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사라진 말들이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녔기에 침묵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공포가 몰고 거대한 침묵,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이 말을 잊게 만든 것이다.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는 쉽게 나쁜 기억이나 심한 트라우마라고 말한다. 경험자가 아닌데도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말하곤 한다. 무려 20여 년이 훌쩍 지났기에 이제는 나아지지 않았냐고 묻는다.

 

 나는 몰랐다.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모른다. 당신의 입술이 굳게 닫힌 이유를, 당신이 망각의 삶을 선택한 이유를 모른다. 부끄럽고 창피한 고백이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른이 되어서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동안 소설과 영화로 수많은 당신을 만났지만 이번에 만난 한 소년은 달랐다. 소년이란 글자가 말하듯 너무 어렸다. 보호받아야 할 아이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 (13쪽)

 

 ‘혼은 자기 몸 곁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까. 그게 무슨 날개같이 파닥이기도 할까. 촛불의 가장자릴 흔들리게 할까.’ (45쪽)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지,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왜 자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소년은 모든 게 어려웠다. 그러나 누나와 형 곁에 있고 싶었다. 친구를 찾겠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뜨거운 가슴을 뒤로 한 채 엄마가 있는 집으로 혼자 돌아갈 수 없었다. 그저 차가운 강당 바닥에 누워 있는 죽은 사람들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았다. 혼도 떠나지 못하는 그곳에 함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니다, 나는 모른다. 소년의 행동을 읽는 나는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서로가 누군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서로가 얼마나 오래 함께였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어. 처음부터 함께였던 그림자와 새로 온 그림자가 나란히 내 그림자에 겹쳐질 때,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척을 구별할 수 있었어. 어떤 그림자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고통들을 오래 견딘 것 같았어. 손톱 아래마다 진한 보랏빛 상처가 있던, 옷이 젖어 있던 몸들의 혼이었을까. 그들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 끝에 닿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의 기척이 저릿하게 전해져왔어. 만약 그렇게 좀더 시간이 흘렀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될 수 있었을까. 마침내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주고받을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59~60쪽)

 

 왜 그들은 죽어야 했을까. 왜 그들은 죽어서도 엄마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다시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았지만 제대로 된 생을 사는 이는 없다. 어느 누가 이토록 잔혹한 시간을 온몸으로 겪고 먼지를 털 듯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을 견디며 죽음을 바라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는 시간은 밖의 시간일 뿐이다. 진실인 양 들려주는 보도와 몇 장으로 남겨진 사진을 통해 그 거리와 시간에 들어설 수 없다. 과감히 그 시간에 들어갈 용기를 가진 이도 없었을 것이다.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벌어진 잔혹하고 야만스러운 인간 그 이하의 행위는 말할 수 없는 말들이 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런 말들은 쌓여 독이 되고 스스로를 병들게 만든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죄를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어떻게 그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일부러 도려내고 도려냈던 기억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단 말인가. 몸에 새겨진 잔인한 시각을, 끊임없이 펼쳐지는 악몽의 날들을 말이다.

 

 사실은 이 소설에 대해 아주 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제대로 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건 매우 어리석고 건방진 생각이었다.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들은 소설 속 인물들뿐이다. 기억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 기억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이들도 그들이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고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134쪽)

 

 이처럼 한강은 인간의 고통을 향해 직진한다. 우회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고통의 본질을 캐내려 한다. 타인의 고통에 다가서야 나눌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것은 외부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내부의 존재와 맞닿았을 때 궁극적인 삶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어서다. 그리하여 아주 미세하게 나마 고통의 일부에 공감할 수 있어야 희망이라 이름 붙일수 있는 삶의 조각을 간직할 수 있으니까. 대낮의 태양이 되기 위해 태양 안에서 그것을 견디려는 「노랑무늬 영원」 속 이런 구절처럼 말이다. 소설을 통해 내게로 온 소년, 그 소년이 내게 건넨 말들도 결국엔 그것이었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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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달력이 도착했다. 달력을 넘기지 못했다. 빨리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과 2014년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똑같게 나눠졌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2014년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 많이 기울고 있다. 내년이라는 지우개가 지난해를 깨끗하게 지워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줄 거라 믿어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한 해였지만 아득하게 느껴지는 일 년이다. 거창한 계획을 세웠던 것도 아니고 그저 무탈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무탈’이라는 말이 이렇게 큰 의미로 다가온 해가 또 있었을까. 온 나라에 스며든 슬픔에 비하면 개인적으로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평범한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기적인 마음은 절대적인 위로가 필요하다. 부재를 인정하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았고 상처는 버릴 수 없었다. 내게 주어진 날들을 살기에도 버거웠다. 그것이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하루임에도 말이다.

