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윤리학연습 발제문. 칸트,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의 제2장 「대중적인 도덕철학에서 도덕형이상학으로의 전이」를 요약.>

  제 2장 「대중적인 도덕철학에서 도덕형이상학으로의 전이」는 크게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① 왜 경험적 요소가 순수한 도덕철학에서 배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루고, ② 여러 용어들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 정의에 따라 인간의 행동의 유형을 나눈다. ③ 정언명법의 도출과정, ④ 도덕적 명령의 내용을 규정하는 원칙으로서의 최종적 목적인 인간, ⑤ 도덕적 명령의 법칙으로서의 위상 ⑥ 도덕성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설명(목적의 왕국) ⑦ 이 장에서 했던 작업들을 요약하고 도덕성에 대한 다른 입장들을 비판하는 부분이다.



  순수한 도덕철학에서 경험적 요소의 위상


  칸트는 1장에서부터 줄곧 도덕성에 대한 엄밀한 철학적인 사고와 원리에는 경험적 요소가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험적 요소가 개입할 경우, 도덕성은 특수하고 우연적인 것으로 전락해,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장의 첫 부분에서 경험적 요소가 도덕적 행동에 개입했다는 것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특정한 도덕적 행동이 어떤 근거로 행해졌는지는 인간의 내부에서 결정되는 것인데, 그 결정의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기애self-love’는 도덕적인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드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 역시도, 도덕적인(것으로 보이는) 행동이 일어나는 원인을 파악한 것이지, 도덕적인 행동이 왜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믿을만한 친구가 없는 세상을 가정하면서, 그렇더라도 친구에게 믿을만해야 한다는 도덕적 원칙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도덕적인 행동의 근거는 단순히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 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의 모든 이성적인 존재들에게서 나와야만 한다는 견해를 쉽게 도출해낼 수 있다. 가장 선한 존재인 신조차도 자신의 도덕성은 이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에게 도덕성은 경험적인 요소들로부터 추상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험적(추상적)인 영역에서 먼저 규정된 뒤에 모든 경험적 요소들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도덕성의 기반은 인간을 둘러싼 외부의 환경이라는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본성은 내부적인 것이고, 또한 이 세계의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라면 모두가 지닌 공통적인 성질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계에서의 보편성일 뿐, 만약 가능한 다른 세계에서의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이 있다면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도덕성은 결코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성적 존재자들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을 ‘우연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따라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어야 하는 도덕성의 근거로서 인간의 본성은 적합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칸트는 도덕성의 기반을 특수한 경험과 우연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이성에 두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아무런 경험적인 유인의 낯선 첨가물과 섞이지 않은, 의무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도덕법칙에 대한 순수한 생각은 이성 혼자만의 방식에 따라 경험적인 영역에서 불려오는 모든 다른 동기들보다 더욱 강하게 인간의 마음에 대한 영향력을 가진다.”(64)



  각종 개념의 정의, 인간 행위의 유형 분류


  “자연 안의 모든 것은 법칙과의 일치 속에서 일한다. 오직 이성적 존재만이 법칙에 대한 표상과의 일치 속에서, 다시 말하면, 원리와의 일치 속에서 행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즉 의지를 가지고 있다.”(66) 이성적인 존재자들은, 정해진 법칙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원칙을 표상하여 그것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는 능력이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이것이 의지이다. 의지는 이성과 일치할 경우, 선하다. 하지만 의지가 이성이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해 촉발되었을 경우, 의지는 이성과 일치하지 않고 선하지 않다. 따라서 이성은 의지에 대해 일련의 행동들을 강제하는데, 이것이 명령이다. “명령의 형식은 명령법이라고 불린다. 모든 명령법은 ‘-을 해야한다.’로 표현되고, 이것에 의해서 이성의 객관적 법칙과 그 주관적 구성에 의해 그것(이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결정되지는 않는 의지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66)

