연 그가 주장하는 이론과 증거 사이의 관련성이 인식론적 문제와 얼마만큼 연관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인가?

 

  인식론과 경험적 심리학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증거, 정보, 입증 등 두 영역에서 동시에 쓰이는 단어들이 각 영역에 맞게 엄밀하게 사용되지 않고 느슨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콰인은 신경을 통해 입력되는 것들을 원초적인 정보로서 간주하고, 이것을 인식의 토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경에 입력된 전기적 신호들은 어디에서 정보로 바뀌는가, 그곳이 어디인지 경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면, 경험적 심리학은 이런 작업에 실패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콰인은 이런 장소들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경험적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콰인은 이와 모순되는 듯한 진술을 하기도 한다. 즉 인식론이 경험적 심리학으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경험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외부세계에 대해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인식의 주체를 외부에 대응하여 그것에 관한 정보로서의 출력을 생산하는 (기계적)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식론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또 인식론자들이 단순히 인식주체의 작동방식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식론적 문제에 관한 콰인의 해법은 그렇게 적절해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대해 콰인은 신경에 입력된 전기적 신호의 결과로서의 정보는 인과적으로, 그리고 그것을 기술하는 관찰문장은 인식론적으로 말하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도 적절해보이지는 않는다. 콰인이 처음에 의도했던 것은 인식론을 자연화해 경험적 심리학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찰문장들 간의 정당화 관계는 경험적 심리학의 대상이 아닌 사회학이나 과학사의 연구대상이다. 따라서 콰인의 제안은 그의 의도와 조화롭지 않다.

 

  인간이 관찰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콰인은 관찰의 과학적 객관성을 상호주관성으로 대체한다. 이렇게 되면 관찰문장은 “동일한 자극이 동시에 주어졌을 때, 언어를 사용하는 모두가 동일한 예측을 하게 되는 문장”이며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언어공동체 안에서 과거의 경험이 다르다는 점에 민감하게 변화하지 않는 문장”으로 정의된다. 또한 몇몇 아주 특수한 예들을 제외한 “현재의 감각자극에만 의존하며 문장을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저장된 정보에 의존하지 않는”것을 관찰문장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을 경우에는, 관찰문장에 대한 연구는 더욱 더 심리학이 아닌 사회학과 과학사의 연구대상이 된다. 상호주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심리학은 적당하지 않고, 그것을 문장과 그 문장을 지지하는 이론 내지는 담론 수준에서 풀어가는 사회학이나 과학사가 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콰인의 의도와는 어긋난다.

 

  상호주관성으로 관찰문장의 정의하는 그의 시도는 자신의 의도를 뒷받침하는 데 또 다른 난점을 안고 있다. 그가 말하는 신경입력이나 관찰문장은 기존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는 인식론적 문제를 경험심리학으로 해결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식론적 문제를 묻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우회한다. 그러나 상호주관성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그가 우회하고자 했던 문제, 즉 인식론적 정당화의 문제와 다시 마주하게 되고, 그것은 경험적 심리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인식론적인 문제의 전통을 잇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콰인의 논의는 과학과 철학이 연속적이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연속성이 철학적 골칫거리들을 해결하는 방법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로티는 과학과 철학이 동시에 진행된 작업이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로티가 보기에 콰인과 같은 논의는 철학(인식론)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 속에는 어떻게 철학이라는 영역이 자리잡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것은 왜 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해소될 수 없는가? 듀이는 이런 질문에 대해 비과학적인 측면의 여러 동기들을 언급하며, 이들에 대한 입장으로서 현재까지의 철학과 미래의 철학을 나눈다. 반면 콰인은 경험론의 입장을 선호하며, 이들이 잘못된 의미론에 의해 인도되지만 않았다면, 경험적 심리학을 인간을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제대로 확립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콰인의 이런 입장에는 실재의 모습에 접근하는 우리의 능력이 과연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회의주의에 대한 로크의 관심과, 회의주의는 무능력하다고 하는 콰인의 주장이 은폐되어있다. 만약 회의주의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그 자체가 회의주의의 대상인 경험의 요소를 곧바로 지식의 요소로 간주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역시 설명의 요소는 정당화의 요소가 될 수 없다.