 

 가끔씩 생각한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누구라도 붙잡고 따지고 싶다. 지난 5월 검사를 위해 입원한 아버지가 사흘 만에 눈을 감았을 때 우리는 내심 안도했다. 아버지의 고통을 빌미 삼아 신과 타협을 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삶이라는 오늘을 살아내고 견디는 것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4월의 빛나는 바다와 5월의 눈부신 푸름을 지나 한 해의 끝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책을 읽고 코미디에 웃고 드라마에 우는 날들이 이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의 가슴에 송곳처럼 박힌 2014년을 돌아보며 선뜻 어떤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넬 수 없다. 저마다의 절망과 분노를 알 수 없기에 말이다. 그저 오늘을 살아내는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 짐작할 뿐이다. 여기 세 권의 책이 들려주는 다양한 생이 그렇듯 말이다. 책과의 만남에도 타이밍과 인연이 있는 건 아닐까. 염승숙의 『그리고 남겨진 것들』은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선물처럼 다가왔다. 마냥 신 나는 밝은 소설이 아닌데 묘한 뜨거움이 있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은 열 개의 이야기는 상실과 부재를 인정하라고 손을 잡아주고 다독인다.

 

 아버지의 등에 소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습濕」) 외톨이였던 누군가는 죽어 벽돌이 되어 그리운 이를 지켜보며 살아가고(「그리고 남겨진 것들」) 사라진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은 노래를 듣고 요리는 하며 홀로 살아간다(「노래하는 밤 아무도」). 바쁘다는 이유로 가까운 이들의 얼굴을 잊어버리며 살아가고(「양의 얼굴」) 부와 권력으로 삶의 경계가 이뤄지듯 청력에 따라 구역이 나눠질 수 있다는 미래(「눈물이 서 있다」)는 서글프고 섬뜩하다. 그럼에도 소설 속 인물들은 오늘을 살아내고 있었다. 때로 과거의 기억과 사라진 당신을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도 견디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언젠가는 곁에 있는 모두가 사라질 것이다. 사라진 후에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혼자라는 고독과 소멸하는 삶뿐이라 여기는 나와 당신에게 이런 구절은 힘이 된다. 결국 저마다의 생을 살아가는 걸 알기에.

 

 ‘혼자가 아닌 거야. 누구라도,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과 함께 식사하는 거야.’(89쪽) 

 

 한 번씩 그립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눈물 흘릴 나만의 밤과 손을 잡아주며 괜찮다고 말하는 친구가 간절하다. 이름만 들어도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공간은 아프다. 이광호의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에서 만나는 용산이 아린 것이다. 용산이라는 지명이 지닌 의미가 노란 리본의 팽목항과 겹쳐지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상실과 부재의 크기와 모양은 다르다. 그러나 그곳에 고인 슬픔과 그곳을 지키는 이들의 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를 잊게 된다는 것’은 ‘네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153쪽) 란 분명한 사실이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거기 있었던 네가 한순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인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점차 나의 오늘에서 아버지는 옅어진다. 이미 아버지의 공간은 사라졌고 함께 했던 시간은 번져 흐려진다. 자꾸만 이광호가 담아낸 용산을 펼쳐본다. 용산을 팽목항을 아버지를 간직하기 위해서.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후회로 채워진 오늘을 자책한다. 화분 속 마른 식물 같았던 아버지에게 작은 물방울의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끔뻑이던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 면회가 있을 거라 여겼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핑계이며 부질없는 탄식이다. 물론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완벽하게 살았을지 장담할 수 없다. 얼마나 더 살아야 삶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에서 누군가의 삶을 통해 그 대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유년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자갈」)과 이별의 이유를 찾을 수 없이 비껴간 사랑(「아문센」)과 욕망을 절제하는 사람들(「일본에 가 닿기를」). 가장 가까운 가족과 화해하고자 노력하는(「디어 라이프」) 삶이 거기 있었다. 통찰과 관조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인식하지 못한 과거의 잘못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게 아닌가 자책하는 나와 당신에게 괜찮다고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생채기마다 흘러나오는 붉은 피도 언젠가는 멈춘다고 말이다. 살면 살수록 생이 어렵다는 걸 알지만 만회할 수 있는 생도 우리에게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어떤 오늘은 눈물로 채워지고 어떤 오늘은 피하고 싶은 날이 될지라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수많은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416쪽)

