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허물기 우리 시대의 고전 22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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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본서는 주체라는 기계(/)장치의 system*에서 결정성 문제를 성차화(= (정신(분석)적 )sexuation 및( 사회문화적) gender(-mold)ing/genderization**) 문제와 뒤섞어 ’미결정성’, ’불확정성’ 등의 엄밀하지 못 한 개념을 남용하고 있기에 우선 이 점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원래 비결정성이나 불확정성이란, 주체의 system 내/외부 모두에서 그 system의 작동/행동에 관해 어떠한 요구나 지시도 하지 않거나 못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실질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대개는 내/외적 요구 간 간섭적 과잉결정의 불일치나 모순상태를 과장한 문학적 rhetoric에 불과하고, 특히나 Judith Butler는 거의 언제나 이것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예외적인 특이개체의 정신(분석)적 성차화와 사회문화적 판별/판정이 모두 오류나 괴리, 모순에 빠지거나 실패해 판단중지에 이른 상태에서조차도 Biochemical process는 나름의 조절 mechanism에 의거하여 독립적으로, 그리고 거의 언제나 굳건하게 자기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으며, 이 경우 ’미결정’이나 ’불확정’이란 곧 system 정지를 의미할 뿐입니다.


주체 system의 이러한 지평은 정신분석적, 사회문화적 범주와 판단의 경계들을 모두 넘어서 있는 실재의 차원이기 때문에 상기의 판단중지 상태에서도, 아니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 판단붕괴 상황에서만 드디어 순수한 ’단일결정’의 실현이 가능하게 되므로 이 지평의 내적 요구에 충실히 따르면 되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몸’이 (번역되지 않은) 자신의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 전거( ¶ http://blog.aladin.co.kr/705625157/7699565 )한 바와 같이 대개 system의 hormone 종별 농도의 수리통계적 모형에 따라 기본적으로는 결정되겠지만, 잠복-성의 경우는 사회적/일시적 오해에 불과할 뿐 성소수자로 보기도 어렵고 (굳이 따지자면 표현적/잠정적 성소수자일 뿐이며), transgender나 transexual은 오히려 여타의 (특히 물질적) 제결정을 모두 전복하는 초과잉결정이라 할 수 있고, 간성의 다수는 과잉결정이며, 극소수의 ((XO적) 일부 간성이나) 무성도 생각하는 것처럼 ’미결정’이나 ’불확정’은 전혀 아니며, 이는 오히려 이 소수자들에 대한 인권적 모욕이기도 합니다. 이들도 나름대로 하나의 완전한 개체로서 완결된 결정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재의 지평은 생(-)화학적 장과 사회문화적 장 간 적응적 기제( / )interface로 발명돼 온 임상의학적 진단 규범과도 다른 것입니다.





[이하 경어 생략]






 즉물적 ’가부장제 주적론’류의 성/gender-의식 과잉을 넘어 여성없는 feminism으로, 보편주의적 소수자 연대(/)공동체론으로 진화해 나아간 후기 Butler의 사상은 분명한 발전으로 평가받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다음과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 한 채 남게 된다.




1. 결국 탈Gender화를 통해 (보편주의) (범)소수자-정치(론)의 급진민주주의 도식으로의 뒤늦은 수렴이라는 본질적 한계를 노정하면서 오래된 급진민주주의론의 문제와 난점들 또한 고스란히 떠안게 되지만 이를 하나도 해결하거나 인식하(려들)지도 않은 채 갑자기 윤리철학으로 도피해 버리고 만다.




2. 시대적 과제와 문제 설정의 퇴색으로서의 parachronism

  ; 세계사적 시대/정세 변화에 따른 문제계의 이동


현재 남한사회에서 (소위 ’mirroring’등 vulgar feminism 진영의 잘못된 감정적 과잉 대응으로 오히려 여혐 mention량 연간 9배 이상의 증폭을 계속하며 폭발로 치닫고 있는)  ’이’성혐오와 성대결 현상의 숨은 근인인 경제 위기와 사회 양극화에 대해 과연 Queer feminism은 이런 현상적 갈등들을 넘어 어떤 결정적 해법과 대책을 제출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Queer feminism은 호황기의 한가하고 표피적인 작은 문제 설정이란 측면이 강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이는 또한 더 본질적으로는 Queer feminism과 3세대 feminism의 신자유주의와 동성애/Queer 제국주의에의 착종-교란 및 역이용 문제로 귀결된다.

원래 한국의 Queer (Pride) Parade와 Culture Festival은 여타 진보 단체들의 행사와는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철저한 경찰력의 비호 아래 치러져 왔고, 경찰들은 항상 Queer 진영을 입장시부터 호위병들처럼 도열하여 환대해주거나 행사 내내 참가자들을 등 뒤로 보호하며 기독교 세력에 맞서는 대형으로 진을 쳐 제반 관련 행사들을 도와 왔고,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전지구적 미래산업 전략기업의 해마다 계속되어 온 대대적 후원 등은 이미 익히 알려진 바이나, 이에 더하여 최근의 주목할 변화는 영미권 주도 구미 강대국 대사관들의 적극적 후원과 참여라 할 수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 질서와 정치군사전략의 판을 짜고 그 실현 관철을 추진하느라 눈코 뜰 새없이 바쁜 대사들을 많은 시간 아낌없이 할애해 그 많은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등 뒤로 보이는 경호원들까지 대동한 채, 언론 interview 요청들은 거부/차단하면서 저토록 열심히 참가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저 미소 뒤에 가려진 고도의 치밀한 정치경제적 계산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가를 Queer진영은 반드시 숙고해 보아야만 한다.





3. 이러한 결정적 대안은 고사하고 Feminism bloc 내부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 queer (feminism) 진영은 과연 bloc 내부에서의 정치력조차 (주도적으로) 행사할 수 있으며, 그러한 (극)소수성의 한계를 넘어 실질적/거시적 주요 사회 변화를 실현시켜낼 수 있는가?





4. 현미경적 미시분할과 근시안에의 편집증적 집착과 매몰 대신 망실하는 장기적 거시관점


현재 Queer진영은 Gender binary를 극복한다면서 자신들의 성정체성과 지향성, 그리고 관계성[!!!], 취향 등의 서로 다른 차원들을 뒤섞어서, 정립된 분류 체계도 없이 나름 광적으로 미시분할을 반복하며 종족 분류학에 현미경적 편집증을 보이고 있다. 현재는 Bi-sexual이 독립범주로 성립 가능한지 연성 Homo-sexual로 통합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또 예의 그 "혐오!!" matador를 휘두르며 분열하고 있는데 이 갈등이 가까스로 봉합되어 봤자 다른 분류 단계마다 이와 유사한 문제는 계속 반복 출현할 것이다.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이 Binary(체)계의 문제점이 아니라 언어(적 사고)체계 자체의 본원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규분포의) Spectrum계이기 때문에 수리통계적 사고체계인 (Cognitive) System IV***로 도약하지 못한 채 언어적 사고체계인 (Cognitive) System III*** 수준에 갇혀 있는 한 아무리 이러한 미시분할을 반복해봤자 결코 분류의 최종단계에 도달할 수조차 없는 것은 물론, 게다가 더욱 치명적으로는 이런 언어적 구획과 분류에는 항상 "어떻게든 금을 그어 봐!! 삐져나와 줄테니까!!!"하고 벼르는 종자들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어서 구축해 온 모든 분류체계는 곧 마디마디 분기점마다의 저항과 반론에 흔들리게 될 것이다. 


한편 이들에게는, 몇 계단의 섬세한 분할을 통해 도달한 범주인 Asexual 안에서도 가령 Demisexual과 Grey-Asexual 사이의 차이점 등은 매우 중요하지만 예를 들어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차이 등에 관해서는 별반 관심을 보일 정도로 중요한 게 없다. 왜냐하면 Carol Hanisch 이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 Personal is Political]"이라는 신앙 때문이다. 설령 정말 만의 하나 그 말이 진리일지라도 이들이 왜 자신의 개인적 경제생활 상의 문제 같은 중요한 것들에 대하여는 함께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 성/gender, 그것도 취향 문제에만 집착을 보이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정체성(의 구성)이 교차하는) 각 분야 전 방면에서 이런 광적인 미시분할을 계속해 나간다면 그 누구도 소수자가 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는 문제도 있다. 결국 모두가 언제까지나 영원히 고독한 소수자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실질적 지배자는 인식의 장막 뒤편으로 사라지고 남는 것은 자칭 소수자=피해자들 간의 고통-전시-"쇼당"[show-down]( / )battle 뿐이다. 누가 누가 더 아픈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럼 누가 누구에 맞서 싸워야 하고, 누구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가? 결국 실제로 도래하는 것은 소수자들의 연대(/)공동체가 아니라 역사 상 한번도 실재한 적 없고 단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했었다고 주장되는 바로 그 자연 상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로서의 무한 이기주의 Narkissist들의 전쟁터 뿐이다. 왜냐하면 장막 뒤에 숨은 실질적 지배자는 결코 죽지 않고, 그로 인해 현실의 적대적 구조와 갈등 관계, 목숨을 건 생존경쟁 등은 계속 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큰 난점은 이것이 Queer 정치(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몫(소리) 없는 존재자들, 유령적 존재들의 가시화를 위한 (감각의) (재)분할을 추구하는 급진민주주의론( / )진영 일반의 한계로 완전히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다. Queer진영은 이를 단지 예시해 주고 있을 뿐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근원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 하는 한, 아무리 감각의 재분할과 episteme의 인지적 해체 및 재구성을 반복해도 결코 평화와 연대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S.


묻고 싶다.


아직도 보수 개신교를 "가부장제", 혹은 "젠더체계"(라는 현실)의 제1계급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그들만 무너뜨리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정말 (숨은) 지배자들이 그 보수 개신교의 Anti-queer운동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이제 (현실의) Queer 정치학에 도대체 어떤 정치성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들을 직설적으로 좀 더 정련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젠더체계"나 "가부장제" 붕괴시도실험을 했을 때 도출되는 data값은 계속해서, 당신들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 열렬한 수호자들이 실질적 지배세력과는 거의 상관이 없고, 실질적 지배세력은 그에 대해 (더이상) 별로 개의치 않고 연연하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근본적" "체제" 위협 따위로는 전혀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발빠르게 이미 다른 견적서들을 얼마든지 뽑아 놓고 기다리다 이제는 조급해져서 눈치고 뭐고 본색을 드러내며 오히려 발벗고 나서서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특정 자본주의 단계에서, 그리고 지금도 일정 정도는 지배세력이 (잔존하는) 가부장제를 통해 특히 성별 임금차별과 무급 재생산 노동 수탈 등으로 대표되는 이익들을 취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부장제 정도가 붕괴한다고 해서 차별적 임금-승진체계나 ’무급 재생산( / )돌봄 노동체계로서의 가족제도’ 자체가 붕괴하는 것도 전혀 아닐 뿐 아니라 설령 이것까지 붕괴해 버린다 해도 그런 이익이나 효과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및 지배 양식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오히려 선진국들은 이런 Queer(/)Feminism을 적극 이용한 선도적 Pinkwash(ing)를 통해 미처 전환/적응하지 못 한 주변국들에 대해 압도적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위협적 압박을 강화하는 데 동원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후기의 Judith Butler조차 아직도 극복하지 못 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소위 "GENDER 체계 근본주의"같은 종교가 얼마나 허황된 허구인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data들이다.


이 "견적서"에 대하여는 상기 전거 후단($ ’X.S. 최종 결론과 남겨진 문제’ 절)을 참고할 것.

)







’2016.06.12일 Florida주 Orlando의 한 LGBT club에서 ISIS/L에 동조하는 미국 국적의 자생적 Muslim terrorist에 의해 49명의 사망자와 53명의 부상자를 낸 미국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우선 먼저 그 희생자들에 말할 수 없는 깊은 애도를 드린다. 국내 뿐 아니라 국제 정치적으로도 극도로 미묘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이것이야 말로 Queer와 갈색 feminism이 post-Fordism기반 (미래 인간자원산업과 시장창출, 그리고 2,3세계 주변부 적대국가와 경쟁기업들의 압박을 위한) 신자유주의-신제국주의의 총알받이 (문화) 돌격대로 역이용 당한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으로 해석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Queer는 선주민/현지인들에게 살해 당하는 21세기 선교사들에 다름 아니다. 그 자체로는 일정 정도 진보적인 평등 사상도 대변하고 있고 또 때로는 숭고하기까지 하지만 대개는 너무나 탈맥락적이고 Naive하며 그 뒤에는 언제나 열강들의 제국주의 군대와 거대 상단들, (척식) 기업들이 역시 "견적서"를 뽑아 들고 계속 치밀하게 검토하면서 바짝 따라 붙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답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인식론에서 반과학주의와 반기계론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기계론은 고전적 mechanism이 아닌 Deleuze-Guattari의 machin(e-)ism 계보를 잇는 것으로 특히 ’인식론적/전략적 기계주의’로 새롭게 불려야 하며, 모든 신비주의 해체를 (제1)목표로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임을 밝힙니다.


** 불과 10여년 전에 출간된 이 책 원서의 제목은 Undoing Gender인데, 왜 Judith Butler는 그 멀지 않은 당시에 좀 더 창의적으로 Ungendering이나 Degendering같은 단어를 그 스스로 착안해내지 못 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의 과문 때문일 뿐인가? 어쨌든 다소 거슬리고 거추장스러운 word-formation이 아닐 수 없다.


*** 학계의 공식 용어는 Cognitive없이 그냥 System II와 System I으로만 명명, 통용되고 있는데 여간 딱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는 기회가 되면 다른 곳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오늘(’160615) 자로 가해자가 10년 이상 스스로 동성애자 성향이었다는 새로운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고 FBI는 이것이 금번 terror를 위한 치밀한 사전준비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다는 바보같은 입장을 표명했는데, 이에 대한 합리적 추론은 다문화 자녀의 (문화)정체성 갈등과 분열적 동요 속에서 증폭배양되어오고 하층이민자 유색인종 식민주체, 특히 Muslim들에 대한 만성적 일반 혐오의 누적 속에서 어떤 결정적 계기로 임계폭발한 자기혐오적 붕괴의 극적 대반전이자 외전투사로서, ’귀향한 탕자의 심/종(=회개)적 보복 성전’이라는 해석이 되아야만 할 것이다. 








[초고 memo 작성중]


[당분간 좀 긴급한 중기적 사정이 발생해 당분간은 본격적 서평 작성이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혹시 예기치 않은 시간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추가해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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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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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선 ’루인’(의 글)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여러 독자, 평자들의 지적에 공감하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나의 개인적 관찰로는 이것이 그의 잠재력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데 그 가장 강력한 기반은 말미에 다시 후술하게 될 유서 깊은 계보의 솔직성과 그것이 약속하는 깊은 (자기) 성찰의 가능성이다.

((질문에 대한) 이해력은 좀 떨어지시는 듯해 다소 실망ㅠㅠ)




1. 상상계의 폭력 대 실재계의 폭력


1.1.1. minor minority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major minority의 폭력 문제

  ☞ 이에 대하여는 본서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중 루인의 글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 ; 트랜스젠더퀴어, 바이섹슈얼 그리고 혐오 아카이브」에서 (주로 gender minority들 간 문제에만 제한된 한계는 있지만) "(시스플레인[ ; cisplain=cisgender+explain으로 nontrans(-여성)들이 trans(-여성)들에게 훈계하려드는 태도], )비트랜스 페미니스트의 트랜스 혐오, 동성애자의 바이 혐오"로 명시된 문제에 대한 detail한 경험례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참고할 것.

미국 사례는 Jillian Todd Weiss를 참조.

