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다식한 신학자이자 독서광인 한 선배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한음 옮김, 김영사 펴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싸구려에 대한 비판치고는 넘치는군."

그리스도교를 필두로 하는 종교의 무례한 행태를 놓고 그 종교에 속해 있는 많은 사람들도 불편해한다. 최근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극단주의 테러리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종교의 모습은 비판받아 마땅하며, 실제로 안팎에서 무수한 비판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특정 종교가 사회적으로 특권을 누리는 사회에서 그 특권에 대해 사람들은 대체로 무관심하다. 도킨스가 말하듯이 일부 유럽 국가에서 시행되는 종교세나, 그리스도교 학교나 교회에서 행해지는 분별없는 종교 교육 등에 대해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민사회는 그다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한국의 경우 특히 그리스도교 계통 학교에서 수행되는 채플 의무화나 교직원 채용 시의 종교 강요 등에 대해 법은 대체로 종교재단의 편을 들고 있다. 또 대개의 시민사회는 이러한 인권 침해 문제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상식만으로 종교 비판은 충분치 않다. 교육 전문가도 발언할 필요가 있고, 노동 전문가도 문제에 끼어들어야 한다. 또 법 전문가의 식견도 요청된다. 나아가 사회학적, 정치학적, 역사적, 신학적 분석을 요한다. 또 시민사회 일반이 상식만으로도 비판이 가능한 사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그런 무례함이 종교 제도로 정착하게 되는 과정과 배후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도킨스나 스티븐 호킹 같은 과학자가 이러한 종교 비판에 전문가의 의견을 피력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원론적인 얘기를 하자면 분명 과학자의 비평은 중요하다. 한데 도킨스나 호킹의 비평은, 내가 보기엔, 과학이 끼어든 사례로는 그리 좋은 예가 못되었다.

그들이 비판한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에 한정된다. 게다가 그 대상은 창조론에 국한되어 있다. 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신은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 중력 법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호킹의 주장이나, 자연 선택의 과정에서 진화한 인간의 상상이 신을 창조한 것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이 염두에 두고 있는 상대가, 겨우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성서의 진술을 직설적 어법으로 이해하려는 대중의 잡설로서의 창조론이나 그 연장선상에 있는 창조 과학의 주장이다.

위에서 인용한 '싸구려에 대한 비판치고는 넘친다'는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처럼 최고의 명성을 가진 특급 과학자가 그토록 거창하게 최고급 정보를 동원해서 반박한 것이 겨우 이것이냐는 얘기다. 별의별 시답지 않은 신학이 난무한 그리스도교 학계의 사정에서, 그나마 그런 시답지 못한 신학 축에도 못 끼는 잡설에 지나지 않는 창조관이 그네들이 논박하고 있는 주요 대상이라니….

한데 그들은 이런 반론으로 그 이상의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허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대중의 잡설로서의 창조론을 공박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교 전체를 부수어버릴 수 있다면, 아마도 이 종교는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 제도로서의 그리스도교나 신학 담론으로서의 그리스도교, 혹은 대중의 신앙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어느 것도 그런 잡설에 대한 비판 정도로 흔들릴 만큼 유약한 생명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런 질긴 생명력이 대체로 역사 속에서 바람직하게 작용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서투른 비판이 좋은 비판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신을 위한 변론>(카렌 암스트롱 지음, 오강남 감수, 정준형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한글 번역본으로 550쪽을 넘는 방대한 분량의, 카렌 암스트롱의 책 <신을 위한 변론>(오강남 감수, 정준형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은, 비록 10여 쪽 분량만을 도킨스를 위시한 최근의(contemporary) 무신론에 할애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 책 전체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그는 서양의 근대(modern)가 이성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는 생각의 제도를 발전시킨 결과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과 그 밖의 몇몇 최근의 무신론자들의 빗나간 비평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종교에 대한 이성주의적 인식의 제도에 대해 그는 두 가지 형태의 빗나간 비판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근본주의적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의 무신론이다.

근본주의는 근대적 이성의 차가움에 대해 뜨거운 이성, 그의 표현으로는 "머리가 아닌 가슴의 종교"가 지향하는 이성을 신앙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뜨거운 이성의 종교는 대중의 열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또 그런 지식인의 담론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것은, 그에 의하면, 뮈토스(신화)를 세속적 로고스(합리성, 이성)로 환치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20세기 초 독일의 철학자인 빌헬름 네슬레가 말했다는 저 유명한 명제, 서양의 지성사가 뮈토스가 로고스로 이행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거의 근대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다. 같은 시기에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성서 해석(근대적 이성의 요소)은 성서 속의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불트만의 탈신화화 프로젝트는 뮈토스로 상징되는 전근대를 제거하는 작업을 통해 근대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내포한다. 근대는 뮈토스의 배제를 통해 구현되는 인식의 질서인 셈이다.

