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치미교 1960
문병욱 지음 / 리오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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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책은 『사건 치미교 1960』 단 한 권이다. 공식적으로는 그의 첫 작품이나 다름없지만, 예상보다 더욱 대담하고 능수능란한 작품이다 (물론 이것은 일반 독자의 개인적인 느낌일지도). 보통의 미스터리 소설은 스릴감이나 속도감이 돋보이기 마련이지만, 장면 속에 흠뻑 빠지는 이외에도 즐길 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이답 스토리 공모전'의 최종 수상작답게, 이야기를 끌어가고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할 말을 자연스럽게 꺼내놓는 '스토리 텔링'이 탁월한 소설이다.

 소설의 소재가 된 '백백교 사건'은 한국사의 실화이자,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소재로 많이 이용되는 사건이다. 일제강점기의 절망과 혼란을 틈타 사이비 종교를 창설하여 수많은 교인을 이용하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였으며, 여성들은 교주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런 '백백교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치미교'라는 끔찍한 종교를 소설 속에서 탄생시켰고, 그 탄생의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리고 교인들을 통한 세력 확장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지게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약간의 픽션을 더했다.

 '치미교'의 교주인 '해용'이 (이는 '백백교 사건'의 실제 교주 이름인 '전용해'와 비슷하다) 이 일제의 마루타 실험에 참여하였다는 전제로 기상천외한 일들을 펼치고, 그 얕은 지식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협박하는 모습들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하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 의학계와 오묘하게 맞물리는 구성은 아주 흥미롭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버린 아버지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교인이 되어 종교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상원'의 모습으로 소설은 더욱 박진감 넘치게 흘러간다. '상원'은 과연 그들을 구해내었을까.

 

​ 전쟁, 혹은 가장 어려운 시기의 '혹세무민(惑世誣民)'은 비단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는 상술을 벌이고, 누구는 가장 궁핍한 이들을 꼬여 낸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또 다를까. '사이비'라 불리는 종교는 여전히 존재하며, 강매 혹은 다단계로 서민들의 부푼 희망을 이용해 삶을 짓밟기도 한다. 조금 더 가보자면 당장 지금의 일들도 많다. 연예계의 큰 가십이 터지는 순간, 가려지는 무서운 사실들은 그들이 얼마나 교묘한 방법으로 국민을 속이고 있는지 짐작게 한다. 『사건 치미교 1960』라는 작품의 여운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곧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29쪽,

의학이라는 건 지독히도 실체로의 파고듦을 기초로 하는 학문이라네. 치료를 위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약을 개발하는 일도, 살을 찢고 암 덩어리를 도려내는 수술을 시행하는 행위도, 모두가 생명연장으로 향한 실체들이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근간과 근원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이네. 의학은 단순한 장사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세.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의 생명에 숫자로 표시되는 가치를 적용하는 비극이 실현되고 말 테니까.



275쪽,

성훈은 참으로 무섭고 거대한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다. 마치 별 볼일 없는 일상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듯 문장을 나열하는 식이다. 성훈의 어조와 어투는 설명을 시작하고 나서 끝을 맺을 때까지 짧지 않은 동안 한결 같다. 또한 설명 안에서 굳이 상원을 설득하려는 의도도, 혹은 위압적인 분위기도 일절 내비치지 않는다. 그래서 상원은 치가 떨린다. 단순한 두려움이나 분노가 아닌 안하무인에 인간백정이나 다름없는 족속들과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불쾌하기 짝이 없어서 치가 떨렸다. 더구나 해용은 성훈이 설명을 하는 동안 그 옆에서 교만과 우월감에 찬 얼굴을 해서는 암묵적으로 자신을 따를 것을 강요하는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300쪽,