(대표적으로는 Jillian Todd Weiss, "GL vs. BT: The Archaeology of Biphobia and Transphobia Within the U.S. Gay and Lesbian Community", Bisexuality and Transgenderism: InterSEXions of the Others, Ed. Jonathan Alexander & Karen Yescavage, Harrington Park Press, 2003. (: 상기 루인에서 재인용))


이러한 통찰 방식은 대중 현실에 있어 여성(주의자)들의 transgender와 양성애, 동성애자, 남성 혐오 및 차별 문제 등등으로 더욱 복잡하게 확장될 수 있음.


1.1.2. 정체성 혼란 : Identity의 가변-중첩교차성과 다수vs소수의 난첩한 중층(적 위계)성 


(이하의 예시는 논제를 아주 조야화하는 역효과가 매우 크지만 논제 자체만 제시할 경우 의미 이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일부 일반 독자를 위한 시도로서 아주 극단적으로 단순화할 경우 예를 들어, 
못 생긴 고학력의 중산층 feminist 한국 여성과 장애인 부자 남성, 미모의 고졸 여성, 볼품 없는 단신의 고졸 남성(+만약 운 좋게 대기업 노동자일 경우와 아닐 경우), 중상층 흑인 여성White trash 즉 백인 빈민(층) 남성, 부자 백인 남성 동성애자나 transgender queer.......
(등등이 서로 뒤엉켜 다투고 있다면)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약자이고, 소수자인지 대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

더구나 이들의 identity 구성 요소들은 의-과학 기술등의 비약적 발전과 사회의 유동화에 의해 (상향이든 하향이든) 점점 더 가변(화)한다.

애초에 순수한 (추상적) 남성과 여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인데, 바로 이런 동일한 이유로 또한 "’여혐’은 가능한데 ’남혐’은 (보편 주체라서, 또는 혐오와 분노는 다르기 때문에 등등) 불가능한 사회이므로 문제"라는 식의 주장은 오류가 되나 추가 논의는 ☞"$S.2.=2.S." part 중 ’남혐’ 불가론 비판 참조
)


1.1.3. 폭력의 상호성과 개별성

계층-진영 범주적 절대가해자 및 순수피해자 사고의 전형적 2분법 편향과 오류


우리는 폭력의 상호성과 관련하여 가장 시사적인 case의 하나로, cisplain 대신에 sisplain이나 shexplain 같은 걸 개념화해 볼 수 있는데 sisplain=sister+explain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니가 뭘 잘못했는지 도대체 알기나 알아?!"나 심지어 대부분 "오빠가 뭘 잘못했는지 알기나 알아?!"로 시작해 잔소리꾼 엄마가 되면서 본격화하다 마침내 가모장의 왕위에 오르면 완성됨. 실재의 많은 가정들에서 남편은 그냥 철딱서니 없는 큰아들일 뿐이며, 돈-벌어-오는-기계로 전락한 지는 더 오래되었고, 많은 경우 딸들도 아빠를 가르치며 한 여성 (가족)상담심리전문가의 지상파 방송을 통한 공언에 의하면 한국의 가족들에서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딸을 이길 수 없고, 그녀들은 어디 가서도 말싸움, 감정싸움으론 결코 지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



1.2.1. (문제의 근원으로서)

폭력의 일반성과 편재성,

중층성 및 (분리불가능한) 유착-착종성,

근원적 회피불가능성 문제



인지 폭력

    비의도적 인지 폭력

        특히 인간 인식(능력)의 숙명적 한계로부터 근원하는 인지 오류의 필연성

    의도적 인지 폭력

         ex. 지식-권력 연계의 episteme 설계-관리에 의한 지배와 통제 등

그에 기반한 비논리-비약적 과잉증폭으로서의 감정 폭력, 혐오

행동화된 물리적 폭력

구조화된 사회적 폭력 : 취업-승진 제한과 임금 차별, 가사-육아 등 인간 (재)생산 노동에 대한 (완전)부불, 무급제 등등



1.2.2. 일반 전략으로서 환대와 적대, 평화와 폭력의 문제


1.2.2.1. 

The Golden Rule & The Silver Rule의 필연 :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된 숭고한 절대적 평화주의-인도주의의 (불)가능성과 난점들

Levinas식 환대의 불가능성에 대한 Derrida의 비판처럼.


1.2.2.2. 

인식과 판단의 근원적 불완전성, 오류-항상성과 그에 의한 판단 및 실행 (영구) 중지 요청으로의 귀결 문제 A

"침을 뱉어라!", "분노하라!", "광신"! 등 열정적 행동주의 계보와의 (정교한) 양립 (불)가능성 문제

  : 이 절에서 제시된 논제에 대하여는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명확한 구체적 대상과 원인-근거가 없는) 혐오와 ((그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써?) 명확한 구체적 대상과 원인-근거가 있는) 분노의 차이를 강조하려는 답변 시도가 있는 것 같은데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해 추가 설명을 제공한다. 

이런 류 답변의 핵심적 문제는 크게 3가지인데,

첫째, 본절 논제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혐오( 반대)와 분노( 반대)의 구별 (불)가능성이라기 보단 절대적 평화주의-인도주의 노선과 분노의 열정적 행동주의 노선 간의 정교한 양립 (불)가능성이다.

둘째, 감정(/) 폭력의 중층성 및 (분리불가능한) 유착-착종성 문제는 해결하지 못 한다.

인지, 감정, 물리, 구조 등 완전히 층위가 다른 이종 폭력 간 분리도 개념 상으로만 가능할 뿐인데 하물며 동일한 감정 폭력의 층위 내에서 유사한 감정들을 실제 대중들의 생활 세계에서 분리해 낸다는 것은 오직 관념적 사변일 뿐 "그들"은 커녕 자기 자신도 결코 그렇게 통제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셋째, 현 상황의 양측이 (이미) 정의된 혐오와 분노라는 술어로 정확히/정밀 기술될 수 있는가라는 시작점의 문제도 여전히 남는다.

이 문제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일단 다 양보하고 혐오, 분노 개념 적용을 인정하고 시작한다 하더라도 범주-진영별 2분법적 과잉 일반화-단순화의 문제가 발생해서 모든 남성의 행위는 다 혐오이고, 메갤 등을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행위는 다 정당한 분노인가를 반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성중]

 

Frantz Fanon의 폭력론과 post-colonialism의 비폭력론의 의미



1.S. ☞ S.S. 참조



2.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 성찰 계기로서의 부정과 비판을 원천 불허하는 Narkisism적 자기 숭배로의 귀결 문제


2.1.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과 지적을 좌절한 열패남, 찌질이 무능력남들의 엉뚱한 화풀이 아니면 세련/은폐된 교묘한 혐오로 처리해 버리는 (망상적) 방어 기제와 무조건적 자기 옹호

☞ $3.2.2. 소위 ’김치녀’의 어원을 참조할 것.


(자기) 혐오를 통한 (자기) 성찰 경로와 가능성의 차단, 봉쇄를 통한 고립과 퇴행


예를 들어, ("[여성(주의)은] 까도 내가 까!!"를 외치며 살아 온 결과,) [그 의도와 속내를 알 수 없(고, 더 나이 들어도 계속 붙어 있을지조차 의심되)는, ’간신’ 계보의 ㅡ인용자]  "(극)소수 무비판적 yes-man들을 제외한 대다수 남성들을 anti-feminist로 만들어 아예 담을 쌓거나 등을 돌리거나 떠나게 만들었다"는 feminist의 고백 : 여왕님과 간신배

 


2.2. 무한 이기주의 Narkisist들의 전쟁터



2.3. 가모장(적 여성)주의 fascism의 맹아와 개연성

원거리에서 침묵으로 권위를 형성하고 주체 내면의 죄의식을 통해 간접 지배하던 부성적 초자아와 달리 초근접하여 잔소리를 퍼부어 대며 micro-control을 하는 가장 잔인한 지배자로서의 모성적 초자아

Margaret Thatcher로 대표되는 그 모든 혹독한 Tiger-mom들의 계보




3.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 하나이다"


  :  그토록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의 주인은 과연 자기 자신일까?



3.0. 

인식과 판단의 근원적 불완전성, 오류-항상성과 그에 의한 판단 및 실행 (영구) 중지 요청으로의 귀결 문제 B

특히, 자기 안의( / )내부 타자들 :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와 무의식, (자기) 기만성( ; 종특적 허언증), 항상적 동요와 변심, 자기 회의, 자기 혐오 문제들




(절대 진리의 붕괴와 도달-불가능성, 그리고 언제나 모호한 진실들


유일한 진리(/)기준으로서의 자기 자신

무한 이기주의 Narkisist들의 전쟁터

자기 안의 타자들, 공백과 결여들 : 자기 진리의 부재와 허구성

Postmodern 시대 확고한 자기 진리로 상정되는 주체의 욕망에 대한 회의와 비판)


3.1.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류의 일본판 post-colonialism(만)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대타자의 욕망을 열망하는 주체’의 식민성, 또는 식민 주체의 (일반성) 문제


특히 ’(major )minority로서의 식민지/식민집단’ 내 ’minor minority( 분파)로서의 자발적 친일파, 부역자와 백인 닮기를 열정적으로 실천하는 유색인종들, Transgender 등’(의) FLUNKYISM(에 대한 집단 내 혐오) 문제.

더구나 이 분파가 여성일 때 혐오 문제의 복잡성

예를 들어 피부미백과 획일화된 서구지향적 화장술, 성형술에 목숨[!!!!!] 거는 여성들.

그리고 Michael Jackson case가 보여주듯 만약 이런 행위가 의식있는 타 인종 내에서, 더구나 남성에 의해 실행되었을 때의 혐오 비교.



3.2. 그리고 그들의 (자기) 기만성 문제와 해결의 최소-출발점으로서 Fanon적 솔직성의 고통, Parrhesia

  : 식민 주체(로서)의 (매판/기생적) 노예 근성에 대한 완전한 몰지(각)와 부인, (자기) 기만


3.2.1.

여담이지만 가장 실망스러운 건 청중들인데, 소위 얼치기 ’꼴페미’를 대표 전형하는 듯한 한 여성은 애초에 질문을 이해 못 한 건 물론이거니와 질문 당시에는 실재계의 폭력과 (절대) 평화주의/인도주의로의 귀결 등 혐오반대 전략틀의 난점이 주촛점이었고 여성 성형이나 여성(주의) 비판은 거의 주제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끝까지 매우 공손하고 호의적으로 기계와 의료기술에 의한 신체변형을 반대하는 게 전혀 아니라고 재차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Michael Jackson은 백반증일 뿐이고 여성들이 성형수술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취업때문이라며 심지어 뭘 좀 알고나 지껄이라는 둥 자기 말 끊지 말[고 닥치고 듣기나 하]라는 둥 공론장에서 (더구나 여성에게 행해졌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폭언을 쏟아 내며 역겹게 광분하시던데,  미국 연예인의 사생활엔 관심도 없지만 그 알량한 media의 노예같은 인식에 한가지만 묻고 싶다.

그럼 Michael Jackson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오똑한 콧대와 송곳처럼 뾰족하게 치켜 올라간 코끝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백반증과는 상관 없는 여성들의 경우, 전에는 [대부분의 feminist 여성들도] 남( 특히 男)에게 보이려는 게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해서일 뿐이라거나 눈썹([<눈섶])이 자꾸 눈을 찔러서라는 게 단골 변명이더니 요즘엔 취업을 위해서라고 바뀌는 추세이던데, 그러나 취업에 성공한 이후에 월급 모아 성형하러 달려 가는 여성들과 취업 의사가 조금도 없는 중상층 중장년 여성들의 성형 행렬, 초등 고학년생들로까지 확산된 세계 최상위 빈도의, 그리고 가장 짙은 화장 등 얄팍한 변형술의 만연과 당연화는 또 뭐라 설명할 것인가?

더구나 본인이 지적하고자 했던 바는 성형 자체가 전혀 아니라 변형이 실천될 때나 심지어 고려, 상상될 때의 지향 ㅡ 쌍거풀과 안검 지방 제거, 높은 콧날과 하얀 피부로 표상되는 그 미적 가치와 기준의 획일성이 가지는 의미이다.

(자기 만족론자들 또한) 순수하게 자기 만족을 위한 미의 추구라면 각자의 개성들이 만발하는 기기묘묘하고 기상천외한 다양성의 꽃밭이 되어야지 왜 구별조차 힘든 비슷비슷한 외모로 획일화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반드시 설명해야만 한다.


(이하 근거 문헌 :

"[Michael Jackson] went through various image changes. Starting in the mid-1980s it became clear that Jackson's appearance was changing dramatically. The shape of his face, particularly his nose, triggered widespread speculation of extensive cosmetic surgery. His skin tone also changed, becoming much lighter. Although Jackson was diagnosed with the skin disorder vitiligo, it was also widely speculated that the change was due to skin bleaching. 

.......Jackson's skin was a medium-brown color throughout his youth, but, starting in the mid 1980s, his skin gradually grew more pale through what was widely considered to be skin bleaching and changing of his features to appear European. According to Jackson biographer J. Randy Taraborrelli, Jackson began making his nose smaller around the same time his skin became very gradually lighter and that he was using the over-the-counter skin-bleaching cream called Porcelana to achieve the lighter skin. Taraborrelli reported that Jackson's sister La Toya used Porcelana too, and that they had crates of this cream stored at their family home Hayvenhurst, "hoarding it as the most valuable beauty product ever produced."Jackson's physical changes gained widespread media coverage, and provoked criticism from the public. African American psychologists argued Jackson was "a lousy role model for black youth". Dr. Dennis Chestnut said Jackson gave "black youth a feeling that they can achieve", but also may encourage some people to think they've got to be esoteric and idiosyncratic to be successful. It was also presumed that Jackson bleached his skin just to boost his career. Dr. Halford Fairchild stated Jackson and other African American celebrities would try "to look more like white people in order to get in films and on television".

According to Taraborrelli, in 1986, Jackson was diagnosed with vitiligo, which Tarraborrelli noted was sometimes considered by doctors to be a consequence of damage done by bleaching chemicals over the years.


.......New York plastic surgeon Dr. Pamela Lipkin, who has never treated Jackson or reviewed his medical records, said, "when you look at the other features, the skin bleaching sort of goes along with what I think was his quest for beauty, so I have to wonder what came first? Vitiligo or lighter skin?" Noting that Jackson had even skin tone when he was younger, Lipkin's interpretation was that "probably he's trying to look Caucasian: His skin is whiter. His nose is getting thinner every six months. His lips are getting thinner. His eyebrows are getting higher. His eyes are getting wider every time. His cheekbones are getting bigger."

When producer Quincy Jones who worked closely with Jackson at the time Jackson's skin transformation began, was asked about Jackson's facial transformation he stated: "It's ridiculous, man! Chemical peels and all of it. And I don't understand it. But he obviously didn't want to be black...You see his kids?"

According to the affidavit of Sergeant Deborah Linden found by Vanity Fair reporter Maureen Orth in the Santa Maria courthouse complex, Jackson told his maid Blanca Francia "that he bleaches his skin because he does not like being black and he feels that blacks are not liked as much as people of other races." Orth was also informed that Jackson referred to blacks using unique names like "spabooks.""


