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골드만삭스를 떠난 이유 - 나는 더이상 고객을 멍청이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레그 스미스 지음, 이새누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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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골드만삭스에서 십 년 넘게 일한 내부자의 자기고백.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전후로 골드만삭스와 월스트리트가 급격히 부패한 것을 비판한다. 골드만삭스의 `전통`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의 일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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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어떤 환각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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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처럼 흘러가는 문장. 따옴표 대신 쉼표로 이어지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타인의 꿈을 직접적으로 바라본다면 미쳐버릴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독자가 타인의 꿈을 읽더라도 미치지 않도록 해주는 장치를 문학이라고 한다면, 『레퀴엠』은 제대로 된 `문학`으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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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이 심플 - 스티브 잡스, 불멸의 경영 무기
켄 시걸 지음, 김광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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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아이맥의 이름이 `맥맨`이었다면 과연 팔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잡스를 설득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하지만 그것도 `심플`이라는 원칙에 따라 i브랜드를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단순함이 얼마나 성취하기 어려운 것인지 보여주는 것 같아요. 책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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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32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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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마르셀 모스, 이상률 옮김 / 한길사, 2002)은 에밀 뒤르켐의 조카이자 프랑스 사회학·인류학의 거두인 마르셀 모스의 노작이다. 그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말할 것도 없고, 부르디외, 바타이유, 보드리야르, 푸코 등에게 미친 영향은 무척 크다고 한다. 그런데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저술한 저작은 거의 없는 듯하다. 문화인류학자 류정아 씨가 쓴 해제를 보면 모스는 단독으로 연구하기보다 다른 학자들과 공저하길 선호했던 것 같다. 공동 작업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준 셈인데, 이는 현대 문화연구자와 인류학자들에게도 모범이 된 게 아닐까 싶다(대표적으로 연세대 문화연구 그룹과 조한혜정 등). 


『증여론』을 읽은 것은 『거대한 전환』과 『리오리엔트』를 경유하면서 시장 경제와 비시장 경제 사이의 교점을 탐색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2009년의 경제 인류학 콜로키움에서 폴라니와 모스를 연이어 읽은 맥락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증여론』을 읽으면서 프랑스에서는 굳이 폴라니를 볼 필요를 못 느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폴라니가 1944년에 『거대한 전환』을 출간했고(같은 연도에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을 냈다), 모스가 1925년에 『증여론』을 썼으니까 거의 20년 전에 폴라니가 할 말을 다 한 셈이다(폴라니는 자신의 경제인류학적 관점을 말리노프스키와 투른발트, 마거릿 미드 등에서 찾고 있다). 특히 말리노프스키, 보아스 등의 연구가 품은 의미를 보다 섬세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말하는 '전일론적 관점'과 '다양성 속의 통일성' 개념을 보다 완전하게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른바 원시 혹은 미개 사회의 살림살이는-본문 번역에서는 이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살림살이oekonomi로서의 경제economy 개념은 통시적·공시적으로 중요하다-선물을 매개로 한 공동체 생활이다.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누군가 강요해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선물 교환은 자발적이고 우호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들)이 따로따로 흩어진 '섬'이 아니라 마을(가족, 부족, 종족 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안에 존재하는 경제는 의무의 경제이다. 주어야 할 의무와 받아야 할 의무, 그리고 받은 만큼(아니, 그보다 더 많이) 다시 주어야 할 의무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부과된다. 이 의무를 함부로 깰 수 없는 이유는 그로 인해 공동체의 힘이 커지거나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선물 교환은 축제이자 전쟁이며,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자 권력 투쟁의 장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공동체 및 구성원들의 영혼이 걸려 있다. 모스는 이 선물 교환의 축제를 포틀래치potlach로 부르자고, 또 이런 경제를 '전체적인 급부 체계'systeme de prestation totale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게다가 아메리카의 학자들이 밴쿠버에서 알래스카에 걸쳐 사는 백인과 인디언의 일상 언어의 일부가 된 치누크(chinook)어(치누크족은 미국 북서부 컬럼비아 강 유역에 사는 아메리카 인디언-옮긴이)의 명칭을 이용해서 부르는 바와 같이, 우리는 그것을 포틀래치(potlach)라고 부르자고 제의한 바 있다. '포틀래치'란 원래 '식사를 제공하다'(nourrir) 또는 '소비하다' (consommer)를 뜻한다. (p.54) 