이렇듯 자신의 책임은 전무하고 남의 허물만을 묻고 앉았으니 해결책을 찾기 위한 토의가 진행되기는커녕 근본적인 문제점마저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보건복지부에서 병원균의 정체를 밝혀냄으로 해서 요란하기만 했던 치졸한 토의장이 잠시나마 소강상태를 맞을 수 있었다. 소강상태를 맞았다고 일컫는 근간은, 이들은 당장 눈앞에 닥쳐있는 사태만 어찌어찌 넘기고 나면 또 다시 경박하게만 입을 놀려댈 것이 여실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어쩌면 옛날 나랏일을 보았던 벼슬아치들로부터 유래된 말인지도 모르겠다. 백성의 본보기가 되어도 모자랄 판에 자기 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꼬락서니라니. 예나 지금이나 그곳의 의지는 총명하고 올곧았던 인물들까지 졸부로 만들어버리는 마력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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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이토 씨
나카자와 히나코 지음, 최윤영 옮김 / 레드박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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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부터 어떤 책을 판단한다는 것은 참 미안한 일이지만, 유독 (나를 향해) 강한 아우라를 뿜는 책들이 있다. 내게 소중한 책이 될 것 같은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이 책은 좋아야만 한다"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확 끌리는 그런 책들이 있는데, 『아버지와 이토 씨』는 분명 그 정도의 아우라는 아니었다. 그냥 '좋은' 느낌으로 다가와 한 편의 영화를 본 듯 따뜻한 시간을 보낼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예상이 빗나갔다. 딱 일본의 감성 소설 느낌인 이 책이 뭐가 그리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며칠, 또 일주일이 지날 정도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가족'이라는 소재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 '감성 소설'의 조건과 분위기, 그 모든 것들에서 이 소설은 아주 약간, 한 발짝 정도 물러나 있다. 웃겨지나 싶다가도 진지하고, 독특하다 싶다가도 정말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남자친구와 동거하는 집에 아버지가 무작정 짐을 싸고 들어온다는 설정은 기가 막힌데, 그 뒤에 오는 상황들은 현대의 가족 문제와 아주 닮아있기도 하다. 아버지와 딸의 미묘한 감정, 갈 곳 없이 떠도는 노인들, 가정을 이루는 복잡한 과정을 생각하게 한다. "누가 먼저, 그리고 누가 더 잘못했냐"는 물음이 불필요한 가족 간의 문제가 현실에서도 쉽사리 풀리지 않는 것처럼, 소설 속에서도 아버지의 비밀을 시원하게 터뜨리지 않은 채 그저 결과로만 가족들의 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만약 다른 '가족 소설'이나 '감성 소설'이라면, 비밀을 터놓고, 이해하고, 시원하게 화해! 이런 순서였겠지만, 이 소설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점이 재미있다.)

 아버지가 어딘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딸인 '아야'는 상반된 감정에 고민한다. 언제나 무례하고 티격태격했던 아버지가 맘에 들지 않지만, 그의 존재와 가족이라는 이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그들의 관계와 아버지의 진심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딸 '아야'의 동거남 '이토 씨'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여유로운데, 무례한 아버지에게 따끔한 말을 던질 줄 아는 대담함도 가진 독특한 캐릭터다. 아버지를 향한 딸의 미묘한 감정을 이해하고, 답은 정해주지 않은 채 오로지 정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조언가이기도 하다. "도망가지 않으니까-"라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입버릇은, 어떤 부정적 미래에도 불구하고 딸이 아빠의 손을 잡게 하여주는 짠한 대사가 되기도 한다. 제목의 한 자리를 꿰찰 만큼의 공이다.

 이 책의 작가인 '나카자와 히나코'는 원래 희곡을 전문으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사에 힘이 있고, 장면 장면에 강력한 한 방이 있다. 아버지의 고향 집, 번개에 터져버리는 박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비교적 조용한 소설 속에서 번쩍, 하고 빛난다. 내가 이 소설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영화로도 나온다 하니 또 한 번 이 감동을 즐길 수 있음에 설레는 마음이다.


80쪽,

​상대 좀 해 주라는 마음과, 다시 어디든 나가 버리라는 마음. 상반되는 두 감정이 내 안에 있다. 어느 쪽의 감정이 보다 강하게 말로 스미어 나올까.