이 자료의 이후 부분들에선 백반증의 촉발 인자[=trigger]로 지목되는 지속적 피부 탈색, 그리고 (코 이외의 눈, 패인 턱[ 일명 턱보조개], 각진 돌출 턱윤곽 등등 서구 사회에서 흔히 백인 남성의 전형적 특징들로 간주되는 부위들의) 성형에 대한 Michael Jackson의 강력한 ’공식적!’ 부인들ㅡ예를 들면, 호의적인 Oprah Winfrey Show에서의 "피부 탈색이요? 제가 아는 한 그런 건 없어요. 전 그런 걸 한 번 본 적도 없고 그게 뭔지도 몰라요."[".....In 1993, Jackson told Oprah Winfrey "there, as I know of, there is no such thing as skin bleaching. I've never seen it, I don't know what it is." It was in this interview that Jackson stated he had a skin disorder(=vitiligo)....."] 라거나, "제 안면 골격이 변한 건 사춘기 [자연적 생체 변화] 때문"이라며 "제 아버지도 원래 이런 턱을 갖고 있었어요." 등등ㅡ이 대부분 거짓이었음이 부검소견서와 형제자매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고 있으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할 것.


¶ "Michael Jackson’s health and appearance" @ http://en.wikipedia.org/wiki/Michael_Jackson%27s_health_and_appearance)


3.2.2.  소위 ’김치녀’의 어원

말 나온 김에 밀련하여 한마디만 더 첨언하면, 많은 공주님들이 분개하시는 ’김치녀’란 개념도 실은 그들의 상상과 달리 무능하고 찌질한 한국 남자들이 만든 게 아니라, 근래 국제 교류와 체류 외국인 급증으로 한국에 오게 된 서양 남성들이 자신의 실제 경험들을 기술해 낸 [민간 민족지적(ethnographical!)] 내부 술어였던 게 귀국 유학생들이나, 어학 수강생 남성들과의 허물없는 교류 과정에서 흘러 나와 확산된 단어로 원래는 훨씬 더 모욕적이고 성(행동)적( 맥락)으로도 매우 비하하는 의미였을 뿐 아니라 한국 내에선 널리 애호되는 ’애교’ 등에 대해서까지도 끝까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나이에 안 맞게 아주 인위적으로 어리고 귀여운 척하며 징징거린다고 very annoying, cheesy, immature 등의 부정적 평가를 connotation으로 담고 있던 게 국제 비교 경험이 거의 없는 일반 ’한국 남성들’에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그나마 완화되고 토착 변용을 거친 결과에 불과하다.

서양인들에겐 가장 인상적인 대표 표지이기에 ’Korean ([adj., n.])’과 완전한 동의어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 정작 한국인들 본인에겐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해서 결코  자기 자신을 추상하는 함축 수사로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고도 환유가 바로 ’kimchi’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대상의 이러한 특성들이 전세계 명품백들을 다 빨아들이는 독보적 최대 소비자이면서도 본사나 본국으로부터 전혀 존중받지 못 하는 동북아 3국 여성들의 천박한 과시적, 경쟁적 소비주의의 토대( 중 일부)임을 계시해 주는 (전도된) 합리성 기표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하 통계 자료 :

’세계 명품 시장의 국가별 점유율’에 관하여 국내에 출현한 거의 최초의 통계 수치는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2012), “명품 브랜드의 성공요인과 시사점”에서 인용 소개된 세계명품협회 (2011), “2010~2011 World Luxury Association Annual Report”의 자료였다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2010년 당시만 해도 세계 명품 시장의 국가별 점유율은 일본이 34%로 1위, 중국 25%로 2위의 순이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보고서에서도 초반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지만, 자료명들의 비교에서도 그 차이를 알 수 있듯, 일단 세계적 표준어[ ;국제 통용어] category는 ’명품’이 아니라 ’사치품’이다.

그런데 이후 세계 명품 소비 시장에서 한국, 중국이 대약진을 계속하며 (특히 명품백에 대하여는) 2013년 통계로 이미 한, 중, 일이 각각 전세계 명품백의 30%씩을 구매하고 있었는데 이후 세계 경제에서 Europe의 몰락과 중국의 독주, Abenomics의 성공과 한국의 상대적 선전으로 한국에서만 지난 3년간 약 3배 규모의 매출 성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므로 현재 시점에서 구매 비율로는 각각 거의 35~32% 내외의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점들은 먼저 인구 규모를 동시에 고려하면, 공식 통계만으로도 최소 13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은 차치하고라도 1억 3천만 명의 일본을 기껏해야 5천만 인구밖에 안되는 남한이 적어도 2015년 통계로 이미 추월했다는 것.

둘째, McKinsey&Company (2011)의 보고에 의하면 2010년 국내시장에서 명품 판매량의 약 91%가 여성용이고 남성용은 9% 정도라는 사실. 

셋째, Date 비용 지불 pattern과도 연관해 독일, Netherlands 등과 함께 남녀간 철저한 50% 분담률을 엄수하는 일본과 달리 한국 여성들은 그 세계 명품백 32~33% 수량의 구매 비용 실부담자가 상당 부분 남친과 남편들이라는 것 등이다.

)


『데이트의 탄생』에 대한 오해들

국가 유형들이 결정하는 Dating pattern

『데이트의 탄생』 독해에서의 parachronism

[추가작성중]



3.3. 현대 식민주의론

   이상에서 ’식민(성)’ 개념은 (상품을 통한 임노동 ’착취’를 본질적 기반으로 하는 순수 자유(시장) 경제의 예외(상태)로서 정치군사-문화를 동원한,) 자본주의 태생/발생(기)부터의 시초 축적 등 상품화 과정 자체 및 초과 이윤 추출의 전과정, 가사-육아로 대표되는 전통적 여성 노동 등 모든 그림자 노동, (완전) 부불 노동, 무급 노동의/과 각종 내부 식민지까지를 포괄하는 (특히 비상품(경제)적) ’수탈’(과 그를 위한 (그래서 결국) 폭력 및 차별) 관계의 총체.

(거칠게 도식화하면 노동 ’수탈’을 주목적으로 하는 정치군사적 폭력과 문화적 차별( 및 기만) 관계.)

근대체제/체계의 정상상태로 가정되는 의식영역이 소위 ’근대성’으로 지칭돼 온 (표현적) 보편성과 평등성 간 자유계약과 동의에 기반한 ’착취’ 양식이라면,

(노골적) 차별과 폭력에 의한 억압과 은폐가 정당화/당연시 돼 온 예외상태로서의 무의식영역이 ’식민성’으로 그 본질은 ’수탈’ 양식이며 지배-복종 관계를 구현하는 이러한 두 차원은 탈식민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동전의 양면이라기 보다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처럼 빙산 pyramid의 상-하부로 협소한 중심 상부를 꽃피우고 유지하기 위해 이를 떠받치며 수면 아래 은폐된 채 희생하고 있는 내외(부)의 거대한 주변 하부.

특기할 점은 독점자본주의는 저하된 이윤율을 회복하고 초과이윤을 추출하기 위해

 a) ’액체화된 토지로서의 금융’화를 통한 (중세(적)) 지대 경제로의 회귀,

 b) 탈산업화와 외주화[=Outsourcing, 특히 Crowdsourcing] 등등을 통한 내부 재식민화

를 적극 추진하는 강력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독점자본이야말로 다름아닌 탈근대[사실은 후기근대!]의 monarch이고, 동시대 인구 대부분을 植民-臣民화하면서 연명하기 때문에 독점자본 초과이윤과 식민지 초과이윤은 결국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폭력과 차별 등의 경제 외적/비경제적 (강제) 요소들을 동원하는 작동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며 식민성은 또다시 탈근대의 시대적 핵심 문제로 부상한다. (굳이 정밀한 차이점을 찾는다면 다만 그 강도차, 그리고 외부식민지에서의 노골적 폭력과 차별에 비해 내부식민지에서 ’기만’에 좀 더 의존한다는 점 뿐이다.)


이때 금융화된 독점자본주의, 즉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인구의 대부분은 부채와 임차를 기반으로 모든 생활과 자영업을 포함한 각종 사업등등의 경제활동을 꾸려 나갈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채무자들은 본질적으로 현대의 ’소작농’들에 다름 아니다. 건물주와 그 임차 자영업자들은 가장 직접적인 ’지주 대 소작농’ 관계의 직계 재현자로서 갖은 고생해가며 피땀 흘려 불모지에서 일궈놓은 옥토를 지주의 간단한 변심으로 한순간에 잃고 쫓겨 나던 소작농들의 비애가 홍대 주변 등에서 ’gentrification’이란 개념으로 정확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임차인들 뿐 아니라 액체화되고 추상화된 토지로서의 금융자본에 포획된 모든 채무인들 또한 ’확장된 소작농’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동시대의 지배적 인구 형태인 ’채무자’들을 현대/후기근대의 보편적 예속 주체로 보고 "만국의 채무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는 새로운 기획-노선은 (사민주의를 포함한) 소위 정통 좌파 또는 구좌파 성원들 대다수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기획은 필연적으로 소작쟁의, 극적으로 성공해서 대규모로 폭발해도 결국 농민전쟁 형태로 밖에 귀결하지 못 할 가능성이 너무나 크며 이것이 소위 ’다중[=Multitude]’의 ’경제적’ 실체이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새롭고 혁신적인 현대적 전략 체계 발명과 그리고 근본적으로 노동계급 재급진화 등과 반드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경제적 ’식민(성)’관계는 보다 일반적으로는 사회문화적, 정신심리학적으로 대타자와 주체 간, 궁극적으로는 모든 주인-노예 간( 관계)에 발생, 성립하는 ’종속성’이 된다.

따라서, 19~20세기 초 구-제국주의기 nation-state 간 관계라는 전통적 역사 술어로 협소한 고전적 이해에만 고착된 채 식민성의 문제를 



이러한 식민 주체들의 매판-기생적 노예 근성과 선망[=envy]이 또한 언제나 여성들이 (잠재적) 최종 결정권을 가진 압도적 (다수) 소비주체였던 TV, 영화 등 주류 Media 시장들에서조차 남성주의 문화상품들만이 넘쳐남으로써, 여성주의자들의 음모론적 문화(/)비평이론이 주장하듯 마치 시장내 악의적/악마적 소수 남성주의 ideologue들과 문화생산자들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며 대다수 여성 문화소비자/소비지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그들의 심리까지 교묘하게 계획/의도적으로 조작하여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진정한 숨은 원인이다.



3.S. 

3.S.1. 문제의 순환 회로 1

         : 정체성 혼란→망상→혐오의 순환 회로


        (신체변형등)        Narki적      순(전무)결의

          재정체화    →    과대망상 → 피해망상과 코스프레

                ↑                                          ↓

          자기혐오    ←    세계혐오←(가해)타자혐오

                                                ▲우에노 치즈코


3.S.2. 문제의 순환 회로 2


절대 진리의 붕괴와 도달-불가능성, 그리고 언제나 모호한 진실들

유일한 진리(/)기준으로서의 자기 자신

무한 이기주의 Narkissist들의 전쟁터


그러나 자기 안의 타자들, 공백과 결여들 : 자기 진리의 부재와 허구성


다시, 토대로서의 외부 공통 기준 ; Game의 규칙과 공생, 협력

탈-post를 향하여!!



(잠정 방법적 일제언 : 

혐오에 대해 피해 망상적 hysteria로 과민 반응하거나 정반대로 (원인까지)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 직접적 자기 이익보다 성찰과 공적 목표 및 문제(로서의 共敵과 主敵)에 집중하기.

(☞행간 읽기에 익숙치 않은 일부 독자를 위한 명시적 요약은 본고 최하단 ’$X.X.’절을 참고할 것.)


그런데 문제는 여성(주의)의 주류가 자기 방어와 여성 권력을 위한 통합 기반으로서의 무조건적 자기 옹호, 그리고 남성공격과 성대결 외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S.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가?


S.1. Gender 체계 근본 가설과 성 범주-진영적 2분 사고 및 성대결 관점 반대


S.1.1. 가장 강력한 일원인은 feminism 진영의 근본 가설인 Gender 체계/체제 frame이 결코 근원적이지 못 하고 지극히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양하게 제기되는 개별 사안들의 고유한 발생과 작동 원리 및 구조 해명을 위한 성실하고 수고로운 작업 대신 간편하지만 무리한 환원 작업의 반복을 통해 언제나 성대결로 끌고 가는 경향이 있다.

이 ’무리’는 그 가설의 현상성으로 인해 기원하고 증폭된다.



S.1.2. 성차라는 기호학적 표지? Gender Trouble is trouble!!

성차 강조 전략 대 성차 무시/무화 전략 간 충돌 문제

gender 체계가 근본임을 강조하는 feminism 전략 대 gender 체계가 허구임을 폭로하는 feminism 전략


성차의 악용과 오용

가장 원시적인 파충류 뇌 [=R complex]에 직접적으로 소구하는 가장 악질적 인지 편향


그러나 ((성차 무화/해체) 전략 bloc 내) Post주의의 고질적 언어-문화(중심)주의(적) 관념성 문제

Derrida의 오른쪽, 또는 그 이상 : 그들 자신의 믿음이나 소망과 달리 기호체계로’서’ 세상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경향은 Post주의 (전통) 내 우파를 형성할 뿐이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汚名과 포스트자유주의

이에 기반한 성차 무시/해체 전략이란 결국 지겨운 자유주의의 표현적 보편성, 평등성의 반복에 불과

딸각발이 골수 인문주의자들의 의-과학적 무지, 또는 위장한 남성들


만약 세계 내의 모든 것이 언어와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반드시 그 언어와  문화는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 때 만약 그 무엇이 ’gender 체계’처럼 생각된다면, 당신은 더러운 이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도 못 되는, 그냥 Levi-Strauss를 뒤늦게 따라 하고 있는 낡은 원형-구조주의자일 뿐이고 그것도 아주 열등한 epigonen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낡은 원형-구조주의의 질 나쁜 여성주의 판본의 논리에 따르면 gender는 언어와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고 그 언어와 문화는 다시 gender가 만들어내고 있다는 순환 논법이 되기 때문이다.


Deleuze & Guattari 계보의 유물론적 univocity theory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epigonen으로서의 관념론적 univocity theory는 차라리 현명한 2원론보다도 열등한 인식론적 퇴행이 될 수 있음.

다만 특정 이론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진리치와 문화적 자유도 및 급진성/화 효과는 (특히 잠정/한시적으로는 더욱더) 별개일 수 있음.

(그러나 이 경우 문화적 급진성이 곧 정치적 급진성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대개 (특히 성적) Libertarianism (쯤)으로 귀착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역사가 수없이 증명하듯이 이러한 관념적 (주의주의) 급진성이 반드시 실재적, 궁극적 승리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아니며, gender 수행성 실천에 있어서도 그 필수불가결한 핵심 행위가 hormone 주사 투여 등 의-과학기술적 의존이 되어버리는 comic irony로 귀결될 소지가 큼.)

.........

