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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사실 남의 뒷담화는 재밌다. ‘글쎄 걔가 그랬다더라’ 식의 이야기는 술자리의 흥을 돋는 애피타이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얼마동안은 흥미롭고 재밌을 수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밤새 계속된다면 지겹고 짜증나기 마련이다. 결국 밤샘 술자리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끊임없는 험담보다는 서로간의 진솔한 속내를 고백하는 일이나 서로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프로이트의 험담을 읽는 일은 약간은 고역이었다.
물론 방금 말한 ‘험담’이란 표현은 ‘근거 없는 비난’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저자는 프로이트의 모든 저작과 접근 가능한 서간들에 대한 꼼꼼한 검토를 통해 프로이트의 사상을 비판한다. 이런 비판을 통해서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나는 이 책을 빌려 프로이트의 생각을 무효화시키거나 할 생각은 없고, 다만 프로이트의 이론이 철저하게 그 개인의 자전적인 존재론적 경험에 바탕을 둔 것임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34)고 말한다. 이는 아마도 정신분석학을 잘 정립된 하나의 과학으로 굳게 믿고 있는 이들에게 정신분석학이란 그런 것이 아님을,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학적 심리학’이 아닌 단지 ‘문학적 심리학’에 불과함을 알려주기 위함일 것이다.
이를 위해 이와 같은 두꺼운 분량이 필요했을까. 혹시 그에 대한 두꺼운 상찬의 글들과 균형을 맞추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는 피터 게이의 전기 <프로이트>는 우리나라에 출간된 번역본의 경우 1000페이지가 넘는다. 그러나 상찬이든 험담이든 길면 지겨워지는 법이다. 더구나 프로이트 사상의 모순을 지적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군데군데 감정적 혐오의 뉘앙스가 풍기기도 한다. 평소 프로이트를 싫어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저자의 독설과 비꼼에 신나게 맞장구를 치며 읽어나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 예를 들어 나와 같은 사람이 이 긴 글을 읽어나가기란 다소 힘든 일이다.
이 책은 긴 글이긴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 한 문단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프로이트는 이전 시대의 혹은 동시대의 여러 사상가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을 지우고 자신만의 독창적 생각인 양 꾸미려 했다. 그의 책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온갖 모순된 이야기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한낱 개인적 경험에 불과한 내용을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과학으로 포장하려 했다. 그리고 이러한 포장을 위해 환자의 사생활을 거침없이 공개하는 비윤리적 행위를 하기도 했고, 치료되지 않은 환자를 완전히 치료한 것처럼 거짓말을 했으며,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동료들을 내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세속적 탐욕, 즉 돈과 명예,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구에 매몰된 인간일 뿐이다.
이건 내가 요약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이 책이 단지 저 내용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동일한 비판을 반복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을 위해 저자가 주로 참고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여러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저자는 잘 정리된 저작과 달리 그때그때의 감정을 담은 편지가 오히려 프로이트의 진심을 담고 있는 것이라 판단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는 혹시 프로이트의 방법론이 아닌가. 의식적인 저술과 무의식적인 편지라는 도식, 그리고 무의식적인 편지에서 그의 진실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렇기에 그는 프로이트의 후손과 추종자들이 몇몇 편지들의 열람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사상가에 대한 비판이라고 한다면 그의 공식적 생각이 담긴 저작만을 가지고 할 순 없는 것인가. 굳이 그 사생활이 담긴 편지들을 낱낱이 까발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게 최근 자주 논란이 되는 ‘신상털기’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저자가 생각하는 프로이트 사상의 문제를 들어보자. 그는 무엇보다도 정신분석학이 프로이트 개인의 몽상에 다름 아니라고 지적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다시 요약해보자. 그가 과학 저서라고 내놓은 두꺼운 책에는 그의 전기적 요소가 바탕이 된 자기 성찰이 주를 이룬다. 꿈과 어린 시절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내용도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실험적인 방법론을 적용한 유일한 훈련이 바로 꿈과 어린 시절에 겪은 사건을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기적 요소는 그의 이론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로 쓰였으며 프로이트가 대상을 해석한 방식에 따라 해석이 곧 이론의 핵심이 되었다.”(134)