  “모든 명령법은 가언적이거나 정언적이다. 전자는 누군가 바라는(또는 누군가가 바라는 것이 적어도 가능하기는 한) 다른 어떤 것을 성취하는 것의 수단으로서의 가능한 행동의 실천적인 필연성을 나타낸다. 정언적 명령법은 아마도 다른 목적에 대한 참고 없이 그 자체의 객관적 필연성으로서의 행동을 나타낼 것이다.”(67) 가언적 명령법은 성취하려는 목적의 성격에 따라서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만약 그 목적이 전혀 일반적이지 않고 단순히 임의적인 의도에 따라 설정된 것이라면, 그 명령법은 개연적이다. 반면에 그 목적이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라면 그 명령법은 실연적이다. 칸트는 실연적 명령법의 예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을 해야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런 것들은, 선하기는 하지만 도덕적이지는 않다. 도덕성은 우연적이고 조건적인 요소들에 좌우되지 않아야하지만, 이들은 이런 요소들을 명령법에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정언적인) 명령법은 아마도 도덕성의 명령법이라고 불릴 것이다.”(69)

  이런 명령법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의지를 강제한다. 개연적 명령법은, 특정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그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는 이성적인 존재자라면 누구나 개연적 명령법이 ‘해야한다’고 하는 여러 행위들을 거쳐가야 한다. 실연적 명령법은,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든 것을 아는 한에서 개인적 명령법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적으로 너무 불확실하기 때문에, 또한 인간의 행복은 외적인 경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실연적 명령은 의지를 강제하지 못한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반면 정언적 명령법은 이런 경험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그것이 의지를 강제하는지 아닌지 여부를 (초반에서 보았듯이)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형식적 조건, 즉 정언적 명령법의 정의 자체를 통해서만 의지를 강제할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정언명법 : Act only in accordance with that maxim through which you can will that it become a universal law at the same time(73).


  정언적 명령법의 도출과정은 논증이 아닌 일종의 선언이다. “가언적 명령법이라는 것 전부를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엇을 담게 될지 미리 알지는 못한다. 조건이 주어져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러나 정언적 명령법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곧 안다. 왜냐하면 정언적 명령법은 법칙과 이 법칙을 따르라고 하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담고 있는데 그 법칙은 자신을 제한할 조건을 전혀 담고 있지 않아서, 남아 있는 것은 법칙 전부의 보편성 뿐이기 때문이다. 행위의 준칙은 이 보편성에 맞아야 하고, 이렇게 맞아야 한다는 것만으로 정언적 명령법은 진정 필연적이라고 생각된다. / 그러므로 정언적 명령법은 단 하나뿐인데, 그 준칙을 통해서 네가 그것을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 삼으려고 할 수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또한 “마치 네 행위의 준칙이 네 의지에 의해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할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

  칸트는 이 정언적 명령법에 따라서 의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의 준칙에 대해 분석을 시도한다. 의무는 크게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의무와 다른 인간 존재자들에 대한 의무, 그리고 완전한 의무와 불완전한 의무”(73)로 나뉜다. 첫째, 힘든 상황을 마주하여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한다. 칸트가 보기에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의 행동의 원칙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살을 시도하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라는 인간의 본성, 즉 자연에 위배된다. 따라서 자기애는 보편적인 원칙이 될 수 없다. 둘째, 거짓 약속으로 돈을 꾸고 갚지 않으려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부정의 근거 역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여 거짓 약속을 하게 된다면 약속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뿐 아니라 거짓 약속을 통해 성취하려고 했던 목표 또한 성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셋째,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고양시키는 데 신경쓰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식의 태도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내적인 모순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특정한 능력을 계발해야하므로, 세계가 그런 모습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넷째, 다른 사람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원칙을 모든 사람들이 원칙으로 삼는 세계를 상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데, 이 사람은 이런 도움을 받을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바라는 것에 대해 모순이 생긴다.

  정리해보면, 완전한 의무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준칙으로 삼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세계, 즉 내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준칙이며, 불완전한 의무는 그런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나 그가 당연히 바라는 것들의 측면에서 모순이 생기는 준칙이다. 칸트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들은 이런 의무들을 부정할 때 자신이 언제나 예외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의무를 부정하는 행위를 할 때마다 역설적으로 그들은 그 의무들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띄고 있다는 것이 반증된다.