91쪽,

"이래저래 우울하던 때에 아이가 세 살 정도 됐을까,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 `이것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고. `육아가 힘든 시기는 대개 오 년 정도로, 그건 긴 인생 중 겨우 오 년이잖아.`하고. 한창 힘들 때에는 잘 모르기 쉽지만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야. 대부분의 것은. 그걸 깨닫고 나니 마음이 꽤 편해졌어. 그 뒤부터는 `기간 한정, 기간 한정`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어."​

​ 설마 간마니와 씨의 입에서도 `기간 한정`이 튀어나올 줄은. 어쩌면 정말로 마법의 주문인 걸까.

136쪽,

똑 닮은 할아버지들은, 그러나 왠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오래도록 살아온 작은 집에서 쫓겨난 개처럼 무료한 듯했다. 조금 전 자유 공간에서 본 여자들이 모두 반들반들 빛나고 생기가 넘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여자들은 이곳에 오는 것을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이지만, 할아버지들은 `강요받고 있다.`는, 그런 느낌.



208쪽,

​"……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말이야, 의미란 게, 세상 모든 일이, 그 한가운데에서는 좀처럼 안 보이잖아? 그 당시에는 `왜 이런 짓을.`하면서 어리석다고 생각하거나 귀찮게 여기기도 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비로소 `아- 그런 의미였구나.`하고 수긍이 간다고 할까, 납득하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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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의 여인
이순원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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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부터 선생을 알아왔다. 고백한 적은 없지만, 선생을 이룬 것 중에 내가 은밀하게 샘내는 것이 있다. 선생의 대관령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있다고 해도 선생처럼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선생은 선생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관령을 말한다."

 

황정은 작가의 추천사가 인상깊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내내 줄곧 그 말에 수긍하게 되었다. 평소에 여러 책을 접하면서 항상 생각하던 것이 있는데, 소설가에게 모든 경험은 극복의 대상이든 소중한 것이든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이다. 이순원 작가의 경우, 그 경험은 '고향'이란 곳에 있으며, 아주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이전에 읽어봤던 작가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첫사랑'과 '고향'은 중요한 코드로 등장하며, 둘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은 동일하다. 되돌아갈 순 없지만 아련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각자의 생활을 겪으면서 잊게 되었던 그것들은, 어느 순간 우연히 물꼬가 트인듯 흘러나온다. 하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또 하나가,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이다. 그때는 첫사랑인지도 몰랐던 '연희'와 대관령을 떠돌았던 기억도, 그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오수도리 산장과 길 아저씨에 대한 기억들도, 그들과 나눴던 모든 대화의 기억들도 '고향'과 '첫사랑'이라는 이름 속에 아로새겨진다. 왜 잊어버렸는지 모를 아련한 기억들과 순정한 시간들은 대관령의 따뜻한 풍경 속에서 그려진다.

 

사랑했던 누군가나 고향의 어떤 사람들이나, 누구 하나 더 부각되는 것은 없이, 작가는 순수하고 다정하게 그 추억들을 차곡차곡 꺼내보인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하고 흘러갔던 것들에 대해 슬퍼하거나 회한하는 마음 없이, 그저 그렇게 지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다독인다. 단 하나 안타까운 시선이라면, '연희'의 아버지이자 한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유강표'라는 존재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던 아쉬움은 소설 속에서 가장 진하게 드러나는 감정이지만, 그것 또한 극복의 여지가 있기에 아주 슬프지만은 않다.

 

과하지 않은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차분하게 쓰여진 글은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읽힐 것 같다. 특히 대관령의 풍경과, 일본의 삿포로의 풍경이 다른듯 겹쳐지는 절경이 일품이었다.