[작성중]



S.2.=2.S. 무비판적 옹호 대 비판적 옹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는, 권력 관계의 현실적 gender 불평등성과 일상화된 (물리적, 구조적) 폭력 피해의 압도적 비대칭 및 비등가성을 전적으로 승인하면서, 발생하는 모든 심각하거나 응급한 성대결 국면과 구조적 진지전에 있어서 여성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한편 인문주의적 주류 feminism(과 그에 포획된 무비판적 지지자들)의 무지가 완전히 탈각하고 있는 가부장제와 가부장주의, 그 대립물로서의 여성주의의 흥망성쇠를 배후 기저에서 결정하는 또 하나의 물적 토대가 있는데, 세계의 각 지역별 사회에서 해당 단계별로 초기 경공업 자본주의기 사회경제 활동에 여성 노동력의 동원 및 그를 위한 여성 교육으로 발화하기 시작하는 여성 운동을, 이후 근력 위주의 (중화학공업 및 건설산업 중심) 발전/개발(도상)기 산업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절정에 달하는 (완화된, 핵가족 기반) 근대 가부장제가 다시 억압함으로써 잠시의 잠복기가 있게 되나 결국 다음 단계에서 탈산업적 후기자본주의의 변성 및 경제 위기와 그에 맞물린 여성(주의)의 대약진 등이 복합되어 가부장제는 (특히는 세대교체 과정을 통해) 급격히 와해 또는 최소한 결정적으로 완화되고 있다는 이러한 현실의 변화 운동 또한 절대로 경시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가부장주의를 포함한 모든 남성중심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하지만 그 궁극적 대안이 곧 (숙명적 거울 관계의 (모순과 문제를 몰고 올)) 여성주의라 생각지 않고, 여성(주의)에 대한 모든 비판과 지적은 즉 여성 혐오나 폭력이므로 원천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덧붙여 물리적, 구조적 폭력 피해의 비대칭성 때문에 여성(주의)의 그 모든 죄가 사하여지 듯 모든 잘못과 오류, 한계가 정당화되고 그에 대한 어떠한 발언과 지적도 자제되어야 한다는 식의 경향신문 등 일부 견해를 포함, 심지어 신자유주의 상품화/시장화를 선도할 총알받이 돌격대를 자청하고 나선 갈색 feminism까지 오히려 반색하며 적극 환영하는 자유주의자 등 소위 ’진보진영’ 내에 만연한 (무조건적 무비판적 여성(주의) 옹호가 곧 ’신사적’ ’진보’의 표지라는) 얄팍한 온정주의적 위선과 강박은 그 자체로도 논리적 상호 연관을 결여한 오류이지만 운동사에서 각 시대마다 ’경제주의’, ’조합주의’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끊임없이 지목되어 온 지겹도록 뿌리 깊은 즉물-즉자적 (대중) 이기주의에 다시 빠진 여성(주의) 주체들의 대주체로의 승화와 결합 발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 외 여러 이유로도 재고돼야 할 소지가 있어 보이며, 더구나 이러한 (피해의) 비대칭이 개별적 현실의 인지 갈등과, 혐오 등 감정 갈등 상황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남혐’ 불가능론 비판 : 남성주체의 보편성 현실, 혐오와 분노의 차이 등을 강조하면서 ’여혐’은 가능한데 ’남혐’은 불가능한 사회이기에 불평등하다는 식의 일부 주장은, 상기 초두의 "$1.1.2. 정체성 혼란" part에서도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애초에 순수 추상적 남성과 여성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이상과 같은 가부장제 와해와 gender 관계 변화에 의해서도 여러 형태의 지독한 ’남혐’ 행위들이 실제로 얼마든지 있어 왔다는 몇가지  예를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증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남혐불가능론’이 완전한 상상과 허구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 암수 관계에서는 물론 인류학적 원시 단계로부터 mirroring이라는 미명하의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래의 그 모든 남혐 행위들이 대부분 불쌍한 하층 계급 남성들, 특히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신체적 complex들을 target으로 하고 있는 비열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단신남들에 대하여는 오래 전부터 한국사회 중추신경 중에서도 핵심 중추 각성 (의)식역에 해당하는 prime time 지상파 TV에서 "키 180cm 이하 남성들은 loser"라는 테러적 공언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후 어좁남 등을 거쳐 현재의 혐오에 대한 혐오라는, 진정한 여성 억압 및 차별과 비하, 혐오 가해자가 혐오의 혐오 피해자[=target]와 일치한다는 어떠한 보장조차 전혀 없는 또 하나의 가해 행위에 불과한 한심한 대응 하에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남혐 행위들 뿐 아니라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등의 혐오의 혐오 이론들까지 찌질남, 비인기남, 결혼 못 하는 남자 등등.....지목하고 있는 모든 남혐 대상들은 다 우리가 끝까지 보호하고 해방시켜야 할 바로 그 하층계급 성원들이다. 쉽게 말해 그동안 뚱녀들을 비웃어 온 것이 정말 단신남, 어좁남, 찌질남, 실**남들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이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땀에 찌든 노동에 대한 혐오와 공포, 하층/노동 계급 남성을 멸시하며 따돌리고 ’최소한’ 중간 계급 이상 남성을 일방적으로 이상화하고 선망하는 여성들의 역겨운 노예 근성과 무의식이 똬리를 튼 채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 한심한 사고방식은 비단 남혐site들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무뇌아적 여성대중들 뿐 아니라, 이무리 초고학력의 feminist라 할지라도 거의 예외없이 동일한 pattern으로 발견되는데, 예를 들어 下記 ’$X.2.’절의 대상 text나, 또는 본서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중 여성혐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시도’ 등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특히 이(런) 불완전한 정신분석의 치명적 결함은 완전히 동일한 구조(/)pattern으로 대타자-주인-지배계급 남성 강자를 상징하는 ’아버지’에 대하여 (예속)주체-노예-피지배 하층계급 남성 약자를 형상하는 아들

여성혐오는 거의 언제나 여성숭배와 동시에 존재해 왔으며 모계사회등에선 그 존재여부도 미미하나, 그에 비해 이 열등남 혐오와 하층계급남성 혐오는 항상적이며 일관되게 거의 자연사 전체를 관통할 정도로 유래가 깊고 장구한 것이기도 하다.

)



따라서 오히려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여성(주의)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건강한 비판적 공론’장과 회로’, 소통 ’공간과 channel’을 보장하고 건설해 나가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적대와 분리가 아닌 협력과 단결 지향을 절대적 전제로 한 우애적 비판 수준과 담화 방식은 적극적으로 (동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인지갈등과 감정갈등의 분리를 구현하는 실질적 방법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S.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지적과 비판이 적대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세심한 구분과 각성(의 필요성)을 필수적으로 요청/전제하면서, 장차 발생할 모든 심각하거나 응급한 성대결 국면과 구조적 진지전에 있어서, 권력 관계의 현실적 불평등성과 일상화된 (물리적, 구조적) 폭력 피해의 압도적 비대칭 및 비등가성을 전적으로 승인하며 여성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적극적 동참을 진심을 다해!!! 강력하게!!!! 재차 다짐하는 바이다.



S.S. 

마지막으로 이 모든 질문들의 핵심 취지는 의도적, 비약적 폭력들 전체에 맞선 철저한 반대 및 금지 조치와, 비의도적 인지 오류로서의 인지 폭력부터 맞서 시작하는 치료적 인도주의~(post)구조주의 인지 전쟁에의 집중 필요성을 전제로, 예상되는 몇가지 난점들에 대한 점검과 그에 따른 여타 (대안적) 전략들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여지는 없는지 검토해 보기 위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명확히 강조하고자 한다.

이상의 전제된 동의와 달리 혐오 반대와 금지를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그다지 (큰) 효과가 없을 것으로 보이나 인지 전쟁에 대한 집중은 우리가 극도로 열심히 임한다면 남녀 대중의 폭발할 분노와 혐오에 그 올바른 대상을 찾아 줌으로써 쉽게 보이지 않고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주적에로 방향을 전환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X. 반응 평가

최근 본고에 대한 사회적 반응들 중 가장 유의미한 답변의 하나는 역시 존경하는 《문화/과학》지 최근호(no. 83), 특히 "페미니즘 2.0"이라는 제하의 특집기사로부터 나왔는데 그 주신 가르침들에 대하여는 앞으로 진심을 다해 심사숙고해 나갈 것을 약속드리나 이중 몇가지는 본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료되어, 그에 대한 짧은 해명을 여기에 첨부키로 한다.



X.1. 우선 무엇보다 feminism의 정치경제학 ’비판’ 관점의 잠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Marx주의 정치경제학 비판 체계와의 통합발전을 시도하는 정정훈 선생님의「페미니즘 이후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다시 생각한다―맑스주의 정치경제학비판의 전화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페미니스트 자본주의 분석을 읽기」는 작성자의 근본 입장과 전혀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상당 부분 일치하기에 본고가 feminism 전체와 Marxism을 완전히 대립시키(면서 후자만을 배타적으로 옹호하)고 있다는 식의 오해는 이를 계기로 다른 분들도 일소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이 통합 체계의 구축은 적록보라 강령 실현을 위한 이론적 핵심 과업이기에 또한 작성자의 제1순위 작업 과제의 하나이며 이에 대한 요지는 약술된 상기 3.3절에서 단초를 확인할 수 있음.



X.2. 그런데 대만정치대학교 류진희 교수님의 '무기 없는 민족'의 여성이라는 거울: 해방 전후 탈/식민 남성성과 여성혐오를 단서로 하여」는 첫째 ’식민성’ 개념 사고에 있어 역사상 특정 시기에 국한된 nation( - )state 간 특수한 국제 관계라는 고전적 외부식민지 개념에 고착됨으로써  post-colonialism과 de-colonialism 등 현대 (탈)식민주의의 귀환과 그 의미, 중요성을 별로 깊이 이해하고 있는듯 보이지 않고, 둘째 그 필연적 결과로 더 중요하게는 보편근대성에 대한 절대적 확신에 근거해 모든 반/비근대적 저항을 역사의 일회적 해프닝 정도로만 간주하고 (식민지) 근대화/서구화를 적극 수용한 주체에만 정당성과 면죄부를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진영과 정치적 차별성의 실질을 구할 수 없으며, 셋째 ’근대성’ 개념 이해에 있어서도 서구중심성과 세밀히 구분하지 못 함으로써 결국 근대화=서구화로 완전히 등치시키고 있어 결과적으로 적극적 서구화 (수용) 세력만이 가장 정당한 역사적 주체로 상정되어 버리고 있는 듯 보임. 넷째 이 문제는 남성성과 여성혐오라는 하위범주에 국한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위 3절, 특히 ’(major )minority로서의 식민지/식민집단’ 내 ’minor minority( 분파)로서의 자발적 친일파, 부역자와 백인 닮기를 열정적으로 실천하는 유색인종들, Transgender 등’(의) FLUNKYISM(에 대한 집단 내 혐오)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사료됨. 다섯째 얼핏 고상해 보이는 이 주장의 입론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는 그냥 간단히 ’무기 있는 민족’의 지배계급 등 강한 남성들이 이집단, 특히 적대집단이나 ’무기 없는 민족’ 등 하위집단들의 남성과 교제, 추종하는 자기집단 내 여성들, 이를 테면 (특히 흑인노예제 시대에는 더욱더) 흑인남성과 교제하는 백인여성, 중세 조선에서 ’종놈과 놀아난 마님’ 등을 어떻게 대했는지만 잠깐 생각해 봐도 누구나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류의 입론들은 그 본질에 있어서 상기 ’$S.2.절’ 중 ’남혐불가능론 비판’에서 밝힌 남혐site에 모여드는 여성대중들의 즉자적 대응심리인 약자인 하층/노동 계급 남성을 멸시하며 따돌리고 ’최소한’ 중간 계급 이상 남성을 일방적으로 이상화하고 선망하는 여성들의 역겨운 노예 근성과 무의식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작성중]

이상에 대하여도 본고 3.3절의 ’식민성’ 개념 논의를 참고할 것.



X.3. 손희정 편집위원 선생님의 박사학위 논문에서의 Media 시장 결정자 문제와 이후 수정된 《문화/과학》지 83호의「페미니즘 리부트―한국영화를 통해 보는 포스트-페미니즘, 그리고 그 이후」에서 소비주체로서의 여성관객 문제에 대한 비평적 comment도 같은 절( 최하단)을 참고할 것.


무엇보다 선생님의 백미는 입론 자체보다도 그것을 압도하는 영화 text적 예증 능력에 있다고 보여진다는 점을 전제하면서, 다만 Postfeminism에 대하여는 저술 과정 상 절차적 문제가 좀 있지 않나 싶어 보여도 원 논의 그 자체는 숙고의 가치가 너무도 충분하나 결정적으로 feminism과 postfeminism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역사적 이해, 특히 역사적 개념화와 역사이론 (model) 구성에 실패함으로써 feminism과 특히 postfeminism 계보들을 각각 세대 구분없이 뒤섞어 평면화시키면서 몰역사적으로 대립시키고, 초창기의 anti-feminism적 부정어법에만 매몰/고착됨으로써 너무 협애하게 일면적으로만 파악한 개념 기준으로 다시 feminism과 postfeminism을 뒤섞어 모든 선과 정의는 feminism으로, 악과 불의는 postfeminism으로 재편집하는 등 결국 세대 (간) 구분과 세대 내에서의 이후의 변화 발전까지를 포괄한 종합적 이해와 평가에 이르지 못 한 듯 보이는 아쉬움이 있고, 무엇보다도 절대적 단일 불변의 feminism 관점에만 입각해 역사화 상대화된 통찰없이 feminism 사조의 세대 교체기마다 나타나는 역사적 일반 현상으로서의 기성 세대 feminism 비판을 모두 반feminism으로 받아들이는 피해 의식을 반복하고 있는 측면은 없는지 검토해 보아야 할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틀이 최근까지의 정세정황과 역사를 관통하는 전면적 종합 고려로 확대되어, (본고 후단에 검토된 의미의 (((급진) 좌파 feminism의 주류라 할) 바로 그) 3세대 feminism에 대한 본격 비판과 차세대 feminism의 발명으로 이어진다면, 또 반드시 그래야만, 현재의 여성혐오 문제를 돌파하는 가장 현명한 출구가 될 것이다.

( 그 이유는 다음에 매우 자세히 명시되어 있으므로 참고할 것.

¶  @http://blog.aladin.co.kr/705625157/5914507 )


이에 대한 논의는 본고 최하단 $X.X절에서 최종 결론으로서 상술한다.



X.4. 이하는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에 올리는 답변들인데, 우선 이하에 좀 더 상술할 국제적 관점을 고려할 때 우리의 발명 과제는 "페미니즘 2.0"이 아니라 (제)4세대 페미니즘이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X.5. 그리고 인식론-존재론과 관련해서는 위원회의 우려처럼 ’gender’ 개념을 비판하면서 생물학적 ’sex’ 개념으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전혀 아님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작성자가 Simone de Beauvoir 이래로 여성주의에서 의심(할 수) 없는 정설로 받아들여져 온 소위 ’사회적 구성주의’를 지배하는 언어-문화( 중심)적 구성주의 가설, 그 중에서도 특히 Judith Butler류의 gender univocity를 폐기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던 실험 결과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동들의 혈중 성 hormone 농도 수치와 선호 장난감 유형 간 관계에 관한 것으로 Simone de Beauvoir의 바로 그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이 실험에서 성 hormone의 종류별 농도를 조작하면 총기류와 인형류 같은 선호 장난감의 유형이 변화한다. 여기서 극적으로 보여지는 바와 같이 2(~4, 광의의 외성기 개념을 적용해 세분시 최대 8)종의 성기 구성에서 연역하여 모든 성차나 gender, 그리고 세계를 2(~4)분법으로 설명하려는 보수주의 규범은 분명 전복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차를 부정하고 n개의 수평적 gender 분포로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 또한 못지 않은 허구적 상상에 불과하며 진실은 다음과 같아 보인다. 

인간의 gender(별) 행동의 많은 부분은 성기 (구성) 종류가 아니라 혈중 hormone 종별 농도차에 의해 설명되며 이때 농도 수치는 인구 모집단에서 n개 점의 수평선 분포가 아니라 쌍봉형 정규 분포 곡선을 이루고, 이는 연령 변화 등의 여러 요인에 의해 끊임없이 유동한다. 다만 작성자의 정확한 입장은 이러한 설명 체계와 언어-문화(중심)적 구성주의를 배타적 택일 관계로 보지 않고 매우 긴밀하게 유착하여 간섭하는 과잉결정 관계로 보나 두 원인이 서로 직접 침투적 상호 작용을 하는, 대칭 관계로(서) 고정된 변증법적 과잉결정 model이 아니라 연령별, 생애 주기별로 그리고 역사적 사회-문화 구조별로 끊임없이 구체적 역관계=결정관계가 유동하는 간섭적 과잉 결정 관계이다.