 

 

 

3. 진정한 설명으로서의 심리학적 상태

 

 

  “이론과 증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의미한 심리학적 이론을 얻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공공의” 정당화를 상황이나 다른 주장을 통해서 “내부적으로” 재생산할 이론이 필요하다.” 앞의 논의와 이어서 이 장의 도입부인 이 문장을 해석하자면, 관찰문장들을 조합하고 초월하여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이론이 만들어져야만 우리는 이론과 증거의 관계에 대한 유의미한 심리학적 이론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흔히 이를 위해 사용되는 심리학의 가정(이자 연구대상)이 ‘정신적 존재자’이다. 이 정신적 존재자는 이론과 증거 사이를 매개하는, 정당화를 위한 개념적 수단이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매개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관해 정당화를 요구하는, 이른바 무한퇴행의 문제가 ‘정신적 존재자’에 관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경험과 외부가 일치한다고 알게 되는 것은, 일치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해를 반드시 먼저 품고 있어야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무한퇴행을 끊기 위해서는, ‘어떠어떠하게 보인다’는 것을 ‘어떠어떠한 것이 있다’로 추론하는 독단적 도약이 필요하다. 이 독단적 도약은 로티가 비판하는 혼합, 즉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반면 이것이 독단적 도약이라기보다는, ‘항상성’을 띄는 최초의 과정으로서 보아야한다고 생각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설명과 정당화를 분리하면,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의 동일성과 경험된 개념의 동일성은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독립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항상성은 다양한 감각들 속에서 어떤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 유사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런 유사성을 찾아내 대상의 동일성과 개념의 동일성을 대응시키는 규칙이 필요하다. 이런 규칙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다시 그것을 설명할 어떤 정당화를 필요하게 되면서 무한퇴행에 빠지고, 만약 그 규칙이 없다고 가정할 경우에는 인식에 대한 어떤 유의미한 이론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런 인식의 문제는 그러므로 역시 인식론적인 ‘개념’의 문제이거나, 심리학의 문제이거나 둘 가운데 한 쪽을 택해야 한다. 심리학은 경험의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개념’의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동일성을 획득하는지에 관한 배경을 설명해야 그 개념이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는가에 관해 의미있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런 배경으로 정신적 존재자가 가정된다. 그렇지만 정신적 존재자가 어떤 것인가에 관해 다시 묻는다면 우리는 난점에 또 다시 봉착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이 와중에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정당화와 설명에 관한) 관계를 컴퓨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 유비를 통해 풀어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과연 ‘설명의 대상’인가에 대한 의문은 제기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더하기로 이루어진 모든 등식들이 더하기의 법칙을 설명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의 신경 체계가 하드웨어라고 생각하고, 그 하드웨어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해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지식에 관해 설명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하드웨어에 기반하기는 하지만, 하드웨어를 이용하는 또는 지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히 하드웨어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또한 이들은 하드웨어 속에서 전류가 지나가는 길을 파악한다고 해서 그 하드웨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유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들은, 인간의 여러 개념적 동일성들이 이른바 알고리즘 안에서만 산출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은 하드웨어의 특성이 아니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념적 동일성의 알고리즘적 특성을 특화시키는 것은 이 유비를 반박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인간 속의 인간, 기계 속의 기계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어떤 또 다른 ‘존재’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델로 인간의 지식을 설명하려는 것은, 또 다른 존재자들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언제나 동반한다. 이것은 마치 “붉은 색의 감각인상을 다양한 환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요소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적”이면서 붉은 색이 어떤 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알고리즘적 특성에 대한 강조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우리는 하드웨어 속에서 전류가 지나가는 경로를 파악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알고리즘이 무엇을 하는지에 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특정한 입력이 신경에 주어졌을 때 그리고 그 때에만 그가 ‘붉은 색을 본다’고 대답을 한다면, 우리는 그 입력이 붉은 색에 관한 입력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컴퓨터 유비에 대한 비판자들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컴퓨터의 유비를 통해 인간의 알고리즘적 특성을 강조하려는 시도 또한 잘못되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곱셈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두뇌를 들여다봐도 곱셈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곱셈이 무엇인지 몰라도 누군가가 특정한 숫자의 곱을 생각하고 있는 뇌를 들여다본다면 그가 곱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곱셈’이라는 말이 아닌, 특정한 전기적 신호의 특정한 연결과 경로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대척행성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리적 대상들의 특정한 움직임으로 특정한 행동의 원인과 경로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무한퇴행 논변은, 설명과 정당화의 연결을 시도할 경우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런 질문의 인식론적 버전은 이른바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고, 이것은 나쁜 물음이다. 이런 질문은 설명과 정당화를 동시에 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배경적 요소들을 요청하고, 그래서 인식에 정신적 존재자가 동원되고 이와 관련한 철학적 쟁점들이 생겨난다. 반면 이런 무한퇴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컴퓨터의 유비가 동원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이 유비는 무한퇴행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의 지식이 하드웨어적 과정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리학은 이것을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인간의 지식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이른바 ‘인간 속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게 하고, 지식을 만들어내는 알고리즘과 하드웨어적 배경이 인간의 본성 속에도 있으며, 경험 속에도 있다는 평이한 생각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또한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있는 알고리즘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데, 그것을 굳이 본성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실제로 그가 무엇을 하는가에 관해서만 관찰하더라도 그 알고리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개념적 동일성과 같이 알고리즘적 특성만이 나타난다고 생각되는 개념들도, 특정한 탐구의 목적에 의지해야만이 규명 가능하다는 것 또한 드러난다.