 


 


 

45쪽,
"지금 기자님께서 시간이 순정하다고 하신 말은……."
저쪽에서 말을 하다가 중간에 끊기에 주호도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가 싶어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제가 지난번 삿포로에 갔을 때 연희도 똑같이 그렇게 말했거든요."
"시간이 순정하다고 말인가요?"
"예. 지난번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대관령에서 참 힘들게 자랐어요. 집안 형편이 안 좋아 연희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는데 그래도 그때가 자기한테는 가장 순정한 시간이라고 했어요."
"그랬군요."
"그냥 순정하다는 말은 누구나 쓰는 말이지만 시간이 순정하다는 말은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닌데, 기자님이 그렇게 말하니 지난번에 연희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요."
"듣고 보니 그 말이야말로 순정하군요."


100쪽,
저마다 아버지들이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톱과 자귀와 대패로 아들의 스키를 만들어주었다. 스키 앞머리는 불에 바짝 달구어 힘을 주어 휘었다. 스키에 신발을 끼우는 앞 바인딩은 깡통을 오려서 만들고 뒤축을 고정시키는 뒤바인딩은 철사를 꼬아 앞뒤로 끈을 묶어 신발을 고정시켰다. 스키화는 눈 위에서 신는 고무장화를 사용했다. 검정운동화보다 장화가 뒤축이 높고 든든해 나무스키를 발에 묶기가 좋았다. 양말도 두툼하게 신을 수 있었고, 신발 속에서 발목을 놀리기도 편했다. 스키폴도 대나무로 만들었다.

160쪽,
"열심히 일만 하며 지나가는 시간이나 인생을 즐기며 지나가는 시간이나 다 똑같이 귀한 `그때의 시간`이지. 열심히 일하고 나중에 폼 나게 즐기려 하면 `그때의 시간`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는 거야. 그건 청춘의 시간도 마찬가지고 장년과 노년의 시간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인생은 그때의 시간으로 즐겁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인생에서 다음이란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 접근할 수 없는 과거나 마찬가지의 시간이지.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다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다음에 가면 그건 또다시 그때의 시간으로 접근할 수 없는 다음이 되는 거지."


196쪽,
대관령에는 어느 여인이 입다가 벗어 놓은 흰 치마처럼 겹겹이 눈이 내렸는데, 멀리 바다는 하늘보다 더 새파란 모습으로 겨울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는 트럭에서 내리지 않고 연희만 내리게 했다. 연희가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바다 멀리 엄마를 부를 때 그는 연희가 누구에겐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민망하지 않게 일부러 창문을 더 꼭 닫고 반대편 하늘과 맞닿은 흰 산을 바라보았다. 산이 아무리 험해도 눈이 많이 내리면 산의 전체 모습이 곡선처럼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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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그래피 매거진 8 안희정 - 안희정 편 - 다시 민주주의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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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출간일로부터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때, 20대 총선이 열렸다. 이번 호의 인물이 선거 후보는 아니었지만, 뚜렷한 정치 성향을 가진 현 정치인이었기에 읽고 쓰기에 약간은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치는 어렵고, 정치 이야기는 난감하다. 내게는 특정한 날의 권리 행사, 또는 어떤 부조리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반짝 관심을 두고 마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비판하고 똑 부러지게 구분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정도까지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선거 이후로 독서를 미루고, 좀 더 여유가 있을 타이밍을 고르다가 (결국엔 잊어버렸다가) 이제야 읽게 되었다.

 

 

 

 

'바이오그래피 매거진' 8호의 인물은 충남지사로 재직 중인 '안희정'이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친노' 인사이며, 차기 대권주자로도 거론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를 잘 알지는 못했기에 그동안의 책보다 더욱더 차근차근 천천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본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샛노란 배경 속에서 '친노' 인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7주기란다. 길을 지나면서 플랜카드도 보였다.) 딴소리로 흘렀는데, 역시나 '바이오그래피 매거진'은 인물을 소개하는데 짚어나가야 할 것들을 아주 확실히, 그리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혹자는 '안희정'이 '친노'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과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어서, '안희정'의 일생을 보다 깊이 파고들어 간다. 정치인으로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꿈꾸는 진보주의자로서 중심이 되는 소신을 갖게 된 과정이 그의 인생 이야기에 녹아들어 있다. 그는 운동권 학생에서부터 정치인이 되기까지, 어떤 위인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옥살이도 했다. 험난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러던 와중에도 옳은 것은 옳다고 굳건히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신념을 쌓아나갔다.