씨족 자체가 그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그들이 소유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또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추장을 매개로 하여 계약을 맺는다는 의미로, 그곳에는 전체적인 급부가 있다. 그러나 이 급부는 추장의 이름으로 매우 두드러진 투기적(鬪技的)인 성격을 띤다. 이 급부는 본질적으로 고리대적(高利貸的)이고 낭비적이며, 무엇보다도 귀족들이 나중에 자신들의 씨족이 누릴 위계서열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p.56) 

이와 같은 내용은 멜라네시아의 트로브리안드 제도를 연구한 말리노프스키(『증여론』에서도 쿨라 교역을 주로 인용한다)와,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등지에서 사는 콰키우틀족, 틀링깃 족 등을 연구한 프란츠 보아스의 기록 등을 토대로 보다 구체화된다(투른발트도 각주에서 인용되지만, 솔로몬 제도 연구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단순한 우애의 표시가 아니다. 더러는 미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사치스러우며 과시적인 소비가 축제 한 가운데에서 벌어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물 교환은 언제나 축제와 함께 벌어진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우, 축제의 절정은 부(富)의 상징인 동판을 깨버리거나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더러는 노예를 죽이기도 하며, 재산을 불태우는 등 파괴의 방식은 다양하다). 

때로는 주거나 답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답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단순히 물건을 파괴하는 일이 있다. 생선기름이나 고래기름의 통을 완전히 태워버리기도 하고 집과 수천 장의 담요를 태워버리기도 한다. 또 상대방을 압도하여 '끽소리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장 비싼 동판을 파괴하기도 하고 물 속에 던져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법과 경제 체계에서는 막대한 부가 끊임없이 소비되고 이전된다. 이러한 이전을-원한다면-교환·교역 또는 판매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교역은 예의와 후함으로 가득 차 있는 귀족적인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것이 다른 정신으로, 즉 직접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 행해진다면 그것은 매우 뚜렷한 경멸의 대상이 된다. (pp.141-144)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경제인homo economicus은 존재하지 않는다. 효용(개인적 만족에 대한 양적 개념)에 기반해 최적의 소비를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행태는 보편적인 것도, 원초적인 것도 아니다. 이어서 모스가 '제3장 고대의 법과 경제에서 증여 원칙들의 잔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12표법 이전의 고대 로마와, 게르만 부족 사회, 힌두 전설 등을 참고했을 때, 이른바 '문명 세계'조차도 개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경제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미약했다는 것이다. 이는 서문인 '증여, 특히 선물에 답례해야 하는 의무에 관하여'에서 인용한 에다(Edda,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서사시집)의 한 구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42절은 게임 이론상 팃포탯 전략tit-for-tat의 우월성을 연상시킨다). 

(41절) 무기와 옷을 주면 친구들은 서로 즐거워할 것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그것을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서로 선물에 답례하는 자들은 만일 그 물건들이 잘 쓰인다면 언제나 변함없는 친구가 된다 

(42절) 누구나 친구에 대해서는 친구로 있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선물에 대해서는 선물로 답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웃음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답하고, 거짓말에 대해서는 속임수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p.45) 

이 점에서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리오리엔트』에서 중세와 근대의 '세계 경제'마저도 이윤으로 움직이는 시공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은 착오다. 화폐조차도 단순히 구매력의 수준에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어떤 권력을 상징하고 반영하느냐로 파악해야 한다. 희소한 것은 자원(화폐)이 아니라, 권력(권위)이다. 