이 ’간섭적 과잉 결정 관계’란, hormone signal system에 의해 정교하게 작동하는 기계 장치로서의 주체의 신체라는 장에서 언어-문화가 지속적으로 내삽적 간섭을 일으키는 교란 신호로 작동한다는 의미이고,

유동하는 역관계=결정관계란 ’상상 임신’ case에서처럼, 극단적인 경우 때때로 언어-문화 등 신경-정신적 요소에 의해 내분비계가 완전히 압도, 장악되는 관계까지를 포함한다. 

이러한 설명 체계만이 그동안 gender univocity theory 진영을 핵으로 하는 여성주의( 분파)가 눈 감아온 또 하나의 핵심적 모순인 중년기 이후 남성성과 여성성의 역전 또는 중성화 현상까지를 유일하게 온전히 이해시켜 준다. (특히 갱년기 이후 가속되는) 급격한 중년 여성들의 남성화와 중년 남성들의 여성화는 모두 언어-문화적 성규범이나 교육지침이 중년 이후만을 대상으로 혁명적으로 일거에 전변하거나 혹은 이들이 인생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급진화되어 의지적 수행에 의해 남녀 모두 ’동시에’ 도달한 목표가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은 대부분 이것을 ’인간 구실의 상실과 종말’처럼 받아들이면서 ’반동 형성’ 등의 방어 기제 등도 동원하여 가능한한 이에 저항하고 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 한다.


가장 극명한 반례로서의 배설강 외번증 환자 Joe(lla) Holliday case



뿐만 아니라 원형-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계통적으로 연결/매개함으로써 현대 관념론 계보를 부활시키는데 핵심고리 역할을 한 (특히 후기 이전 (/) 언어학적 구조주의) Lacanian 정신분석 중 그 성차화 공식(에 대한 독해(법))에 있어, Butler를 정점으로 하는 ’급진주의 feminism’*( 일파)로서의 queer (feminism) 진영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오류는 ’자신이 무엇인가’와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타인들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의 결정적 차이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 중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는 자아(의/라는 (Narkissism적)) 환상으로서 상상계의 핵심을 구성하기 때문에 여성주의는 이러한 오류를 통해 실재계로의 도약 대신 상상계로의 퇴행을 선택한다.


단, 이러한 내분비계의 biochemical process를 포함한 정신(분석)적 및 사회문화적 성차화 process는 주로 성적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성적 관계성의 지향과 취향은 이에 기반하는 한편 그 외에도 (특히 성적) 경험 요소, 특히 모험과 탐구/탐색 활동 등에 의해 좀 더 복잡하게 교란됨으로써 정체성 형성(에서) 보다 (훨씬) 더 많은 상대적 자율성 하에 놓이게 되며 이러한 복합교란은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여성의 hormone 구성이 좀 더 복잡하고 후천적 정신-문화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 : 여기서 ’급진주의 feminism’은 주로 현대 France 급진주의 철학을 주요 이념적 기반으로 하는 여성주의를 중심으로 그 세력장/영향권 주변의 연관 운동과 사조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3세대 feminism 좌파 (bloc) 정도에 해당하며, 엄밀히는 2세대 feminism 좌파인 미국 기반의 영어권 ’급진적 feminism[=radical feminism]’과는 구별된다. 
애초에 한국 여성주의는 진영 간의 이론적 불명확성과 미분화 및 (특히 시간적) 혼종성 등으로 분석에 결정적 애로가 있고, 동일한 이유로 한국 여성주의 현실에선 솔직히 별 차이점도 그리 크지 않을 뿐 아니라 뒤섞여 있는 경우도 흔하지만 그래도 원래는 postmodern feminism과 post구조주의 feminism 등을 포괄하여 post(-)feminism 등의 명명도 시도될 수 있었겠으나 이 용어야말로 역사적으로 거의 주류 feminism의 세대 교체가 있을 때마다 애용되어 이미 1920년대 전후 이래로 여러 맥락과 세력에 의해 다양하게 채색되어 왔기에, 《문화/과학》지 손희정에서와 같이 본고에서 지칭하는 대상과 관련없는 과거 부정어법으로도 많이 사용되므로 오해의 소지가 너무나 많은 반면, ’급진주의 feminism’은 무엇보다도 이 진영의 가장 두드러진 이념적 지향과 태도, 정서 상 특징 중 하나가 근본적 해체로 표현되는 급진성( 추구)이기에, 더 적절한 (한국) 사회적 명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맥락과 국면에 따라 이 용어를 당분간 계속 사용키로 한다.
)


X.S. 최종 결론과 남겨진 문제
근래의 여성혐오 현상/국면 해석과 대응에 있어 핵심 문제는 이것을 단순히 여성(주의)의 약진에 위협을 느낀 한국 찌질남들의 극우적 반동으로 볼 것인가, 여성주의 세대교체의 신호이자 요청으로 볼 것인가이다.

(선량한 (유대인) 이웃에 대한 끊임없는 음모론적 혐오라는 비유적 예시도 지극히 타당한 고견임은 분명하나, 이 국면에서 여성주의 비판은 단순히 혐오 문제 해결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여성(주의) 주체들의 대주체로의 승화와 결합발전, 그를 위한 여성주의 세대교체에 요구되는 비판과 성찰의 필요성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frame이란 점에서, 그리고 미래 예측 방식에서 다소 극단적인/대담한 비관이란 점에서도 수용엔 무리가 없다 할 수 없지 않나 싶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매우 유용하게 준거할 만한 반복되는 역사적 pattern을 추상해 낼 수 있는데, 그 양상은 시간축을 따라 여성주의 내부의 세대교체가 진행되면서 그것을 관통하는 직교축으로 분리주의를 포함하는 여성중심주의적 경향[=n세대 feminism]과 협력주의적 경향[=n세대 postfeminism]의 주도권이 교차반복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pattern은 2차원 평면의 역사공간 상 파동형(, 확장된 관점에서는 3차원 공간에서 시간축을 따라 회전하는 나선형(의 정사영)) 순환 gragh처럼 형성되는데 각 세대의 파동이 발달하여 절정에 도달하면 논리와 운동이 극단화하여 여성중심주의 경향의 이기주의가 강화되면서 그 세대/사조는 점차 문제에 봉착하고 모순이 심화되어 그에 대한 사회적 저항과 반발에 부딪히며 위기에 빠짐으로써 파동이 쇠퇴하게 된다. 이때 이러한 사회적 저항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끌어 안으면서 기성 세대 feminism의 문제와 오류를 본격적으로 비판, 해결하며 등장하는 새로운 파동이 발생하는데 이들의 비판성 때문에 초기에는 자칭/타칭 post(-)feminism으로도 불리고, 또 자신의 feminism만을 불변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일괴암적 feminism으로 상상하는 기성 세대 feminism의 기득권 세력에 의해 anti(-)feminism으로 오해도 되지만 이내 차세대 feminism으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이 파동에서 n세대 post(-)feminism의 핵심(정신)은 n+1세대 feminism과 거의 유사하거나 계승된다.
그런데 이러한 파동 연속에서 (특히 교체기에) 그 기(축)선이 여성중심주의-분리주의 경향 대 협력주의 경향의 대립으로/처럼 현상하는 이유는 기성세대 feminism의 모든 문제와 모순들이 심화되면서 그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거세질 때 기성세대 feminism이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간편한 방어기제가 바로 도피적 분리주의(의 강화)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오히려 더욱 가속된 모순이 집중적으로 표출되는 가장 표면/표층적인 쟁점이자 파열구이며 차세대 feminism의 가장 두드러진 초(창)기 차별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통찰을 상기의 경제사적 통찰과 통합시키면, 경공업기에 출현하는 것이 1세대 feminism이고, 중화학 공업기에 출현해 그 (Fordism) 말기에 (본)격화하는 것이 2세대 feminism이며, 신자유주의기에 등장하는 것이 3세대 feminism이 된다. 그러나 이 3세대 feminism은 그 paradigm의 신자유주의와의 본원적 유사, 착종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굴종과 투항으로 귀결되며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함께 도래한 신자유주의 (자폭) 위기와 함께 재급진화한 4세대 feminism model로의 도약 모색을 강제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1세대 feminism은 주로 여성 대중 교육 시대( 개막이)라는 환경에서 구좌파의 지도하에 그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기반으로 각성, 촉발되나 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근력 위주의 대규모 중화학 공업 및 건업 위주의 산업자본주의기에 오히려 근대 가부장제는 절정에 달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탄생해 잠복하다 그 시대말/위기기에 격화하는 2세대 여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조직 노동(자) 계급( ideology)에 대한 실망, 불신과 절교이다. 이에 따라 gender체계 근본주의와 가부장제 주적론으로의 대전향/퇴행이 일어나고 극단주의 분파에선 1세대 여성중심주의를 넘어선 2세대 분리주의로의 격화, 분리주의 분파 내에서도 2세대 초기[ 1970년]의 일시적-전술적 분리에서 이후 (철학적-ideology적 차원으로 고양된) 전생애적 분리주의로의 격화도 진행된다.
이 세대의 (본)격화는 서양에선 60년대에 한국에선 (80년대(말)~)90년대에 나타나는데[ 권인숙 (1991) ; 공지영 (1993)] 그나마 이들은 (탈계급(선상이나마)) 나름대로의 정치( 지향)성을 유지했다면, 그에 반해 서양에서 80년대에( 발생해 90년대 본격화하고), 한국에선 (90년대(말)~) 2000년대에 등장한 3세대 여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여성) 집단(/)동일성 의식의 해체 및 원자적 개인주의 탈정치화와 급진주의 성(애) 문화(적 수행(성))에의 몰입, 그리고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ideology에의 착종적 포섭/교란에 의한 (post)liberal~libertarian(ism)화라 할 수 있다. 체제가 (성적) 존재 및 지향/취향의 다양성과 급진/노골적 성(애) 문화에 겁먹고 이들을 애써 부정하거나 억압/탄압에 앞장서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gender(라는) 근본체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혁명적 급진주의 정치의 선봉에 서 있다는 queer feminism과 갈색 feminism 진영의 자기 착각과는 달리 실은 그들은 추락하는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신상품과 나아가 틈새시장을 비롯,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산업 자체의 개발/발굴(을 위한 내외 (신)신식민지 개척)에 사활을 걸고 있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로서의 post-Fordism과 신자유주의에 총알받이 돌격대로 적당히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공격대상으로 뭉뚱그리고 있는 보수집단은 결코 간단한 단일세력이 아니며, 이러한 가미가제식 자살 돌격을 통해 가까스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이미 스러져가고 있는 봉건잔재로서의 종교 및 유교 세력의 失權( 가속화) 정도일 뿐, 배후의 진정한 지배권력인 신자유주의 자본가계급은 절대 건드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지배집단 내에서 상호 경쟁 관계에 있던 일방을 대신 제거해 줌으로서 그간 이 잔재 세력들의 보수 봉건적( 생명)윤리에 견제 받고 눈치보느라 머뭇거리고 있던 성산업과 (난자, 성/생식기관 등의 각종 장기, 배아, 태아/신생아 등을 포함하는) 생체 (Data[ Foucault가 지적한 인구통계학은 그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식, 변형 및 매매)-의료민영화 산업, 우생학적 유전공학 산업, TRANS-human/post-human(화) 산업 등이 본격화할 공산도 매우 크다. 성산업과 Bio산업을 양대 축으로 하는 노골적 원액 생명/생체 자본주의는 인공지능 및 Robot공학 자본주의 시대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자본가 계급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고이윤(율)의 마지막 인간자원 산업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동성애 제국주의’, ’Queer 제국주의’같은 개념들이 부상하는 숨은 이유이다. 이 최점단 제국주의가 선도/후원하는 새로운 국제 표준으로서의 Queer 문화 ideology와 그에 의해 폭증할 다양한 가족 형태의 가정들은 전지구적 환경파괴 및 저출산 고령화에 의해 가속점증할 불임가정, 상실가정, 사별가정, 비혼 및 독거 가정 등등과 함께 유전공학적 난자, 수정란, 배아, 태아/신생아 산업의 넓은 선도 시장을 창출해 줄 것이고 (전신) 성형과 성전환이나 (단순) 성기변형/이식 수술 등은 TRANS- 및 post- human(화) 산업의 초기 형태를 예비한다.



이러한 급진주의 sexuality( feminism)들)은 이미 근대 태동기 Boccaccio의 『Decameron』에서부터도 끊임없이 이어져 온, 근대에 던져진 발명품으로서의 인간(중심)주의(~개인주의~이기주의)라는 동전의 양면이자 근대의 두 얼굴로서의 ’이성/욕망’-중심주의의 한 측면에 불과하기에 그들의 바람과 달리 전혀 탈근대적이지 않고 그냥 퇴행기에 접어든 후기근대를 지배하는 전형적인 ’억압가설’의 아주 뒤늦은 반복일 뿐이고, 이런 맥락에서 Gayle Rubin의 『일탈[Deviation]』은 이미 매우 낡았으며 Foucault는 아주 일찌감치 이 모든 것들의 너머에 도달한 현대의 예언자였다.


소수자 인권과 평등을 위한 투쟁은 너무나 중요하고 그 당위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다만 다양한 문화정치경제학적 맥락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권력장의 시공간에서 하나의 실천 행동은 다층적인 다중 효과를 산출하게 되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결을 더이상은 미룰 수도 없는 소수자들의 고통에 대한 (잠정적) 일대책은 아마도 극우개신교파 또는 인사에 대한 정밀타격과 민주/자유주의적 기독교 세력으로부터의 분리고립화 전술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여기서 4세대 feminism model 발명 과제와 함께, 한국 여성주의 (분포) 지형 분석을 적록보라 구현을 위한 시급한 운동/연구 과제이자 남겨진 또 하나의 문제로 촉구하면서, 중약 가설로 현재 반발과 저항의 주요 대상으로 한 축이 되고 있는 한국 국가 feminism( 진영)은 (anti-sex적) 가모장주의 fascism 성향의 2세대 feminism 보수연합이, 이와 구별되는 비정부[=Non-Governmental] sector에선 전통적 여성단체들은 2세대( 보수/중도/좌파)와 1세대가, 신생 여성단체, (소장) 학계와 인권 운동단체들은 (pro-sex적) 3세대 좌파 ( 특히 post구조주의) feminism이 주도하고 있다는 주장을 투척해 보면서 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결어 삼아, 이 사회적 저항 및 반발과 관련해서도 한국 여성(주의자)들은 그들의 약진에 위협을 느낀 못 난 한국 찌질남들의 호들갑 정도로 처리하고 있지만, 다시 한번 국제적 관점에서 고찰하자면 서양판 ’(신)남성연대’에 해당하는 전통의 ’Men’s Rights’ (movement)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은 2013~14년부터 ’Women Against Feminism’ (movement)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여성인 이들은 한국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campaign이 유행하고 있을 때 매우 유사하나 더욱 확대된 방식으로 각종 blog 등을 포함한 모든 social media를 통해 "#I don’t need feminism" campaign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한국 여성(주의자)들이 성찰과 혁신에 눈감을 때 그 멀지 않은 미래를 예시해 주는 중요한 현상일 뿐 아니라, 절 초두에서 제기했던 현 국면의 해석과 대응에 관한 핵심 문제에서 후자 입장이 지지되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
이에 존경하는 《문화/과학》지 83호가 천명한 차세대 feminism의 발명 원칙을 음미하면서 문을 닫는다.

