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을 위한 은행가>라는 칭송을 받던 유누스 박사에 대한 불편한 얘기를 처음 전해들었던 것은 그 나라 출신 이주노동자 S를 통해서였다. S에 의하면, 최초 유누스 박사의 선행은 아름답다 할 수 있을지라도 이후의 그의 행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후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으려고 그가 알고 있는 전세계의 유력 정치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그게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세금을 냈는지, 내지 않았는지.. 하여튼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대출을 하면서 유명해진 그 은행은 방글라데시에서 거대한 사업체가 된 것은 분명해 보였다. 


2009년, 나는 S와 함께 방글라데시를 방문했다.

그리고 수도 다카에 있는 그라민은행 본점을 찾아갔다. (가난한 사람들의 거리를 지나 마침내 도달했던 건물은 얼마나 삐까뻔쩍하던지.. 1층 로비에 꾸며진 유누스 박사의 노벨평화상 소개는 또 얼마나 거창하던지..)

그곳에서 담당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대개의 NGO들은 단체를 방문하는 해외 NGO활동가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최소한 나의 경험은 그러했다. 우리 단체를 방문했던 활동가들에게 돈을 요구했던 적이 없고, 마찬가지로 외국의 단체를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활동에 대한 존중, 존경의 의미로 기꺼이 시간을 내어 안내하고 도움을 준다. 그들을 위해 방문할 곳들을 섭외하고 직접 안내하고 심지어 통역을 해주더라도 그 활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거나 받아본 적이 없다. 간혹 단체의 활동에 감동한 이들이 후원금을 주거나 단체 기념품을 선물로 준 적이 있고, 나 또한 해당 단체의 활동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약간의 후원금과 선물을 전달한 기억만 있다.

그래서 그라민뱅크의 담당자가 A활동, B활동, C활동을 참가할 때 각각 00~000$를 내야 한다고 할 때 당황했었다. 나 때문에 일부러 조직하는 활동이 아니라 그들의 평소 활동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방문하는 것인데 교통비 등의 실비가 아니라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참가비가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마치 놀이동산을 방문할 때 입장료를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돈을 내더라도 가보고 싶다 했지만 단체의 일정상 불가능해졌다. 그들끼리 설왕설래할 때, 나는 잠시 사무실 밖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그때 그녀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외국에서 온 두 명의 여성들이 "또 저들이 거짓말을 하는군" 하는 것이다. 그 여성들은 당시 그라민뱅크에서 인턴쉽 활동을 하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를 물었지만 자세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우연히 이 책이 나온 걸 봤다. 시간 날 때, 천천히 읽어봐야 겠다. 조만간 한가해질 것 같으니 책 읽을 시간도 덩달아 생길 듯하다. 모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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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통해 전정식 작가가 한국에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한달 내내 북콘서트가 열리나 봅니다.

서울에서만 열리는 건지, 다른 곳에서도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 출판사에 문의했더니, 정독도서관 주관 행사랍니다. 서울에서만 한다는 (제겐 너무) 슬픈 소식.


서울 계시는 혹은 가실 분들은 참고하심 좋을 것 같아요.

저자 사인회도 한다고 하니.. 책 가진 분들은 싸인 받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혹시 안 보신 분들은 이참에 함 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책이 번거로우신 분은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나보실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영화보다 만화책이 더 좋았습니다.














참가 신청 및 문의 02-2011-5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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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4 12: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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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4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4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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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4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재국가에서... 진실은 위에서 명령한 한 가지밖에 없다. 신문의 내용이 모두 똑같다.
...독재국가에서는 진실을 마음대로 바꾸고, 과거를 되돌려 역사를 다시 쓰고, 사실을 왜곡하고 삭제하고 거짓을 첨가하는게 합법적이다. 프로파간다가 정보를 대체한다. 그런 국가에서 당신은 권리를 지닌 시민이라기 보다는 신민이다. 또한 당신은 광적인 충성과 맹종을 강요하는 국가(그리고 국가를 대표하는 독재자)에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쁘리모 레비,27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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퀼트나 옷을 만들기에는 타고난 재능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손은 느려터졌고, 성질은 더러워서 대충 넘어가지를 못하니 홈질 하나 하면서도 몇번씩이나 뜯어버리는 통에 붙들고 있는 시간에 비해선 만들어놓은 물건들이 얼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느질은 내 좋은 취미생활이 되었다.

내가 전하는 애정과 위로의 방법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도 꼭 나아서 여행가라며 여권지갑을 만들어 선물했었다.

언니가 사용했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내가 연구년으로 떠나 있는 동안 언니는 여러번 비행기를 탔지만... 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그 지갑은 새언니에게 남겨졌다.