여기서 현대인(좀 더 정확하게는 '근대인')이 모스의 전일론적 관점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드러난다. 즉, 선물 경제가 품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경제적·법적 의미와 한계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물에 영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 한갖 미신으로 여겨지는 근대 산업 사회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겐 너무나 당혹스런 개념이다(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으로서 영(靈), 제의(際儀), 신앙 등은 모스에 대한 프레이저의 지적 영향력과 함께,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을 독해함으로써 더욱 심도깊게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모스의 연구가 주는 의미를 잘 헤아려 보면 선물 경제가 우리 생활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통찰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선물을 주고 받으며, 여기에는 호의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온전히 자발적이고 순수한 일인가? 선물은 일종의 고마움의 표시이면서, 주고 받은 사람끼리 서로 동등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선물 교환의 부정적인 행태로는 정경유착과 각종 부정부패가 있는데, 이 또한 선물 경제 연구의 주된 대상일 것이다). 산업 사회에도 남아 있는 이런 관념과 풍습을 인습으로 폄하하거나, '자유 시장'(완전경쟁시장)을 경제 생활의 유일한 장으로 고정시키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 '살림살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장 경제는 결코 완전히 시장 자율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는 폴라니의 지적은 옳다. 

다시 법적·경제적·정치적·종교적 생활의 복합체로서 선물 경제의 의미를 짚어보자. 모스는 상호부조와 호혜의 경제가 부활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당대 프랑스의 조합주의적corporatist 경향이 시장 자율에 의한 인간성 파괴를 치유할 방법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기능적 민주주의자' 폴라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보편적 복지'가 화두인 '지금 여기'에서, 모스와 폴라니는 시장 경제와 비시장 경제가 서로 포개져 있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포착한 사상가로서 의미가 있다. 여기서 시빌리떼(civilite, 시민윤리. 옮긴이 이상률은 이를 '예의'로 번역했지만, 나는 발리바르의 개념을 끌어와야 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가 일종의 새로운 '시민 종교'로 기능해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있겠다. 

『증여론』에서 드러나는 소비 행태는 베블렌의 '과시적 소비' 개념으로 이어질 것이다(옮긴이는 바타이유와 보드리야르의 소비 개념을 선취한 모스에 주목하지만, 나는 그런 관점이 종교학적·인류학적 관점은 배제시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시장 역시 하나의 제도로서, 또 살림살이와 관계망의 '패턴'으로 존재한다는 걸 인식한다면 자기조정 시장의 파괴적인 행보를 조금이라도 완충하고 넘어설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왜 문화연구자로서 모스를 읽어야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추. 공화정 말기 로마에서 카이사르는 유명한 빚쟁이였다. 특히 그의 최대 채무자인 크라수스는 정치적·정서적·경제적 유대를 형성하는 수단으로 빚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사람이었다. 『증여론』에 따르자면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노예'(비유적인 표현이다)인데, 어떻게 정치 파트너로 '대등해질' 수 있었을까? 이를 '교활한 카이사르' 때문으로 넘겨짚는 건 그다지 좋은 태도가 아닌 것 같다. 『증여론』은 고대 로마(그리스 포함)의 경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단초를 제공한다. 이해타산적인 경제가 셈족·헬라인·로마인에게서 나타나지만, 이 또한 멜라네시아와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종교·관습과 얽히고 설켜 있다. 그런 점에서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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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운동사 -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역사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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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운동사』(한윤형 / 텍스트, 2010)를 말하기 전에 밝힐 게 두 가지 있다.

첫째, 나는 조선일보에 나온 적이 있다. 2002년, <독자만화대상>의 1기 멤버로서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조선일보 취재에 응했다. 당시 나는 '운동권'이었지만, 한총련과 점점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만화 운동에 몸과 마음이 모두 기울어 있었기 때문이다(이 또한 '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정리글을 올려볼까 한다). 안티조선 운동이 한창이던 때였음에도, 나는 '안티조선'이라는 구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솔직히 말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병행하던 청소년 참정권 운동에서는 "왜 조선일보에 나왔느냐"는 질책도 들었다(우습게도 나는 모 대학 학보와 한겨레에 만18세 참정권 운동가로 취재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무지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무지보다 더 부끄러운 건 따로 있었다. 조선일보에 사진이 박힌 것 때문에 온 일가친척들이며 학과 사람들까지 나를 '조선일보에 나온 만화 운동가'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야 조선일보의 파급력을 깨달았다.

