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자고 나니 어제 나를 가득 채웠던 그것은 우울이 아니라 슬픔의 일종이란 걸 알았다.   



어제, 허기를 못 느꼈지만 먹어야 한다는 권유 때문에 마지못해 국화빵을 입속에 구겨 넣는데 침샘과 눈물샘은 동시에 자극되는 것인지 씹기와 함께 눈물도 났다. 새가 고단한 날개를 쉬게 할 나뭇가지 하나를 찾는 것처럼 마음 둘 데 하나 없는 나는 휘적거리며 복도를 지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꽂히는 데가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 한 장. 무슨 사생대회라도 했는지 아마추어의 서투르면서도 순수한 터치가 뚝뚝 듣는 서양화 몇 점이 복도 벽을 따라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어느 그림 한 장 건너편에 우뚝 섰다.  


그림 속은 청명한 초하의 농촌 풍경이었다. 그림의 삼분의 이쯤은 야트막한 야산이고 그 아래 산 모롱이를 따라 논이 보였다. 논에는 모 심기한 벼들이 땅 냄새를 맡고 초록으로 자릴 잡아가고 있었다. 자세히 볼 수록 햇빛을 받는 벼의 녹색 톤이 싱그러웠다. 초록에 청록을 섞었는데 희뿌윰하게 빛이 반사하는 느낌이 들도록 흰색을 적절히 잘 배합한 것 같았다. 그림에서 논은 그다지 비중이 있는 것도 아닌데 벼를 저렇게 세심하게, 생명력 있게 표현하는 걸로 봐서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은 자기 논에 벼농사가 있던 사람일거란 막연한 추측을 했다. 소나무와 잡풀 사이로 난 산길에도 마음이 갔다. 저곳이 내 고향도 아니고 내 논도 아닐지라도 저 길을 따라 발목이 시도록 걷는다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저 맘 때 찔레꽃이 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저 길을 따라 걷는다면 달근한 들꽃 향기와 풀 냄새가 가득하겠지....지금 그림에선 한없이 따스하게 보이는 빛살도 성가셔서 챙 넓은 모자가 필요할지도..... 


"후~우~아......" 


나는 폐를 한껏 부풀려 들숨을 마시고 천천히 날숨을 내쉬고 아쉽게 발걸음을 뗐다. 그림을 좀 더 보고 싶었지만 '남들보기 이상하게 보일까봐'하는 멋쩍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서 있었던 건 뭐란 말인가. 사람들은 각기 제 일에 바빠 내가 서 있던 말던 관심도 없었는데. 그때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고즈늑한 어느 시골 풍경에 고달프고 슬픈 내 마음을 걸어놓고 버거워도 현실로 돌아올 힘을 얻은 것이다. 20110329ㅇ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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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3-2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 슬픔의 차이는 뭘까요.
그림 속의 시골 풍경을 말씀하셨는데 마치 그곳에 직접 다녀오셨다는 말씀처럼 읽혔어요. 그 그림이 제 눈 앞에도 어른거리는 것만 같아요.
저도 요즘 아무때나 눈물샘이 자극되어 스스로 꾸짖고 있는데 진주님 글을 읽으니 그게 꼭 꾸짖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침샘 자극될 때 눈물샘은 좀 멈춰주었으면 좋겠어요 ^^

진주 2011-03-30 12:00   좋아요 0 | URL
우울과 슬픔의 차이..
제 경우엔 말이죠,
평소보다 달콤한 음식이나 밥이 더 먹히면 그건 우울이고요,
목구멍이 자물쇠를 채우고 도무지 음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건 슬픔이더라구요.

비로그인 2011-03-30 0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착하셨다니 다행이로군요. 봄이 빨리 와서 개나리도 보고 목련도 봤으면 좋겠네요. 무엇보다 그 화사한 햇살이 고프지만 말예요..

진주 2011-03-30 12:12   좋아요 0 | URL
그 그림이 입상작으로 뽑혔던 이유를 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어요. 전체적으로 환하게 쏟아지는 빛을 묘사하면서도 손길이 좀 더 필요한 벼는 세심하게 어루만졌고, 신록의 싱그러움 중 일부는 약간의 음영을 넣는 등의 빛 조절을 잘 했다 싶어요. 태양빛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모체이죠. 어머니 마음은 한결같아서 전체적으론 공평하지만 약한 자식에게 한번더 쓰다듬어 주는 법이니까요.
아..그리고 여긴 벌써 개나리 목련 다 폈어요. 노란 등을 켠 것 같이 환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