 

 

 

 

"우리 현대사 100년만 봐도 그래요. 식민지 시절에 독립운동 안 한 건 잘못됐다고 해야죠. 그런데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너희라고 다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싸우는 거예요. 국가와 독립을 위해 싸운 역사를 더 받들어 주는 게 상식이죠. 자기 집안의 명예나 위신에 해가 되더라도 상식으로 봤을 때 그게 옳다고 얘기해야 하는 거예요. 타인에게 봉사, 헌신했던 사람들의 역사가 그 사회의 정의라고 말하는 흐름을 만들어 줘야 돼요. 이런 토대 위에서 시민과 정치인이 성장하고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야 해요." (99쪽, "상식과 양심이 오염된 실례를 드신다면?" 인터뷰 中)

 

칼럼과 인터뷰가 유독 재미있었다. 칼럼에서는 '안희정' 지사가 표방하는 '더 좋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좋은 민주주의'는 물론 좋고, 긍정적이고, 평화로우나, 너무 이상적이 아닌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정말 나아질 수 있을까, 모든 이들이 고민하고 희망을 갖는 부분들이 편집자의 서문에서 보았던 "독재의 부재가 민주주의는 아니다"라는 문장과 맞물려, 깊은 생각을 갖게 한다. 완벽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더 좋은 민주주의'의 선례가 있었으니, 우리나라는 조금씩 성숙해질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말이다.

 

인터뷰는 여느 때보다 더욱 스릴 있게 느껴졌다. 질문은 역시나 날카롭고 절묘했고, 정치를 넘어 사회적 현상, 개인의 삶, 철학까지 진지한 얘기들이 오갔다. 능수능란한 둘의 대화를 끼어들 틈 없이 숨죽이며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좌희정, 우광재'라 불렸던 평생 동지 '이광재' 전 도지사의 인터뷰와, '안희정'의 청춘을 위한 강의로 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언제나 여운을 남기는 명언들과 함께다. 진중한 이야기가 그득했던 터라 시원하게 소화하기 힘든 이번 호였지만, 평소 깊이 관심 두지 않은 부분에 대해 가까이할 수 있어 기쁘기도 했다. 앞으로 '안희정'이라는 정치인에 대해 더욱 관심 있게 보게 될 것 같다. 좋은 정치인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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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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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이 좋았어요. 조금 의외였지요. 가볍게 생각했는데 진지하게 나와버려서. "청춘은 긴 터널이다. 누구나 눈을 꼭 감고 싶어질 정도로 밝은 빛을 향해 달리고 있을 터지만, 터널 한가운데에서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저 마구 달리는 이름 없는 영혼인 것이다." 그러니까요. 이름 없는 영혼, 나비와도 같은 청춘들이 주인공이고요. 아주 풋풋한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그렇지만 왜 '취하지 않아'라는 말이 들어갔냐고요? 이 부분은 살짝 골 때립니다. 주인공이 '추리'를 좋아하는데 착각을 한 나머지 '추리 연구회가 아닌', 술독에 빠지는 '취리(醉理) 연구회'에 들어가게 된 거죠. 웃기는 건, 술독에 빠져 즐기고 즐기는 그들에게 미스터리 같은 사건들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소설은 이 작은 사건들을 5편의 연작 소설로 담았어요.

