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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0.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 감상을 써야하는 일은 남감하다. 이런 종류의 책이란 나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책을 말한다. 이해 능력을 넘어서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고 물음을 던질 수도 없다. 그저 이해 안 되는 음악이나 영화, 그림을 보았을 때처럼 ‘저런 것도 있구나’ 하고 넘겨버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저자의 지적처럼 ‘무의식적인 자기 방어’에 굴복하는 비겁한 일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걸. 마침 사사키 아타루가 어렵고 지루한 책에 대해 말하니 이 얘기를 해보자.
1.
나는 ‘어렵다’고 느끼게 되는 책은 두 종류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독자의 사유를 극단까지 몰아가는 책들이 있다. 상상 가능한 모든 논리적 근거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토함으로써 말 그대로 독자를 질리게 만드는 혹은 압도하는 책들이 그렇다. 이런 책들은 빈틈없이 촘촘하게 짜인 사유의 그물망을 저자와 함께 직조해나가고 싶다는 열망이나 열정이 없다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 대개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이 비로 이러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오락으로써의 책읽기가 아니라 지적 고통으로써의 책읽기.
이런 책들을 끝까지 견뎌내었을 때 결국 남는 것은 직조된 그물이 아니라 그물을 짜는 법이다. 저자의 결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결론에 도달한 과정을 배울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한번 그물 짜는 법을 배우게 되면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실을 가지고도 새 그물을 짤 수 있으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 생각을 덧붙여 새로운 방식의 그물을 짜는 것도 가능해진다.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을 배운다’는 칸트의 조언을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쉽게 요약 정리된 입문서보다 고전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어려운 책들도 있다. ‘뭔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에 대해 어떤 이들은 ‘저자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지껄인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는 저자의 속내를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없는 이상 과도한 말이라고 생각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책들이 대부분 독자에 대해 설득보다는 공감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쓰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이런 책들은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가 아니라 ‘제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느껴지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니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대체로 이런 느낌이 드는 책은 모순과 역설 혹은 비약으로 점철된 책일 경우가 많다. 물론 그것들이 은유의 차원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좋은 은유는 컨텍스트 안에서 나름의 정합성이 있기에 설득력을 가진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문장만 따로 떨어뜨려놓고 본다면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대 노 저어 오오”라는 문장과 결합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다 모순이나 역설 혹은 비약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단순히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치부하기보다는 그것이 어떤 컨텍스트 안에 위치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독창적으로 어떤 개념을 새로 정의하여 사용할 수도 있고, 독자에겐 낯설지만 저자에겐 당연한 문화적 배경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그러나 이러 시도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나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포기하는 수밖에,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필요해 보이는 말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사사키 아타루의 책에 대해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
사사키 아타루는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39)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무의식과 독자의 무의식이 직접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무의식에 직접 침투하기에 독자의 무의식은 자연스럽게 자기 방어를 하게 된다. ‘지루하고 어려워. 그러니 읽지 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읽는다면 독자의 무의식은 외부의 침투로 인해 점차 변화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사사키 아타루는 이런 무의식의 변화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에 ‘미쳐버리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더 나아가 그는 읽는다는 것이 바로 혁명이라고 말한다. “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171~172)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2~43) 즉 읽는다는 것은 미친다는 것이고, 미친다는 것은 나의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읽어버린 이상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더 이상 기존의 가치와 믿음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 것입니다. 즉 고쳐 쓰는 것, 쓰는 것이었습니다. (…)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은 읽고 있는 자신과 세계가 동시에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쓴다는 것에 대해서도 ‘신앙’은 사라집니다.”(216) 이처럼 읽고 쓴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와 믿음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경우로 국한되지 않는다. “읽는 것 그리고 쓰는 것. 이것이 정보를 둘러싼 착취의 구도를 파괴하고, 모든 분야에 걸친 답답한 닫힌 영역을 답파하여 현 상황을 추인하는 조치를 거절한 끝에 인류사적 규모의 중요성을 갖게”(62)되는 식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위대한 두 혁명, 즉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과 16세기의 ‘대혁명’이 바로 ‘읽기, 다시 읽기, 쓰기, 다시 쓰기’의 결과였다. 중세 해석자 혁명은 로마법을 읽고 다시 씀으로써 현대 사회의 모든 기틀을 마련해 놓았고, 루터의 ‘대혁명’은 성서를 읽고 다시 씀으로써 종교개혁과 근대적 법체계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고 쓰는 한 혁명은 지속된다. 문학이 끝났다, 예술이 끝났다, 역사가 끝났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게으른 이들의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 읽고 쓴다는 것은 영원한 혁명의 시간에 놓인다는 것이다.
3.
읽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해나가는 일이고 그런 행위들이 계속 누적되어 세상을 바꾸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읽어나갈 때 또 다른 혁명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뭔가 그럴듯하고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따져보자. 사사키 아타루는 어려운 책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저자와 독자의 무의식적 접속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어렵고 지루하다는 느낌, ‘무의식적 자기 방어’가 느껴지면 무의식적 접속이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면 포기하지 말고 읽고, 또 읽고 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와 같은 반복적 읽기는 대단히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이 아닌가? 그런 의지적이고 의식적 활동 자체가 바로 무의식적 접속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누구나 그렇게 책을 읽고 있을 것이므로 굳이 읽는다는 것에 대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가 쓰는 혁명이란 개념은 어떠한가? 일상적 의미의 급진적 변화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점진적 변화까지 포괄하는 개념인가? “우리는 혁명으로부터 왔습니다.”(63)라고 할 때, 그 혁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중세 해석자 혁명인가 루터의 대혁명인가, 아니면 그 모든 혁명을 모두 총칭하는 것인가? 현대 사회의 모든 기본이, 즉 “이것저것 다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왔다”(193)고 하면서 “루터가 살았던 16세기는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 즉 교황 혁명의 성과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71)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 해석자 혁명의 여러 성과들 중 특정한 성과만 루터의 혁명에 의해 새롭게 되었다는 의미인가? 루터의 혁명도 “법의 혁명”(91)이었고 중세 해석자 혁명도 법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법”(176)을 낳은 혁명이었다면, 12세기 이전-중세 해석자 혁명 이후-대혁명 이후 각각의 법체계는 어떻게 바뀌게 된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계속 뒤적이게 된다. (혹시 이것이 그가 말한 다시 읽는다는 것일까?) 그러나 여러 번 뒤적여 봐도 여기저기서 산만하게 끌어다놓은 전거들만 보일 뿐 논리적 구조를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적게 반복해서 읽으라더니, 이 많은 사상가들이란!) 얼핏 보기엔 멋진 그물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뒤죽박죽 얽혀있는 실타래와 마주한 느낌이랄까. 결국 그가 말하고 있는 ‘읽는다는 것은 혁명한다는 것이다’라는 진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0.
물론 이는 내가 가진 이해 능력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내가 처했던 이 어려움을 사시키 아타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까지 읽고 돌아오지 않으면 사실상 납득이 가지 않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것을 입에 담아버렸으므로, 이대로는 약간 되풀이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 되고 말 것 같습니다.”(43) 그래서 몇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반복해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 나의 무의식과 사사키 아타루의 무의식은 만나지 못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