한데 카렌 암스트롱은 뮈토스가 로고스로 이행하면서 근대에 이르는 서양 지성사적 인식의 체계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에서 해석의 가능성이 아니라 '해석의 제약'을 본다. 그는 이러한 해석의 제약은 '진리의 확실함'에 관한 강박증과 관련이 있다. 직관과 상상의 세계가 풍부한 담론 형태인 뮈토스를 견디지 못해, 탈신화화 프로젝트라는 그것의 제거 작업을 하는 것, 그 속에는 저 모호함의 세계가 아니라 딱딱한 확고부동한 사실에 관한 세계만 남아 버렸다.

모호함은 경계가 분명치 않음을 의미한다. 해서 뮈토스가 담고 있는 생각의 세계는 이웃과 공존하는 데 있어 경계를 두고 상호불침범의 계약을 맺어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웃의 일부이기도 하고 이웃이 나의 일부이기도 하는 감정, 즉 공감의 감정을 통해 타자와 섞인 자아를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타자와 내면적으로 엮인다는 것은, 타자의 배제를 전제로 하는 근대적 주체성과는 다른 주체성을 내포한다. 성서에서 그리스도의 주체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케노시스'(비움)를 그가 뮈토스의 세계관과 관련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다른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일찍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주 초기부터 예수는 하느님이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 온 분이라는 해석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데 그리 하려면 신은 자기를 해체해야 한다. 즉 신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를 통해 주체화된 신성에 관한 믿음을 해체하지 않으면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경계의 해체를 지칭하는 용어를 그리스도교는 '케노시스'라고 표현했다. 번역하자면 '비움'이다.

그는 종교란 바로 이렇게 비움의 세계관, 자기 해체의 세계관을 수련을 통해 자기 몸에 새기는 담론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뮈토스적 요소를 더욱 발전시킨 삶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한데 근대주의, 뮈토스의 제거를 통한 로고센트리즘은 종교조차 그렇게 변질시켰다. 해서 불트만처럼 근대주의에 비판적인 실존주의적 성서학자조차 성서에서 뮈토스를 제거해야만 이해 가능한 성서, 이해 가능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의 제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한편, 근본주의는 이러한 근대의 산물이다. 앞서 말했듯이 차가운 이성 대신에 뜨거운 이성을 강조한 것이 근본주의라는 것이다. 이 둘은 진리관의 관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보다 덜 성찰적이고 보다 더 행동주의적인 것, 그런 점에서 근본주의는 좀 더 통속적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그리하여 그에 의하면 해석적 가능성으로서의 신앙을 경직된 확실함의 신념, 더 행동주의적이고 덜 성찰적인 확실성의 신념으로 전환시킨 신앙, 그것이 근대적 과학주의와 결합하면서 나타난 또 하나의 근대주의가 바로 근본주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확실함에 대한 과도한 신념은 도킨스 유의 최근의 무신론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적어도 종교를 비판하는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과학적 가설로 설명될 수 있고 증명 가능하다는 자세를 취한다. 잡설로서의 창조관이나 창조 과학을 비평하는 데는 그리 진지한 과학적 논평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대한 반론이 도킨스처럼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직결되는 것은 독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 속의 창조 개념을 과학적으로 반증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충분히 해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서의 창조 개념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려 했던 창조 과학에 대한 반론일 뿐, 창조 개념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의하면 근대 이전에 창조는 뮈토스, 즉 신화적 언술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근대주의적 창조 과학과의 언술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무수한 해석 가능성으로 이해되었고 신앙 속에서 사람들의 삶의 다양성으로 채택되었다. 그것은 결코 확실한 하나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근대적 잡설로서의 창조관이나 창조 과학은 그것을 하나로 환원시켰고, 또 무신론은 그것을 허구로 환원시켰다.

이러한 확실성의 독단을 양자는 공유한다. 하여 카렌 암스트롱은 이 둘을 근대적 쌍생아로서의 근본주의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억견에 대한 반론으로 그는 이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분량만 방대한 것이 아니라 다루는 내용도 방대하다. 우선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 유대교 등 유일신 종교들만이 아니라 유교나 도교, 그리고 불교와 힌두교에까지 생각의 지평을 넓힌다. 이들 종교들은 '긍극적 실재'에 대한 다른 표상들을 발명하고, 거기에서 다른 신앙 제도들을 발전시켰다. 그런 점에서 이들 종교들은 분명 다른 양상이지만 서로 공통된 문제의식을 갖는다. 또한 그가 다루는 시간의 범위는 인간의 종교심이 최초로 형성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1만7000년 전 프랑스 도르도뉴의 라스코 지하 동굴 벽화 속에 담긴 제의 흔적에서부터 성서 시대, 고대, 중세, 그리고 근대 초기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기간 동안의 종교적 현상과 운동, 그리고 그 이해들을 포괄한다.