 

추리를 좋아하는 소녀, '조코' 그리고 어딘가 미스터리한 선배 '미키지마'의 살짝살짝 건드리듯 풋풋한 로맨스가 보이며, 기상천외해 보이는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아니, 사건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해프닝' 정도로 할까요? 이 책이 추리 소설이 아닌 로맨스이므로, 그들이 소속된 동아리가 '추리 연구회'가 아닌 '취리 연구회'이므로, 어떤 살인 사건이나 무서운 사건들이 아니라 어쩌면 진짜 있을법한 이야기나 해프닝 정도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조코'와 '미키지마'의 콤비는 어떤 추리소설의 콤비들 만큼이나 잘 어울리지요. 캠퍼스를 배경으로 잡은 만큼, 그들의 유쾌한 장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깊게 몰입할 수는 없었던 게 아쉬웠어요. 청춘 연애 미스터리라는 신선한 장르는 좋았지만, 어느 하나 확실히 잡아주는 게 없어서 애매한 느낌이었지요. 신선한 조합이 될 거라는 생각에 기대감을 갖고 있었으나, 그 기대감은 싱거워졌습니다. 그리고 묘하게 일본틱한 대사들은 읽는 내내 툭툭 걸렸지요. 예를 들면 이런 부분들입니다.

 

첫인상은 '휴일에 골프 치면서 땀을 빼고, 연인에게 바비큐를 강요할 것 같은 아웃도어 착각남'이라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경박한 채로도 어른이란 게 될 수 있구나.'라는 말의 대표 격인 오라를 뿜어내고 있어서, 나는 지레 거절 모드에 돌입했다. (106쪽)

 

꽤나 특수한 짬뽕이 아닐 수 없다. (113쪽)

 

청춘의 통통 튀는 상큼함을 표현했던 것일까요. 그런 면에서 번역은 아주 놀랍게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합니다만, 진지한 부분은 또 너무 성숙하리만큼 진지해서 가벼운 장면이 더 어색하게 보이는 함정이 있었어요. 작가가 일본에서 출판사와 재단이 협력해 주최하는 '애거서 크리스티'를 수상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좋은 문장들이 많이 보여서 더 아쉬운 마음이었습니다. 술에 취한 듯, 사랑에 취한 듯 복잡하고 풋풋한 청춘의 감정을 그려낸 부분은 참 좋거든요. 가볍게, 술 한잔하듯 읽어내려 갔다면, 괜찮았을는지.

 

 

9쪽,
"조코, 인생에 뭘 바라니?"
선배가 그날 내게 그렇게 묻지 않았더라면 터널 도중에서 맨홀을 찾아내 시궁쥐와 놀며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스튜어트 서트클리프처럼 거기에 목숨을 놓고 잊어버리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자유라는 도랑에 빠져 죽을 권리를 방기했다.
선배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한 것이다.
"모르겠어요, 아직 아무것도."
"음, 그럼 말이지. 어쨌든 1년간 우리에게 맡겨보라고."
"뭘 말인가요?"
"네 인생을."

101쪽,
"취기란 게 다양한 곳에 있는 거로군요."
"사람한테도 있지. 세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어. 취하는 인간과 취하게 만드는 인간. 혹시 네 스스로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인간이라고 교만을 부릴 테면, 무엇으로 취하게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무엇으로 취하게 만드는가.
생각하고 있자니, 창밖 풍경에서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하천 부지를 넘어 녹음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130쪽,
그러한 미주(美酒)를, 빨대로 마신다니. `아아 죄송합니다.`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빨대로 쪽쪽 빨아 마시더라도 그 부드러움이 변하지는 않을 터라고 벌써부터 감동에 젖고 말았다. 물보다도 마시기 쉽고, 입속에 물이 있는데도 물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기분 좋은 게 있었다.
아무래도 혀가 내 자신이 된 것처럼 `이 순간 혀를 뽑히기라도 한다면 반드시 죽고야 말겠지.`라는 영문 모를 생각을 하는 건, 다시 말해 진미의 한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아아, 이건 바다다. 지금 나는 바다에 있다.

189쪽,
"목적이란 게 때로는 달처럼 구름 너머로 숨어 버리곤 하잖아. 인간이라는 것도 아무리 발아래를 똑바로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문득 어떤 타이밍에는 뭘 위해 살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생물이라고. 그래서 아마도 달을 보는 거겠지. 달이 뜨지 않는 밤에는 `그런 거지`라고 포기할 수 있고, 또 달이 뜬 밤에는 `좋아, 그렇다면 나도!`라고 할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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