안타까운 건.. 벌써 바늘귀에 실을 꿰는게 어려워졌다는 거.

나이가 드는 것처럼 노안이 되는 것도 인간이 어쩔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그냥 좀 쓸쓸하다. ㅎㅎ


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떨어진 단추 달기' 수준을 넘어가는 바느질을 하지 않았다.

가사 시간에 했던 바느질은 글쎄 뭐라고 해야할까? 새가빠지게 만들었지만 절대로 입을 수 없는 촌스러운 옷들의 행진 같았다. 정말 대책없는 왕퍼프 소매 블라우스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작업했는지.. 완성하고 나서 절대로 입어본 일이 없는 그 블라우스는, 그래도 오랫동안 내 서랍장에 놓여 있었다. 대단한 업적인양 생각하다가도 입지도 못할 옷을 만드느라 그토록 오랫동안 고생했다니 쯧쯧쯧..하면서.


교과서에 적힌 대로 2밀리미터 간격으로 촘촘하고 꼼꼼하게 작업해갔더니 되려 가사선생님이 탄복할 정도였다. 웃긴 건 30년전에도 엄마가 대신 바느질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었다는 거. 바느질할 시간에 공부하라고 했단다. 우리 엄마는? 내 일을 엄마가 도와준 적은 글쎄 거의 없는 것 같다. 이게 자식 많은 집 공통점이라고 할 테지만 큰언니나 동생들은 엄마 손이 많이 거쳤던 것을 알고 있다. 


6년쯤 전이었나? 옷 가격도 만만찮고 내 몸에도 안 맞고.. 차라리 옷을 만들어 입겠다며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러다 옷만드는 재미,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데서 오는 뿌듯함을 알게 되었다.

그때쯤.. 알게 된 이가 있었다. 출장갔다가 우연히 그가 연 퀼트 클래스에 참가하기도 했고, 그가 첫번째 책을 냈을 때는 내 일처럼 기뻐하면서 좋아라 했던 기억이 있다.

그가 두번째 책을 냈다. 그녀를 닮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소품들 패턴이 담긴 특별한 책.

비슷비슷한 퀼트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에 비하면 그녀의 작품들은 확실히 그녀의 이름이 오롯이 새겨진 그녀만의 것이다. 

부디 이 책이 대박나서 더 이상 월세 걱정 않고 그녀가 좋아라 하는 바느질을 오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녀의 딸과 오랫동안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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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고 알게 되고 함께 활동했던 시간은 만 2년 2개월 정도였다. 

전포동 초라한 건물, 4층 화장실 옆 자투리 공간에 작은 책상 2개를 놓고 활동을 시작했던, 부팅하는데만 몇 분이 걸리던 낡은 컴퓨터가 사무실의 전재산인, 그러나 뚱뚱한 꿈을 품고 있었던 작은 NGO. 그 곳을 찾아온 거의 첫번째 손님이 김형률씨였다.


따스한 봄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목에는 손수건을 두르고 점퍼를 입고 무거운 가방을 매고 나타났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NGO에 그는 요구했었다. 한국원폭2세 환우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도와달라고. 그를 만나고 나는 히로시마를, 나가사키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피해자들 내부의 복잡다단한 사정과 내부의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 분노하게 되었다.

그의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쉽게 그의 일을 나와 나누려 들지 않았다. 수고스럽고 힘들어도 그는 늘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사물을 챙겼고, 반복됐던 입원으로 늘 병원비가 부담이었지만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돈은 받지 않았다.


그는 정말 그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

단 2명의 회원뿐인 조직인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인정할 수 없다던, 당시 보건복지부 담당과장의 비아냥에 그 자신이 환자이면서 직접 다른 환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가 급작스럽게 서거했을 무렵, 한국원폭2세환우회에는 60명이 넘는 환우들이 가입한 상태였다. 


그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고, 자신의 목숨과 바꿔 한국사회가 잊고 살았던 한국원폭피해자들, 그 2세, 3세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무참히 그를 보내고 남은 이들은 그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이런저런 활동들을 해오고 있다.


다시 5월, 그를 보내고 10년이 흘렀다.

그가 목숨을 걸고 만들고자 했던 특별법은 아직도 제정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말을, 뜻을 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과 나누고자 조촐한 추모 문화제와 10주기 추모제(추모 식수)를 준비하였다.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자리로 만들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의 10주기를 맞아 초창기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고 활동해왔던 아오야기 준이치 코리아문고 대표가 집필한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가 출판되었다. 그가 기억하는 김형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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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9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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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9 13: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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