 

  그러므로, 로티의 입장에서는 “심리학적 상태를 내적 표상으로 생각하는 데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흥미롭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심리학적 상태가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정된 상태이며, 생리학적 상태와 어떻게 동일시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하더라도 정신의 참된 본성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즉 알려질 만한 아무런 “본성”도 없음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철학자들의 마음-몸 구분은 존재론적이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이며, 이 구분이 인간에 대한 과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마음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과학에 아주 해롭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똑같이 철학자들의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4. 표상으로서의 심리학적 상태

 

 

  정신적인 것을 구분해 내는 또 다른 구분법은 신경에 전달된 전기신호로부터 표상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신적인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해냄으로써, 정신적인 것에 대해 규명하는 것이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의 목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한 언급은 기존의 전통적인 언급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은 이런 정신적인 것 또한 물리적인 것의 조합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며, 이와 관련해서 개념적 동일성에 대한 표상 같은 것들은 자극의 불변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이런 개념적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특수한 기관이 있다고 상정할 때에만 즉 특수한 심리학적인 인지과정을 가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은 그 자체가 정당화 내지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경험적으로 지각되지는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이른바 ‘철학적 비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경험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철학적 독단이라고 하면, 그 비판은 효력을 잃어버린다. 이런 과정이 경험적으로 지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에 대한 심리학적 기술은 지식에 대한 일반적이고 유용한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몸에 대한 설명과 정신에 대한 정당화를 무화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는 이것을 가정된 유기체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즉, 심리학의 연구 목적에 들어맞는 유기체의 상태일 뿐, 그것이 다른 영역에까지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지심리학적 주체는 평가적 개념인 인식론적, 도덕적, 윤리적 주체와 그 모습이 같지 않다. 근대의 경험론자들이 심리학과 인식론을 이으면서 했던 실수가 이런 주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심리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로티가 비판하고자 하는 자연의 거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심리학에서 가정된 주체는 심리학의 연구에 알맞을 뿐, 그것이 세계를 정확히 표상한다거나 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물건이 밑으로 떨어진다’고 하는 상식적인 기술과 ‘물건이 중력에 의해 위치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물리학적 기술 모두가 참으로 인정받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우리는 심리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어휘 묶음을 통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기술할 수 있다. 표상은 이런 어휘 묶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그저 기호일 뿐이다.

