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현대철학 발표문.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의 3장 '자유주의 공동체의 우연성' 요약.> 

벌린의 자유주의와 상대주의 문제

  언어와 자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한 로티는, 그 다음으로 개인들이 모여서 구성한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간에게 확고한 정초를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인데, 이것은 공동체에 대한 견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에서 그가 논하려는 내용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즉 개인은 합리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의 선택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근대적 자유주의 이념이다.

  로티가 자신의 견해와 가까운 것으로 제기한 이사야 벌린의 자유주의는 근대적 자유주의 이념과는 구별된다. 그의 자유주의는 개인이 각각 선택한 신념들이 절대적-보편적-필연적 타당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는 내용이 들어간 근대적 자유주의와는 구별된다. 물론, 인간에게는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 대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러나 벌린의 생각 그리고 지금까지 로티가 전개한 논증에 따르면 개인은 근본적으로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벌린이나 슘페터의 말처럼 ‘신뢰할 수 없는 상상 속의 토대’를 자신의 행위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샌들은 벌린의 자유주의적 견해가 상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만약 개인의 신념에 확고한 토대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그 신념을 굳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과 합리적인 존재라는 것은 서로 모순인데, 만약 합리적인 것이 더욱 근본적이라면 자유는 단지 합리적으로 선택가능한 사항으로서의 가치 정도밖에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합리적으로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게다가 자유가 ‘자유롭게’ 포기할 수 있는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면, ‘자유’를 공동체 구성의 기본 원리로 삼는 자유주의 또한 하나의 이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로티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대립시키는 샌들의 구도 자체가 전형적인 근대인의 태도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상대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상대성을 판단하기 위한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한다. 다시 말해, 상대성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정초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샌들은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정초를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로티가 보기에 인간은 오로지 역사적인 존재일 뿐이며, 역사성을 벗어나 합리적으로 신념들을 선택할 능력은 없다.

  또한 그는 데이비슨의 견해를 빌어서, 역사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다시 쓰는 행위, 즉 은유(메타포)의 변화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절대적-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합리성조차도,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합리성이라고 부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따라 각 시대의 합리성조차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샌들의 질문은 벌린이 제기하는 현대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질문 또는 비판일 수 없다.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란 변화를 불러오는 새로운 은유가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거부하는 신념이다. 절대적, 보편적 정초를 요청하는 경우 그 정초와 어울리지 않는 특정한 은유들은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는 로티 식의 자유주의에 반하는 행위이다. 지금 우리를 규정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여기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는 그들이 등장했을 당시에는 매우 세련되고 신선한 은유였다. 그 은유의 확산은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법과 공동체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현재의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와 결합된 상태로 계속 머물러서는 안된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렸고, 그들이 공동체에 대한 또 다른 은유들을 상대로 절대성과 보편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월권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절대적-보편적 정초에 대한 열망, 즉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적 욕구와는 결별해야한다. 그 자리에 시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은유의 자유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해주는 형태로 다시 쓰여야 한다. 자유주의에 철학적 기초를 놓으려고 하는 행위는, 샌들의 반박이 그렇듯 다른 것을 철학적 기초로 삼는 자유주의의 반대자들에 의해 선택가능한 이념 가운데 하나로 격하되며, 그 가치를 상실한다. 나아가서는 인간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특징 자체를 퇴색시키게 된다.

  이런 재서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효과는 중립성의 포기이다. 역사적 인간은 결코 모든 신념에 대해 중립적인 상태가 될 수 없다. 어떤 은유에 대한 선택은 곧 어떤 신념에 대한 선택인데, 인간은 결코 어떤 은유도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은 중립에서 선택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은유들의 배열을 바꾸어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새롭게 탄생한 은유는 그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사라지거나 또는 확장되는데, 그 불투명성이야 말로 진짜 자유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이 로티의 생각이다.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문제

