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역사철학자들』(임희완 씀, 건국대학교출판부, 2003)에서 헤겔 부분 요약. 역사와 이성 과목 발표문 초고.> 

  헤겔(G.W.F. Hegel : 1770~1831)은 역사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헤겔 이후에야 비로소 역사는 철학의 연구대상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역사철학(philosophy of history)이 철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다. 역사란 무엇인가, 그 역사의 주체는 누구인가, 역사는 어떤 목적을 향해 진행되는가, 그 진행에 따른 변화의 양상은 어떠하며 또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질문, 다시 말하면 역사철학의 주제는 모두 헤겔이 역사철학을 정초하면서 설정한 연구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후의 역사철학자들은 거의 모두 헤겔에게 사상적으로 큰 빚을 지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헤겔의 역사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철학 전반을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헤겔의 개념들 - 이성, 정신, 자유, 국가

  헤겔은 역사철학의 목표를 역사에서 드러나는 이성(reason)을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역사현상은 합리적인 과정(a rational process)을 밟아서 일어나는데, 이 과정을 인도하고 주재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성은 그 자체로서 역사를 전개시키는 힘이며, 역사의 변화과정을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펼쳐보인다. 헤겔에게 역사의 주체는 이성인 것이다. 

  이런 역사를 이끄는 힘으로서의 이성은 지금까지 인정받았던 이성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 개념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연과학을 지배하는 법칙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섭리인 이성이다. 헤겔은 앞의 이성은 인과에 묶여있어 자유가 없다는 이유로, 뒤의 이성은 초월적이어서 역사에 자신을 전개시킬 수 없는 차원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두 가지 종류의 이성에 대한 정의를 거부한다. 여기에서 헤겔이 역사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역사가 인과율에 묶인 단선적이고 일차원적인 변화 혹은 과정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역사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지 그 층위를 뛰어넘는 어떤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성은 역사 속에서 정신(spirit)을 실현시킨다. 여기에서 정신은 개인의 정신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자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필연적인 숙명이나 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 고유의 영역을 뜻하며, 이는 곧 인간의 정신의 핵심은 자유(freedom)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정신의 발전, 자연과 대립하는 인간의 자유의 확장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철학적으로 반성(reflection)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게 자유가 확장되는 과정을 발견한다는 말과 같다. 

  이런 자유의 확장은 의지(will)를 통해 역사 속에서 발현된다. 하지만 이 의지는 역사의 무대 위에 있는 구체적 개인의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은 이성과 반대되는 정념(passion)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역사는 합리적 과정을 밟아나간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의지가 개인의 의지가 이성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헤겔이 말하는 ‘이성의 간계(이성의 간지, the cunning of reason)’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은 정념에 따라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행동은 결국 이성이 정교하게 짜놓은 과정에 따라 자유가 확장되는 역사로 나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성의 간계’라는 말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성이 개인을 통해 드러날 수 없다면, 의지는 어떤 존재를 통해 역사현상에서 드러나는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이 질문에 헤겔은 ‘국가(들, state(s))’라고 답한다. 그가 사용하는 국가라는 단어는 민족공동체 혹은 문화공유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는 외형적인 법이나 물리적 강제력 등이 아니라 가치체계 혹은 특정한 신념을 공유하는 집합체 등 국가를 정신적인 면을 중요시하여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국가(들)은 역사현상 속에서 이성을 담지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존재이고, 국가 내의 구체적 개인들을 이성의 기획에 따라 자유를 확장하는 경향으로 통제한다. 따라서 헤겔의 체계 안에서는 개인의 통제와 자유가 양립하는 모순적 상황이 가능해진다. 또한 이런 국가(들)의 신념체계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종교가 국가(들) 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따라서 헤겔은 국가를 구성하는 이러한 가치체계와 종교의 모습을 지켜보면, 그 국가(들)에서 자유가 얼마나 확장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의 역사 해석 - 자유의 확장

  헤겔은 이같은 자유의 확장 즉 이성의 기획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그 역사들을 분석해보면, 대체로 역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갈수록 자유가 확장되며 자유로운 사람들이 많아지는 경향을 띈다. 또한 그는 현재 시점에서 그 정점은 게르만 민족이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데, 게르만 국가(민족)이 인간의 자유가 가장 확장된 제도와 종교를 신념체계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 가장 처음 시작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지역은 중국이다. 고대 중국은 황제 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며, 정신상태는 아직 자연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연에서부터 파생된 우연한 가치체계를 도덕적 신념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어, 근본적으로 자연에 종속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인도 또한 마찬가지로 자연에 기반한 제도와 그 제도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유가 성취되지 않은 국가이다. 

