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미인-왕소군王昭君, 날아가는 기러기도 떨어지다. 

 

왕소군은 전한 시대 원제의 궁녀로 본 이름은 왕장이다. 그녀의 집안은 너무 가난하여 궁년로 들어간다. 원제는 궁중화가 모연수에게 수천명의 궁녀들의 초상을 그리게 한다. 궁녀들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예쁘게 그려달라고 청을 한다. 왕인 원제에게 잘보여 후궁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난했던 왕소군은 가난하여 줄 것이 없어 모연수는 그녀의 초상을 추녀상으로 그렸고, 얼굴에 점까지 찍었다. 그녀는 입궁한지 5년 동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여 신분으로 비파를 타며 향수를 달랬다.  

 

중국 드라마, 왕소군 의 한 장면, 흉노로 가는 도중 


당시 한은 북방의 흉노족과 전쟁이 있었다. 남흉노의 선우 호안야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오게 된다. 그는 원제에게 화해를 구실로 들어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때 황제는 아직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한 궁중의 미녀들을 불려 들여 술을 따르게 한다. 바로 이때 왕소군王昭君을 발견한 호한야는 이렇게 말한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라면 괜찬습니다"  

원제는 직접 미녀를 고르도록 하자 그 때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선택했다. 왕소군을 처음 본 원제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라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주고 만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궁녀들의 초상화를 꺼내 원본과 대조해 보니 왕소군의 원 얼굴과 초상화는 너무 달랐다. 더우기 얼굴에 점까지 있어 추녀로 보았던 것이다. 화가난 황제는 분노가 일어나 화공 모연수를 불러 들여 그 자리에서 참수시키고 만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라 흉노 떠난다. 고향을 떠나 왕궁에 까지 와 다시 머나먼 이국으로 떠나는 왕소군은 슬픔을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말 위에 앉은 채로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청아한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 짓 하는 것을 잊어 버려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그녀를 '낙안'(落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왕소군은 결혼 후 2년 만에 남편인 원제가 죽고 만다. 결국 흉노의 관습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은 배다른 아들의 처가 된다. 흉노족은 아버지가 죽으면 생모가 아닌 어미니들을 처로 받아들이는 관습이 있다. 

몽골에 가면 아직도 왕소군의 삶을 그린 동상과 공원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왼쪽의 책은 왕소군(중국식 발음은 왕짜오쥔)의 일대기를 그린 책이다. 왕소군은 흉노에 가서 명비라는 칭호를 받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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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성어로 보는 중국인의 협상전략 

1. 화비삼가(貨比三家)

물건을 구입할 때는 세 군데의 품질과 가격을 비교한 후에 산다는 뜻이다.
가격, 품질, 거래조건을 꼼꼼히 비교한 후 구입하는 중국인의 특징을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약간이 가격차이가 있어도 그 자리에서 구입하는 경향이 높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세군데 이상의 가게를들러 보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
심지어는 화비팔가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7,8군데의 가게의 견적을 받아보고 의도적으로 경쟁에 붙이게 한다. 대게 견적을 받으면 비교되는 회사에 알리지 않는 것이 정상이지만 중국인들은 비공식 통로를 통해 견적을 받았다는 것을 알림으로 경쟁회사들끼리 암묵적으로 경쟁을 하도록 만든다. 이럴 때 한국 사람들은 제살깍아먹기에 바쁘다.

대응법 : 공동을 대응하라. 즉 서로 알게 했으면 경재회사에 연락하여 공동의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


2. 선고후락(先苦后樂)  


 

이 책은 속임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병법과 상술 속에 숨겨진 수많은 기만과 속임수의 실체를 배우라. 

 

 

 

 

 


3. 허장성세(虛張聲勢)  


 

중국인들의 상술과 협상 전략을 꼼꼼히 챙겨 놓은 책이다. 

 

 

 

 

 



4. 성동격서(聲東擊西)  



중국인을 대하는 한국인의 상술도 만만치 않다  이 책은 중국인이 쓰는 상술을 간파하고 우리만이 필요 적절한 상술을 소개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중국인의 상술을 보려면 중국 고전을 읽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단연최고는 역시 손자병법이다.  태공에 의해 지어진 육도삼략 또한 중요한 병법서이며, 삼국지는 두고 두고 읽어야할 고전 중의 고전이다. 이번에 고우영씨의 만화로 한번 질러 보는 것은 어떤지..

동쪽에서 소리내고 서쪽을 친다.

