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의 군주 - 브뤼노 라투르와 객체지향 철학 카이로스총서 58
그레이엄 하먼 지음, 김효진 옮김 / 갈무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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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이론적) 정세에 대한 고려 때문에 유보 중이었으나, 일정한 시급성도 있어 일단 간략한 비망록 형태로만 작성하기로 합니다.


0. Graham Harman은 Bruno Latour에 대해 다소 과대평가하고, 자기자신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이는 일정 정도 Deleuze & Guattari[1]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계열이 하고 있는 말의 의미와 이론사적 맥락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 기인하고 있는 듯 보임.


I.

1. Kant주의의 최대 문제는 선험적(Transcendental[2]) 주체, 또는 주체의 선험성 발견이라는 Copernicus적 전회를 달성함으로서 구시대의 대립물이었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각각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상관주의라는 새 지평을 열어젖힌 혁명적 위업에도 불구하고, 첫째로는 Nietzsche의 관점주의Perspektivismus와 반토대주의(erkenntnistheoretischer )Antifundamentalismus/Antifoundationalismus를 경유[3]하면서 (신)자유지상주의와 fascist적 우파들의 postmodern적 각종 궤변과 가짜 news, 유사 과학들의 창궐을 몰고 온 진리와 윤리 없는 시대를 잉태한 철학적 기원이라는 것이고,


둘째로, 그나마 Kant주의 중도파 소시민 후예들조차도, '세계'라는 도저히 인식불가능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party에 초대돼 앉혀진 (wet-blanket) wall-flower처럼 조금도 즐기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회의하고 반성하면서 자아(/)주체라는 탐미적인 작은 알껍질 속에 갇힌 자의식 과잉과 행동마비의 상태에 빠져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2. 



3. 이러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즉물과 대물, 즉자와 대자의 단계를 관통하여 획득된 자기자신과 세계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기반으로, 동시에 다시 물아 일체라는 몰아와 무아의 경지로 회귀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Kant주의는 그 위대성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궁극적 결론이 아니라 잠시, 그러나 반드시 들러야 하는 경유지일 뿐 아니라, 오히려는 출발지에 불과하다.



4. 이러한 모든 문제적 사태들에서 탈주할 수 있는 한 출구는 Deleuze와 Guattari에 의해서 제언되었는데, Harman이 극찬하는 Latour도 결국은 아직 이 구도안에 놓인 후계자일 뿐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Latour 철학의 핵심 개념인 '행위소'란 결국 존재(론)들의 세계 층위를 구성적으로 통일하는 Deleuze-Guattari 형이상학의 '기계' 개념의 변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그 유명한 Niklas Luhmann 사회학의 '체계' 개념 또한 포괄하는데, '체계들의 체계'로서의 세계관에 극적 역동성이 가미된 것이 '다층적 중층위에 걸쳐 응결 산포된 기계들의 연속체로(서) 통일되어 있는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의 통일성으로부터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란 소위 주체의 순전한 사후적 환상임이 드러나며, Kant의 상관주의 인식론은 그 최선의 혁명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러한 구분과 대립을 전제하며, 절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구시대의 구도에 아직도 포획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Latour를 뒤이어 Harman 등 신유물론들이 견지하는 (이론적) 반인간(중심)주의가 시사한다는 '인류세anthropocene의 총체적 위기를 돌파할 최신의 완전평등 생태주의 세계관'이란 실은 Spinoza적 범신론에서 발원하여 Guattari가 이미 선착한 바로 그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4]




5.



6. 




II.

7.반면 Harman(의 말)은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Heidegger[그리고  Hegel]에겐 Kant주의와 신Kant주의를 무너트릴 수 있는 결정적 장치의 단서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며, '객체 지향(Object Orientation)' 개념[5]이 그 중 하나이고, 이것은 Latour에게선 발견되지 않는 요소이다.




8. 따라서 Kant가 발견해냈다고 알려진 '선험적 주체'/'주체의 선험적 지평'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인식'이란 개념과 범주는 이제 (그것을 하위범주로 포괄하는) Cybernetics의 한 축인 '통신' 범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결국 '주체(인식)의 선험적 지평'이란 통신장비의 종특적 Device Specification에 불과하고, 비록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계와의 효과적이며 성공적인 통신과 상호작용(/상호침투), 유쾌한 적극적 참여와 합일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할 어떠한 결정적 이유도 되지는 못 하는 것이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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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범한 경로의 모든 자료와 사실들을 종합하건대, 다시 한 번 더 올바른 발음은 /과따리/



[2] ((transcendent와 달리)) transcendental의 '초월적'으로의 번역은 막론하고, '초월론적'이라는 번역에 대하여도 반대합니다.

