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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혹은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가 요즘 열중하고 있는 트위터의 단평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으며, 각종 언론에서도 그의 트윗을 단골처럼 인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말하자면 황우석과 디워 논란, 그리고 촛불시위와 같은 굵직한 상징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진중권은 그의 책 제목처럼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네임드’가 그러하듯 여기에도 호오의 평가가 극명하게 교차한다. 아니 어쩌면 그 어떤 ‘네임드’보다도 극단적으로 평가가 갈리는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단정적 어조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주 단정적 표현을 사용하여 사태를 재단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아마도 그가 사태를 단순화하여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트위터 상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곽노현 사건이나 공지영의 ‘의자놀이’ 사건이 대표적 경우다.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이러이러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봐야 한다. 혹은 이렇게 보는 것이 맞다.’ 물론 그의 단정은 그가 자주 언급하는 ‘상식’이라는 기준에서 나오지만, 각자의 ‘상식’은 다르기 마련이므로 찬반이 분명하게 갈릴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발언마다 입장마다 다양한 찬반과 논란을 불러오는 그이지만 단 한 가지 분야, 즉 그의 전공인 미학과 관련해서는 (물론 내 눈에 띄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논란들이 별로 없다. 진중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변희재조차도 대학 시절 <미학 오디세이>로 공부했고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할 정도이니 말이다. 이건 좀 재미있는 건데, 매번 진중권에게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든다고 비난하는 변희재가 자신의 전공이기도 한 미학과 관련해서 왜 아무런 말을 안 하는지 궁금하다. 서로가 전문가이기에 오히려 할 말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나름 추측해 본다면, 그의 미학 책들에는 전공자의 조심스러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즉, <미학 오디세이> 삼부작이나 <서양미술사> 삼부작과 같은 책들의 경우 특유의 ‘단정적 어투’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정 입장을 강하게 옹호하기보다는 경합하는 다양한 입장들을 세심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자신이 선호하는 해석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타인, 즉 권위 있는 작가나 이론가의 입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마도 그 책들이 자신의 특정한 미학적 입장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개’하기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개론서 혹은 입문서의 저자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그 역할에 충실하게 임하는 저자의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이 책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에서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현대미술을 ‘읽는’ 방법을 소개한다. 왜 ‘보는’이 아니고 ‘읽는’인가? 저자가 제시하는 현대미술의 키워드는 ‘비평’이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미술을 ‘비평의 시대’로 특징짓는다. “오늘날 비평은 작품 자체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된다. 현대미술은 ‘예술의 정의’ 자체를 주제화하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언제 예술인가?”로 바뀌었다.”(5)
“언제 예술인가?” 이 물음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일반적으로 비평이란 말 그대로 어떤 작품을 평가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좋은 작품 나쁜 작품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등을 묻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물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물음의 대상, 즉 작품이 먼저 존재해야만 한다. 비평이란 언제나 사후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제 예술인가?”라는 물음은 이 관계를 뒤집어 놓는다. 이제 어떤 것이 작품인지 아닌지를 비평이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현실에 대한 이론의 우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 점이 궁금했다.
먼저 상황을 유추해 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개념은 폭발적으로 확장된다. 이는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기존의 미술 이론들로 포괄할 수 없는 각양각색의 예술 작업들이 전개되었고, 이제 비평가들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를 평가하기 이전에 도대체 그것이 작품인지 아닌지를 물어야 했다. 여전히 분명한 미적 기준을 고수하려 했던 평론가 그린버그는 형식주의 비평을 확립함으로써 이 상황을 통제하려 하였다. “그린버그가 <모더니즘 회화>(1960)를 쓴 것도 실은 당시의 미술이 자신이 설정한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모더니즘의 원리를 다시 한 번 명확히 천명해둠으로써 미술이 더 이상 자신이 설정한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막으려는 제스처였다.”(26) 그러나 이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그린버그는 비평 활동을 멈추게 된다.
미술의 개념이 폭발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것은 잭슨 폴록이었다. 캔버스 위에 단지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 같은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새로운 미국 회화의 본질은 추상인가, 아니면 표현인가? 거기서 중요한 것은 ‘작품(work)’인가, 아니면 ‘과정(process)’인가?”(48) 이 책의 목차에 열거되고 있는 여러 다양한 미술 사조들, 즉 추상표현주의부터 앵포르멜, 색면추상, 탈회화적 추상,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팝아트,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해프닝, 플럭서스, 리히터의 작품, 신표현주의 등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자, 이 갈래길에 대한 선택이 된다.
이처럼 기존의 이론으로 포괄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처음 반응은 기존 이론을 보다 확장하여 이 이론에 최대한 포섭한 후, 포섭되지 않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린버그의 노력이 바로 이러한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포섭되지 않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기존 이론을 버리고 새로운 이론을 택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새로운 이론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이론들 간의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 예술인가?”라는 물음은 바로 이러한 이론들의 경쟁, 비평의 경쟁, 그리하여 미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비평 역할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정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언제 예술인가?”라는 질문에서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의 아이디어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정상 과학과 이상 현상, 그리고 경쟁 이론의 경합과 과학 혁명의 완성까지 이르는 과정이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사와 유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비유가 허용된다면 현대 미술은 어디쯤에 와 있는가. 아마도 경쟁 이론의 경합쯤이 아닐까. 저자는 나가는 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해하는 세 이론을 소개한다. “‘확장된 장’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로잘린드 크라우스), ‘연극성’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더글러스 크림프), ‘알레고리 충동’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크레이그 오웬스)이 그것이다.”(309) 물론 저자는 이 각각의 특성들이 “서로 교차하는 공통성”을 이룬다고 지적하지만 그 공통성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는 않는다. 항상 분명하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저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결국 미술을 이해하는 상식적 입장의 부재. 이것이 현대 미술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일 테고, 현대 미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애매함 때문일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