한과 초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싸우고 있을 때이다. 한의 유방은 초의 유방에게 항복하여 한을 대적한 위를 한신에게 정벌하도록 명했다. 포판에서 황하를 건너야 위로 들어가는데 포판은 물살이 세고 적이 보는 앞에서 강을 건너는 것은 자살과 다름 없는 일이었다. 한시는 적이 보는 앞에서 강을 건너는 훈련도 하고, 군의 깃발도 꼿아 두었다. 그러니 위군은 마냥 비웃고 구경하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한신은 군대를 황하 상류인 하양으로 이동시켜 뗏목으로 건너가 하양부터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후방에서 쳐들어오는 적의 기습에 위군을 이렇다할 대응도 못하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고 말았다. 항동격서는 기만술로 적의 관심을 분산시켜 방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구상할 때도 역시 항동격서 책략을 사용했다.

중국상인들은 성동격서(聲東擊西)의 달인들이다. 초반에 납기와 물량에만 관심이 있고 가격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음 대량을 주문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가격이라는 숨겨진 카드를 커낸다. 이미 주문한 물품을 처리할 방법이 없는 상대방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격을 깍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응법: 초기 협상을 완벽하게 하라.
무엇을 목적으로 협상을 하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라.   
실속은 없으면서 큰소리치거나 허세를 부리는 것을 말한다.

중국 진(晉)나라 장수 위주와 선진이 위(魏)나라에 있는 오록성(五鹿城)으로 쳐들어갈 때의 일이다. 선진은 자신의 군사들에게 군대 깃발(旗幟)을 산이나 언덕을 지나갈 때마다 잘 보이는 곳에 꽂으라고 명령했다. 진나라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 백성들이 성 위에 올라가보니 진나라의 깃발이 온 산과 언덕에 수도 없이 펄럭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나라 백성들은 지레 진나라가 군사 너무 많다고 생각하여 지레 겁을 먹고 한 번 싸워 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 덕분에 진나라는 오록성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할 수 있었다.

허세를 부리는 것은 어느 민족이나 있는 것이지만 중국은 특히 심하다. 그리고 이것을 전쟁이나 협상 등에서 적절하게 이용한다. 협상을 할 때 대부분 중국측에서는 정재계 거물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위치가 한수 위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상대방을 먼저 기선제압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협상을 이끌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대부분 의례적인 것일 뿐 협상이 끝나고 나면 아무 상관도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중국인들은 장사꾼들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의도적인 기만술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고후락은 처음에는 힘들지만 나중은 즐겁다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협상을 할 때도 이러한 방법을 쓴다. 초반 협상 때 중국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안을 가지고 시간을 끌며 상대방을 지치게 만든다. 속전속결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중국상인들의 안이한 태도에 불만을 품거나 쉽게 지치고 만다. 그러다 상대방이 지쳤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중국 상인들은 중요한 사안을 내 놓음으로 중요한 것들을 대충 넘어가게 만들어 버린다. 특히 한국 기업들은 협상 기일을 중요시하게 생각하고 본사에서 언제까지 협상을 마무리하라는 압박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한국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하려 드는 것이다.

대응법: 협상 기일보다는 내용에 비중을 두라.
협상 기일을 중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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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료에는 김근도(1900~1983)는 경남 창원 출신으로 나온다. 그러나 부산시는 김근도선생이 1900년 12월 10일 부산시 강서구 성북동 722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918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법랑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는 일제의 조선통치와 일본인들의 재일교포 차별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1936년 김금도선생은 김성규,이수강,이수용 등을 규합하여 재덕판가덕인친목회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김금도 선생은 일제의 조선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일제로부터 조선을 탈활하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치단결 해야 할 것을 역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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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상 선생 동상  


중앙공원내에 있는 민주공원에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일을 했으며, 고려공산당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김구선생과 안창호 등과 친밀하게 알고 지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쿠테타로 인해 정권이 바뀌면서 고속수감되었다.후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만년을 쓸쓸하게 지내다 92세로 숨을 거두었다. 더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사전[장건상]을 참고하라.
위키백과 장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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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사치스러운 낭만주의자, 죽림칠현(竹林七賢)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중국 위(魏) , 진(晉) 왕조 시절 완적(阮籍) , 혜강(嵆康) , 산도(山濤) , 상수(向秀) , 유령(劉伶) , 완함(阮咸) , 왕융(王戎)을 가리킨다. 정치 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을 주고받고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들이다.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이 그들의 근본 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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