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압정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詩 : 이문재



* 위 사진은 하도 많이 올려서 민망하기까지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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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3-17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눈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렇게 작은 것에서 우주보다 큰 진리를 잡아내는 걸 볼때마다 마냥 부럽습니다. 퍼갈께요.^^

파란여우 2005-03-17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들레를 노래하는 시인의 정서와 개망초꽃의 사진이 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플레져 2005-03-1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 때 마다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새벽별님.
저두 감탄을 했다지요. 시인의 눈을 파는 가게는 없겠지요? 잉크냄새님.
파란여우님의 댓글도 이 시와 잘 어울립니다.

icaru 2005-03-1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지만 사진 좋으네요^^
이문재 시인하면... 김형경이 생각나요... (제가 너무 가십에만 강한 걸까요~ )
제가 갖고 있는 민들레 올려요~ 저도 민들레 얘기 나올 때마다 꺼내보는 사진인데.. 민망할까요^^;;



플레져 2005-03-19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코 민망하지 않아요. 고마워요, 복순이언니님...^^ 가끔 저두 써먹을래요~

icaru 2005-03-1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진도 이 시에 어울리죠오~ ??

플레져 2005-03-19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