그런데 이 모든 설명들은 하나의 수렴점을 갖는데, 그에 의하면 종교란 공히 수련(discipline)에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잡설에 불과하지만 창조론을 둘러싼 논쟁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논점의 축이 교리에 있음을 보여주는데, 반면 뮈토스로서의 창조 이야기는 사람들의 삶의 다양한 수련을 통해 이 이야기가 여러 방식으로 간직되어왔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수련으로서의 해석과 이해는 확실함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모호함을 견뎌내고 모호함과 이웃하며 살고 모호함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는 것과 관한 신념과 관련된다. 그런데 근대는 전근대성에서 뮈토스를 제거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수련이 사라진 종교, 이성으로서의 종교만을 보존해왔다는 것을 그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도킨스 류의 최근의 무신론에서 생각이 시작된 것이겠지만 더 나아가 서양 근대주의를 비판적으로 재조명하는 데까지 생각의 지평을 넓혔다. 도킨스가 종교의 근본주의를 종교의 차원에 한정해서 보고, 심지어 종교 자체로 동일시해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데 반해, 그는 종교의 근본주의를 서양 근대성이라는 문명론적 맥락에서 읽어내고, 나아가 도킨스 같은 주장도 그러한 문명론적 지평의 차원에서 해석해내는 혜안을 제공한다. 하여, 앞서 말한 것처럼, 도킨스가 종교 비판 논의에 끼어든 과학자의 사례로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경우라고 한다면, 카렌 암스트롱은 종교학자로서 매우 훌륭한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글을 마감하면서 그의 논지에 대해 경의를 표함과 아울러 유감 또한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뮈토스와 로고스의 이분법적 틀에서 문명사를 읽어내고 종교의 가능성을 발견해내는 그의 논지는, 말한 것처럼, 종교란 본질적으로 뮈토스적이라고 보면서, 타자를 향한 자기 비움의 수련(discipline)에 그 의의가 있다고 본 것에 대한 유감이다.

가령 예수를 보자. 알려진 일화 하나는 예수가 안식일에 손이 굽은 장애인을 고쳐주고 바리사인을 비난하며 말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진리의 확실성에 관한 신적 과시 행위라기보다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슬픔과 아픔에 다가가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카렌 암스트롱이 말하는 뮈토스적 행위가 예수에게서 드러난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예수는 그 사람의 경우에서 일반의 진리를 말하기보다는 그이를 주목하면서 그이의 삶의 행복과 관계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그가 그 사람을 많은 이들이 보는 자리, 곧 회당 가운데로 불러내고 그를 치유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 사람은 응급 환자가 아님에도 바로 그날,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었다. 이것은 예수가 공공연히 거대한 진리 체계에 대해 도전한 것이며, 그 체계의 전복을 선언한 것이다.

예수는 그 시대의 진리관과 불화한 존재였고, 그 시대의 정의를 둘러싼 투쟁의 장에서 하나의 관점을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그이에게는 사람 하나하나의 아픔과 대면하는 친숙한 종교 지도자의 모습이 있지만, 동시에 그 시대의 체계를 해석해내고 그것에 도전장을 던지는 합리적 해석가의 면모 또한 엿보인다. 또한 그는 일단의 저항 조직의 지도자로서 조직 운용에 관한 합리적 해석을 통해 행보를 조직해 갔음을 복음서에서 엿볼 수 있다.

뮈토스와 로고스를 나눈 것은 근대의 서양 지성사를 해석해 내기 위한 편의적 분류법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대표하지 않는다. 암스트롱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 둘이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다. 그럼에도 종종 그는 도처에서 그 이분법을 생각보다 명료한 것처럼 활용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종교를 합리적 계산과는 분리된 공감과 비움의 수련과 너무 과도하게 연계시킨다. 하지만 위의 예수에서 보았듯이, 종교는 뮈토스적인 동시에 세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이성적 방식이기도 했고, 그러한 해석의 틀에서 행동을 조직해내는 합리성의 원리이기도 했다. 해서 종교는 우리 시대의 합리성을 비판하고 대안을 향한 실천에서 하나의 영역을 담보하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카렌 암스트롱은 그러한 정치·사회적인 신앙적 실천에 앞장서 있는 종교 운동보다 내면적 수련과 봉사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치·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종교의 선각자들 가운데는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확실성에 대한 강박증보다는 자기 비움과 타자성의 신념이 넘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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