   "예컨대, 우리가 상상한 ‘페미니즘 2.0’의 언어는 이런 것이었다. 눈앞의 혐오와 폭력에 붙들려 ‘계몽’과 ‘(반)비판’만으로 에너지를 소진하거나 퇴행하지 않을 것, 페미니즘을 부분운동으로 국한.고립시키는 기왕의 오해와 거리를 두면서 페미니즘 논의를 일신 혹은 (재)활성화시킬 것, 페미니즘의 역사성과 정치적 가능성을 급진화할 것, 페미니즘을 둘러싼 국내 안팎의 현상과 담론, 이론과 실천들을 두루 다룰 것, 현재 페미니즘 지형에 상관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여러 흐름의 참여적 가능성 및 그 조건으로서의 미디어환경을 고민할 것. 요컨대, 우리는 ‘페미니즘 2.0’이 기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유지·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흐름을 일으킬 수 있는 ‘확장과 전환, 참여와 가능성’의 이름이기를 바랐다."









[본고의 주 약점은 작성자가 여혐, 남혐 site들에 직접 노출된 바가 전혀 없어 혐오 실태를 다소 부정확하게 과소 평가하고 있을 수 있기에 이에 고지함. (그러나 전체적 고려의 구도 상 본질적 결함으로 사정되지는 않음.)]



[아울러 저작 동기는 (현실) feminism, 특히 주류 feminism( 내 가모장주의 fascism 성향과(/의) 극단(적 분리)주의 분파 등)을 중심으로 자기 성찰 능력을 상실한 채 즉자적이고 무조건적인 자기 옹호와 방어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문제 의식 때문이었지만, 전체적 작업 구도와 정치 전략 체계에 비추어 여성(주의) 비판에 과촛점화된 측면과 (무뇌아적 남성주의 극우파 등에 의한) 악용 우려도 있어, 진지한 자성을 촉구하기 위한 중기 게재 후 자진 삭제 고려 중]



[덧붙여, 문미의 ’갈색 feminism’이란 용어에 다수 대중은 물론 feminism 외부의 정치, 운동 단체들도 오해가 있는 듯하여, 거명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해 더 이상의 상술은 않겠으나 문맥상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는 바, ’제3세계 feminism’ 같은 의미로 사용된 건 결코 아님을 추기함] 


[[그리고 장구한 탄압(/)독재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사의 특수성 때문에 약간의 수정도 필요한데, 70년대에야 (재)출현한 일반 model 1세대 이전까지 압살적 탄압에서 비롯된 긴 공백기를 (기독교 중심의) 종교단체 산하 ((특히 Mission School들과 직/간접 연계된)) 여성단체들이 메꾸어 왔다는 점이 반영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서울 위주의 중앙집권적, 형식적 조직체계에 기반한 소수 중상층 여성 지도자 중심 단체들로 활동도 주로 사회봉사나 소극적 사회참여 정도에 그쳐 그 한계가 명확하며 결정적으로 대규모의 대중적 참여를 특징으로 하는 여성(대중)운동 1세대의 지위를 대체하기에는 난점이 많고 같은 종교단체 여성운동이라 하더라도 70년대 (말)~80년대에 본격화한, 구좌파 주도 사회운동의 대격변 속에서 그 영향 하에 자극-촉발되거나 질적으로 변성됨으로써 (범)1세대로 분류되어야만 하는 민중불교, 기독민주 단체 (연계) 여성운동 등과는 상호간에 질적 차이와 불연속을 보일 뿐 아니라,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세계사적 추세 속에서 앞으로 더욱 가속 활성화될 (여성운동) 국제교류협력을 위한 국제표준이란 측면에서도, ’0세대’ 정도로 정위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해 볼 만하다 하겠다. 돌이켜 보면, 서양사에서도 본격적 여성대중운동으로서의 1세대가 등장하기 이전 계몽주의~자유주의 여권(신장)론 상간에 이에 해당하는 유사한 시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건만 현재 통용되는 주류담론의 표준model에서 이들이 독자적 1세대로 명명을 인정받지 못 한 것은 약간 의아한데 아마도 그 ’대중성’ 규모에서의 결격으로 흡수통합된 것이 아닌가 싶다.


[(현 문단에의)  추기]

  본고 작성 약 1년여 후 Nancy Fraser에 의해 시도된 참신한 수정 분류 model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포함한 Nancy Fraser solution 전체에 대한 본격 검토는 다른 공간에 할당키로 하고 여기서는 본고, 특히 그 역사( / )분류 model과 밀련되어 가장 아쉬운 부분인 매우 독특한 Nancy Fraser식 Feminism 분류법에 대한 평가와 관련단상들만을 간단히 추기해 두기로 한다. 

그는  2세대 1막, 2막, 3막이라는 명명을 창안하고 있는데 그 세부 내용을 검토해보면 그가 말하는 2세대 feminism이란 사실상 좌파 feminism으로 1막은 좌파 feminism 1세대로서의 Marxist feminism을, 2막이 그에 대한 반동/반발로서 가부장제 주적론과 정체성 정치로 발화한 RF[ =Radical feminism( ≠Radicalist feminism; (3세대) 급진(민주)주의 feminnism)]를 주축으로한 주류 2세대 feminism과 좌파 feminism 2세대로서의 사회주의 feminism(내 온건우파)의 혼합을, 3막으로 3세대 (좌파) feminism을 의미(하고자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좌/우파의 정치적 분류축(과의 교차)을 사상하고 시간축 하나로만 모든 feminism들을 분류하려는 오류로 복합/통합주의자로서의 자기위반일 뿐이며, 이러한 2세대 feminism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장은 그의 출발점=출신지=고향과 혼동된 좌파 지향성의 표식/흔적이고, 진정한 2세대의 부정성에 대한 비판과 탈주를 가능하게 할 상대화를 가로막는 감옥으로서의 (분류) 도식일 뿐으로 사료됩니다.


다만, 이러한 착상의 그나마 긍정적 측면을 최대화한 재활용해 세분화라는 구도로 정당화하면 2.1세대는 그래도 계급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주의 feminism으로, 2.2세대는 이것을 완전히 망실해버린 채 극단적 2분법의 정체성 정치로 빠져버리게 된 RF로, 2.3세대는 이들의 해악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본질로 표방하며 등장한 3세대의 좌파, 즉 (postmodern 및) poststructuralist 급진(민주)주의 feminism으로 합리화해 볼 수 있겠으나, 밝힌 바와 같이 2.3세대는 2.2세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그 과업이자 본질이고 무엇보다 기반하고 있는 근본적 paradigm이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양자는 같은 세대로 묶이기 어려워 보입니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긍정화해도 2.3세대로 정위 시도해 볼 수 있는 2세대 말 3세대 초(기) feminism은 사실은 2세대 feminism 전체에 대한 비판에 더 주력하는 2세대 post-feminism이었고 이러한 반립을 통해 이후 미세한 차이를 보이며 3세대 feminism으로 계승, 정립되어 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본고에서 제시되었던 분석/분류 model에서의 LF[ =Liberal feminism]에 대한 결과적/표현적 과소평가가 반성될 수는 있는데, 이는 한국을 포함하는 많은 나라들에서 LF가 본격적 (대중)운동으로 출현하지 못하고 누락, 미발현, 압축-이월/월경하거나 좌파 1세대 대중 feminnism운동의 영향과 연동/혼합되어 출현했었기 때문에 먼저 (자가) 시도된 바대로 0세대 feminism으로 분류하거나 아니면 1세대 우파/중도 feminism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공히 모든 1세대 feminism( 분파들)의 근본 동력과 기반은 누가 뭐래도 어쨌든 전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경공업 중심의 근대 산업자본주의 초기 값싸고 복종적인 여성 노동력의 대규모 동원과 이를 위한 여성 (대상) 대중교육 도입이며 LF는 그 대중 기반 동력의 특수한 일파적 반영이었을 뿐이고 이 계급 분파들의 LF는 이를 (분)기점으로 같은 LF계보라도 그 내부에서 이전의 극히 제한되고 수동적인 소수 elite 여성들의 선각자적 0세대 LF(/)운동과 이후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본격 대중운동으로 발화한 1세대 우파/중도 LF로 양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당시의 시대 분위기(, 특히 1세대 안에서의 좌/우파 관계, 작성자의 model에 기반하여 좀 더 정밀히 표현하면 1세대 좌파 feminism과 1세대 우파 feminism 간 관계)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서술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할 수 있음.

¶ ☞ Orr, Judith (2015). Marxism and women’s liberation. Bookmarks Publications.

국역본: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역: 이장원. 간: 책갈피.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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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자본이다 - 생명자본주의 그 생각의 시작
이어령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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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Zizek도 빈번히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Italian) 자율주의자들의, 뿌리 깊은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론에 대한 심오한 확대계승인 생명자본-인지자본주의론에서 중요한 문제의식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 때늦은 도용이자 피상적 왜곡!!! 아직도 구시대 한국의 번안가요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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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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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에 대한 총괄적 이론 검토는 다른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그간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비판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노동가치론' 논쟁과 관련하여 일단 시급하다 생각되는 짤막한 언급만을 메모형식으로 게재하기로 한다.

 

 
 

 

첫째, 인지자본주의론의 핵심 messege는, 플랫폼만 제공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꿀벌처럼 꿀을 모아오고, 스스로 집을 짓고, 엄청난 활동의 결과물을 스스로 축적해 주는 각종 소셜 네트워크 같은 Platform 자본주의 등 모든 새로운 착취와 전유 방식들의 등장과 변화를 통해 후기자본주의가 탈산업화를 거치면서 이제 공장내 육체노동만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 밖으로 전면적으로 확대되어 사회공장, (거대)도시공장화하면서 공장 내외의 모든 다양한 (가치(/)생산)요소들; 감정-정서, 언어, 인지, 인간관계=인맥(활동) 등등 생명과 생활의 모든 요소들에 노동을 시키며 영혼까지 착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인지자본주의론은 노동과 착취개념이 모든 생명활동으로 전면화 되는 현상에 대한 포착과 이론화일 뿐이며, 자본주의의 착취 기반이 과거의 영혼없는 노동에서 이제 노동하는 영혼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 그 핵심의 가장 형상적인 요약이다.

 

따라서 흔히 오해하는 바처럼 얄팍하게 지식인(계층)을 지식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옹호하려는 중간계급 ideology도 아니고, 이 과정에서 여전히 노동의 위계화와 계급 차별, 계급 서열화는 엄밀히 유지-관철될 뿐 아니라  (노동과 관계의) 식민화, 외주화를 통해 완전부불/무급노동화, 비고용노동화까지 격화됨으로써 이에 의한 노동과 계급 간 차별과 위계-서열화, 계급 적대는 더욱 심화된다. 이 새롭게 서열화된 노동들의 위계에서 절대 다수를 이루는 주류 인지노동은 고급지식노동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시장근본주의에서 악의적으로 차별 받고 있는 새로운 부불노동, 여성노동의 형태들인 하층의 각종 Service노동들, 특히 전화상담, 고객상담 등 감정노동들과 보육, 간병, 가사 등 돌봄노동들, 비정규직, 청년실업, 실버노동, Prosumer노동, Cyber노동, Crowd sourcing 등등 각종 그림자 노동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구조적으로 배제-도태된 가난한 예술노동 등의 모든 비시장주의적 노동들이다.

또한 가치생산에서의 노동(계급)의 독점적 절대적 기여(도)를 위협하거나 전통적인 노동(들)의 가치를 폄훼하려는 어떠한 시도와도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전통적인 (그러나 이제는 체계/체제의 수혜자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대기업/대공장 조직 산업노동자 뿐 아니라 비정규직과 부불노동, 여성노동 등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모든 노동계급 구성원들을 가장 폭넓게 가장 전투적으로 옹호하는 새 시대의 강력한 이론틀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완전히 다르게 인지자본주의론을 노동가치론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핵심에의 집중을 심각하게 왜곡/방해하는 MacGuffin에 불과하다[각주].

 

 

 

 

둘째, 인지자본주의론은 이러한 노동과 착취의 전면확장과 다양화 과정에서 그 일부의 현상으로 전통적 산업자본주의의 기반이었던 Fordism 체계 상의 표준화된 단순노동을 중심 대상으로 개발된 가치측정 방법론(/)모형이 다소의 난점을 겪(으면서 일반적 설득력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현실을 부인하지 않고 수용하여 적극적 해결을 모색하려 시도하고 있을 뿐, 단순히 모든 인지자본주의론자가 가치측정 가능성 자체나 가치법칙을 전면 폐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노동가치론 논쟁'이라기 보다 '가치측정( 방법)론 논쟁'( 또는 정말 아무리 양보해도 '가치"법칙" 논쟁')으로 호명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왜곡성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쟁에서 인지자본주의론 진영 내에 '가치실체론'보다 '가치형태론'을 선호하는 경향이 좀 더 다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흔히 오해하듯이 가치수량화는 가치실체론의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가치형태론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따라서 인지자본주의론 진영도 제기된 가치측정 상의 난점 문제와 관련하여 가치측정 가능성을 유지 또는 유보하는 그룹과 폐기로까지 나아가는 정치적 독해론 그룹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그런데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점은 이 논쟁이 언제까지든 측정 가능성 자체를 두고 왈가왈부, 갑론을박 해봐야 결코 해결이 나지 않는 문제 구조로서, 제기된 난점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 (생산) 및 노동, 착취 유형들에서도 엄밀히 관철, 작동되는 새로운 가치측정 방법론(/)모형을 개발해 낼 때에만 건설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내 가치론 연구의 대가이신 이채언 선생님께서 최근 Communnale에서 발표하신 "Marx 가치이론에 있어서 닫힌 가치체계와 열린 가치체계" 같은 시도는 이런 문제 구조를 정확히 관통하는 매우 생산적의 논의 전개로서 모든 (폐기) 반대론자들에게 (방향과) 시사점을 제시해 줄 매우 의미있는 작업으로 보인다.

 

 

 

 

넷째, '엄밀하게 관철되는 가치법칙'의 자본주의적 역-이용(/)효과 문제.

엄밀한 가치법칙과 가치측정(모형)은 사실 잔인한 '무노동 무임금' 철칙과 함께 엄격한 성과급제의 구현을 위해 필요했던 산업자본주의의 ideology( 요소)이며 Ford주의 생산방식 하 분배체계의 근간이자 그 소산으로서 아무런 반성적, 철학적 성찰없이 교조적 관성에 의해 맹목적으로 추종, 옹호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현철한 선결적 사유를 시도해 보아야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생산과 노동 능력이 없는 장애인 계층 등 모든 존재자를 고려하여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는 따뜻한 communism의 이상에도 위배될 뿐만 아니라, 이미 post-Fordism 하의 사회공장, 거대도시공장화된 항상적 복합 network 작업 방식에서도 다시 개인 노동 단위로 "엄밀히" 가치 (생산) 기여도를 환원적으로 복고 계산해 내는 것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결국 2중 효과를 발생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오히려 정보재등 지적 재산과 그외 모든 새로운 식민화 및 상품화와 사적 소유권 주장을 위한 굳건한 토대 개발로서 가치 평가와 가격 계산 등 지금 자본가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고 있는 생존도구이자, communism의 도래, 이행을 지연, 방해하고 그 징검다리로서 새로운 시대의 분배체계이자 이념인 기본소득(론)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론적 근거 중 하나를 아래에서부터 허물어 자본주의를 구원, 연명시키는 결정적 수단으로 전유당할 수 있음을 먼저 유의, 각성할 필요가 있다.

 

 

 

 

소결1. 인지자본주의론의 의미에 대한 확장적 재평가의 필요성.