  목적들의 왕국 : The idea of the will of every rational being as a will giving universal law(81)


  이성적인 존재인 개인이 이성에 따라 세우는 준칙, 곧 도덕적 법칙은, 개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법칙을 부여한다는 측면에 있어서는 주관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게 선험적으로 같은 형태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다. 이성은 보편화 가능성을 통해 준칙 자체가 내적인 모순을 일으키는지, 또는 그것을 바라는 행위가 모순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검토하여 특정한 준칙이 도덕적 법칙으로서 성립되는지에 대한 형식적인 기준을 제공해준다. 또한 이성을 지니고 있는 자신을 이성적인 존재로서, 즉 목적 그 자체로서 사용하라는 내용도 함께 제공해준다.

  따라서 모든 이성적 존재는 각각의 이성이 작동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의지를 지향시킴으로써 도덕적 법칙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여기서 지금 보여주는 원칙의 세 번째 형식, 다시 말해 보편적인 법칙을 주는 의지로서의 모든 이성적 존재의 의지라는 이념 안에서 행해진다.”(82) 이런 생각은 단순히 이성적인 존재 개인이 설정하는 도덕적 법칙에 대한 논의 뿐만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인 개인이 모여서 만들어진 사회 안에서의 도덕적 명령에 대한 논의도 가능하게 해준다. 칸트는 이것을 목적들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 보편화 정식과 목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식은 이성적인 존재자가 단 하나뿐일지라도(심지어 그런 존재자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이성에 의해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선험적인 조건이었다면, 목적들의 왕국이라는 개념은 이런 존재자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가 어떤 준칙을 바랄 수 있는지에 대한 선험적인 조건을 함축하고 있다.

  목적들의 왕국이 성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 왕국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각각의 준칙을 이성을 통해서 검토하고, 그 가운데 정식에 들어맞는 준칙들만을 법칙으로 삼는다. 따라서 법칙으로 확립된 것은 자신의 준칙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성의 법칙이기도 하다. 다르게 표현하면 주관적인 준칙은 이성에 따라 동시에 객관적인 법칙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은 그러므로 자신이 세운 법칙에 지배당하는, 자기지배의 상태에 있어야한다. 이것을 칸트는 ‘의지에 고유한 보편법칙 부여’(81)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공동체 내에서 이런 대우를 받는 한 그 존재자들은 자율적이며, 반대로 의지 이외의 다른 것에 의해 보편법칙을 부여받을 경우 그것을 타율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도덕적 성격, 즉 도덕성을 띄기 위해서는 의지의 자율성이라는 조건을 만족해야한다. 칸트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의지의 자율성과 타율성을 대비시킨다. 지금까지의 학설들은, 도덕적 법칙에 대한 완전성에 너무나 집착하거나 그것을 탐색하는 작업을 포기한 나머지, 전자는 결코 인간의 이성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완전한 선인 신을 도덕성의 근거로 삼거나, 또는 우연하고 조건적인 것을 도덕성의 근거로 삼는 실수를 저질렀다. 칸트의 생각은, 인간은 스스로에게 보편적인 법칙을 부여하여 행동의 원칙을 정하고, 그것은 이성에 따르는 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다. 따라서 칸트가 보기에, 신의 완전성에 기대든 또는 여러 경험적 요소에서 추상을 하든 그것은 둘 다 인간의 외부에서 도덕성을 찾아내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의지의 타율성이라고 부른다. 반면 자신의 입장은 인간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에게 보편적인 법칙을 부여하고 그에 따를 수 있는 자기입법적, 즉 자율적 존재이다.

  이와 같은 칸트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이것은 매우 분석적인 수준의 논의라는 점이다. 그가 이 책의 초반부에 공표했듯이, 자신의 논의는 경험이 완전히 배제된 수준의 논의이며 따라서 그것은 도덕의 기초를 이루는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의미 분석과 재구성이라는 틀을 일관되게 지키고 있다. 따라서 정말 구체적으로 인간의 의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이 글의 논의 범위를 벗어난다.