 

 책을 읽는다. 습관처럼 때로는 의식적으로 읽는다. 좋은 책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어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세 권의 책이 내게 그랬듯 당신에게 그런 어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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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4-12-1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 너무 좋아요.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자목련 2014-12-14 23:09   좋아요 0 | URL
보물선 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보내세요.

2014-12-14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4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4-12-15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기댈 어깨 같은 글을
자목련 님의 서재에서 만나고 갑니다.
좋은글 감사해요^^

자목련 2014-12-15 17:29   좋아요 0 | URL
아무개 님 빈약한 어깨를 꼭 안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가운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안부를 전하는 일은 얼마의 마음 조각이 필요한 일일까. 곧 닫힐 11월을 보내는 날들이라 그런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립다. 어느 계절을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전히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마음이 작아져서가 아니라, 일이 많아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불안하고 서운하다.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 건 아닌가 쓴 약을 마시는 짐작을 한다.

 

 또 한 해를 살았다는 안도와 함께 제대로 살지 못한 날들을 홀로 원망한다. 매년 올해의 리스트를 작성했지만 2014년에는 쓰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반복되는 일상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며 그들의 얼굴을 보고자 했던 다짐도 냉동실 속 아이스크림처럼 얼어버렸다. 이제는 유통기한이 지나 버려야만 한다.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하고 누군가의 소식을 듣는다는 건 소소한 기쁨이 아니라 아주 큰 즐거움이다.

 

 작은 소동이든 큰 사건이든 일어나고 해결된다. 죽음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매일 죽음의 소식을 듣는다. 가까운 이, 누구나 다 아는 공인, 나와는 상관없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듣는다. 때문에 죽음에 익숙해진다. 때문에 죽음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마주한 소중한 이의 죽음은 버릴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지울 수 없는 그림이 된다.

 

 

‘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이별, 미련과 기대와 슬픔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리는 깨끗한 결단. 종지부. 두부를 삼키면 두부가 눈앞에서 사라지듯이 죽음은 그들을 삼켜 없애버린다.’ (내 침대 아래 죽음이 잠들어 있다 중에서, 187쪽)

 

 어쩌면 나는 박연준의 『소란』에서 그 상처와 그림을 매만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의 문장이 건네는 안부가 오직 나를 위한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문장에서 그 봄을 떠올리고 잠시 봄의 목소리를 듣는다.

 

 

 ‘사랑이 편애라면, 나는 4월의 나무 이파리들을 편애한다. 꽃 진 다음 이파리가 주인공이라고 외치듯, 막 태어난 색깔인 듯 화사하게, 처녀의 종아리처럼 빛난다. 아직은 떨어질 일이 없다고, 아마 영영 없을 거라고 자신하는 저 몸짓! 앳된 얼굴들. 자전거를 막 배운 아이처럼 생동하는 움직임! 눈물이나 떨어짐, 기우는 일 따위는 모르는 듯 떨다 웃다 선명해지는 저 잎사귀들. 저건 어느 나라 사파이어지? 그늘마저 화사한 4월의 나무들! 좋다. 참 좋다!’ (이파리들 전문, 145쪽)

 

 