 

  그러나 근대의 인식론자들은, 이렇게 가정된 심리학적 주체를 ‘참을 생산하는 심리학적 주체’로 생각하였다. 로크 이래로 시작된 심리학과 인식론의 혼동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즉, 내적인 표상이 참된 믿음에 대한 어떤 것이라면, 내적인 표상이 생겨나는 과정 또한 참된 믿음에 대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은 인지과정이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가정된 주체’라는 생각은 이러한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가정된 주체’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들은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의 여부를 “그들이 대화 속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가?”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다양한 분과가 어떤 보편적인 대상에 관한 무엇인가를 서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심리학적 인지과정을 중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을 달리해서, 만약 인식론의 목표가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합리성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심리학적 과정에 대한 탐구가 인식론에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합리성은 목적에 따라 수단을 조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적 표상의 합리성에 관한 탐구는 ‘가정된 주체’의 관점에서 비춰봤을 때 어떤 개별적인 과정 연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 탐구란 수단이 어떤 목적에 대해 얼마나 최적화되었는가에 대한 것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평가적 개념이라는 측면에서 ‘합리성’은 인식론에서의 ‘진리’, 도덕철학이나 윤리학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러 덕목들과 비슷한 수준에서 그 평가의 정도가 결정된다. 이런 평가적 개념들은 목적에 대하여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설정하는 우리의 능력에 의존한다.

 

  표상의 인식적인 적절함은 그런 것들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가정 아래서만 유효해진다. 이 타고나는 것이란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온 정신적인 것, 정신적인 인지과정이며, 이것은 모든 합리성의 표준이 된다. 이렇게 타고난 것으로 간주된 개념들은 철학사에서 수없이 많이 제시되었다. 진리, 필연성, 개인, 대상, 과정, 상태, 변화, 의도, 인과, 시간, 연장, 수 등등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의미를 명료하게 한다는 작업은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것이 콰인을 통해 드러났다. 또한 이런 견해 속에서는 위에서 나열한 단어의 의미가 우리의 경험에 의해 바뀔 수 없다라는 독단적인 전제가 감춰져있다. 그리고 ‘가정된 주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입장에 가한 비판에 따르면, 우리는 저런 단어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언제나 아예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정신적인 표상이라는 개념은 정보와 명제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알려진 모호한 개념이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이 두 과정을 표상이라는 한 단어를 통해 다루려고 함으로써,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하는 오류에 빠졌다. 하지만 ‘가정된 주체’를 통해서 이를 다시 해석하면, 표상은 가정된 주체에 의해 생산된 명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여의 신화에 대한 셀라스의 비판을 비켜갈 수 있다. 또한 그 가정된 주체는 특정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 명제이기 때문에, 그 주체가 그것을 완전히 신뢰하고 표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경험론자들의 ‘관념’과는 달리, 망막의 상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처리장치가 취하는 다양한 명제적 태도를 통해서 주체의 언어중추의 출력에 이르는 인과적 과정이 주체의 견해를 정당화하는 일련의 추론과정에 대응할 필요는 없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것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관해서 논쟁을 벌이는 중이라면,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자기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을 고려해볼 때, 정당화는 오로지 상호주관적 즉 공공의 영역에서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자들은 인식론의 과제를 자신이 떠맡아서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철학적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인식론적 문제를 자기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잘못 믿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이 이런 강박을 버리면, 즉 의식의 토대 등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자신들이 언급해야 한다는 강박 - 즉 정신의 존재를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정신에 대한 기술은 아주 가볍고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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