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현대철학 발표문> 

  후설의 현상학 –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사이에서

  후설은 초기에 수학에 대한 연구로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였지만, 점점 철학으로 연구 분야를 옮기면서 현상학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구축하였다. 현상학의 여러 요소들과 그 태도는 이후의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현대철학에서 거장으로 평가받는 많은 사람들이 후설을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상학은 현대철학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철학사조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 특히 후설의 철학은 현상학이라는 흐름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상학에 대한 구상은 당시 후설을 둘러싸고 있던 학문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은 계몽주의의 기획과 구상, 즉 자연과학의 발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자연과학의 발전이란 ‘모든 것의 자연과학적 해석’을 의미했고, 인간 또한 자연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심리학이 등장하였다. 반대로 인간의 정신성을 강조하며 철학과 인문학의 영역을 방어하려는 조류 또한 만들어졌다. 이들은 자연과학에 맞먹는 방법과 체계를 기반으로 인간의 정신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학문분과, 즉 ‘정신과학’을 만들고자 했고 그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여러 이론적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후설은 어떤 특수한 학문과 그 특수한 학문이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로 이루어진 연역적 체계를 사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물론 그가 각 개별학문들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탐구를 수행하는 것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후설이 비판하려 했던 것은, 개별학문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고, 그 방법을 사용해 드러낸 특정한 세계를 객관적인 세계라고 주장하려는 시도였다. 특정한 방법은 이미 그 안에 세계를 예비하고 있고, 따라서 특정한 세계 밖에는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방법에 의해 드러난 전체 세계의 특정한 모습일 뿐, 그것이 세계 자체이거나 혹은 그 세계가 인간에게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각 개인에게 드러나는 그 모습이 전부라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현상학을 통해서 세계의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에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후설은 이 점을 아주 조심스럽게 주장하며, 상대주의를 대표하는 정신과학의 흐름 또한 비판한다. 정신과학을 세우려 했던 이들은 주로 인간의 정신이 활동해온 결과들의 축적이라는 점에서 역사, 문화 등을 강조하며, 또한 현세대의 인간의 정신도 이들에 비추어 고찰할 수 있다고(고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을 역사와 문화의 경계 안에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후설이 보기에 인간의 정신은 이 영역들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보편성은 여기에서 갖추어진다.


  현상학의 목표와 대상 – 선험적 자아의 구조, 현상

  당시 주류이던 학문적 경향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은 각 개별학문들이 공리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즉 토대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각각의 세계를 담고 있으며, 그 세계는 몇몇의 가장 기초적인 근거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한가? 그렇지 않다면, 개별학문들이 기초로 삼는 그 근거들은 또 무엇을 토대로 삼고 있는가? 후설의 현상학은 이 지점을 짚어내어, 모든 개별학문들이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정한 토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보여주는 의심과 매우 유사하다.

  정신과학에 대한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은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보편적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적 논증을 펼쳤던 인물로 보아야 옳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개별학문의 연구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이 말하는 보편적 세계란, 자연과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인식주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그에게 보편과 객관은 다른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보편적인 세계는 어떤 차원에서 확보할 수 있는가? 후설은 전반성적인 영역이라고 답한다. 학문적 인식을 포함한 모든 인식은 반성의 산물이다. 반성을 통해 인간은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 형식은 수학적일 수도 있고(저것은 부피가 1ℓ이다), 실용적일 수도 있으며(저것은 내가 물을 마실 수 있게 도와준다), 미학적일 수도 있다(저것은 예쁘다). 그러나 이런 판단과 규정은 대상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내 의식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유의미한 것(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되는 과정에는 근본적으로 정신이 참여한다 -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그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목하는 것은 그 의미들로 이루어진 세계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가 부여되기 전 가장 즉자적인 세계 – 즉 전반성적인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의 활동이다. 이 활동을 수행하는 자아가 경험 이전의 자아, 즉 선험적 자아이다.

  이 선험적 자아가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결합한 장소를 후설은 현상이라고 부른다. 현상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인식의 근원이며, 학문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학문의 대상은 바로 현상이어야 한다. 그는 철학을 바로 이 현상에 대한 학문, 즉 현상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체계를 표현하는 단어로서 선택하였다. 모든 개별학문들은 현상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서 끄집어낸다. 이것은 그 학문이 전제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태도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은 객관적 대상에 대한 탐구이기보다는 특수한 정신적 태도와 절차의 산물이다. 현상학은 그 모든 가능성들을 담고 있는 현상에 대해 연구함으로서 모든 특수한 정신적 절차들을 예비하고, 그 학문들이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를 닦는 학문이 된다.