  인지자본주의론은 기본관점과 인지태도에서 끊임없이 조절-변화-적응하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수구적인 구좌파가 보여주는 방어기제로서의 현실 부정과 억압/망각, (자기)합리화 같은 도피형이나 기만형 패턴, 또는 반대로 조절이론류의 패배주의적 체념과 수용 패턴 양자를 모두 극복하고 현실의 변화를 면밀히 적극적으로 연구하면서도 급진적 관점과 대안 전망을 결코 잃지 않는 (Gramsci적) 투혼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착취모델 이외에도,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이윤율이 저하된 자본주의 중심부/선진국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부식민지에 대한 전면확장의 일과정으로서의 시원축적=비자본주의/탈산업자본주의적 환원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등장한  (노동과 관계의) (재)식민화, 여성(노동)화=무급부불노동화, 금융화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매우 오래된 전통적 무급부불노동인 여성노동에 대하여도 막강한 (친)여성주의 경제학 이론틀을 제공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부불노동, 여성노동의 형태들인 비정규직, 청년실업, 실버노동, 감정노동, Prosumer노동, Cyber노동, Crowd sourcing 등등 그 모든 (신(신))식민주의적 외주노동들과 비고용=미상품(화) 노동들에 강력한 통찰과 영감을 주는 이론적 투쟁 수단이 될 것이다.

 

 

 

 

 

소결2. 보편성? 또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  역사적 자본주의와 현실 자본주의

a.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화 문제

b. 순수이념형 자본주의 vs 현실 자본주의로서의 macro사회구성체 문제.


잉여가치추출의 다양한 복합 경로들과 그 원천으로서의 부불(분) 노동.

상품(경제)회로를 통한 일부불 고용노동의 소위 "착취" model은 그 일 경로/형태에 불과할 뿐.

오히려 후기 자본주의는 유일한 활로로서 (직접)고용의 최소화 때문에 상품회로의 외연(/)주변부에 지배-관리-통제권 하에 있으면서도 (전혀) 지불되지 않는(,) 노동들에 대한 "수탈"과 액체화되고 추상/일반화된 현대(판) 토지로서의 금융-자산에 의한 임대-지대 "수탈" 기반 내부식민지 model들로의 환원과 다양한 (재)확대가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후기자본주의에서 자본(경제)의 정치-명령-폭력화는 자본주의의 국가화에 의한 국가(독점)자본주의화에 정확히 조응하는 일반 현상으로(서), 이 모든 기저에는 (공황, 과소소비, 이윤율저하 등등) 순수자본주의의 (각종) 위기와 그에 따라 (재)식민화(에 의한 폭력적 원시축적 model)로의 (탈산업적) 환원과 확산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근원이 존재한다.

 

 

 

 

 

소결3. 자기붕괴에 대한 구좌파의 불안-공포증에 대하여

; 소극/방어/수구적 협의의 Marxism과 확산/진취/혁신적 광의의 Marxism.

 

 

 

 

 

소결4. 인지자본주의론은 Foucault 정치경제학의 혁명적 발전으로서의 생명경제, 생명자본주의론의 다른 이름이자 그 일부.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지자본주의론은 국내에선 극히 최근에야 출간된 Foucault의 선구적 신자유주의론( 비판)을 담고 있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과, (그 주제에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본격 시도도 제대로 못하고 못내 아쉬워하며 끝나버린) 그 책의 원래 궁극적 목표였던 "삶/생(명)(관리)-정치론"의 합리적 핵심을 더욱 발전시켜 경제적, (총)체제적 차원까지 끌고 나가는 생명-경제, 생명-자본주의(bio-capitalism)론의 다른 얼굴이고 층위인 것이며, bio-capitalism 시대 금융자본주의 분석의 핵심적 혁신 중 하나랄 수 있는 Lazzarato의 부채(인간)론 같은 통찰들이 계속 잉태되고 터져 나오는 혁명 정신의 토양이다.

 

그런데 그간의 (한국 사회에서) 인지자본주의론의 수용과 논쟁 과정을 돌이켜 보건데 그 최대 장점으로서의 혁명적 잠재력과 설명력에도 불구하고 반대 흐름은 오히려 좌파 내부 그것도 급진 좌파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구좌파적 전통으로부터 제기되어 왔다는 사실은 irony를 넘어 비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여러 구시대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지만 그 하나로 계속 확인되는, 예상 외로 낮고 불철저한 구좌파의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이해도와 그에 의해 거대증폭된 '인지자본주의'라는 '이름'이 초래한 오해와 선입관념-태도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름'이 아무 (실질적) 연관도 없이, 위에서도 지적했듯 꽤 오랜 역사가 있는 '얄팍하게 지식인(계층)을 지식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옹호하려는 (중간계급) ideology'에 대한 구좌파의 거부감과 저항을 불필요하게 소환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인지자본주의론은 물론 Foucault, Agamben등등으로 이어져 온 '생명(관리)정치'론/개념의 본질과 핵심 messege들도 더욱 잘 표현하고 있는 '생명자본주의'론이라는 호명이 여러가지로 더욱 적절해 보인다. 

 

 

 

 

 

 

 

 

[각주]――――――――――――――――――――――――――――――――

 

MacGuffin, McGuffin (맥거핀)

 :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로 결말부에서의 (예상치 못한) 극적 대반전을 위해) 어떤 사실이나 사건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 독자나 관객의 주의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돌리게 하는 속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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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의 폭력 -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41
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심성보 옮김 / 갈무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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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책을 읽는 방법

 

  유명한 Foucault, Lazzarato등 뿐 아니라 (특히 인지자본주의-생명자본주의 계열의) 여러 빛나는 영감과 통찰, 성과들을 집약해 놓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Marx주의 혁신 경제학의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주는 좋은 이정표이자 선언의 성격을 가진 책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영감에 찬 aphorism을 가득 담은 잠언집처럼 혁신의 착상들을 얻기 위해 구절, 구절들을 명상적으로 깊이 읽어 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인지자본주의』가 다소 원론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그 계열에서 세계 경제 위기부터 일반화된 부채, 대학 등록금과 학자금 대출 문제까지 시급한 현실의 사태와 여러 현재적 사안들을 바라보는 견해를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그 계열의 최신 흐름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참조가 된다.

단, 종합적 집약이고 이정표이기 때문에 정밀한 논증이나 통계적 Data 등은 기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사안에 따라 다소 논쟁적일 수는 있으나 반드시 전적인 찬성이나 반대가 중요하다기 보다 "진보의 몰락"이나 "죽음", 또는 그 훨씬 전부터 얘기되어 온 "좌파의 구조적 위기", 그리고 이미 수십 년 된 "Marx주의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열어주는 하나의 출구이자 풍부한 생각할 거리들의 보고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0. 이 얇은 책이 제시하는 중대한 논점들

 

1. College de France 강의들과 특히『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이후 Foucault 정치경제학의 계승발전이자 일반화된 인지자본주의로서의 생명자본주의, 생명경제론

 

  생명자본은 자본주의 하에서 이윤을 생산하는 ‘노동(력)’을 ‘생명(력)’으로 바꿔 쓴 표현으로,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에 생명은 이윤의 지배적 원천이 되었음을 포착한다. 생명이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된 자질로, 아주 기초적인 생리학적 특성부터 상징, 관념, 감정, 언어 등 인간의 추상적인 요소와, 자연생태계까지 포괄하는 용어이다. 이제 자본은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노동자가 수행하는 물리적 노동뿐만 아니라 감정과 상징까지 흡수하며, 나아가 일상생활 곳곳에서 인간 활동을 추적하여 식민화한다. ‘셀프서비스’는 소비자를 생산자로 만들며, 온라인 쇼핑몰에 남겨진 소비자의 구매정보는 어느새 분류되어 생산과정에 통합되어 버린다.

 

생명자본주의, 생명경제란 Foucault가 생명(관리)정치/삶정치, 즉 bio-politics라는 개념을 동원해 포착하고자 했던, 그러나 생전에는 끝내 충분한 이론 전개를 완수하지 못한 바로 그 새로운 현상들의 핵심적 본질이자, 물적 토대이다. 

bio-politics란 결국 후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실체로서의 bio-capitalism과 그 통치 ideology로서의 복지국가 model을 중심으로/에서부터 현대/후기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와 (이후 도래할) post-자유주의까지를 포괄하는 장기 후기 자본주의를 지칭하고자 했던 개념인 것이다.

bio-capitalism과 bio-politics, bio-pouvoir는 신자유주의를 초월하여 지속할 상위 범주이고, platform-capitalism, digital-capitalism에서 더욱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Google과 Apple사 등의 국제독점자본들이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각종 생체의료, 건강운동정보를 핵심으로 한 Big Data collecting & mining 산업의 급부상은 이러한 예측을 잘 증명해주는 현상들이다.

 

 

 

 

2.1. Marx 대 Minsky ? ;금융(자본주의)화라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급진좌파의 혁명주의를 수호하는 하나의 경로

 

최근('2013.05.10~12) 개최된 제6회 Marx Communnale에서 핵심 쟁점 중 하나로 제시된

Marx 대 Minsky, 즉 독점자본주의론=정통 Marx주의 vs 금융(자본주의)화론=Keynes주의/개혁주의라는 문제설정에 대한 하나의 대답

 

2.2. 금융자본(주의)의 위상 평가 문제

 

  일곡 유인호 학술상 제5회 수상자이기도 한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의 저자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전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부소장, 진보신당 창당준비위원회 정책위원회 의장)은 최근 "『신자유주의의 탄생』-― 문제의식과 성찰 그리고 제안들"이라는 논고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신자유주의의 모태가 된 자본주의의 동학 :

  이 책(『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은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사회 세력을 화폐 자본(=금융 세력)으로 파악한다. Kees van der Pijl의 『The Making of an Atlantic Ruling Class』(Verso, 1984)가 이러한 역사적 이해의 기본틀을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금융 세력을 부각시키면서도 저자[=장석준]는 이것이 K. 마르크스 이후의 전통적 자본주의 이해에 어떠한 충격을 가하는 것인지 명료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을 집필한 뒤에야 저자는 J. 잉햄의 『돈의 본성』(홍기빈 옮김, 삼천리, 2011), D. 그레이버의 『부채, 그 첫 5,000년』(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11), M. 라자라토[>랏짜라또]의 『부채인간』(허경 외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2)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화폐, 금융 이해에 근본적 오류와 한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자본』1권은 생산 현장에서의 자본-노동 관계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자본가계급 전체에서 헤게모니적 역할을 수행하는 금융 세력을 논의에서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자본』3권에서 비로소 금융 세력이 자본 전체의 지휘자라는 중대한 위상을 갖고 등장하지만, 이들에 대한 논의는 그야말로 파편적 수준에 그친다. 이에 따라 '실물 경제'/'화폐(금융) 경제'의 이분법적 인식이 지배하게 되었고 후자가 전자에 종속되거나 이로부터 파생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실제 자본주의 역사에서 2차 대전 직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예외적 시기를 제외하고 계속 자본가계급 내의 헤게모니 집단은 금융 세력이었다.

 

  물론 이 글은 『자본』의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저술 체계에 대해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역으로 반면투사를 통해 산업자본에 대한 일방적 강조라는 『자본』에 대한 통속적 독해법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잘 보여주고 있다.

  Marazzi는 (본서에서 실물/산업경제에 대한 화폐/금융경제의 전면적 지배까지를 주장/강조하고 있지는 않지만), Giovanni Arrighi 등 실물경제와 금융경제의 분리를 통해 경제파동과 주기를 설명하려는 흐름을 비판하면서 풍부하고 중요한 여러 함의들을 동반해, 양자의 분리불가능한 융합 현상을 역설한다.

이것은 본서를 둘러싼 최대 쟁점 중 하나로 향후, 금융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산업자본주의(와 임금regime 기반의 복지체계)를 복원하려는 주요 선진국 좌/우파 정부들과 구좌파들의 시도(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비가역성 논쟁으로 본격화될 것으로 보이며, 이후 역사적 (주요) 지배자본논쟁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3. 자본과 정동, 자본과 언어

  뿐만 아니라, 이후 엄밀한 검증과 치열한 논쟁작업이 뒤따라야 하겠으나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불변자본 중) 고정자본은 이제 [manual등을 포함하는 (범) program적] 수행 언어화되어 전 사회에 퍼져 (가고) 있음을 지적하는 Stephen Baker등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 성찰 등에 대한 소개도 별처럼 빛나는 여러 논변 중 하나로 보인다.

 

고정자본의 (수행)언어화 현상은 크게 3가지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는 그 유명한 『Grundrisse』에서의 Marx에서 유래하는 전통적 해석으로

 

 

둘째는 현대 (급진) 철학적 해석으로 사뭇 의미심장(하고 흥미진진)하다. 이중 특히 구조주의 계열에서 Lacan과 Deleuze에 이르기까지 근대성의 핵심으로서의 주체를 해체하는 철저한 (이론적) 반인간주의, 반주체주의가 드디어 철학과 인문학을 넘어 경제학까지 침입하기 시작하는 제1격, 그러나 근본적 치명타로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드디어 경제(행위)의 주체, 생산의 주체라는 개념 자체가 반성적으로 의심되고,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라는 오래된 방법론이 (발전적으로) 해체될 수 있는 위력 또는 위험을 안고 있는 해석인 것이다.

이들에게 주체란 구조화된 언어일 뿐이거나 말그대로 "기계"일 뿐이(었)기 때문에 근대 경제학적 paradigm에서 가치생산과 노동의 신성한 주체로 설정되었던 노동자(계급) 또한 이제 신경과 근육의 구조(물)로서 해체적으로 인식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전통 Marx주의의 가능한 반론은 아마도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의 대별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post)operaismo, 또는 후기-노동자주의적 해석으로 이 현상은 동시에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의 산 노동의 점증하는 자율을, 즉 다중 내에서 점증하는 사회적 협력의 잠재적 자유를, 언어적 수행, 지식 생산의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의 잠재적 자율을, 그리고 오늘날의 산 노동의 소통과 협력의 역량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된다. 왜냐하면 자율은 일반지성을 구체화하면서 지식과 언어의 생산적 힘들을 훨씬 독립적으로 배치하고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5.

 

 

 

 

S. 본서의 대안적 결론들

 

  본서는 곳곳에서 다층적 결론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국내에 최초로 소개되는 저자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자료들의 혼합적 편집체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요하게는 '현실성'이라고도 읽힐 수 있는 주체별, 시계열별 다양한 정책/전략체계들이 곳곳에 중층적으로 독립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책들의 서론과 결론만 읽고 질 낮은 서평들을 매주 쏟아내는 언론들이 본의 아닌 왜곡을 해대고 있는 것처럼, 본문 결말부에 해당하는 '6장 나오며'의 마지막 문단을 이 책이 제출하는 단 하나의 결론이라고 독해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오해가 될 것이다.

