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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훔친 사람은 징역에 처한다.”라는 법은 동등하지 않다.

부자는 빵을 훔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법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이처럼 개인이 갖는 권리의 내용은 그 개인이 속해 있는 성별,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인권은 사회의 권력 관계와 관련 없이 추상적, 초월적으로 본래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구성되고 쟁취되는 경합적 가치이다. 인권은 언제나 피억압 집단의 개입을 기다리는 과정적 개념인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죽은 것이다. 살아있으려면 경계에 존재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 개념을 뜨뜨미지근한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아주 예민하고 민감하게 느껴야 하는 것이고, 융통성을 발휘 해야 하는 것이다. 양 극단에 치우친 생각이 조화로운 세상에 방해가 된다고 느낀다.



"빵을 훔친 사람은 징역에 처한다."라는 법은 동등하지 않다.
부자는 빵을 훔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법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이처럼 개인이 갖는 권리의 내용은 그 개인이 속해 있는 성별,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인권은 사회의 권력 관계와 관련 없이 추상적, 초월적으로 본래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구성되고 쟁취되는 경합적 가치이다. 인권은 언제나 피억압 집단의 개입을 기다리는 과정적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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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실존을 '시지프 신화'를 예를 들어 설명했다.


신들은 시지프에게 끊임없이 산꼭대기에 바위덩어리를 굴려 올리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돌덩이는 무거운 무게로 인해서 그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하였다. 무의미 하고도 희망 없는 일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는 것이었다.


시지프 신화에서 큰 바위를 산 위로 끊임없이 올리는 것은 부조리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삶,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이다. 신은 의미 없이 바위를 옮기는 것을 통해 고통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카뮈는 여기서 신의 결정을 조롱한다. 끊임없이 돌을 옮겨야하는 무의미하고 힘든 영겁의 고통, 즉 부조리를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을 옮기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랬을 때, 돌을 올리는 행위는 좌절과 절망의 행위가 아니라 의미 있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돌을 옮겨야 한다. 내일도.. 모레도.
하지만 매일 돌을 옮겨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의미를 부여한다면 우리는 극복할 수 있다. 무의미함을, 부조리함을.


인간은 ‘삶이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없다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고,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으니까.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의 글이 생각난다.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중략)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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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종종 내 다이어리 페이지를 채웠다.


신체 위에 체현된 가치는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 준다는 생각에, 나는 외모꾸미기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서 살아남기 위함.' 이 이상의 가치를 찾고 싶었다.


"어떻게 차려입어야 자신의 미적 욕구를 실현하면서도 예술과 철학과 연기를 사랑하는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지 못했고, 나의 스타일과 정신은 부조화를 이루며 정체성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 책을 발견 했을 때는 마치 보물섬을 찾은 기분이 아니었겠나. 


-나의 'spirit'을 담은 스타일-을 찾는데 도움을 얻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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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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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전차'를 읽으면 자연스레 우디앨런의 블루 재즈민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화려한 삶을 잃은 모습, 하지만 그녀에게 남아있는 욕망, 현실과 욕망의 괴리감으로 점점 히스테릭해져가는 그녀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에 나오는 블랑시와 많이 닮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섬세한 연기가 아직도 내 뇌리에 남아, 블랑시와 오버랩되며 그런 감정을 표출하고 싶은 나의 욕망도 일깨워 주었다. 
조만간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재스민 필사연기를 도전할 것이다. 


한국에는 여성의 섬세한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아 늘 아쉽다.
예쁘장한 외모가 아니면 여배우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환경이, 배우가 연기력이 아닌 외적매력에 집중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 같아 또 아쉽다.


이런 환경속에서도 외모보다는 배우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성장시키도록 연기를..연극을.. 무대를.. 더욱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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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 법정 잠언집
법정(法頂) 지음, 류시화 엮음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누구나 고독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고독과 마주할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자유를 찾고 능동적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정리하자면,

-고요속에 나를 내던질 것.
-그 속에서 나를 들여다 볼 것.
-나의 추함을 발견하더라도 피하지 말 것.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찾을 것.
-소유와 소비에서 자유로워 질 것.
-능동적인 삶을 누릴 것, 마음의 주인이 될 것.

`귓속의 귀에 대고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로운 감옥에 비유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 있고
텔레비전 수상기와 오디오가 놓여 있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이런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날 때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ㅡ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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