이런 번역을 옹호하시는 분들은 무엇보다 구미 문화권에서 일반적인 두 어휘 간 역사적 분(리 구)별 관계에 대해 무지하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더하여 Kant 철학에서의 독특한 어법과 맥락도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는 탈맥락적 (보편주의) 폭력 사고 성향이 있고, 전반적 상황을 주의 깊게 총체적으로 고려한, 번역에서의 창의적 장치 발명등에 대한 사유 방향이 폐쇄되어 (본의와 달리) 이해와 인식 전파에서의 혼란 반복을 방치하게 됨.

가장 창의적 번역대안으로는 '초험적'도 적극 고려될 수 있음.



[3] 그러므로 신Kant주의의 중핵은 이미 당대에 Heidegger에 의해 완파되어 사양길로 접어들었던 Ernst Cassirer 등이 아니라 신Kant 우파의 대부로 불러줘야 할 바로 그 악명 높은 Friedrich Nietzsche라 할 수 있다.

((신)Kant 우파의 (좌파/중도파에 대한) 결정적 이단점은 (오만한 또는 주체/자기 중심적) 반이성주의라 할 수 있고 이것이 먼저 전제되어야만 이후의 생철학과 실존철학 계보로의 분기가 가능함. 즉, 근대(적) 주체주의는 이성중심적 주체주의와 반이성/비합리적 욕망중심 주체주의의 두 시기/국면으로 양분되며, Nietzsche와 Freud-Lacan (그리고 Deleuze)등을 포괄하는 이 계보는 흔한 오해와 달리 탈근대사상이 아니라 전형적인 후기근대의 사조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최근 일어난 사상 운동을 포함하여 이러한 유물론을 위한 투쟁을 '단순작업의 무한반복'이라 폄훼하려 시도했던 고전적 지성들이나 아직도 생각없이 이를 인용해대는 이들은 세계사와 철학의 관계나 철학사 자체 뿐 아니라,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판단과 개입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재한 자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이런 맥락에서 첨언하건대, 본인의 입장을 '기계적 유물론'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Deleuze-Guattari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순전한 오해일 뿐이며 애써 변론할 필요도 느끼지 못 한다.



[5] ☞ OOO ; Object-Oriented Ontology객체지향존재론





※ 

    거시 철학사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변동은 이전까지의, 인식론을 필두로 최근의 정신분석까지 광의의 범-심리학주의가 주도해 온 주체지향 사조를 전복하려는 객체지향운동으로(서)의 근본적 방향전환이 본질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철학적 표현이 (대)주제 변경으로서의 '존재론적 전환'이며, 그 선도적 시대정신의 가장 견고한 중핵이 유물론적 전회인 것이다.

따라서, 그 발아 형태인 신유물론들로서 출발했던 새로운 철학사조는 소박한 유물론이나 물리주의등 미숙하고 수상한 여러 과도기적/실험적 한계들을 수반할 수 밖에 없기에, 이들이 최근 몇 가지 절단점들을 형성하며 분기/분화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예측되던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 흐름에서 이제까지 신유물론을 주도해 온 사변적 실재론 일부의 '자연'주의, 물리주의적 물질개념에 반발해 행위소/자-Network 이론[ANT] 같은 표현적 유물론 등이 (재)부상하거나 (그 반작용의 반작용으로) 후기 HARMAN이 스스로를 '비유물론'으로 과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과도기적 시행착오들의 일환이며, 소위 그 비유물론이란 그 축자적 의미와는 달리 오히려 비판적 '사회' 실재론으로서의 Marx주의적 역사유물론에 그 어떤 신유물론들보다 근접하는 분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반의, 더군다나 주류 Marx주의자들 자신의 오해와 달리 심지어 (일반화한) 역사적 Marx주의 내부에도 오직 하나의 단일한 유물론 전통만이 있어 온 것이 아니다!!!

유물론 계보 내부의 제1 대분기점은 우선 자연주의 대 사회적 실재/유물론이라 할 수 있으며 Marx주의도 이러한 사실/사정으로부터 전혀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HARMAN이 신유물론의 문화주의 계열에서 스스로들을 유물론으로 자칭하는 것에 석연찮아 하거나,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비유물론이라 자처하(ㄹ 수 있)는 것은 그 근본 동기가 이러한 사정을 기본 배경으로 (환원주의로서의 유물론이라는) 그의 독특한 사적 재정의( 또는 차라리 '인상')가 가미되는 등 신유물론들이 공통된 '유물론' 개념 그 자체에 대해서조차 합의하지 않은 채 동시대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과 반응경향으로서 그 운동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증폭된 것이며, 이는 모두 이 사상 운동이 과도기적 발생 단계에 있기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다.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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