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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글쓰기 - 우리 말로 끌어안는 영어
최종규 지음 / 호미 / 2012년 1월
평점 :
지난 토요일, 문화방송 노조의 파업 탓에 <무한도전>이 예전에 방송되었던 내용으로 다시 방송되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타인의 삶’이라는 내용으로 여기서 박명수는 의사의 삶을 대신 살아본다. 박명수가 겪는 의사의 삶 가운데 의사들의 아침모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모임에서 온갖 영어로 된 병이름이 쏟아져 나오자 박명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제작진은 이를 ‘안드로메다’에 온 그림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사정은 오후의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의사들이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된 병이름을 사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공부하는 책들이 대부분 영어로 씌어 있어 영어 이름이 익숙하기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말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일 테다. 그러나 가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데도 영어를 섞어가며 말을 하는 이들을 볼 때면 볼썽사납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꼬치꼬치 따지고 있다. 왜 좋은 우리 말을 놔두고 굳이 영어나 한자어를 써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좋은 물음이고 되새겨보아야 할 물음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지은이의 물음을 내내 마음속에 두고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쉽지 않다. 영어나 한자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언어쓰임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말로 순화해 사용하는 일이 마치 또 다른 번역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한편으론 이렇게 어려운 일을 굳이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언어란 결국 소통의 도구이고 서로가 그 뜻을 잘 보내고 받을 수 있다면 영어건 한자어건 우리 말이건 편한 말을 쓰면 되는 게 아닌가. 지은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말을 올바르게 써야 생각이 올바르게 되고, 생각이 올바른 이만이 삶을 올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말을 올바르고 알맞춤하며 제대로 배우는 일이란, 스스로 내 생각을 올바르고 알맞춤하며 제대로 가눌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생각을 올바르고 알맞춤하며 제대로 가누도록 하는 일이란, 내 삶을 올바르고 알맞춤하면서 제대로 꾸리도록 다스리는 일입니다.”(150~151)
지은이는 말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삶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말을 써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욕이나 비속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바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레 좋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말을 사용하는 모습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좋은 지표일 수 있다. 그러나 ‘겉 다르고 속 다르다’라는 속담도 있듯, 말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다. 지은이는 말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만 거꾸로 삶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말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가 그 사람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자연스레 언어사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말과 생각, 그리고 삶은 서로 되먹임을 주고받는 사이이지 한쪽으로만 영향을 주는 사이는 아니다. 그래서 말을 올바르게 써야만 좋은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지은이의 아래와 같은 결론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 제 삶을 올바르게 다스린다면, 알맞춤하게 꾸린다면, 제대로 북돋운다면 어찌 될까 생각해 봅시다. 아마, 삶터와 마을과 나라가 한껏 거듭날 테지요. 달라질 테지요. 온갖 검은 셈속이 사라지고 갖가지 더러운 짓이 쫓겨나며 돈벌레 짓거리는 자리잡을 수 없을 테고요. 거짓말 일삼는 정치꾼은 뿌리내릴 수 없고, 뒷돈 챙기는 쇠밥그릇 공무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151)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이 단지 말을 바로 쓰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은 아닐 테다. 올바른 말의 사용은 좋은 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또한 우리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다고 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나는 존댓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말에 있는 존댓말과 같은 표현은 서로 존중하기 위해 쓰이기보다는 나이 많은 이가 적은 이를 짓누르는데 쓰이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러한 태도는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대화를 가로막는 큰 담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이란 세월에 따라 변해간다. 사람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변화를 무조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울림도 좋고 뜻도 좋은 우리 말이 있는데 나라밖 말을 쓸 까닭은 없을 테다. 그러나 쉽게 사용하기 어렵고 뜻도 잘 전달되지 않은데 굳이 우리 말만을 고집하는 일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적절한 말을 쓰는 일이란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진다. 이 글을 쓰면서도 지은이의 꾸짖음을 계속 떠올렸다. 역시 어렵다.
“삶을 가꾸는 사람만이 말을 가꿉니다. 삶을 고치는 사람만이 말을 고칩니다. 삶을 올바르게 가다듬는 사람만이 말을 올바르게 가다듬습니다. 삶과 말이 동떨어진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으며, 어느 한 사람도 두 가지가 나란한금으로 나아간 적 또한 없습니다.”(144)