 4월을 편애하는 내게 이런 문장은 달콤한 커피처럼 스며든다. 겨울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에 봄으로의 도피를 도와주는 문장이다. 그 봄, 어디든 연두가 춤을 췄다. 그리고 그 봄 부실한 이를 가진 마른 과일 껍질 같던 아버지가 밥상에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고 있었다. 제 기능을 상실하는 귀로 인해 내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나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뱀이 된 아버지」 의 일부

  귀여운 귀여운 아버지

  사그라지는 몸

  사그라지는 목소리

  사그라지는 실체

 

  마침내 잦아드는,

  흘러넘치는

  아버지라는 액체  -「물빛, 정오」 의 일부

 

 

 아버지도 무언가가 되었을까. 시 때문인지 박연준과 아버지는 같은 단어로 여겨진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킨 큰언니에게 아버지는 어떤 단어로 기억될까. 아직 그 질문을 큰언니에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묻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 아닌 비밀이 있다는 걸 안다.

 

 곧 12월이 된다. 잠시나마 세상의 죄악을 덮을 수 있다고 믿는 천사의 눈이 내릴 것이다. 12월의 첫날, 다시 이 문장을 읽을 것이다. 끝이라는 말보다 시작이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 12월이 될지도 모른다. 12월이 되면 불안을 누르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나만의 12월을 갖고 싶다. 

 

 

 ‘이상하다. 12월이 되면 모든 것의 윤곽이 흐려진다. 달력의 숫자들조차 꿈틀거리며 도망가려는 듯 보인다. 명징한 얼굴을 보여주길 거부하듯, 12월이 품은 날들은 웬일인지 모두 흐리다. 인디언들은 12월을 ‘다른 세상의 달’ 혹은 ‘침묵하는 달’,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 ‘늙은이 손가락 달’, ‘태양이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달’ 등으로 부족에 따라 달리 부른다. 재미있다. 우리말로 12월은 ‘매듭 달’이다.’ (12월, 머뭇거리며 돌아가는 달 중에서, 197쪽)

 

 

 여전히 당신의 목소리는 내게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나의 목소리도 당신에게 닿을 수 없다. 안부 대신 건네는 문장을 당신의 목소리로 읽히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곧 현실이 되리라는 믿음과 함께. 가느다란 믿음이 이스트를 품은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오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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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을 정리한다. 가만히 책들을 바라본다. 몇 년 전에 환호하며 읽었던 책, 탐났던 문장들, 눈물을 닦아주던 문장들이 거기 있었다. 잊고 있었던 책들도 발견한다. 책날개에는 소중한 이의 손글씨와 내가 남긴 메모가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사인도 눈에 들어왔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에는 단정한 글씨로‘2008. 10.1 김연수’가 적혀 있었다.  

 

 책을 정리하면서 책 속에 숨겨진 욕망을 보았다. 내가 도서 정가제를 핑계로 사들이는(그렇다, 읽기가 목적이 아니라) 분야의 책은 시, 문학, 예술이 많았다. 철학, 인문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읽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기에 멈춤에 이르렀다. 직접 마주할 수 없는 그림을 예술서를 통해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주말을 전후로 구입한 책은 소설가 7인의 옷장이란 부제가 있는 『THE CLOSET NOVEL』, 착한 가격과 함께 호평으로 이어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기도』, 『개더링』,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고 이 책 『ART 세계 미술의 역사』다. 갖고 싶은 책을 생각하는 일은 행복한 고통을 선물한다. 『백치, 『악령』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고민은 괴롭다. 그럴 때마다 지인의 추천으로 기운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추천을 더 잘 알려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도 함께 담았다. 몇 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언니를 위한 선물로 『소설가의 일』을 주문했다. 선물을 생각하니 김연수의 『우리가 보낸 순간』이 떠오른다. 연말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 누군가에게 이 책을 선물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선물을 받는 이는 김연수의 팬이 아니어야 한다.