둘째, 조선일보에 대한 지금 나의 포지션이다. 나는 언소주 활동을 지지하며 조선일보 구매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종의 대조군이자 타산지석으로서 조선일보를 탐색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조선일보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조선일보를 알아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즉, 구매는 피하되 온라인 구독까지 막아선 안 된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사서 보지 않는다고 해서 조선일보가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책에서도 지적되었듯 광고에 대한 신문의 의존도가 높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실구독자 수가 신문의 존속에 미치는 영향은 거대 언론사일수록 작다(진성당원 수에 대한 한나라당-진보신당 간 차이와 비슷하다). 한겨레와 경향은 상관성이 비교적 높다고 볼 수 있지만, 이들조차 토건 광고 때문에 관련 비판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건 조중동의 종편 문제 및 언소주의 활동과 연결될 만한 꺼리이지만 여기서는 넘어가자.

글머리가 길었다. 조선일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조선일보도 안티조선도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안티조선 운동사』는 말 그대로 안티조선 운동의 역사를 기술한 한윤형식 정리글이다. 근대 한국사 연구자인 신복룡 선생은 역사를 서술하려면 한 세대(30년)가 지나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강준만이 『김대중 죽이기』를 통해 (한윤형의 표현으로는) '광야에서 조선일보를 외친' 시기(1995년)를 생각해 보더라도 15년을 겨우 넘겼다. 그러나 인터넷 매체의 특성상 호흡이 짧고 빠르며, 시대 자체의 변화 속도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급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안티조선 운동을 말하기 이전에 한국 언론사를 요약 소개한 것도 장황한 감이 있지만 용인할 수 있다. 사건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한국 언론 운동의 연장선상에 안티조선 운동이 있었다는 입장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안티조선 운동을 중심에 둔 나머지, 언론 운동의 당연한 귀결 내지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과대해석한 감이 있다. 안티조선 운동은 여러 가지 변수가 있었기에 나타난(뒤집어 말해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면 없었을) '실현된 가능성'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하고 '아흐리만'이라는 아이디로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한 한윤형에게 있어 안티조선 운동에 대한 정리글은 일종의 부채 청산인 듯하다. 한윤형이 책 속에서 즐겨 인용하는(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소설들로 빗대보자.『은하영웅전설』로 치면 율리안 민츠로, 『반지의 제왕』으로 치면 빌보의 '레드북'을 이어받는 프로도에 비길 수 있겠다. 그에게 있어 양 웬리 혹은 빌보 배긴스는 강준만이 아닐까(양 웬리라는 비유는 진중권에게 좀 더 어울리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김대중 죽이기』부터 시작해 조선일보를 언론 운동의 '주적'으로 설정해 안티조선 운동의 이론적·실천적 기반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티조선 운동은 '최장집 사건'(1998년)으로 촉발된 지식인들의 동참과 문학 권력 논쟁을 거치고 대중화되면서 양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여기서 한윤형은 운동사에서 벗어나 '노빠'의 인식론/존재론 분석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안티조선 운동의 지식인적 속성은 대중 운동으로의 확산에 장애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운동의 팽창 과정에서 운동 논리의 극적인 단순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운동이 성공한다는 것은 그것의 이념이 대량 생산되는 공업품처럼 찍혀 나와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간다는 말과 유사하다. 인터넷 화면에서 클릭 한 번 하면 상품을 구입할 수 있듯, 그렇게 운동은 '원 클릭 쇼핑몰'이 되어 사람들을 유혹한다. (p.152-153)

정서적으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듯하다. 학력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한나라당 지지층에게는 우월 의식을 지니면서도, 지식인들의 기득권(?)을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게 했다. 이를테면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무식하다고 공박하는 반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지만, 지식인들이 글을 알아먹게 쓰지 않는다고 인터넷에서 비난하는 민중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그들이었다. (…) 즉 이들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 의식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 '보통 사람'과 '상식'의 역할은 여기서도 분명했다. 여기서도 그들은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p.247)