  의문점들

  1. 보편화 정식이 논리적 결론이 아니라 선언에 가깝다는 의문점


  보편화 정식의 핵심은, 어떤 이성적인 존재자의 의지가 표상하는 준칙이 모든 이성적인 존재자들이 표상하는 준칙이 되었을 때를 이성적으로 판단해야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그것이 그러한 표상 자체에서 모순을 일으켜 그런 세계가 구성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도 불가능할 경우, 그 준칙은 완전한 의무이다. 그런 세계를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그것은 불완전한 의무이다. 내가 제기한 문제는, 단 하나의 정언적 명령법으로 제시한 보편화 정식이 과연 정언적 명령법의 속성에서 연역될 수 있는 단 하나의 논리적 결론인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었다. 유성현의 답변은 이것은 형식적으로 올바른 논증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답변은 (1) 칸트 또한 정언적 명령법이 실제 어떤 모습인지 표현하는데 매우 고심했을 것, (2) 그리고 똑같은 정식화가 조금씩 다른 어감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다는 것 - 따라서 다른 표현들이 논리적으로 수용가능하다면 이 정식 또한 수용가능해야 할 것, 그리고 (3) 엄밀하게 논리형식을 갖춘 결론처럼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타당한 논증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읽어본 뒤, 나의 문제제기는 정언적 명령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정언적 명령법은, (1) 무조건적 명령이라는 정의에서 모든 세계의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적용가능한(다시 말해,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명령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2) 경험적 요소들을 모두 배제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구체적인 세계에서 어떤 준칙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는 단계이다. 따라서 모든 준칙에 적용되는, 메타적인 의미의 명령으로서 모든 세계의 구체적인 준칙을 규제할 명령법은 단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내가 이해한 정언적 명령법은, ‘무엇을 해라’ 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문장이었다. 그것은 정언적 명령법이 아니라 의무이다. 칸트는 이 장의 끝 부분에서, 구체적인 의무가 생성되는 과정은 경험적인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도덕형이상학의 연구 과제를 뛰어넘는 부분이라고 밝히고 있다.



  2.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식이 논리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의문점, 그리고 칸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일종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증명될 수 없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논증을 펼치고 있다는 의문점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나 증명된 것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단지 칸트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가정일 뿐이며, 그것을 어떤 부분에서는 사실로, 어떤 부분에서는 가정이라고 섞어서 쓰고 있다는 것이 나의 두 번째 의문이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은 (1) 이 가정이 사전에 논의되고 있는 내용일 수도 있다. 혹은 가정이 아닌 방식으로 이미 증명이 되었을 수 있다. (2) 정말 그것이 가정이기 때문에 가정적인 어조로 쓴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적인 의도로 쓰였을 수 있다. (3) 목적론적 세계관은, 그의 가정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데 가장 기초적인 사고방식이다.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려면, 그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인정한 뒤에 여기에서 그가 내린 목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식이 연역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즉, 그의 진짜 의도가 인간의 도덕성을 선험적으로 증명하여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인정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을 충분히 고려한 뒤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자라는 의미는, 칸트에 따르면 목적과 수단을 임의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식은 이성에 대한 정의와 보편화 정식을 조합하여 내릴 수 있는 연역적인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만약 어떤 이성적 존재자가 다른 이성적 존재자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이성적 존재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목적과 수단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기며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적 존재자가 이성적 존재임과 동시에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결론, 즉 모순을 일으킨다. 따라서 이런 세계는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이 목적을 설정할 수 없는 존재로 대우받는 것을 바랄 수 있는 인간 또한 있을 수 없다.

 

 

덧댐1. 본문에서 괄호 안에 등장하는 쪽수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영역본 쪽수다. 독일어는 읽지도 못하는지라 영어는 그래도 아는 언어니 낫지 싶었는데, 영어로 봐도 미친듯이 어려워서 결국 한글로 읽었다.

덧댐2. 또 다른 번역이 있는데 이것은 칸트의 3비판서를 완역한 서울대학교 백종현 선생님의 『윤리형이상학정초』이다. 이 발제문을 쓰고 있는 와중에 정초가 아닌 진짜 『윤리형이상학』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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