 

 

 

 

 

 

 

 

 

 

 

 

 

 

 

 

 

 

 

 

 

 마지막을 위한 마지막 리스트는 끝났다. 목요일 이후에 나는 어떤 책을 마주할 것인가? 어떤 책을 살 것인가? 아니,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어쩌면 여전히 책을 정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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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밤엔 강한 바람이 불었다. 16년 만에 수능 한파가 찾아온 것이다. 진짜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중얼거렸고 아침에는 쌀가루처럼 내리는 눈을 보며 첫눈이구나 생각했다. 내가 사는 소읍엔 수능이라 해도 출근을 늦추거나 등교 시간에 대한 변경이 없었다. 공무원이나 은행원들은 달랐겠지만 말이다. 주변에 고3이나 수능에 관련된 사람이 없다 보니 그저 춥다는 말이 지배한 하루였다.

 

 저마다 11월 13일을 기억하는 방법은 달랐다. 누군가에게 오늘은 첫눈이 내린 날이며, 누군가에는 평범한 목요일이며, 누군가에게는 김장을 담근 날이며, 누군가에게는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를 떠올리는 날이다. 물론 내가 전태일 열사의 기일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 덕분에(부끄럽지만) 이런 책을 펼쳐보는 날이다.

 

 

 

 ‘머리채를 잘랐던 어머니는 흉한 머리를 감추기 위해여 한여름 내내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일했다. 태일은 이른 새벽에는 여관을 돌아다니며 구두를 닦고,낮이면 평화시장·남대문시장·중부시장 등에서 시다나 미싱보조로 노동을 하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러 다녔다. 이렇게 하여 그해 가을 모자가 돈을 보태어 2,500원으로 헌 천막 하나를 샀다. 그 당시 남산 중턱에는 골격만 세워놓고 공사가 중단된 큰 아파트형의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건물 뼈대에다가 집 없는 사람들이 합판으로 각각 칸막이를 해놓고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빈터라고는 옥상밖에 없었는데, 어머니와 태일은 옥상에다 천막을 쳤다. 밤이 되니 관리인이란 사람이 올라와서 철거하라고 하여 그날 밤만 사정사정하여 새우고, 그 다음날 새벽에 철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모자는 또다시 헤어져 돈을 조금 더 모아서 판잣집을 세내기로 하였다. 김장철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남산동 50번지의 한 판잣집을 사글세로 얻었고 오랜만에 어머니, 태일, 태삼 세 모자가 함께 살게 되었다.’ (87쪽)

 

 

 

 그 시절을 몰랐던 혹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누군가의 삶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다가온다. 나 역사 다르지 않다. 이런 책을 통해서 그들의 시간을 불러올 뿐이다. 천막에서 살아야 하는 삶은 여전히 비닐하우스로 이어지고, 발끝이 닿지 않는 방 한 칸에서 살림을 사는 삶은 줄어들지 않았다. 진실이 아닌 것들이 진실로 보도되고, 권력과 부가 휘두르는 칼에 서민들은 깊고 큰 상처를 입는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어떤 것일까? 부자가 되는 것, 명예를 갖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극소수가 바라는 삶이다. 아니 바란다고 될 수 있는 삶이라면 좋겠다. 그저 내 식구가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을 꿈꾼다. 아프면 참지 않고 바로 병원에 갈 수 있는 세상, 잘못된 부분을 바로 인정하고 시정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맨 먼저 달려온 사람들은 늘 차별과 소외가 있는 곳에서 함께해온 헌신적인 사회단체 사람들과 고통받는 노동자들이었다. 이랜드-뉴코아 여성 노동자들, 코스콤 비정규자들, 며칠 전 고공농성을 마친 GM대우 비정규직들, 재능교육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전국해고노동자투쟁위헌회 회원들, 그리고 시청 앞에서 성람재단 비리 해결을 위해 끈질기게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장애우들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자신의 권리를 넘어 전체 차별받는 이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이었다.’ (189쪽)

 

 

 

 

 

 

 수능은 끝났고 출제경향에 대한 이야기가 끝이지 않을 시간이다. 시험을 치른 아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들 모두 특별한 하루가 된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멋진 꿈을 꾸며 잠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며 눈물을 삼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2014년 11월 13일을 기억하는 수많은 방법 가운데 분노나 절망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평범한 하루를 마치며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에 작은 감사와 평안의 조각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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