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꿈을 꾸었다. 할머니는 건강한 모습이었고 깐깐한 잔소리를 생생하게 늘어놓으셨다. 그것은 큰언니 집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도 내가 이 공간에 대해 고민하고 있기에 그런 꿈을 꾼 것 같다. 예상보다 휠씬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큰언니만 그 자리에 없을 뿐. 작년 여름에 급하게 유품을 정리하지 않았나 싶은 후회가 밀려온다. 온전한 정리를 한 건 아니지만 급한 마음이 있었다. 정리한다는 말이 사라진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존재한다는 걸 느끼는 나는 때때로 서럽다.

 

 우리는 더이상 큰언니의 부재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큰언니를 언급하는 일이 줄어든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나는 큰언니의 손때가 묻은 것들과 함께 한다. 현관문에 달려있는 풍경의 소리는 문을 열 때마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다. 언니의 부탁으로 내가 주문한 빨간 스탠드, 필요한 생필품을 창고나 서랍에서 꺼낼 때마다 반듯하게 정리된 모습에 감탄한다. 버리지 못한 신분증과 여권 속 사진은 언니의 시간을 짐작하게 만든다.

 

 초반에 몰려오는 고통의 예리한 모서리들이 무뎌지면서, 마비되고 분개하던 마음이 천천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옮겨 간다. 슬픔은 더욱 깊어진다. 허전함과 결핍감, 동요의 순간들과 함께. 상냥함이 깃든 슬픔이 퍼지는 것은 더 나중이다. 부드러운 아픔이 떠난 사람의 이미지를 둘러싼다. 죽음이 우리 안에 똬리를 틀었다. 그 흐름에는 지름길이 없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죽음은 삶에 속하며, 삶은 죽음을 껴안는다.’ (『수런거리는 유산들』119~120쪽)

 

 아무리 연습해도 이별은 속수무책이다. 그저 멀고 긴 여행을 떠났다고 여겨도 어려운 일이다. 분명 잘 가라고 인사를 했는데 떠나는 이를 바라보며 서 있다. 뒤를 돌아 내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데 한 번에 돌아지지 않고 수많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 이곳에 머물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책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김연수가 언급했다는 이유로 제목만 기억하고 있었지만 읽을 용기를 내지 않았다. 집 안의 모든 사물이 수런거리는 소리를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부모님의 집을 비우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의 연애편지를 읽으면서 그들의 사랑과 삶을 마주하지만 나는 언니가 꼼꼼하게 기록한 메모나 일기를 대면할 수 없다. 일부는 읽다가 덮었거나 일부는 태웠고 일부는 그대로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곳을 정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용기를 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옳지 않을 일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용기를 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시간을 요구하는 것들이 있다. 죽음도 그 하나다. 엄마, 할머니, 아버지, 큰언니의 죽음은 저마다 다른 질량의 시간을 요구한다. 마음을 나눠 수많은 비밀의 방을 만들고 살아가는 동안 죽음의 방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 방은 열린 채 쉽게 닫히지 않는다. 그곳을 채울 수 있는 건 통증과 그리움이며 애도다. 누구나 언젠가는 누군가가 만든 그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영원할 수 있다고 믿는 인생은 영원할 수 없다. 어디선가 들은 오늘이 인생이라는 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오늘은 오늘일 때 가장 빛난다. 어제였던 시간은 사라졌고 내일인 시간은 잡히지 않기에. 느닷없는 일들이 인생을 지배한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이라는 말에 담긴 절실함을 모르고 산다.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 작별을 준비하면서 살 수는 없지만 오늘이 인생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묘지는 놀이터였다. 놀이터 중에서도 가장 놀랍고 가장 흥미진진한 놀이터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다. 나는 놀이의 비밀을 잃어버렸다. 나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 모든 날들이 작별의 나날인 것이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95쪽)​

 

 아침에 아주 소중한 사람과 통화를 했다. 목소리로는 자주 만났지만 눈을 바라보며 같은 공간에서 머문 시간을 모두 합해도 하루가 되지 않는다. 대부분 우리는 그렇게 산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집중하며 자신의 삶을 산다. 가까운 듯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며 살아간다.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으며 산다. 무엇이 인생인지 모르며 그렇게 살아간다. 아무리 연습해도 속수무책인 이별을 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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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0 14: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뎌지지않는 것이 있다면 그게 아마 이별의 상실일텐데 그래서 어쩜 신은 (신이 있다면) 인간성의 최후에 만들어 놓은 것 중 하나가 죽음 아닌가 그럴 적이 있어요.
잘 읽고 갑니다...이런 글에 ㅡ개인의 사유에 (인지)덧글함이 옳은지 한참 망설이다 혼자보다는 누군가 이런 고민을 같이 한다는게 덜 외로우실 듯 하여..

자목련 2016-02-22 10:51   좋아요 1 | URL
[그장소] 님, 고맙습니다. 이별을 인정하고 삶을 직시하고 살아가는 과정에 [그장소] 님의 댓글이 힘이 됩니다.

blanca 2016-02-20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쩔 수 없이 죽음과 만나야 하는 시간들이 앞에 놓여 있는 인생이 참 무섭기도 하지만...태어난 이상 숙명이겠지요? 자목련님처럼 잘 해 나갈 수 있을런지, 자문해 보게 됩니다.

자목련 2016-02-22 10:50   좋아요 2 | URL
멀리 있다고 여겼던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걸 실감하는 날들입니다. 말씀처럼 숙명이니 받아들여야하겠지요.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것을 알아가는 게 삶인 것 같아요.

2016-02-20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2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16-02-20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니를 보내고, 언니가 남긴 일기장을 본 적이 있어요. 가슴이 미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그때 알았어요. 그 일기장을 다시 펼칠 수가 없어 49재 마지막에 옷가지랑 태웠는데 지금도 후회가 되진 않아요. 10년이 지났어도 지금도 펼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이런 얘길할 때는 어둠이 함께 했는데 이젠 햇살 드는 빈 방에 허전히 앉아 있는 느낌이 들어요. 용을 쓰며 견디다 이제 힘이 빠진 탓일까요?

자목련 2016-02-22 10:44   좋아요 2 | URL
이누아 님, 고맙습니다. 같은(결코 같을 수는 없겠지요)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어떤 시간은 흐리지 않는 것 같아요. 어둠이 지나고 햇살로 가득한 방을 저도 만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시한 번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6-02-20 2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영원한 안식으로 이해하면 삶의 완성, 삶의 일부로 긍정할 수 있을텐데요. *^

자목련 2016-02-22 10:43   좋아요 2 | URL
머리로는 인식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지 못하는 게 아닐가 싶어요. 그러니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걸 모른 채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장소] 2016-02-2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위로받으셨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