  그렇다면 이전에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어떻게 관계를 맺었으며 또 지금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것이 로티의 두 번째 질문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잘 알려져있듯이 이 관계에 대해 연구한 고전이다. 인간들은 계몽주의의 핵심인 비판과 반성을 통해 인간에게서 (도구적) 합리성을 끄집어내고 인간의 본성을 이념적으로 정초하는 데 성공했지만, 또한 비판과 반성에서 비롯된 ‘철저한 세속화’로 인해 자기 스스로 세운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포함한 어떠한 신념도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들은 자유주의의 뿌리를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로 보고 있다. 따라서 철학적 기초를 잃은 자유주의 또한 공동체를 지지하는 원리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비판과 반성의 원리에 따라 자유주의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서 더욱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로티는 그 비판과 반성을 허용하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적 정신에 부합하는 일이며, 자유주의가 계몽주의와 동시에 탄생했다고 해서 이 둘의 운명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그들이 그것을 비판하려고 시도한 때에 와서야 비로소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실제로 그 두 은유를 만들어낸 사람들에게는 두 사람이 분석한 그 결과들이 등장할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자유주의와 긴밀한 결합을 이룰 수 있었다.

  반면에 듀이, 오크쇼트, 롤즈 등 현재에도 여전히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연결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유라는 철학적 정초와 합리성에 기초한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자유주의적 상황을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의 내용들을 인간들이 스스로 구성한다고 보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어떤 공동체의 가치가 정당화되는 것은 오로지 다른 공동체의 가치와 비교했을 때 뿐이다. 이들의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가치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놓는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자유주의가 갖추어야 할 진짜 모습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확고한 정초라는 말은, 거의 무의미한 말이다. 만약 그 정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가치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보편성이나 절대성을 띌 수가 없다. 가치에 대한 이론의 구성은 다양한 규범과 덕목들이 갈등하는 가운데, 특정한 것들을 더욱 명료하게 말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진다. 실천은 이론에 대해 우선된다. 이론은 실천의 유형화, 일반화, 체계화이며, 그 요점을 밝히는 도구로 한정된다. 오크쇼트는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공동체의 유형을 우니버시타스universitas에서 소시에타스societas로 변화하는 것, 즉 통합적 사회에서 상호존중이라는 가장 약한 약속만으로 결합된 연대체로 변화할 것을 제안한다.

  셀라즈가 도덕성이라는 말을 ‘우리-의식’으로 바꾸자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들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가치는 엄밀하게 갖춰진 형식에 들어맞는 무엇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존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의 ‘목소리’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는 도덕에 선행한다. 가치는 자신의 정체성을 통해 부여되며, 또한 형성된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견해에서 역사성을 배제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오히려 합리성이 배제된 자유주의에서는 역사성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 역사성에서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찾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은 아니며, 언제나 발생하는 갈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관계의 규정은 그 역사성에 의해 언제나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그리고 자유주의가 공동체를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인 시인이 그 사회의 영웅이 된다. 그는 새로운 은유를 지속적으로 창조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말을 찾아 끊임없이 모험한다. 동시에 자신의 은유의 근거가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간과 공간의 역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새로운 은유의 근원이 그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창조되었던 은유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진리에 대한 열망과 어느 정도의 폭력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영웅인 혁명가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푸코, 하버마스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이러한 설명에 따라,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는 개념은 자유주의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로티는 (자신의 관점에서) 아이러니스트이지만 자유주의자는 아닌 푸코와, 자유주의자이지만 아이러니스트는 아닌 하버마스를 비교한다.

  로티는 자아에 대한 이해와 니체에 대한 입장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견해를 비교해보도록 권하고 있다.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적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의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아가 우연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더 나아가서, 근대 사회의 자유가 역설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속박하는가를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으로 고찰하는 것이 푸코의 중요한 철학적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반면 하버마스는, 니체가 개인의 내면적 정초로부터 실천의 원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철학사적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유주의적 공동체에는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인간에게 목적이 있다는 생각까지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인간의 더 많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니체의 입장과 자유주의는 모순된다. 하버마스는 사회의 구성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영역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니체의 입장을 반박하고 자유주의를 새롭게 하고자 한다.