 

 

S.1. 탈금융화 및 재산업(자본주의)화 vs 비가역성 문제

 

.....금융 경제와 실물 경제는 더 이상 구분될 수 없으며, 금융 경제의 토대는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과 생활방식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소비자들은 식료품을 신용카드로 구매하고, 노동자들은 연기금에 가입해 있고, 중간계급은 주택담보대출로 질식할 지경이며, 빈민들은 "몸뚱이"를 담보로 빚을 끌어 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시스템의 탈금융화가 가능할까요? 아니면 단지, 은행의 악행으로부터 시스템을 개선하는 게 문제인가요? 그리고 생산과 소비가 부채를 통해 매우 밀접하게 뒤얽혀 있다면, 위기가 가져오는 침체와 불황을 회피하는 게 가능할까요?  (p.185)

 

  우리가 앞서 논의했듯이 부채를 줄이는 퇴행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 자체가 탈금융화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수요와 소비를 침체시키고, 결국 죄책감 규율은 삶 자체를 절하시키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대신에, 우리는 사적 지대(rent)를 사회적 지대로 재전환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부채를 사회화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화의 수요와 소비를 다시 촉진하고, 공적 공간을 재전유하고, 사회적 관계와 집합적 행복을 재건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통적인 것이며, 악화 일로를 걷는 금융화의 병폐가 악순환의 경로를 벗어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기본소득이나 토빈세처럼, 지난 몇 년 동안 사회적 투쟁에서 활용된 키워드들은 이미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p.186)

 

 

 

 

S.2. 급진(주의)적 하위 대안으로서의 부채 탕감 및 상환 거부 운동

 

  파산할 권리를 주장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회운동은 이를 삶의 금융화에 맞선 저항권처럼 제시하고 있는데요.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대중을 현혹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유럽의 기술관료들이 무력화시킨 국가 주권을 재구축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내[Marazzi]가 볼 때, 그러한 운동이 주체적이고 맥락적인 실천이라면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운동이 국가의 손아귀에 빠지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학자금 대출의 거품이 한 동안 치솟아,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거의 절반에 육박했습니다. 이런 경우, 정당한 대출과 부당한 대출을 구별하려면, 학생들과 이들의 가족이 파산권을 확보해 행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파산권을 국가에 맡겨서도 안 되고, 이를 통해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려는 국가의 야망에 맡겨서도 안 됩니다. (p.187)

 

 

 

S.3. Rosa Luxemburg 경제학의 복권적 재발견과 여성주의(적 통찰들)와의 접합성

      ;적-록-보라 경제학, 또는 (친)여성주의 경제학( Project)을 향하여

 

S.3.0. 전통적 Marx주의, Trotsky주의 계열, 혁신 Marx주의 계열, post±anarcho 계열, 여성주의, 생태주의 계열의 시발적 공통분모/대모로서의 Rosa Luxemburg

 

S.3.1. 비자본주의적 처녀성에 대한 정복으로서 자본주의는 그 태생부터 언제나 제국주의였다는 각성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근/최고/최후 단계라는 단계론적 주류 제국주의론 전통에 대한 확장적 교정과 녹색, 보라와의 접합 가능성의 이론적 개방

 

내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을 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이 비자본주의적 '타자'에 대한 지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은 데이비드 하비, 엘런 우드 등 오늘날의 반제국주의자들에게도 강렬한 영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귀결로 이해한 최초의 비중 있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듯하다. 반면에 힐퍼딩은 금융자본이 우세해질수록 부르주아지가 제국주의(그가 생각하기에는 '군사력 증강과 식민 정책'을 뜻했던)라는 정책을 채택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면서 제국주의를 일관되게 모종의 정책으로 묘사한다.

 

... 룩셈부르크는 이러한 주장을 기초로 『자본축적론』 끝 부분에서 세기말 제국주의를 강렬하고도 독창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도 그는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이른바 시초 축적"(근대 초 영국에서 한편으로는 전세계에서 속임수와 강탈을 통해 자본의 수중에 부를 집중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지 몰수를 통해 농민들을 무토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시켜서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기초를 확립했던 역사적 과정)에 관한 『자본(론)』 1권 8편의 묘사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시초 축적을] 자본의 탄생 과정만을 보여 주는 우연적 사건, ...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산통[으로 묘사한다.] ...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성숙한 자본주의는 그와 나란히 공존하는 비자본주의 계층과 사회 조직들에 모든 면으로 의존한다." 또한 시초 축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관계는 평화로운 교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비자본주의 사회들을 자본주의의 법칙에 폭력적으로 종속시키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렇기에 "역사적 과정으로서 바라본 자본축적은 그 탄생 과정에서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줄곧 강제력을 자신의 영원한 무기로 사용한다." 이 과정은 '자연경제', 즉 비시장적 사회 형태들(그것이 어디에 존재하든 간에)의 체계적 파괴를 수반하며, 자연경제의 생산적 요소들을 세계시장에 흡수하는 것, 그리고 단순상품생산에 대한 선진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적개심(단순상품생산을 자원과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라이벌로 보기 때문에)[과 경멸적 우월감(-작성자)]을 수반한다.

 

...그러나 일각의 주장과 달리, 룩셈부르크는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의 도래가 사회주의의 도래가 필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붕괴로 나아가는 내재적 경향이 있고, 그러한 경향이 제국주의 시대에는 재앙을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말이다(룩셈부르크는 제1차세계대전으로 자신의 예측이 입증됐다고 봤는데, 그렇게 볼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붕괴는 사회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야만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위기들이 예정된 결과를 낳기보다는 인간의 행동에 좌우되는 대안들을 제기한다고 봤다. 따라서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경제 이론에도 불구하고 숙명론적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룩셈부르크의 동시대인들과 오늘날의 이론가들은 모두 전자[마르크스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비판]와 후자[서구 자본주의가 나머지 세계를 침탈한 구체적 과정에 대한 탁월한 해설]를 구분하면서 전자는 거부하고 후자는 매우 높이 사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하비는 "오늘날 룩셈부르크의 과소 소비론을 경제 위기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라면서도 "자본주의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타자'를 창조한다"면서, 마르크스가 이른바 '시초 축적'(하비는 이를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고 새롭게 명명하면서 그 개념을 확장한다)에서 필수적 요소라고 봤던 약탈과 폭력이 사실은 자본주의의 탄생 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자본주의를 늘 따라다니는 요소라는,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계승하고 발전시킨다. 룩셈부르크의 제국주의 분석은 실로 통렬하고, 면밀한 조사에 바탕하고 있으며, 당대의 추세들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여러모로 설득력이 있다. 그의 분석 속에서 식민지 정복, 융자, 관세, 군국주의는 하나로 연결된다. ... 자본주의가 비자본주의 사회로 침하하는 것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설명은 '순수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상은 (놀랍게도) Alex Callinicos의 2009년 저작 (한국어판은 2011년)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책갈피 간)의 p.60~67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러한 동역학/역동(적) 관계는 가치화 과정들에 변형/전환이 있어 왔고 그래서 오늘날 잉여가치의 축적이 [전통적 생산(노동)영역에서] 순환[유통], 교환, 재생산의 영역으로 [확장]이동했으며[a] 사람들의 전체 삶에 온통 일을 시키고 [(삶을) 온통 노동으로 내몰고/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연인으로서의 인간도 포함] (살아있는) [자연적] 생명존재/산 존재들을 고정자본으로 변형[양육]시켜서 [양계장처럼 인간도] 생명 형태/삶-생활 형식들의 생산으로 부터 부가가치를 추출해내는 (일종의) "인간 발생/생성(론(적)) 모형"이다[b]. 이것은 이번 금융위기의 해석에 있어 하나의 핵심적 기여로서, 1929년 탄생기 Ford(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 후에 처음 채택됐던 케인즈주의적 해법들을 무너지기 쉽고 불안정한 오늘날의 금융(적) 생명자본주의에 [재]적용하는 것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자본주의를 향한 (전면)확장적 자본주의 주장은 원래 Rosa Luxemburg의 『자본 축적론』에서 그 사유방식의 원형적 패턴을 찾아 볼 수 있다.

『자본 축적론』자체는 Russia Bolsheviki, 특히 Lenin, Bukharin과의 논쟁을 통해 비판받았지만, 상기의 논점과 관련해서 만약 이 패턴이 '내부식민지론'에 의해 결합, 보강될 경우

이후 Deleuze와 Guattari가 『L'anti-Oedipe』에서 주장한 code화로서의 금융자본론, 그리고 Marazzi 등 인지자본주의-생명자본주의론 계열이 전개하는 전면확장적 (후기)자본주의론 주장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Karl Polanyi가 2009년에야 국역된 그의 주저 『거대한 전환』(1944)에서 다소 낭만적이고 윤리적으로 지적한 "상품화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상품화"의 문제가 단지 (시장)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자기 조정 시장 경제에 대한 잘못된 이상과 믿음 때문이 아니라 사회 내부의 비자본주의적 요소와 영역들에 대한 자본주의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식민화 과정이(었다)라는 극명한 현실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여기에 Luxemburg 경제학의 또 다른 최대 강점이자 여타 제국주의론들 특히 최근 각광받고 있는 David Harvey류의 신제국주의론들을 포함한 공간/지정학적 제국주의론들의 최대 약점/난점이 동시에 놓이게 된다. 즉 여타의 모든 제국주의론은 내부식민지 문제를 전혀 설명할 수 없고 그러한 사유의 방향 자체를 개방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재미있게도 내부식민지론과 제국론은 이러한 기본 관점에서, 특히 공간 문제에 대한 사유( 방식)에 있어서 상당한 유사성이 있어 보인다.




더군다나 이러한 Luxemburg의 놀라운 통찰과 그 귀결은 뿐만 아니라 오늘날 거의 최첨단의 좌파적 각성들 중 하나에 속하는 탈식민주의론 경향들―postcolonialism 계열은 물론이고 decolonialaism 계열도 포함하여―의 공통 기반인 '근대성=식민성' These와도 완전히 정확하게 일치하는 근원적 모태 관념이자 원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더욱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

 

 

 
 

 

 

 

S.3.2. Rosa Luxemburg 경제학에 대한 약간의 수정과 여성주의적 해석


물론 완고한 Luxemburg주의자들로서 이를테면 좌익공산주의 계열의 ICC 같은 group뿐만 아니라 여타 많은 주류 좌파들은 그들의 이론 체계에서 과소소비론을 (decadance기) 세계자본주의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상정하는 것을 조금도 포기하려 하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최소한) 내/외 식민지를 향한 제국주의적 팽창의 근본동력으로(만) 말하자면 (심지어 좌익공산주의 계열 내부에서조차) 대부분 동의하듯 그것은 (일상/항상적으로는) 주로 과소소비( 단독 원인 뿐이) 아닌 고질적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때문.


그렇다고 과소소비론이 Lenin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왔던 것처럼 완전한,  또는 심각한 오류는 전혀 아니며, 이는 주류 경제학에까지도 강력한 설득력을 파급, 유효 수요론으로 발전하여 Fordism 체계/체제 하에서는 임금 regime에 기반한 복지( 예산 및 정책들)로, Post-Fordism 하에서는 부채를 중심 수단으로 (임시) 관리/해소해 와야만 했던, 자본주의의 ((항시적) 위기와 이의 조절을 위한 자기 변형 및 내/외 식민(지 개척)주의적 팽창을 초래할 수 밖에 없는) 3대 근본문제임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외 식민지의 비자본주의적 처녀성에 대한 선진국 자본들의 윤간 파티

쾌락의 원천으로서의 잉여가치

(더 많은 쾌락을 제공하는) 처녀성의 본질로서의 고이윤율과 저임금, 순종(성)

 

 

 

S.3.3. 중심부/선진국 내에서 기존 (산업)자본주의 부문의 비자본주의/탈산업(자본주의)적 환원으로서의 적극적 비고용노동/완전부불노동=여성노동=그림자노동-화 현상과 생명자본주의

 

 

S.3.4. (여성의) 인간 생산/생성 노동과 그 전면확장으로서의 인간(생성)산업, 그 (중(상)위) 대안적 가능성

 

  최근 여성주의 (운동) 진영은 상품생산에 대비하여, 전통적인 여성들의 (완전)부불노동을 기존에 잘 알려진 가사(생산/관리)노동외에도 쾌락생산노동, 인간생산노동 등으로 확장 규정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본서는 중요한 2가지 시사를 주고 있는데, 첫째는 경제 위기에 대한 중(상)위 대안 중 하나로서 인간 (생산/생성) 산업에 대한 (대대적) 공적 투자와 그를 통한 고용 및 (유효) 수요 창출, 경기부양안이다. 여기에는 임신, 출산, 보육, 양육, 교육, 자기계발, 자기관리, 자아실현, 주체변형, 의료보건, 복지, 후생, 양생, 각종 건강산업, Leisure-Sports-운동-체육산업, 성형미용산업, Silver산업 등등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과 인체에 관한 거의 모든 활동과 산업이 모두 포함될 수 있는 매우 광범위한 범주이다.

 

인간 발생/생성론(적) 모델;anthropogenetic model

 abiogenesis(무생물적 발생론=생물 자연발생론) vs biogenesis(생물적 발생론)

 ananthropogenesis(인간 자연발생/탄생론) vs anthropogenesis(인간 (인위)발생론=인간 형성/육성론)


a. 생물학 및 진화론 역사에서 있었던 abiogenesis(무생물(로 부터의/에 의한 (생물)) 발생론=생물 자연발생론) vs biogenesis(생물(로 부터의/에 의한 (생물)) 발생론) 논쟁에서 유래해 사회문화적 비유개념으로 차용된 듯 보이며, 원래는 인류학과 유사 학문분과로서 역사적으로 인류발생의 기원(만)을 연구하는 인류발생학(anthropogeny), 그 설명 이론들로서의 인류발생설/론(anthropogenesis)을 의미했으나,


b. Foucault의 "생명(관리)정치"에서 유래(하여 이딸리아 자율주의 진영 주변에서 발전하고 있는) 생명경제, 생명자본주의(bio-capitalism)론에서는 그보다 '인간'발생론의 의미로 상기 후자 개념, 즉 인간 인위발생론=인간 형성/육성론을 이르는 용어로 제기됨.

다시 말해,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으로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동물)적 생명존재로 태어나 사회문화적 체제에 의해 인간으로 훈육, 육성되어 비로소 인적 자본등 생산요소나 체제구성요소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함의. (이런 관점은 가끔 동물에 의해 양육되다 숲 속에서 발견되는 늑대소년('2012.10. 동명의 흥행영화도) 유형의 존재들이 실재해 왔기 때문에 전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 아니다.)

이상이 Marazzi와 bio-capitalism 계열의 어법.


(c. 그런데, 재미삼아 anthropogenetic을 더 확장하면, 세상 모든 사물은 이제 더이상 과거처럼 그 자체로서 발생,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질학적 '장기' 시간단위로서의 인류세(anthropocene)의 절정기(, 또는 후말기)인 현재는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인간에 의해 (학교, 교도소, (특히 성형외과)병원 등등) 거대한 사회공장, 세계공장 체계를 통해서 모두 (산산히) 분해, 조립, 창조, 재창조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고, 이름과 의미를 부여받고, 재배치됨으로서 탄생/발생, 존재하고 있(는 기호)다라고 하는 맥락에서 '(만물의) 인간발생론'이라는 제3의 최대광의로 사용할 수도 있겠고, 이런 어법에 이르면 anthropogenetic과 anthropogenic은 별다른 차이가 없어지게 되겠다.)


  cf.anthropogenic model이라면 '(인간활동에 의한/의해 발생하는) 인위/인공 생성(론) 모형'이 됨.

     ananthropogenesis는 anthropogenesis의 어원배경 설명을 위해 동원된 (a)biogenesis와의 대비 목적 임시조어.


 

 

 

S.3.S.

 

 

 

 

S.4.

 

 

 

 

S.S.

 

 

 

X. 남겨진 문제들

 

X.1. (신)자유주의적 상품화의 첨병으로 자발적 총알받이가 되려는 MILSA 진영( 돌격대 급진 누나들)께

   : (내외 비자본주의적 타자/요소들에 대한) 식민화, 외주화 1단계로서의 시원 축적적 비고용노동/완전부불노동/여성노동-화에 맞서는 방법들

  

 

 

 

 

[작성 중]

시간 관계 상 현재 매우 엉성한 메모 형식에 불과함을 깊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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