  따라서, 현상학의 정신에 따르면 세계는 주체의 능동적인 구성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외부의 객관적 존재자들의 여러 특성을 지각함으로써만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선험적 자아는 근본적으로 지향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상에게 다가가고, 대상은 선험적 자아에게 다가온다. 이 관계에서 주체의 특성은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지향성으로 정의된다. 반면에 현상인 대상은 형상(eidos)에 근거해 반성을 통해서 판단하고 규정될 수 있다. 후설의 입장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선험적 자아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자아가 현상을 멋대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대상 또는 세계를 어떤 태도로 고찰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그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본질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형상적 학문이다.


  현상학의 방법 – 판단중지, 현상학적 환원, 기술

  현상학의 연구영역인 전반성적인 세계와 마주하기 위한 첫 단계는 판단중지이다. 후설에 따르면, 각 개별학문들은 자신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객관적 세계는 선험적 자아의 다양한 정신활동의 산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보편적 세계는 아니다. 이 세계에 매이는 한, 그 세계를 구성해낸 방법, 즉 정신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존재의 가정을 거부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정신이 그 자신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차원으로 이동한다. 그는 이 단계를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의 용어를 빌려와 판단중지(epoche)라고 표현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다. 판단중지는 판단과 규정에 의해 대상에 부여되었던 모든 의미들을 세계에서 걷어낸다. 이를 통해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서 뭉뚱그려져 드러난다.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은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들의 보편성을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면서 그 전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나누었던 정신의 절차가 걷어진 존재자는 온전히 그 모습을 보전한다. 이 때 모든 인식은 이 하나의 전체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전체를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선험적-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는 모든 분절적 인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이 상황에서 인식대상은 모두 인식하는 자아의 인식활동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인식대상의 입장에서는, 현상학적 환원 이후의 인식의 주체인 선험적 자아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선험적 자아는 자신의 내부에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며, 인식대상은 선험적 자아 내부에서 그와 구분할 수 없는 내적 구성물이다.

  이 단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자유로운 변환이다. 객관적 대상이 구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이 드러난 이후, 의식은 같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 방식은 온전히 의식의 방향에 달려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대상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다른 대상으로서 무한히 열려있게 된다. 후설에 따르면, 이 자유로운 변환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대상의 형상이다. 의식의 구성 방식에 따른 무한한 변환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 무엇이 인식과 판단의 기초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라는 것을 변환 속에서 깨닫는다.

  그러므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성은 이 차원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이성은 판단하고 규정하는 인간의 능력이므로, 판단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전체인 세계,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세계를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매개 없이 대면한다. 직관에 의한 대면은 선험적 자아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능력이다. 직관은 인식의 기초를 이루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모든 판단에 작용하여 대상을 우리의 정신에 드러낸다. 직관의 능력은 정신을 형상과 마주하게 한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현상학적 연구의 표현방법은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기술은 전체인 세계의 모습을 드러나는 그대로 적는 것을 뜻한다. 기술의 방법에 대비되는 것은 설명의 방법이다. 설명은 세계가 왜 그렇게 변화하는가에 대해서 표현한다. 따라서 한 사태와 다른 사태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이러한 표현은, 설명이 자연과학의 설명방법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판단과 규정, 여러 가지 개념들을 사용해야만 하며 이성이 개입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기술의 방법은 어떻게 세계가 드러나는지에 대해서 표현한다.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는 중요하지 않으며, 때로는 인과관계나 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는 모순적인 표현도 허용된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으로 정신의 능동적인 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법칙에 의한 설명이라는 정신적인 틀이 오히려 세계의 진정한 구조를 그려내는 데 제한을 가할 수도 있다.


  현상학의 객관성 - 상호주관성

  위와 같은 비분절적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능력 혹은 이미 그렇게 된 상태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 내재적 초월성은 신이나 어떤 외부의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외재적'인 초월성과는 구별된다. 그런데 이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서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모든 구분이 사라진 세계에서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선험적 자아가 태도를 바꾸는 것뿐인데,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인격으로서의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 선험적 자아의 작동구조는 너와 나의 구분,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까지 없애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역설적으로 아주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후설은 이 말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주체와 대상이 결합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들은 전반성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 인식의 토대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인식의 구조이며 선험적 자아의 세계의 수준을 토대로 삼아 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후설의 철학에서 객관적 세계는 특정한 정신적 태도의 산물로서만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호주관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인격으로서의 한 개인이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인격으로서의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경험 이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후설이 말하는 객관성이란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객관성이기 때문에, 현상에 드러나는 과정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이다.