  하지만 푸코는, 그런 상상력과 의지는 이미 개인으로서 인정받는 사회화의 과정 동안에 충분한 제한을 받고 따라서 개인은 그 사회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 이상의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근대사회는 전근대사회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주체성을 구성한다. 이 방법은 대단히 정교하고 풍부해서 탄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다양한 행동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 공동체 내의 주체들은 자신의 행위가 완전히 창조적이며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어버리는데, 푸코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정 위험한 사회이다.

  로티는 먼저 푸코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푸코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대 자유주의 사회가 가장 해서는 안될 모습을 가장 정교한 형태로 적어놓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가장 자유주의적인 태도로 지향해서는 안될 사회에 대한 혁신적인 은유를 고안해낸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의 과제는 푸코가 말한 형태의 사회를 극복할 대안을 내놓는 것이며, 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이 과제의 해결은, 로티 스스로가 정초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들이 그 사회에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많이 포진되어있는가에 달려있다.

  게다가 푸코의 저서에 대한 비판적으로 읽어보면 그가 여전히 ‘내면적 인간’과 그의 자유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의 사회화 이론은 ‘내면적 인간’이 일그러지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바라는 것은 현재 사회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변화시킬 혁명 정국 내지는 총체적 변화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거치면 이 자유가 온전히 드러나는 사회가 도래한다. 하지만 그의 사회화 이론 내에서, 그리고 그의 철학 속에서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며,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인간들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총체적 혁명에 대한 이러한 동경을 거부하고, 공공 영역에서의 편견과 지배적 구조가 없는 의사소통을 통해서 역사적 변화(와 진보)가 가능하리라고 주장한다. 그가 의사소통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사회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푸코가 지적한 것과 같은 사회의 출현과 그에 비례한 총체적 혁명에 대한 혁명가적 전문가들의 갈망이며, 다른 하나는 전문가집단의 관료화로 인한 ‘합리적’ 관료지배현상이다. 이러한 우려는 로티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는 하버마스의 경우 총체적 혁명에 대한 우려가 더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하버마스적인 의사소통은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데 비해서, 로티의 모델인 ‘시인’의 인간형은 이전의 역사적 전통에서 도약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고 단절적인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이 두 입장은 대립한다. 또한 의사소통은 서로가 이해에 수렴하는 모델이지만, 시인은 그 사회가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방식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는 발산적 모델이다. 이 부분에서 하버마스와 로티는 다시 충돌한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티는 자신과 하버마스의 차이가 철학적인 차이일 뿐 정치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말한다.

  로티의 하버마스 비판은, 그가 보편주의를 포기하는 이른바 아이러니스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그들의 철학적 결론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비판’에 집중되어 있다. 하버마스의 이런 견해는 로티가 폐기하고자 하는 이성과 비이성의 영역을 나누는 사고방식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하버마스는 공공영역의 의사소통에서 사용되는 인간의 능력이 이성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공공의 영역에 이른바 ‘아이러니스트’들이 난입하여 지배적 견해를 형성할 경우, 그것은 공적 영역의 이성을 포기하는 일이 되며 공동체에 비합리주의를 유통시키는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매우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로티는 그들의 은유 또한 존중받을만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공공영역이란 사실 사적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것, 즉 상존하는 것이 아닌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굳이 그들이 비합리주의 또는 합리주의라는 단일한 토대를 바탕으로 단일한 견해에 집중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를 이런 논리에 따라 거부하는 것이, 자유주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로티가 결론짓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푸코와는 달리 ‘모든 곳에서의 자유’를 열망하는 모습도 아니면서, 하버마스와 같이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이념을 거부하면서 공공영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보편성을 귀환시키는 시도 또한 아니다. 이 둘을 절충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는,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서사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연역적 체계가 아니면서도, 자신의 역사성과 자신의 독창성을 연결하는 분명한 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로티 스스로는 자신이 이 둘 사이에서 절충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잔인성의 회피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목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당신을 유도할 정치적 태도에 빠져드는 것을 스스로 막기 위해서, 참됨과 순수성을 향한 니체-푸코적인 시도를 사적인 것으로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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