그러나 과연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이 잘못인가? 데카르트는 난롯가에서 꾼 꿈을 바탕으로 <방법서설>과 <성찰>을 썼다. 케큘레는 뱀들이 꼬리를 물고 있는 꿈을 바탕으로 벤젠 구조식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생각을 직접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이트는 텔레파시의 가능성을 믿었다고 하지만) 타인의 생각을 직접 알 수 없기에 한 인간의 판단과 행동의 준거는 자신의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으로 유아론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고 행동하지만 그런 자신의 판단 및 행동이 다른 이들의 판단 및 행동과 충돌하기도 한다는 경험을 얻기도 한다. 즉 인간은 실천 속에서 서로 다른 준거들의 충돌을 경험하게 되고 이 새로운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준을 수정하게 된다. 이는 과학에서 한 이론이 다른 실험을 통해 동일하게 재연되지 않거나 반대되는 실험 증거가 나타나면 거부되거나 수정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정신분석학 역시 이런 과정을 거치는 중이고 과거에 가지고 있던 절대적 지위가 많이 약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는 프로이트학이 이러한 충돌을 애매하고 은유적인 수사로 교묘히 피해가려 한다고 지적한다. “프로이트가 만든 세계에서 우연은 없다. 다만 순수하고 신비로운 필연성이 존재할 따름이다.”(433) “논술을 하듯 작문을 하고 주석을 달고 분석, 객관적인 번역을 하는 것보다 주관적으로 주석을 달 듯 내용을 파악하는 쪽이 일반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더 수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프로이트가 꿈을 분석한 내용을 보면 타인이 말하는 진리보다는 자기만의 독단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경향이 강하다.”(448) 그래서 “정신분석학을 하나의 사회에 비유하면 그 사회는 철저하게 폐쇄적인 닫힌 이데올로기를 고수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547)
저자의 지적처럼 이러한 폐쇄성은 종교의 영역에서는 허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엄격한 의미의 과학의 영역에서는 용납되기 힘들다. 정신분석학의 지위가 약화되고 있는 데는 바로 이런 폐쇄성이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정신분석학을 다룬 책인 <광기>에 대한 감상에서도 말한 적 있듯이,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정신분석학이 엄밀한 과학 혹은 의학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엄밀한 과학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상담-분석에 치중하기보다는 뇌신경학 같은 학문들과 긴밀히 연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그렇다고 해서 정신분석학이 어떤 현실적 유용성도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신의학이란 일종의 문학과 같은 것이어서 현실에 대한 정밀화는 아니지만 인간 삶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고,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어떤 통찰을 보여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저자가 정리한 다음과 같은 글을 보자.
“프로이트는 이렇듯 인간 존재를 피할 수 없는 비극으로 보았다. 행복은 원래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기본 전제다. 다만 일시적인 쾌락, 나중에 환멸감을 주는 쾌락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을 뿐이다. 행복과 건강한 삶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설이 제기되지만 결과는 허망하게 실패로 끝날 뿐이다. (…) 전체가 힘을 합쳐 공동체 정신을 발휘하고 극한의 이타주의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결과는 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위험 요소를 가중시키는 감정이며, 부부나 가족의 결함은 결국 나중에 당사자에게 큰 고통을 더해줄 위험이 높다. 그리고 정치는 인류의 환희에 찬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582~583)
비극적 진단이긴 하지만 현실의 어떤 장벽 앞에서 좌절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고 한다면 저 문구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그런 공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프로이트의 사상에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또는 문학이나 영화 혹은 사회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려오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비아냥거리듯 “정신분석학자들은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완전한 세상의 허무주의를 견뎌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침대를 제공했다.”(679)고 말하지만, 나는 저런 침대가 있다면 언제든 기꺼이 눕고 싶다.
요는 이런 것이다. 간혹 블로그 등을 돌아다니다 보면 정신분석학에 대해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접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글들을 볼 때마다 굳이 저런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연금술에 빠져있던 뉴턴을 그 누구도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듯이 최면술에 빠져있던 프로이트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과학 이론이든 철학 이론이든 현실과의 접점 속에서 자연스레 도태되거나 수정되거나 안착하게 될 것이다. 굳이 지위를 끌어내리기 위한 험담에 힘을 쏟을 필요가 없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역자는 대체로 읽기 쉬운 문장을 쓰려고 노력한 것 같다. 방대한 분량이고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음에도 쉽게 읽힌다. 그런데 간혹 문맥에 맞지 않는 문장이 눈에 띈다.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다시 읽어보게 되는, 그래도 여전히 애매한 문장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다지 중요한 내용도 아니고 또 내가 프로이트를 전문적으로 연구할 것도 아니기에 무시하고 지나갔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음을 밝혀둬야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