  그 뒤에 페르시아는 의도적으로 각 지역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제도를 조직함으로써, 자연에 기반하지 않은 최초의 사회제도를 탄생시켰다. 헤겔이 말하는 자유의 탄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또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상징을 종교적인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인간의 자유가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발현된 모습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 국가는 이러한 자유를 통해 역사에서 가장 먼저 철학적 ‘반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다. 그는 페르시아 인들과 조우한 뒤에 접한 최초의 자유로부터 자신을 되돌아보는 반성을 수행하였고, 이것은 역사에서 자유를 확장하려는 ‘정신’을 발견하는 아주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 정신이 발현되어 다른 국가들보다 자유가 확장된 형태로 나타난 제도가 바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이다. 로마는 이런 그리스의 민주주의의 몰락을 접하면서 강력한 통제와 국가권력을 구축할 수 있는 정신적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국가이다. 이 강력함을 바탕으로 자기의 정신을 주변 지역에 확산시키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게르만 국가를 접하고 그에게 기독교를 동시에 전파한다.

  헤겔에 따르면, 게르만은 지금까지 역사현상에 등장했던 국가들 가운데 가장 발전된 형태의 국가다. 게르만 민족은 모든 인간이 자유롭다고 선언하는 기독교를 신념으로 삼고 있으며, 이 신념을 제도화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헤겔의 역사 과정 - 변증법

  헤겔은 위와 같은 역사적 사례들을 분석하여 이성이 어떤 합리적 과정으로 역사를 인도하는지 밝혀내고자 한다. 여기에서 헤겔이 역사를 과정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는 위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역사를 단선적 발전 혹은 일차원적 진행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구체적인 역사 즉 일정한 기간의 역사에 한정시켜 보았을 때, 발전하고 있다고만 볼 수 없는 사례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전체를 통찰하였을 때 역사는 정신이 발현되는 방향으로 인도된다고 말할 수 있으며, 헤겔에 따르면 이 방향은 변증법적이다. 

  헤겔이 말하는 변증법은 단순한 상승이나 발전이 아닌, 기존의 신념의 체계(정립, thesis)에 대한 반성을 통해(반정립, antithesis) 전혀 다른 차원의 사고방식(종합, synthesis)이 생성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과정은 단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을 총체적으로 인도하는 존재가 이성이기 때문에, 변증법은 이성의 작동원리(mechanism of reason)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변증법은 이성이 보여주는 단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하지만 변증법적 과정이 필연적이라고 해서, 역사의 전개를 예측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적 과정은 어디까지나 역사 전체를 통찰했을 때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지만, 역사의 전개를 예측한다는 것은 역사적인 맥락에 한정되어 어떤 사건이나 상황의 발생에 대해 미리 말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양쪽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에, 변증법적 필연성이 역사적 사건의 필연성을 말해줄 수 없다. 여기에서 헤겔은 우연과 필연을 양립시킨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자유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그런 조건들이 역사 속에서 마련되지만, 그 조건들이 맞물려 총체적으로 폭발(?)하는 도약의 계기는 우연적인 개입(사건)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 이 우연적인 개입은, 역사 전체를 통찰하는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 개입이 어떤 계기인지 의미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즉 역사현상에서 일어난 구체적 사건들이나 신념의 체계들은, 현재 상황을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서 그 의미가 확정된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단계로 인식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사고방식(synthesis)을 성취한 뒤에는, 그와 같은 신념의 체계는 신념으로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한때 이성에 따르는 합리적인 가치였을 그 신념의 체계가 종합을 통해 교체되었으므로 더 이상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야기들

  헤겔의 역사철학은, 범주나 개념으로부터 구체적 사건을 연역해내지 않고 그 반대의 방향을 취했다는 점에서 매우 높게 평가받을만하다. 그는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것을 이끌어냈고, 그 틀을 역사현상으로부터 끄집어내기 위해 역사를 분석하였다. 따라서 그의 과제는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고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규정하고 그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헤겔은 근본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정신, 물질의 운동으로서의 구체적 역사와는 동떨어진 것들에 연구의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은 ‘너무 형이상학적이다’는 말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있다. 이 말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설령 헤겔의 체계가 역사적 사례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결국 헤겔이 밝혀낸 역사의 주체로서의 이성은 결코 역사현상 그 자체에서 발견할 수 없는 개념 혹은 과정이다. 오히려 역사라는 학문을 가능하게 해주는 선결조건으로서 이성을 제시했거나, 이성 혹은 그와 비슷한 개념을 인간이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만 역사를 구성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따라서 헤겔의 역사철학은 역사 이상의 것을 연구하거나 함의하고 있다. 둘째, 헤겔은 자신의 ‘형이상학적 선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멋대로 역사적 사례를 끄집어들였다. 그 선이해란 다름아닌 이성이다. 사실 이것은 정당화될 수 없거나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선택과 배제를 통해 그럴듯한 모습을 띄게 된 것이다. 모든 국가는 각각의 삶의 양식이 있고, 현재도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그 모두를 외면하고 있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역사 설명의 틀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사회적 맥락과 정념에 지배되는 인간이 아닌 존재, 즉 역사를 탈맥락적이고 일관되게 필연적으로 지배하는 법칙 혹은 과정을 역사의 주체이자 역사현상의 원동력으로 설정하였다. 이런 논리적 귀결은 역사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을 요청한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이곳을 벗어난 어떤 목적과 의도를 성취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이 전개된다는 아주 평범한 견해는 우리가 여전히 헤겔의 역사철학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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