나 역시 노빠의 멘털리티를 '공부하지 않는 지식인'과 '정서적 중도'로 분석하는 입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책이 표방하는 바가 '역사'인 이상,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탐색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한윤형은 서프라이즈 등에 올라온 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태도와 입장에 대해 논하기는 한다. 그러나 운동의 담론적인 측면과 사건들에 대한 기술에 치중한 나머지, 정작 안티조선 운동의 주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에는 좀체 가닿지 못하고 있다. 단적으로, '3부 안티조선 운동의 성장'과 '4부 혼란에 빠진 안티조선 운동'에서 도드라지는 사람들은 여전히 홍세화, 진중권, 유시민, 노무현 등 '영웅캐'들이다. 주체가 곧잘 증발하고 글의 양적 축적이 오프라인에 비할 수 없는 온라인 게시판의 특성상 불가피한 부분은 있다. 내가 아쉬운 건 '살아남은 평범한 사람들'과의 인터뷰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한편, 안티조선 운동은 담론 투쟁이자 정치 활동으로서 지극히 그람시적이다. 또, 레닌(주의)을 누구보다 싫어할 조중동과 노빠들 모두 담론 투쟁의 장에서는 철저한 레닌주의자였다는 것도 역설적이다. 안티조선 운동의 한계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안티조선 우리모두에서 좌파가 이탈하고, 서프라이즈가 동프니 남프니 하며 갈려나가는 데는 한국의 이념 지형이 강하게 작용한다. 물론 정치와 언론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이들은 서로 견제해야 하지만, 언론의 이념적 색채 자체를 무화시킬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안티조선 운동은 지극히 '상식적인' 운동으로 출발했고, 당파성을 표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당파적인 운동이었다. 운동 주체들이 안티조선 운동의 당파성을 거세했을 때 운동의 역동성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즉, 안티조선 운동은 '상식'과 당파성 사이의 괴리로 인해 무너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안티조선 운동의 내외적 모순은 노무현 정부 시기와 2008년 촛불 때에도 반복된 듯하다. 대한민국 상식인의 입장에서 '순수한' 시민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덜 불편하고 온건해 보인다. 그러나 상식을 강조하다 보면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발산할 자리는 사라진다. 노무현 정부의 노동 정책이 그랬고, '촛불 시민'이 비정규직 투쟁을 외면한 것이 그렇다.

여기서 안티조선 운동이 안티테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언론다운 언론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 했다는 지적은 적절하다(히요, <교과서>). 언소주 활동에 대한 지지와 별개로, 나는 언소주 활동에서 보이는 방식 역시 '원 클릭 쇼핑몰'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가장 온건한 운동이랄 수 있는 소비자 운동마저 탄압과 방해의 대상이 되는 외적 조건이 원 클릭 쇼핑몰의 위험성까지 합리화해 줄 수는 없다. 다만 안티조선 운동과 뒤이은 언론 운동에 최소한의 의미가 있다면 '성찰하는 개인들'이 태어날 조건을 만들 가능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관심가는 주제는 '사이버 민중주의'다. 한윤형은 사이버 민중주의가 나타나는 이유를 정치적 채널의 부재에서 찾는다. '네티즌 수사대'와 '신상털기'로 상징되는 웹 생태계의 평등주의('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는 위기의 징후이자 온라인 언론이 활동하는 조건이다. 이는 블로그와 SNS로 다양화되는 웹 생태계에서 개인 언론이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이건 웹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른바 '논객(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티조선 운동사』는 기술하는 주체의 측면에서 볼 때 무척 상징적이다. 『안티조선 운동사』는 강준만과 진중권의 리즈 시절에 대한 기록이고, 현재까지도 재생산되고 있는 온라인 토론술과 논쟁술이 어디서 유래했는가를 탐색하는 작업이다(더 파고들면 PC통신 게시판 시절까지도 들어갈 수 있겠다. 막상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 대한 분석이 적은 듯싶다). 동시에 안티조선 운동에 개입하고 관찰한 20대 필자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이 책은 '20대 논객'의 처음이자 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잠시 언론에서 회자되던 20대 논객론(?)이 어떤 배경에서 태어났는지를 가늠해볼 때, 『안티조선 운동사』는 20대 논객론의 소멸을 상징하고 있는 게 아닐까. 덧붙이자면, 책 중간중간에 『은하영웅전설』이나 『반지의 제왕』을 삽입한 것은 작가의 취향을 다분히 반영하지만, 굳이 넣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운동에 대한 (한윤형식) 정리는 여러 단점이 있긴 하지만, 온라인 운동에 대한 재조명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작업이다(한편 한윤형의 글에서 느껴지는 노회함은 운동에 대한 회의주의에 바탕한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 남은 질문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한윤형 글이 품고 있는 회의주의를 넘어,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를 어떻게 관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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