  현대 사회의 위기

  이러한 상호주관성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성찰을 통해 확보한 상호주관성은 인간 사이의 소통에 중요한 단초가 된다. 후설은 현상학의 구상이 자신 이외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닫힌 철학이라는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독특한 상호주관적 영역을 개척하였다. 또한 이것을 단순히 인식론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통찰의 이론적 도구로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진단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시 유럽 사회는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건전한 공동체를 성립하기 위한 소통에 필수적인 상호주관성은, 현상학적 방법에 따라 깊은 숙고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경지처럼 느껴지지만, 누구나 직관적으로 모든 삶에 걸쳐서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의 자명한 진실을 가리키는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던 자연과학에 대한 신봉은 이와 같은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 그 방법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결국에는 사회가 파괴되는 위기를 정신적인 수준에서부터 발생시킨다.

  자연과학이 위기를 초래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세계를 도외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선험적 자아가 참여하는 세계, 즉 현상의 세계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보여주는 세계가 바로 세계의 진정한 모습인 것으로 호도한다. 이 세계가 반성 이후의 모습처럼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숫자로 표시하여 접근하려는 태도를 후설은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한다. 자연주의적 태도에 의해 진실로 존재하는 세계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궁극적으로 자연주의적 태도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태도로서 자리를 잡으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엄밀하게 자신을 비판하며 가장 자명한 토대에서 시작해야 하는 학문적 작업이, 단순한 정확함을 확보하는 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정신의 위기란, 이성의 기능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그 능력을 현재의 정신적 경향을 강조하는데만 끊임없이 사용하는 실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후설이 보기에 현상학은, 그가 정립한 하나의 철학적 사조 또는 정신의 방법론인 것과 동시에 사회의 해악을 방지하기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단순히 특정한 정치세력에 반대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는 지속적으로 도래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그 위기는 가장 심층적인 측면, 즉 정신적 측면에서 유래하는 위기이며, 따라서 그 극복 또한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현상들은 철학의 표현이었다. “유럽인의 진정한 정신적 투쟁은 철학 내적인 투쟁의 형식을 띄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김태길 외, 『현대사회와 철학』, 문학과지성사, 1981
Richard Kearney,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곽영아, 임찬순, 임헌규 옮김), 한울, 1997
W. Marx, 『현상학』(이길우 옮김), 서광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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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4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4 16:16   좋아요 0 | URL
선택한 건 아니고 선생님의 강요로 첫 발표를... 맡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고요.

음... 현상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현상에 대한 학문(...)이겠습니다. 후설의 저서는 『데카르트적 성찰』 하나밖에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가 독일관념론의 전통에서 여러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더라고요. 초월(선험)적이라는 말의 의미도 그렇고, 현상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칸트가 그런 말을 한 건 어느 맥락인지 저는 잘 몰라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말을 썼는데, 현상학이라는 말보다는 정신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 일반의 정신이 전개되는 과정을 밝혀내겠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현상은 정신이 자기를 현현해서 나타나는, 일종의 부수적인 것?이겠고요.

반면에 후설에게 현상은 의식(정신?)이 지향하는 것이라, 의식과 현상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연구는 곧 의식에 대한 연구이고, 현상학은 의식과 현상이 상호의존하는 관계 또는 상호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됩니다. 그가 의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지향성인 것에서 이런 면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은 처음과 끝이 있는 이론체계는 아닌 것 같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방법론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상학의 연구를 발표하는 형식이 '기술'이라고 후설은 주장한다고 하는데, 사실 말이 좋아 기술이지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적으라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는 이야기죠. 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 같은거요.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을 차용하고도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데리다 등등의 전혀 다른 학문적 경향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용은... 음... 저게... 저렇게 읽고 그냥 머리에서 생각나는대로 정리한거라... 상호주관성 부분은 『데카르트적 성찰』을 읽고 쓴 것입니다.

2011-09-24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5 02:28   좋아요 0 | URL
저도 모르겠어서...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방법론이다! 라는 것입니다. 후설만의 독특한 체계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방법의 토대를 닦은 것이죠.

차이점이라면, 후설은 초점이 인식론적인 부분이고, 인식을 통해서 존재가 생성(자각?)된다고 보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인식 이전의 존재(자)들과 그 존재(자)들의 양식과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 표현방법에 있어서 기술적이라는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이고요. 이 정도가 예전에 『데카르트적 성찰』과 『존재와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두 사람의 문제나 어휘가 책을 꼼꼼하게 읽지 못하게 하는 터라(ㅠ.ㅠ) 저도 힘에 부칩니다......

바오 2015-03-2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기 힘든,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전후 맥락을 잘 전달해주어서 어리숙한 머리에 그래도 잘 넣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효진 2015-03-28 18:41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