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수 개월 동안, 해야 할 것은 많은데 제대로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은 기분에 빠졌다(제대로 하는 게 거의 없기도 하다). 이를 만회하고픈 마음에 뭔가 도움이 될 법한 책을 이리저리 집어본다. 박신영의 『기획의 정석』도 읽고, 읽다만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도 다시 살펴본다. 하지만 책을 본다고 해서 당장 일머리가 나아지거나 하는 건 아닐 테다. 그런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다시 이것저것 집는다.


  『파워풀 워킹 메모리』는 흔한 뇌과학 책처럼 보인다. 우리 뇌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설명하는 방식의 책. 전형적인 플롯이 반복되는 드라마처럼, 주인공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이들을 방해하는 연적과 주변 사람들이 있고, 마침내 갈등을 극복하고 행복을 쟁취하는 그런 방식의 이야기.

  하지만 전형적일 줄 알았던 드라마에서 의외의 반전을 발견할 때의 기쁨을 이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다면 과장일까. 저자들에 따르면(이들은 공저자이자 부부다) '작업 기억'이라는, 우리 뇌의 이마엽앞겉질을 활성화시킬 때 발동되는 능력은 우리가 집중해야 때 집중하게 하고, 잡다한 정보에서 핵심을 추려내는 데에도 기여한다. 내가 흥미를 느낀 부분은 뇌가 작동하는 방식도 방식이지만, 작업 기억을 활성화시키는 방법론에 있었다.

  그런 방법 중 첫 번째 것으로 '암호 해독'이 있다. 이름은 다소 거창하지만(우리가 매번 암호를 풀어야만 하는 스파이는 아니니까)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57*6=?" 같은 계산을 수행할 때 숫자를 쪼개서 계산하도록 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먼저 50을 6과 곱하고, 이 답을 작업 기억에 저장한 뒤 7에 6을 곱해 앞서 계산한 숫자와 더한다. divide and rule 전략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 방법은 '부트스트래핑'이다. 이름에 쫄 것 없다. 숫자나 기억해야 할 대상에 적당한 이름을 붙이고 이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트럼프 카드의 하트 7과 스페이드 킹에 각각 007 제임스 본드와 골프 황제 잭 니클라우스를 연결해서, 하트 7 뒤에 스페이드 킹이 나온다면 제임스 본드가 잭 니클라우스에게 골프 교습을 받는다는 식이다. 이 대목을 읽자 <옛날 옛적에Once Apon a Time> 같은 카드게임이 떠올랐다. 플레이어가 카드를 한 장씩 내려놓으면서 그 카드에 적힌 단어를 가지고 앞선 사람이 한 이야기를 잇는 방식의 게임이다. 이야기를 잇는다는 것 자체도 재미있지만 그렇게 할 때 단어도 훨씬 눈에 잘 들어오고 외우기 쉬웠다. 우리는 그저 눈앞에 놓인 사물은 지나치기 쉽지만, 이름이 붙거나 이야기를 떠올리는 사물은 쉽게 잊지 못한다. 부트스트래핑은 바로 그와 같은 우리 반응을 활용하는 전략이다.

  세 번째 방법은 '덩이짓기'이다. 체스의 그랜드마스터가 체스를 둘 때는 말을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말의 관계를 항상 염두에 둔다. 말하자면 고수는 행마를 할 때 여러 개의 패턴을 기억해서 필요할 때 그 패턴을 꺼내어 쓴다(몇 년 동안 체스를 초보 단계에서 깔짝댔던 나로서는 실제로 체스를 둘 때 이를 거의 실행하지 못한다...). 일류 프로그래머가 작업을 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프로그램의 규모가 커질수록 소스도 늘어날 테니 일을 진행하면 할수록 세부를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대신 프로그래머는 고급 프로그래밍과 저급 프로그래밍으로 프로그램을 구분한 뒤, 고급 프로그래밍 단계에서는 간략하게 만든 코드를 쓰고 저급 프로그래밍 단계에서 작가로 따지면 각주를 활용해 프로그램을 보강한다. 이렇게 패턴을 덩이짓고 꺼내어 활용하는 것이 덩이짓기의 주된 전략이다.


  이런 방법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 또 꾸준히 한다고 해도 과연 체스 그랜드마스터나 일류 프로그래머처럼 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밥상을 제법 잘 차려줬는데 굳이 먹기를 마다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 두뇌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책에는 여러 가지 식이요법과 운동법도 나와 있으니(여러모로 조깅은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운동이다) 위에서 소개한 작업 기억 훈련법과 병행한다면 더없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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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6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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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로서의 열정이 느껴지는 힘찬 글. 조선과 청나라, 일본과 한국, 한국과 미국을 넘나드는 문화교류의 현장. 편지와 필담으로 국경을 넘는 교류를 했다는 게 놀랍다. 18세기의 SNS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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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풀 워킹 메모리 - 당신의 모든 것을 바꿀 힘, 작업 기억
트레이시 앨러웨이.로스 앨러웨이 지음, 이충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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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내 머릿속 하나 가다듬기 어려운 요즘이다. 그러다 보니 정보에 대한 감각도 둔해지고 일머리는 도통 늘지 않았다. 이 책은 약간의 기대감을 넘어 작업 기억을 발달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이 소개되어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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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사회 - 감성은 어떻게 문화 동력이 되었나
최기숙.소영현.이하나 엮음 / 글항아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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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의 경제, 경제의 정동」과 같이 행동경제학/행동금융학의 관점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글과, 「춘향전을 둘러싼 조선시대 감정 유희」와 같이 고전을 문화연구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 글이 눈에 들어온다. 젊은 연구자들의 감성 분석에서 신선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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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정치적 무의식
김상준 지음 / 글항아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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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단지 지배층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대를 비판하고 이를 성찰하면서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제임슨의 개념을 유교에 도입하다니, 그 과감함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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